< -- 161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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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령에서 날아든 뜻밖의 소식은 페로를 아연질색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슈막이 멀쩡한 적자 페로를 가문에서 파문하고 서자 중 장남인 우제크를 가문의 새 후계자로 삼을 수 있도록 인정해달라며 황실에 탄원을 올렸다는 황당한 소식은 귀족가문들 사이에 이미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일단 그 탄원 자체의 내용이 윰 포고령에 어긋나는 말도 안되는 요구인데다가 상급귀족과 적서구별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기존 귀족세력들이 펄펄 뛰고도 남을 노릇이었다.
물론 황실에서는 그 황당하기 짝이없는 내용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고는 하지만 그런 생각없는 탄원을 올린 아버지 슈막은 물론이고 동부의 외가와 남극성당을 오가며 학업을 계속하던 페로에게도 이만저만 망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가문 전체가 제국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터였다. 게다가 후계자 문제는 황실에서 거부의사를 명확히 했다지만 자이센 가에서 정식으로 파문당한 페로는 이제 귀족신분을 영영 잃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망할 새끼,"
샤자한 공이 이를 악물며 황제령에서 온 보고서를 내팽개쳤다. 자신이 일개 평민으로 전락해버렸다는 데 충격을 받은 페로는 그의 앞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꿇어앉아있었다. 서자를 그리도 예뻐한다면 다른 방법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자에게 많은 재산을 넘긴다는 유서를 작성할수도 있고 많은 지참금을 들여 서자를 좋은 가문 사람과 혼인시키는것도 방법이 될 수 있었다.
그 배후에 아버지의 첩들이 있으리라는 건 말하나마나한 일이었지만 그렇다해도 배울만큼 배운 아버지가 저리도 바보스런 짓을 했다는 건 어딘지 꺼림칙했다.
"제 생각엔.....무언가....."
더 말하려던 페로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말을 이으려던 페로는 허리에서 울리는 할룩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람의 연락이었다. 한쪽으로 조금 피해 선 페로는 나람에게 급한 어조로 말했다.
"급한 일이 있으니 조금 이따가 연락해요."
"이쪽이 더 급해요."
나람이 다분히 화난 얼굴로 말했다. 페로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안 일 때문이라면......"
"아버님이 급히 찾으세요. 당장 와줬으면 좋겠어요. 오래 안걸릴 거예요."
갑자기 터지기 시작한 골치아픈 사건들에 페로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할룩스를 끊었다. 그는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샤자한 공에게 힘없이 말했다.
"잠깐 눌레딘 가에 다녀오겠습니다. 오는대로 바로 황제령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셔틀에서 내려선 페로는 급히 눌레딘 가 종가의 사랑채 쪽으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부르는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그 바보짓 덕택에 종장 골루크 경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람과의 결혼식을 겨우 1달 앞두고 이런 일이 터졌으니 페로로서는 입이 열개여도 할말이 없었다. 페로는 일단은 적당한 말로 달래놓고 황제령에 다녀올 시간만 벌 참이었다.
"페로이옵니다."
"들어오게."
골루크 경의 쌀쌀맞은 목소리에 페로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으며 사랑방 안에 들어섰다. 중앙의 골루크 경 부처와 함께 가문 적장자 나람이 시무룩하게 앉아있었다. 페로는 그들 앞에 공손하게 꿇어앉았다.
"내 자넬 부른 이유는 잘 알겠지?"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지금 저희 본가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하니 오늘 제가 찾아가볼 예정입니다. 진상을 알아보고 돌아와서 말씀드리겠사오니....."
손을 들어 페로의 말을 가로막아버린 골루크 경은 여전히 화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자네 졸업하면 뭐할건가?"
"말씀드린대로 황실에 들어가 관료 생활을....."
"종장인 자네 아버지가 자넬 가문에서 축출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했으니 자넨 이제 귀족이 아냐. 귀족신분을 잃었으니 남극성당에서도 퇴학당할테고. 그 신분으로 뭘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물론......시간이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나.....총리셨던 할아버지 투모카프 경처럼 고위 관직에 틀림없이 오를 것이옵니다. 그때가면 아버님께서 틀림없이 가문에 복귀시켜주실 것이니....."
페로가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허! 시간이 더 걸린다고 그랬나? 백년? 이백년? 그럼 상급제후가 종장의 장녀인 내 딸은 평민 남편 데리고 그 시간을 손가락이나 빨면서 기다려야겠군? 그것도 그 자식새끼까지 데리고 말이야?"
장인이 될 골루크 경의 태도가 예상보다 훨씬 부정적이자 저으기 당황한 페로가 급히 다른 변명을 꺼내들었다. 그동안 페로와 나람 사이를 갈라놓을 핑게거리 찾기에만 골몰해온 저 제후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턱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의 탄원서 사건도 그 정체가 의심스러우니....."
"닥치게."
골루크 경의 성난 목소리가 사랑방 안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청천벽력같은 한마디가 터져나왔다.
"아무래도 약혼은 없던일로 해야겠군."
순간 너무나 놀란 페로가 나람을 문득 돌아보았다. 하지만 믿었던 나람 역시 아버지의 말에 별 표정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페로가 오기 전에 이미 가족끼리 모든 결론을 내려놓았던 모양이었다.
다급해진 페로가 바닥에 이마를 대며 그답지않은 절박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제발,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딱 삼일만 주시면.....제가 황제령으로 돌아가 다시 일을 수습해 돌아올 것입니다. 제발 시간을 주십시오. 장인어른. 삼일내로 해결못하면 제가 스스로 순순히....."
"자네가 언제 내 사위였던가? 장인이라니?"
골루크 경이 여전히 쌀쌀맞게 중얼거렸다. 골루크 경의 부인이 딸의 손을 꼭 붙들며 그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로 처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오늘중으로 결정할수밖에 없어. 의사 말이 오늘이나 내일이 지나면 약으로 중절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수술로 해야 된다는군. 종장이 될 귀한 딸의 몸에 기계를 대고싶지는 않네."
“주.......중절이라고요?”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버린 페로가 다시 나람을 돌아보았다. 오늘 중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부인의 이 작위적인 선언이 사실인지, 아니면 페로를 완전히 단념시키기 위한 거짓말인지 따위는 지금 그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안됩니다, 중절이라뇨! 그 아기는 제 아들이기도 합니다. 황제령에 돌아가 제가 사태를 해결하고 올 것이니 제발 사흘, 아니 이틀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람은 우리 가문 적장자니 저애가 낳은 첫번째 자식은 가문 종손이 되어야 하네. 평민인 자네하고 사이에 나온 자식은 하급귀족밖에 되지 못할테니 그런 아이가 종손이 된다니 생각만해도 끔찍하군. 어차피 없애버리는 게 나아."
부인이 딸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페로의 눈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나람 역시 부모님과 생각을 같이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페로의 마지막 발악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나람이 결국 입을 열었다.
"제발 추하게 굴지 마시고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최소한 나람만은 자신의 편이라 굳게 믿었던 페로는 그마저도 변심했다는 사실에 결국 마지막 자존심 한 꺼풀마저도 벗어던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들은 어쩌고......그 아이는 우리 아들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가진 아기인데!"
페로가 나람의 옷자락을 붙들며 울부짖었지만 그는 페로의 손을 거칠게 떨궈내고 말았다. 방문이 열리더니 주사기를 든 의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왔다.
"실시하게."
골루크 경의 목소리에 의사가 나람의 목 옆에 주사기를 조심스럽게 들이댔다. 나람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제 자유로와지세요. 저도 안잡을테니."
가벼운 타격음과 함께 나람이 움찔 했다. 몇초 이내로 페로와 나람 사이의 아들은 세상 빛도 보지 못한 채 숨이 끊어질 터였다.
온몸을 떨며 엎드려있는 페로의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첩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한심한 아버지의 모습과, 무려 다섯 번이나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정체모를 누군가와, 자신을 집에서 쫓아낸 가비의 음모까지, 지난 45년간 그를 스쳐간 그 많은 사건들이 마치 한줄기 빛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한참동안을 바보처럼 웅크리고 있던 페로는 헛구역질이 올라오는지 나람이 입을 가리며 얼굴을 조금 찌푸리는 광경에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근 며칠간 페로를 그리도 기쁘게 했던 자신의 아기가 '성공적으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꽉 악문 페로의 턱 아래 목젖이 미친 듯 떨리고 있었다.
골루크 경이 뒤로 돌아서는 페로의 등에 대고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앞으로 자넬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아뇨, 계속 보실겁니다."
눈물마저도 얼어붙어버린 페로의 싸늘한 얼굴에 앞으로 계속 그를 따라다닐 묘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영웅 페로 자이센의 모습을 보기 싫어도 보게 되실 겁니다."
페로의 독기어린 대답에 골루크 경이 표정을 가볍게 일그러뜨렸다.
"그때가서 후회하실겁니다......틀림없이."
슈트란 종가의 자신의 별채로 돌아온 페로는 오자마자 벽장부터 열어젖혔다. 벽장 안에는 자신이 나람을 만난 이후, 9년간 단 한번도 들쳐보지 않은 그 검은 상자가 오랫만에 돌아온 페로를 여전한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내가 잘못했어......"
상자를 부둥켜안은 페로는 결국 참고참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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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제후 눌레딘 가에서 온 9명입니다. 앞의 2명은 종장 나람 눌레딘 부인의 적생자들입니다."
플로브 경의 소개에 그들 젊은이들이 일제히 페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동부의 전통에 따라 이번 연합군에도 오십여명에 달하는 각 제후가문 직계 상급 귀족들이 지휘관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페로는 나람 부인의 아들과 딸의 얼굴을 문득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이 무서운 권력가와의 묘한 악연을 잘 아는 그들은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이 숙여붙이고 있었다.
"위험한 전투가 될 테니 각별히 몸조심하게."
상례적인 말을 던진 페로가 그들에게서 돌아서서는 플로브 경과 함께 홀을 빠져나갔다. 백여명의 이들 귀족 청년들이 모여 웃고 떠들고있던 수송선의 메인 홀은 이 '부담스러운 거물'이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활기를 찾고 있었다. 페로를 따라왔던 아메스도 이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드는지 아버지를 따라 나가지 않고 결국 그대로 눌러앉아버렸다.
아버지 페로를 그대로 빼닮은 이 귀공자 아가씨에게 다른 귀족 젊은이들의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거북살스러울 정도의 시선집중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메스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가 무서워서일까요? 아버지가 무서워서일까요?"
"몰라서 물어?"
제네르가 웃음띤 얼굴로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아메스가 제네르에게 다시 바싹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아까 나오다가 네자드 숙부하고 최고제후님하고 얘기하는거 얼핏 들었는데요,"
순간적으로 긴장한 제네르가 아메스를 휙 돌아보았다.
"늦었지만 연합군에 지원해서 갈 수 있겠냐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네르가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 되물었다.
"웬걸요, 다히르 경이 펄쩍 뛰셔가지고......아버지가 부지휘관으로 참전하는데 아들까지 갈 필요가 있냐고 불같이 화를 내시더라구요. 게다가 무장도 아니면서 어딜 따라오려고 그러냐구요. 지원장교로라도 오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다가 실컷 혼만 나고 물러나셨죠."
제네르가 그제서야 안도하면서 술잔을 들이켰다.
"전하께서 남극성당쪽 일이 끝나거든 여기 오실거라고 그러시네."
"정말요?"
아메스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제네르에게 바싹 다가섰다.
"황후폐하는 안오신대. 당연한 얘기겠지만."
제네르의 조금은 응큼하게까지 들리는 한마디에 아메스의 얼굴이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샤레이 6번 행성에 도착한 지원군 지휘관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건 5번 행성의 수비군 만 이천이 단 5시간만에 무너지고 말았다는 믿고싶지않은 소식이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비교적 밝던 이들 일행의 분위기가 일시에 침통해지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제르베 경에게서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페로는 짐짓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몇몇 중요 지휘관들만을 대동하고 회의실에 들었다. 회의실 한쪽에는 얼굴과 어깨가 피투성이가 된 채 이들에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건장한 무장 한 명이 서 있었다.
"제3군단 중장기병대 부장 교위 가말라 카잔입니다."
제네르는 얼굴이 완전히 망가진 채 부서진 갑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루쿠스탄 전투에서 하지즈 장군을 일기투로 꺾고 난 직후의 자신의 모습이 저랬으리라 상상하며 자기도모르게 치를 떨고 있었다.
"군단장은 어디있나?"
겨우 교위급 장교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의아해진 페로가 낮게 묻자 카잔 교위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희 군단장님은 요새에서 전사하셨고 4군단장님은 중상을 입으셔서 치료중이십니다. 중랑장 일곱 분들중 두 분은 전사하셨고 두 분은 포로가 되시고 세 분만 살아 빠져나오셨지만 역시 중상을 입으셔서 치료중이십니다."
페로가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야전의 최고지휘관인 군단장들과 중랑장들이 모두 그지경이 되었다면 전투가 어땠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중장보병 4천 중 2천 5백 정도, 경보병 6천 중 4천 정도가 전사 혹은 포로가 되어서 만 명의 보병대 중 생환은 3천 5백 정도입니다. 기병대의 손실은 크지 않습니다만 보병대가 붕괴되면서 퇴각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플라칼 가 보병대가 강하다고는 해도......"
플로브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잔 교위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적들이 천 오백기 정도의 잘 훈련된 전문 궁기병대를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보병대의 붕괴원인은 그것때문이었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아연질색한 이쪽 지휘관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투창만을 사용하는 궁기병대라면 기병이라면 알아주는 이곳 동부에서도 탈라스의 바툴 가에서만 운용하고 있는, 극도로 전문화된 병종이었고, 기껏해야 말타고 '돌격' 정도나 하는 것이 고작인 남부 녀석들이 가질만한 병종이 결코 아니었다.
"궁기병대가 천 오백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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