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65화 (165/1,132)

< -- 165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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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학회가 열리는동안 세네피스 황후의 침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카렐은 우베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회 끝났나?"

"지금 정리중입니다."

"볼만했겠군. 자이센 대제학 망가지는 꼴이."

카렐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베가 내민 찬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도저히 잽이 안되는군요. 푸하하, 남극성당 교수들 똥씹은 표정한 거 정말 구경거리던데요."

이를 닦던 카렐이 갑자기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우베는 입에 침을 튀기며 계속 수다를 이었다.

"어휴, 리쿠 학장은 입에 따로 엔진이라도 달았나, 3시간동안 그 쏟아지는 질문을 혼자서 몽땅 다 반격하던데, 나중엔 목이 쉬어가지고 따로 약까지 드시더라구요. 뭐, 내용같은거야 저같은놈이 알아먹을 건 아니지만, 그 카리스마가 정말....."

"어머님은?"

"학회 전반엔 안계시다가 중간에 들어오셨습니다. 토론엔 거의 끼지 않으시고 대제학 깨지는 광경만 아주 재밌게 구경하시던데요. 결국 막판에 한 10분 정도였나? 통틀어서 딱 한번 제대로된 토론이 벌어진 게 결국 황후폐하하고 리쿠 학장 사이였죠. 그거 아니었으면 남극성당 교수들 몽땅 오늘밤 목매달아 자살하고싶어질 정도로 창피했을겁니다. 뭐라더라? 사단칠.....머시기를 근거로 이기.....머시기......하시던데....."

"'사단칠정분이기왕복서'를 통해서 촉발된 이기이원과 이기공발의 논쟁일세. 원리주의인 리쿠 학장은 이기이원론의 입장이지. 중도파는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의 입장이지만 어머님같은 경우는 특이하게 완전한 이기 일원론을 취하시지. 개혁파인 제네르 경 같은 경우는 조금 더 과격하게 이기론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입장이고."

카렐의 지적에 우베가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만 긁적거렸다.

검은 튜닉을 챙겨입은 카렐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을 문득 바라보았다. 대강당 밖으로 나와 흩어지는 유학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자이납 그녀석은 어디갔어?"

"어딨겠어요. 말하나 마나죠."

다시 웃음을 터뜨린 카렐은 쥬스 한모금을 들이키고는 숙소 밖으로 나섰다.

우베와 함께 서둘러 객사로 향하던 카렐은 멀리 어둠 속에서 다가오던 코리온 일행과 마주쳤다. 피곤한 표정의 코리온은 자신에게 허리를 굽히는 카렐을 외면하며 인도하는 교수의 뒤를 따라 객사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꽁무니에서 뻔뻔스럽게 이들을 따라온 자이납은 코로 공기를 한번 죽 들이키며 넋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히야아......리쿠 학장님의 체취가 이렇게 향기로울줄이야....."

또한번 기가막힌 표정을 지은 카렐이 자이납의 귀를 세게 잡아당겼다.

"쓰잘데기없는소리 말고 바깥이나 잘 지켜."

"그런데 제가 안을 지키면 안될까요? 헤헤."

"이러는 놈한테 어떻게 안을 맡기냐?"

우베가 자이납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기는거지.....네가 리쿠 학장님 겁탈이라도 할지 누가알아?"

"아씨, 사람을 뭘로보고....."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자이납과 우베를 밖에 놔둔 카렐은 2층의 단촐한 객사 안에 들어섰다. 안에서 샤드니와 무언가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던 코리온이 그의 등장에 말을 급히 멈추었다.

"대제학님과 부제학님의 부탁으로 오늘밤 학장님의 침소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필요없다."

코리온이 딱 잘라 대답했다. 우베 말마따나 그 맑던 목소리가 조금 쉬어있었다.

"주최측의 경호제공을 거절하심은 예의가 아닌 줄 압니다. 소인 그냥 가디언에 불과할 따름이니 일체의 사생활에는 간섭하는 일이 없을것입니다. 비밀스런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을 것이오니 말씀만 하십시오."

카렐은 조용히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섰다. 샤드니와 함께 2층에 올라간 코리온은 제일 큰 침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샤드니는 그와 연결된 작은 침실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코리온을 따라 침실에 들어선 카렐은 제일 안쪽의 구석진 자리에 똑바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는 소지가 금지된 칼 대신 팔꿈치까지 오는 긴 건틀렛과 짧은 금속 봉이 쥐여있었다. 카렐을 의식했는지 조금 머뭇거리던 코리온은 카렐이 잠든 듯 가만히있자 그제서야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목욕을 끝낸 코리온이 다시 침실로 나올때까지도 카렐은 한쪽에 인형처럼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서서 잠든 건 아닐테고. 그 천박스런 육체적 능력 하나는 대단하군."

코리온이 어깨를 덮었던 큰 수건을 옆에 내던지며 쉰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희미한 객사 불빛아래 코리온의 미끈하고도 다부진 상체와 허리까지 늘어뜨린 검고 긴 머리칼이 그대로 드러났다.

"학회엔 왜 안들어왔지?"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과는 빤한것을."

"내가 자이센 대제학을 위해 일부러 몰아붙이지 않았을수도 있었을텐데?"

"하지만 학장님께서 그러실분이 아니시라는 걸 잘 압니다."

카렐이 그제서야 눈을 조금 치켜떴다. 카렐은 코리온의 어깨에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옛날의 참혹한 고문흔적들을 보며 잠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와 학장님의 차이겠죠."

"명예를 아는 원리주의자와 쓸개빠진 타협자의 차이겠지."

코리온의 악담에도 카렐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다시 눈을 감았다.

"저때문에 샤드니 경과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에 마음상하셨습니까?"

코웃음친 코리온이 카렐을 째려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넌 가디언 아닌가? 내가 무슨짓을 하건 신경쓰지 않는다며? 왜? 내 이 앞에서 샤드니와 음행이라도 벌였으면 하는가?"

"저도 두분의 시간을 훼방놓고싶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닙니다."

카렐이 창가에 천천히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자이납은 아직까지 이곳을 멍 하니 올려보고 있었다. 그에게 자리로 돌아가라는 손짓을 해 보인 카렐은 창을 닫고 커튼까지 완전히 닫아버렸다.

"제롬 공의 지시로 남부의 불손한 세력이 학장님의 목숨을 노린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직접 온 겁니다."

"근위대장이 그렇게 바보같은 놈은 아닌줄로 아는데? 이젠 그런 삼류 자작극으로 이간책동까지 벌이나?"

코리온이 빈 찻잔을 어루만지며 쌀쌀맞게 대꾸했다.

"네페티 부인의 일을 복수하려는 남부세력이 지난번 학란 때문에 학장님에 대해 앙심을 품은 남극성당 내 불만세력과 연계한 듯 합니다. 근위대장과는 관계없이 제롬 공이 독자적으로 벌이는 짓일수도 있겠죠."

"훗,"

코리온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콧방귀를 끼며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네 그따위 수작으로 내 환심을 사보려하는건가? 내가 고맙다고 눈물이라도 흘려줄 줄 알았나?"

"물론 아니시겠죠. 제 목적은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고.....학장님을 지키려는 것이니까요. 이유는 저도 정확히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학장님을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무언가 말이 안되는듯한 카렐의 대답에 코리온이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똑바로 마주선 이 두 사촌남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말이없던 카렐이 고개를 번쩍 들며 창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곤봉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코리온 앞을 똑바로 막아섰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리창이 큰 소리를 내며 부서져버렸다. 잔뜩 준비자세를 잡고있던 카렐이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부서진 창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암기?"

코리온은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드는 카렐에게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쳤지만 그 엄청난 힘에 밀려 큰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러졌다. 몇 번의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카렐이 몸을 움찔 하고 있었다. 깔려 쓰러져있던 코리온의 얼굴 위로 카렐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려지지 않은 채 몸 밖으로 나와있던 코리온의 왼손을 카렐이 갑자기 거칠게 붙들었다. 곧이어 카렐의 손등에 십자형의 암기가 날아와 건틀렛 틈새로 푹 박혀버렸다. 카렐이 큰 소리로 외쳤다.

"독입니다. 스쳐도 죽습니다."

"너, 넌......"

카렐이 코리온의 드러나있던 왼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에 파묻었다. 옆방에서 들려온 요란스런 소리에 기겁을 한 샤드니가 문을 홱 열어젖히고 있었다.

"오지마!"

코리온이 쉰 목소리로 필사적으로 외쳤다. 문 뒤로 급히 몸을 피하는 샤드니 쪽으로 다시 몇 개의 암기가 날아갔다. 밖에서 자이납과 거친 남자의 큰 고함소리와 함께 요란스런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카렐은 팔이 후들거리더니 코리온의 몸 위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아윽,"

그 엄청난 체중으로 가해진 충격에 코리온이 자기도모르게 약간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코리온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있는 카렐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흐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코리온이 움직이려 버둥거렸지만 카렐의 몸이 워낙 무거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코리온이 무심결에 카렐의 등을 더듬으려 했다.

"안됩니다......암기 8개가 박혔습니다.....만지면 살이 썩습니다."

카렐이 헐떡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깨진 유리창 안으로 복면을 한 두 녀석이 짧은 검을 쥐고 뛰어든 건 그때였다. 카렐에게 깔린 코리온은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망할 녀석들!"

문 뒤에 숨어있던 샤드니가 뛰쳐나와 그 둘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 역시도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급한대로 의자를 집어들고 그들에게 힘껏 집어던졌다.

"아이씨, 쥐새끼같은 새끼들! 도대체 몇놈이야!"

윗층에서 테라스로 뛰어내린 자이납이 둘 중 한 명의 등을 검은 시미터로 그대로 베어버렸다. 카렐에게 깔린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있던 코리온을 발견한 나머지 한 명이 카렐의 등을 힘껏 내리찍었다.

"썅!"

깜짝 놀란 샤드니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힘껏 후려치자 카렐의 등을 조금 스친 칼을 그대로 떨군 채 녀석이 뒤로 나동그라져버렸다. 샤드니는 주먹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이납이 곧이어 달려들어 녀석의 가슴에 힘껏 칼날을 박아넣었다.

"전하! 전하!"

문을 열고 뛰쳐들어온 우베가 카렐의 등을 짚으려 하자 카렐이 소리를 꽥 질렀다.

"다가오지 마!"

카렐의 입으로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코리온의 한쪽 어깨는 카렐의 피로 이미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때 우베의 뒤를 이어 낯익은 얼굴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코도넬 독인가?"

반짝이는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들어온 북부 길드마스터 케스난이 두꺼운 가죽장갑을 손에 끼며 카렐에게 다가섰다. 카렐의 어깨에서 암기 한 개를 뽑아낸 케스난은 그 냄새를 맡아보고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코도넬 독 블렌딩이군. 새끼들......지독한걸. 이런 악질적인 독을 쓰다니......황제령 길드 새끼들도 많이 발전했네?"

카렐의 몸에서 무려 9개의 암기를 모두 뽑아낸 케스난은 그것들을 안쪽에 치워놓고는 굳어있는 카렐을 조금 일으켜 무릎 위에 눕혔다. 무거운 카렐 밑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깔려있던 코리온도 그제서야 샤드니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제기랄, 녀석들이 암기 쓸거라고는 안했잖아. 알려주려면 제대로 알려줘야지, 썅, 방패라도 가져왔을 거 아냐. 아무리 내가 독 내성이 강하다고 내 몸을 꼭 방패로 써야겠냐?"

카렐이 케스난을 가볍게 째려보며 중얼거리자 케스난이 머쓱한 표정으로 카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글쎄요, 저도 황제령 길드 쪽 프락치한테 들은거라 100% 확신할 수는 없다고 알려드렸을텐데요. 언제 암살수들이 무기 예고하고 쓰는 거 봤나요?"

얼굴을 찡그린 카렐이 다시 한웅큼의 피를 토해냈다. 등에 덮고있던 케이프를 끌른 케스난은 카렐의 목과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받쳐주었다.

"내가 준 황금갈고리는 어쩌고?"

카렐이 '허전한' 그의 왼손을 힐끗 보며 물었다.

"들어오다가 치안내 녀석들한테 압수당했죠. 위험하다나."

"쳇."

카렐이 문득 코리온을 돌아보았다. 샤드니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코리온은 자객을 후려치느라 붉게 부어오른 연인의 손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심하게 다친 자신 쪽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는 그의 모습에 카렐이 쓴웃음을 한 번 지었다. 자이납은 아니나다를까 코리온의 '반쯤 벗은 미끈한 몸'에 완전히 넋이 나간 채 멍 해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코리온은 벗어놓았던 검은 무명포를 어깨에 덮으며 누워있는 카렐을 무표정하게 내려보았다.

"델루지 가의 수작이라고 그랬나?"

"아마도 그럴겁니다."

카렐이 여전히 피를 흘리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바보같은 놈들이었군."

코웃음친 코리온이 태연하게 뒤로 돌아섰다.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네놈이 조용히 정리하도록 해. 난 옆방에서 잘테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샤드니와 함께 옆방으로 가버리는 코리온의 뒷모습을 우베가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케스난의 부하들이 뛰어들어와 시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주사기 한 개를 넘겨받은 케스난은 쓰러져있는 카렐의 목에 조심스럽게 약을 주입했다.

"잠이 쏟아지는 부작용이 있지만 약효하나는 최고죠. 저희 암살수들이 쓰는 특제 해독약이니까. 물론 공인같은 거 받은 약물은 결코 아니죠."

"기대도 안했어."

건성 대답한 카렐이 케스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눈을 감자 미소를 띠어보인 케스난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현장처리 전문가' 답게 케스난의 부하들은 눈깜짝할새 객사 메인침실을 핏자국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치워놓았다.

"제대로 치료받으셔야겠는데요."

케스난이 카렐의 등을 힐끗 보며 말했다. 카렐이 우베를 돌아보았다.

"페로 관에 가서 하룻밤 쉬어야겠다. 우베, 어머님께는 내일 적당히 알려드리도록 해. 지금 주무실테니까......내일 내가 안보여도 너무 놀라지 마시라고. 지금당장 네피녀석보고 내 대신 와서 여기 좀 지키라고 해. 방패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

자이납이 끄응 소리를 내며 무거운 카렐을 등에 업었다. 케스난 말마따나 부작용 때문인지 카렐이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졸음에 정신을 못차리는 카렐을 케스난의 차에 실으며 우베가 혹시나 하고 객사 2층 침실 창문을 올려다보았지만 코리온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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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와 추천은 아마추어 작가의 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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