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2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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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투의 승리와, 지난번 요동의 암살작전 성공에 대한 논공행상이 있겠네."
논공행상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히르직스의 의기양양한 표정과, 자신을 문병왔던 부하들에게서 자신의 신상이 피아에 모두 공개되었다는 황당한 사실을 전해들은 베아트릭스의 사색에 가까와진 얼굴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베하라 요새터에 모인 십만여 플라칼 가 제후군들은 각 소속부대별로 모여서서 매번 승전 후마다 있는 이 요란스런 행사를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포박당한 채 한쪽 구석에 꿇어앉혀진 사천여명의 트라티누스 가 포로들 또한 이 비참한 광경을 원하든 원하지않든 보아야 할 운명이었다.
목에 붕대를 감은 채 맨 앞에 핏기없는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던 베아트릭스는 옆에 앉아있던 궁기병대 부지휘관 달리 녀석이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서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이미 베아트릭스를 두 번이나 불렀던 헤즈 경이 짜증스런 표정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비틀거리며 높은 연단에 걸어올랐다.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중랑장. 요동에서의 큰 성공을 치하하며 자네를 군단장급인 경기병단장 장군으로 승진조치하기로 했네. 축하하네.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장군."
"......가, 감사합니다."
베아트릭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지난번 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인지, 실패했다는 것인지 아직까지 종잡지를 못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해도 '작전실패'라며 자신을 몰아붙이던 헤즈는 가장 어려운 단계라는 중랑장에서 '장군'으로의 승진을 '상'이라며 그에게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공이든 실패든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제 그의 외가가 처할 끔찍한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베아트릭스의 턱이 부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야속한 궁기병대 부하녀석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경기병단장으로 승진한다는 말에 환호성으로 답하고 있었다. 지금껏 천대받는 경기병단 내에서도 그나마 더 천대받는 '신생병종'으로 받아온 수모를 이겨온 그들에게 대장의 경기병단장 승진은 이제 당당히 궁기병대가 핵심병종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뒤를 이어 중랑장급의 궁기병대장으로 승진할 달리 녀석이 겨우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모습도, 자신의 자리를 베아트릭스에게 내준 히르직스가 짓고있는 묘한 웃음도 지금의 베아트릭스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히르직스 쉐너 타마르 경."
"예."
헤즈 경의 부름에 히르직스가 연단에 올랐다. 히르직스의 큰 키와 군살없이 다부진 마른 몸매는 군인치고는 꽤나 비둔해보이는 헤즈 경의 그것과 확실히 비교되고 있었다.
"종장님의 명에 따라 경을 세베토 경의 전사로 공석이 된 기사단 사령관 대장군에 봉하도록 하겠네."
뜻밖의 선언에 기사단 쪽에서 탄식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경기병단장과 3명의 기사단장은 똑같이 5천여기의 기병을 거느리는 같은 '장군'급이었지만 그 대우에서 차이가 있는 점에서 경기병단장에서 3개의 기사단을 총괄하는 대장군급인 기사단 사령관으로의 승진은 사실상 두 단계의 승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파격적인 조치에 기사단 내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저들에게 경기병단장 출신 사령관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들은 바로 몇개월 전까지 히르직스가 제3기사단장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까맣게 잊은 듯 했다.
히르직스가 그들에게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려 보였다.
'잘난것도 없는 주제에.'
히르직스는 겨우 2천 5백의 동부 기병들에게 무참히 유린당하던 저들 자존심덩어리를 내심 조소하고 있었다.
오르마즈 경과 슈엘러 경의 죽음 이후로 샤자한 공이나 제롬 공을 빼면 제국에서도 더이상 비할바가 없는 최고의 기병지휘관으로 꼽히는 그였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를 따라붙어온 '배신자'라는 꼬리표는 그의 명예를 철저하게 깎아먹고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었다.
히르직스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며 앞으로 나아갔다. 헤즈가 내민 건 기사단 사령관을 상징하는, 기사단의 배너가 달린 긴 창이었다. 문득 돌아본 기사단의 분위기는 한때 자신이 단장으로 있었던 3기사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침통하기가 짝이없었다.
그는 헤즈에게서 받아든 창을 번쩍 치켜들었다. 슈로 기사단에서 불명예스럽게 떠나온 이래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힘이 다부지고 넓은 어깨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이제 그에겐 당시의 슈로 기사단보다도 더 많은, 만 오천의 명예로 똘똘 뭉친 중장기병들이 쥐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지위에 어울리게 충분히 강했다.
병사 한 명이 그의 어깨에 가문의 문장이며 기사단장의 상징이기도 한 세 마리의 사자가 새겨진 검은 빌로오드 망토를 걸쳐주었다.
병사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그는 망토자락을 휘날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가문에 피의 영광을!"
히르직스를 힐끗 돌아본 베아트릭스는 그의 외침이 '유치함'이 아닌 '경멸'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임을 잘 알고있었다. 벌벌 떨고있는 베아트릭스의 등에도 병사들이 독수리문양이 새겨진 푸른 경기병단장 망토를 덮어주었다.
연단 옆에 모여있던 포로 무리에서 두 명이 끌려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 것임을 잘 아는 베아트릭스가 가볍게 눈을 감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논공행상에서 장군으로 승진한 지휘관의 다음번 '의식'에 쓰일 자들이었다. 베아트릭스의 숨소리가 묘하게 떨리고 있음을 눈치챈 히르직스가 피익 웃음짓고 있었다. 그의 마음같아서는 한 녀석이 아니라 한 열 녀석쯤 베아트릭스의 코앞에 들이밀고 싶었다.
연단에 끌려올라온 두 명의 포로들은 모두 고급지휘관인 중랑장들이었다. 손이 뒤로 묶인 그들은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명의 적 지휘관들을 올려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히르직스가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며 그들 중 한명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대장군'의 손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게나."
씨익 웃어보인 히르직스가 치켜올린 칼을 힘껏 내리치자 포로들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올랐다. 적 장교의 잘린 머리를 치켜든 히르직스는 큰 고함소리와 함께 그것을 앞으로 집어던져버렸다.
"자네 차례네."
히르직스가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뒤로 물러섰다. 베아트릭스 역시 칼을 뽑아들며 포로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머리채가 잡힌 포로의 묶여있는 두 손이 미친듯이 떨리고 있었고 세이버를 치켜든 베아트릭스의 오른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너무도 기뻐야 할 이 승리의 순간에 이렇듯 떨고있어야 하는 자기 자신과, 이런 자신이 탄생하게 만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을 미치도록 저주하고 있었다.
"쳐."
히르직스가 재촉하듯 또한번 말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베아트릭스는 있는힘껏 포로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손에 익은, 끔찍한 느낌과 함께 피가 튀어올랐다. 목이 잘려나간 포로의 두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머리를 미친 듯이 집어던진 베아트릭스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경기병들이 새 단장인 베아트릭스에게 외치는 환호성소리가 그의 귓가를 타고 붕붕 맴돌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한 베아트릭스는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며 자신이 목을 벤 시체 옆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럼.....자네가 적 기사단 사령관인 세베토 플라칼 경을 죽였군?"
"예. 그렇습니다."
페로의 질문에 가말라 카잔 교위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패전소식에 그나마 위안할 거리를 찾던 트라티누스 가 지휘관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럼 자네 부상은 그때문인가?"
"으, 음 아닙니다......녀석들에게 천여기의 경기병들이 지원군으로 왔습니다. 그 선두에 있던 녀석이 워낙 빨라서......녀석 방패에도 사자문양이 새겨져있었던 걸로 봐서 플라칼 가 녀석 같았습니다. 망토에 독수리문장이 새겨져있었습니다."
"독수리문장은 경기병단장입니다. 현 경기병단장은 히르직스 쉐너 타마르 경입니다. 종가 맏사위입니다."
자료를 검색한 보좌관이 페로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의 이름을 들은 제네르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인가?"
페로의 질문에 제네르가 곧바로 답변을 내놓았다.
"슈로 기사단이 해체될 당시 토로 경의 부장이었던 자입니다. 샤자한 공이나 제롬 공과 더불어서 현재 제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기병지휘관입니다. 일기투로도......남부 최고제후 제롬 공을 제외하고는 가히 당할 자가 없을겁니다."
제네르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롬의 '신에 가까운' 일기투 실력은 이미 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체력을 바탕으로 보통 사람보다 서너배는 무거운 창을 깃털처럼 휘둘러대는 제롬의 강력한 공격은 설사 막는다해도 그 충격으로 뼈가 산산조각나서 죽는다는 괴소문이 퍼져있을 정도로 악명이 자자했다.
그리고 그 실력으로 몇번의 경계선분쟁과 5차 혼란기에서 감히 그와 맞서려 했던 수십의 귀족들, 심지어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가디언들에게까지 끔찍한 죽음을 선사해오고 있었다. 제네르가 히르직스를 그런 제롬의 바로 밑에 놓고 말하자 지휘관들 사이에서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음번에 마주칠땐 제가 반드시 꺾어보이겠습니다."
카잔 교위가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녀석들이 언제쯤 이곳에 다시 공격을 개시할까요?"
다히르 경의 질문에 페로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걸리지 않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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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상 조금 작게 자르게 되어 3연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