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3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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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룬과 네피는 셔틀 앞쪽에 검은 상자를 끌어안은 채 우두커니 앉아있는 주인 페로를 보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처가가 될 예정이던 눌레딘 가에 다녀온 페로는 무슨 일인지 모든 짐을 다 싸라는 지시를 내려 휘하 가디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터였다. 26년간 지내온 슈트란 종가 내의 별당을 깨끗이 정리한 페로는 침통한 표정을 짓던 샤자한 공에게 마지막으로 큰 절을 올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이 셔틀에 오른 뒤로 계속 같은 모습이었다.
페로의 태도로 보아 그는 이제 동부를 완전히 떠날 생각임이 확실했다. 페로가 눌레딘 가에서 파혼을 당한 것 같다는 얘기를 슈트란 가 사람에게 얼핏 듣기는 했지만 페로 스스로는 그 문제에 관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나람을 '새 마님'이라고 부르던 가디언들에게도 그의 느닷없는 파혼은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었다. 페로가 평민으로 강등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못들은것도 아니었지만 무려 9년간을 그렇게도 다정한 연인으로 지내온 둘이 그 소식 하나에, 그것도 반나절만에 깨어져버렸다는 건 도저히 믿기지않는 사실이었다.
살기어린 눈을 번득이며 말없이 앉아있는 페로에게서 나람을 대하던 그 따뜻함은 이미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본가에서 그동안 연락통 노릇을 해온 킵과 로카에게 무언가 연락을 하고 난 후 페로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딴사람이 되신 것 같아."
네피가 다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샤자한 공이 빌려준 슈트란 가 소속 셔틀은 황제령에 점점 가까와지고 있었다. 안고있던 검은 상자를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은 페로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무장을 꾸리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셔틀 조종사가 물었다.
"자이센 종가. 서쪽에 큰 떡갈나무가 있는 언덕이 있다."
짧게 대답한 페로는 허리에 차고있던 칼날을 조금 뽑아보았다.
느닷없는 셔틀의 출현에 십여명의 수련장 가디언들이 서문 앞으로 달려나오고 있었다. 검은 비단포에 두건,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와 화려한 가죽장화까지, 완벽한 귀공자의 자태를 갖춘 페로는 긴 장검을 허리에 찬 채 키큰 백마에 앉아 떡갈나무 그늘에 서서 옛 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빗속에서 비참하게 이곳을 떠났던 19살의 앳된 청년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제국을 호령했던 그 할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이 잘생긴 남자의 얼굴에는 그 훌륭한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자부심과 총명함, 그리고 잔혹함까지도 배어나고 있었다.
네피와 다룬을 비롯한 21명의 가디언들이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페로의 뒤에 도열해 섰다.
"주인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네피가 페로를 올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잘 다듬은 거뭇거뭇한 수염이 돋아난 페로의 턱에 힘줄이 불끈 솟아나고 있었다. 21명의 충성스런 가디언들을 동반한 페로는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네놈이 감히 집에 얼씬해!"
서문 밖으로 달려나온 우제크가 페로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말 위에서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페로가 쌀쌀맞게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고싶다. 우제크 자이센."
"뭐, 뭐라고? 저놈이 미쳤나, 어디 말버릇이......."
"적장자에 대한 말버릇이 개만도 못하군!"
페로의 큰 목소리가 쩌렁 울려퍼졌다. 순간적으로 기가 죽은 우제크가 조금 뒤로 물러났다.
"아버님은 너같은 놈은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다."
"어차피 담판을 지으러 왔으니 직접 뵙고 다시는 찾아뵙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면 되겠군."
페로가 태연하게 말을 몰아들어가자 우제크가 그의 앞을 거칠게 막아섰다.
"당장 나가라고 했다. 말길을 못알아듣나?"
"네놈이 감히 적장자인 내 출입을 막겠다?"
쨍 소리와 함께 페로가 칼을 뽑아들고 우제크의 코앞에 들이댔다. 우제크를 따라왔던 이십여명의 가디언들이 깜짝 놀라며 무기를 뽑아들었지만 페로의 뒤를 따라온 선배 가디언들의 기세에 놀라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버님을 뵙겠다고 했다. 우제크 자이센."
페로가 우제크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다시 반복하자 조금 뒷걸음치던 우제크가 부아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좋아. 따라와. 대신 저 도망가디언들은 방에 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잔뜩 불만스런 표정의 우제크가 앞장서서 걷자 말에서 뛰어내린 페로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랑채 마당에 들어선 페로는 그곳에 휘하 가디언들과 함께 서 있던 수석가디언 킵에게 가벼운 눈짓을 보냈다. 그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인 킵은 급히 어디론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버님은 아프셔. 들어가면 헛소리는 안했으면 좋겠어."
우제크의 뒤를 따라 사랑채에 들어선 페로는 안채에서 달려나오던 가비를 매서운 눈길로 돌아보았다. 가비 역시 그동안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페로의 모습에 아연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가비는 그의 서슬퍼런 기세에 조금 기가 죽었는지 옆으로 얼른 비켜서고 있었다. 하지만 가비를 철저히 무시해버린 페로는 21명의 가디언들을 사랑채 밖에 놔둔 채 우제크를 따라 안에 들어섰다.
사랑방 맨 안쪽의 반투명한 베일 너머로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아버지 슈막의 모습이 보이자 페로가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두 명의 젊은 가디언이 그 양쪽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아버님?"
페로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아버지 슈막은 자리에 앉아 살기어린 눈을 부릅뜬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봐. 눈이 잘 안보이실거야."
슈막에게 조금 더 다가간 페로가 우제크를 갑자기 휙 돌아보았다.
"이, 이......"
"죽어!"
우제크의 옷 속에 감추어져있던 작은 단검이 페로의 옆구리를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페로의 날랜 손이 이미 옷을 조금 찢고들어온 그 비수 날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슈막의 양옆을 지키던 두 명의 가디언들까지 큰 고함소리와 함께 페로에게 칼을 휘둘러왔다.
"킵!"
깜짝 놀란 페로가 급히 몸을 숙이며 큰 소리로 비명처럼 외쳤다. 순간 문 밖에서 대기하던 두 명의 가디언들이 페로의 고함소리에 사랑채 문을 때려부수며 큰 고함소리와 양쪽에서 뛰쳐들어왔다.
"망할 어린 새끼들!"
동기 가디언과 함께 사랑채 안에 뛰어든 킵이 페로를 공격하던 두 명의 젊은 후배 가디언들에게 거칠게 칼을 휘둘렀다. 네 가디언들의 싸움에 사랑채 안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페로는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비수를 찌르려고 버둥거리던 우제크의 얼굴을 팔꿈치로 사정없이 갈겨버렸다. 칼날을 움켜쥐었던 페로의 왼손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고 베인 옆구리에서도 약간의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페로에게 다시 달려들려던 우제크의 거구는 동생의 거친 발길질에 얻어맞고는 바닥으로 다시 나동그라졌다.
젊은 후배 가디언을 잠깐만에 베어버린 킵은 피를 흘리고있던 페로에게 즉시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저놈 잡고있어라. 킵."
"예!"
우제크는 자신의 사람이라 믿었던 수련장 책임자이며 수석가디언 킵의 느닷없는 배신에 충격을 받았는지 약간 멍 해져 있었다. 페로를 죽이려했던 두 명의 젊은 가디언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사랑방 바닥에 딩굴고 있었다. 손에서 흐르는 피를 털어낸 페로는 상석에 걸쳐져있던 베일을 확 걷어냈다. 눈을 부릅뜬 슈막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버님......"
페로가 자리에 털석 주저앉으며 슈막을 껴안았다. 막대기에 기대 가까스로 앉혀져있던 슈막의 보존처리된 시체는 26년만에 돌아온 아들을 반기는 듯 페로의 넓은 어깨에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주인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죽여주십시오."
킵이 침통하게 주저앉아있던 페로의 앞에 엎드리며 낮게 울먹였다. 아버지의 오래된 시체를 바닥에 눕혀놓은 페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제크를 바닥에 질질 끌고 사랑방을 나섰다. 마당에는 킵이 불러모은 오십여명의 네베드 부인 시절 고참 가디언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페로가 킵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첫 명령을 내렸다.
"집안사람들을 모두 모이라고 해라. 킵. 한놈도 빠짐없이. 안오려는 놈은 끌고라도 와라. 외곽을 폐쇄하고 나가려는 놈은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죽여버려라."
"알겠습니다!"
건넌방 앞에 벌벌 떨며 서 있던 가비는 돌아가는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입가에 애써 미소까지 띠며 페로에게 다가섰다.
"너......정말 멋있어졌구나......페로. 이제 진짜 남자가 다 됐네......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체격도 멋있고.....눈도 번쩍번쩍하는게......네 곁에 계속 있고싶은데, 어때? 내가 널 최고로 즐겁게 해 줄께......응?"
묘한 눈빛을 번득이는 가비의 손이 페로의 허리를 가볍게 껴안고 있었다.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끈 돋아난 페로가 가비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머, 쳐다보는 것도 너무 매력적이야......"
요사를 떨던 가비의 가는 목소리는 하지만 곧 비명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페로의 거친 손이 어느새 가비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표정이라고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창녀로 팔려가겠나? 여기서 죽겠나?"
"페.....페로, 무슨 소리야......"
"페로 슈트란 자이센. 자이센 가의 새 종장이다. 말버릇이 그따위라니!"
페로는 가비를 그대로 대청으로 힘껏 내던져버렸다. 높은 마루에서 떨어진 가비가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 옆에 우제크의 비둔한 몸이 다시 동댕이쳐졌다.
사랑채 대청에 모여든, 혹은 끌려온 가문 사람들은 가비와 우제크가 피를 흘리며 나동그라져 있는 이 뜻밖의 광경에 경악하고 있었다. 다룬의 손에 질질 끌려온 우제크의 어머니 페노이는 대청에 쓰러져있는 맏아들의 모습에 바로 상황을 파악했는지 하늘을 올려보며 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당으로 내려온 페로는 우제크의 얼굴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각본은 좋았다. 우제크 자이센. 지난번 탄원서 사건으로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은 내가 아버님을 찔러죽이는 걸로 했겠지? 넌 그 옆에서 날 죽이고? 그걸 미리 생각하고 아버지 이름으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탄원서를 올렸나? 어차피 집안일이니 근위대가 공식적으로 수사할리도 없을테고, 집안사람들만 대강 속여넘기면 될 줄 알았겠지? 아버님 유서는 따로 위조해놓았나? 아주 바보는 아니었군?"
슈막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에 집안 사람들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슈막의 첩과 서자들 중 몇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 모두에 대한 '처분'은 새 종장인 페로의 손에 달려있었다.
"아버님은......내가 죽이지 않았어, 정말이야......."
우제크가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세 달 전에 사냥하다가 낙마해서 말에 밟히셨어......후송하다가 돌아가셨어! 정말이야."
여전히 우제크의 얼굴을 짓밟은 페로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상관없어. 감히 아버님의 시신을 저지경으로 해놓고, 종장인 날 죽이고 지위를 강탈하려 했던 것만으로도 내가 네놈을 죽일 이유는 충분하니까."
페로가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페노이가 페로의 앞에 넙죽 엎드리며 울며 호소했다.
"제발, 페로, 이앤 네 형인데......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거니! 아무리 죄가 크다해도....."
"그렇긴 하군. 모양이 별로 안좋아."
페로가 키득거리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네피!"
"예!"
큰 도끼를 든 네피가 페로의 명령에 앞으로 성큼 나섰다.
"이놈의 목은 네가 대신 쳐라. 내 칼에 이놈 더러운 피를 묻히고싶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울며 매달리는 페노이를 옆으로 거칠게 차낸 네피는 그때까지도 버둥거리던 우제크의 뒷덜미를 그 무지막지한 도끼로 거침없이 내리찍어버렸다. 우제크의 잘려나간 머리가 대청의 흙바닥에 피흔적을 그리며 굴러떨어졌다.
형의 목을 치는 그 광경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바라보던 페로의 시선은 이번엔 앞에 꿇어앉아있던 '두 여자들'을 향했다.
"페노이. 가비. 네년들도 이 계획을 알았겠지?"
"몰랐어, 정말이야, 정말이라니까."
가비가 페로의 발목을 붙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페로는 그의 눈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고운 얼굴을 신발바닥으로 걷어차 버렸다. 페로는 품 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페노이의 앞에 내던졌다.
"네년에게 먹이지 못하면 내가 먹으려고 했던거다."
페로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열어본 그 봉투 안에는 검은빛의 작은 알약이 하나 들어있었다. 페노이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페로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페로가 그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쏘아붙였다.
"네년이 아무 죄도 없을지 모른다는 건 잘 알아. 날 죽이려들었던 다섯번이나 되는 사건들은 단 한번도 제대로 조사된일이 없으니까 저 뒤에 있는 구경꾼 중에 누군가가 저지른 일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네년이라도 죽어주지 않으면 내 이 더러운 기분이 안풀릴테니까."
페로가 이를 드러내며 쏘아붙였다.
머리가 달아난 아들의 처참한 시체를 잠시 바라보던 페노이는 결국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봉투 안의 검은 알약을 입에 넣고 삼켰다. 그리고 몇초 지나지않아 온몸에 약간의 경련을 일으키며 옆으로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입과 코에서 약간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통없는 죽음은 페로가 '아버지의 여자'에게 내린 그나마 마지막 자비였다.
페로는 '아직 살아있는' 가비 쪽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제발, 제발 살려줘, 제발 용서해줘, 다신 안그럴께. 응? 정말이야,"
가비가 다시 페로의 발목에 매달리려 했지만 다룬이 이미 그의 뒷덜미를 거칠게 붙들고 있었다.
"좋아......네년은 집안에서 나름대로 쓸모가 있겠어."
페로의 입가에 악마 같은 미소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평민인 네년은 감히 종장인 나를 무고했고 저 흉악한 계획을 알고도 묵인했으니 노예로 강등되어도 족히 할 말이 없겠지?"
가비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 목숨만은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는지 맨땅바닥에 급히 이마를 붙이고 있었다. 페로가 그의 뒷덜미를 발로 가볍게 밟으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안채를 네년이 쓰도록 해라."
페로의 뜻밖의 처분에 다룬과 네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페로가 자신을 계속 곁에 두려 한다고 생각한 가비는 입가에 웃음까지 띠며 머리를 다시 조아렸다. 가문의 새 주인이 될 페로의 사랑을 얻는다면 잃어버린 지위는 언제든 되찾을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페로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내놓았다.
"그곳에 제국 최고의 미녀노예들이 계속 들어올 것이야. 넌 그중 하나가 되어서 접대용 장난감으로 쓰일거다. 네년에게 딱 맞는 역할이다."
그제서야 자신이 '노예창녀'로 전락했음을 깨달은 가비는 차마 울지도 못한 채 노예들의 손에 질질 끌려 페로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페노이 저년의 나머지 핏줄들은 모두 어딨냐?"
페로가 눈을 치켜뜨며 킵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구경꾼 무리로 뛰쳐든 다룬이 그들 중간에 섞여있던 2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를 거칠게 끄집어내 대청에 동댕이쳤다. 뒤이어 어린아이 5명과 3명의 비교적 큰 청년들, 그리고 유모의 손에서 강제로 빼앗겨나온 3명의 갓난아기들까지 모두 흙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이게 다냐?"
"예!"
그들 모두를 확인한 킵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주인님, 아기들은......"
마음약한 네피가 페로의 귀에 대고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한귀로 흘려버렸을 따름이었다. 그는 다룬과 판을 가리키며 냉담하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다 알겠지?"
페로의 명령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그 우직한 두 가디언들은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그들에게 칼을 뽑아들고 바로 달려들었다. 도망치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부수고 젖먹이 아기의 목을 졸라 내던지는 그 끔찍한 광경에 충격을 받은 네피와 킵이 창백해진 얼굴로 주인을 바라보았지만 페로는 눈을 그대로 부릅뜬 채 그 모든 광경을 낯빛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길을 절대 밟아나가지 않을 것임을, 태어날 후손에게는 자신처럼 손에 가족의 피를 묻혀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을 절대 물려주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앞으로 단 한명을 제외한 세상 그 어떤 여자라는 존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을 그는 가슴깊이 새겨넣고 있었다.
45세의 페로는 무려 16명의 집안 사람을 무참히 죽이고 아버지 슈막의 뒤를 이어 명문 자이센 가의 종장으로 당당히 등극했다. 상급귀족가문들 중 최연소이며 유일한 미혼의 종장이었다.
종장이 된 그가 집사 로카에게 내린 첫 명령은 저 더러운 여자들의 체취가 배여있는---더불어 죽은 그의 어머니 네베드와 누나 크낙스의 추억도 남아있는---옛 안채를 모두 불살라버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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