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6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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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의복을 정제하고 취임식 참석시간에 맞춰 샤드니와 함께 객사 밖으로 나온 코리온은 문앞을 지키고 있는 낯선 거구의 남자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은 누구냐?"
"가디언 네피라 합니다."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네피가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장태자전하의 명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훗......녀석은 어디가고?"
"몰라서 묻는거유?"
기분이 완전히 상해버린 네피가 결국 평소 말투로 되묻자 코리온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 무례한 말투에 흥분한 샤드니가 무어라 대들려는 것을 가로막은 코리온이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그 어미한테 갔나보지?"
"그럴 기운이나 있었으면. 칫.
"뭐라고?"
열이 오른 네피가 코리온의 코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대뜸 언성을 높였다.
"이봐요, 똑똑한 유학자양반. 난 이런저런거 모르는 천하의 무식장이지만 최소한 자기 목숨 구해준 은인이 독하고 피로 범벅이 되어서 실려갔으면 최소한 생사확인정도는 해보는 성의 정도는 보이는 게 도리라는 건 알고있소이다. 은혜도 모르는 망할 유학자새끼들......제네르녀석 빼곤 도무지 맘에드는 놈들이 없어."
"은인?"
네피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던 코리온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정말 질긴 년이군......독까지 맞고도 아직 안죽고 살아있다니......"
기가막혀 말대꾸도 못하고 있는 네피를 뒤로하고 남극성당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간 대강당에는 오늘 행사의 주인공인 세네피스 황후가 약간 안절부절하는 표정으로 한구석에 서 있었다. 그 이유를 짐작한 코리온은 사뭇 밝은 표정으로 황후의 앞에 보란 듯 똑바로 자리잡고 앉았다. 곱지않은 시선으로 코리온을 한 번 노려본 황후는 옆에 선 애꿎은 우베만 자꾸 무어라 닥달하고 있었다. 샤드니가 그런 코리온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도리상 녀석의 안부라도 묻는편이......"
"필요없다."
코리온이 눈을 치켜뜨며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지은대로 받는 법이다."
샤드니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아는 코리온은 겉으로는 엄격하지만 나름대로 속정은 없지않은, 목숨을 구해준 사람까지 대놓고 나몰라라 날 정도로 매몰찬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코리온의 뼛속깊이 사무친 원수인 황후와 카렐과의 관계를 알 턱이 없는 샤드니는 이런 학장의 태도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페로 관의 의료시설이 있는 남쪽 안채 욕장에 누워있던 카렐은 여전히 약의 부작용에서 완전히 깨어나지는 못했는지 졸다 깨다를 연신 반복하고 있었다.
독기운을 빼내기 위한 검푸른 진흙 속에 몸을 깊이 담근 카렐의 머리맡에는 행여나 졸다가 익사하지 않을까 걱정한 모렌 박사가 붙여놓은 미녀 노예 두 명이 앉아있었다. 그 둘은 졸고있는 카렐에게 장난까지 쳐 가며 이 옛 수석가디언의 평소같지않은 모습에 키득거리고 있었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그 묘한 감촉에 눈을 번찍 뜬 카렐은 잠이 가득한 눈을 껌벅거리며 눈에 익은 욕장 안을 새삼스럽게 둘러보았다.
"들어가서 곁에 함께 있으면 안될까요?"
미녀 중 한명이 카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혼자있기도 좁아."
쌀쌀맞게 대꾸한 카렐이 옆의 컵에 담겨있던 얼음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차가우신 건 여전하시네."
입을 삐죽거리며 진흙 속에 손을 밀어넣으려던 미녀는 갑자기 열린 욕장 문 앞에 서 있던 매서운 눈매의 여자 모습에 움찔 하고 말았다. 왼손의 반짝이는 황금 갈고리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올린 케스난은 몸에 달라붙는 관능적인 검은 원피스를 바닥에 끌며 카렐에게 다가왔다.
"나가들 주지."
케스난의 위압적인 태도에 저으기 주눅이 든 미녀들이 급히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욕조 귀퉁이에 가볍게 걸터앉은 케스난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의 카렐을 보고는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어제 차 안에서 제게 무슨짓을 하셨는지 모르시죠?"
"무슨 짓?"
카렐은 행여 자신이 큰 실수라도 하지 않았나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졸음이 가득하던 카렐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리며 특유의 무지개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케스난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짓 안하셨어요.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쿨쿨 주무시기만 했죠."
"하여간.....잠은 확실히 깨워놓는군."
카렐이 큭 하고 웃음지으며 물 한모금을 다시 들이켰다.
"그런데 전하의 피냄새에 뜨거운 호흡이 정말로 자극적이었죠."
케스난이 진흙에 몸을 담근 카렐의 입술에 바싹 다가가며 속삭였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 안되는게 문제지."
카렐이 그답지않은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자네 혹시 황빈 될 생각 있나?"
"글쎄요, 솔직히 별 관심은 없는데......그게 저같이 천한 창녀도 될 수 있는 별볼일없는 자리인가요?"
케스난이 진흙 속으로 손을 넣어 카렐의 가슴과 어깨를 어루만지며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요즘 딱지의 연속이었거든."
카렐이 피식 웃으며 다시 얼음물을 들이켰다.
"내일은 네번째로 딱지맞는 날이 될테고."
카렐의 말에 케스난이 욕장이 떠나갈정도로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누구죠? 감히 천하의 카렐 전하를 딱지놓은 년들이?"
"북부에서 오신 잘난 상급귀족 따님들."
"쯔쯔쯔.......안봐도 뻔하군."
케스난이 카렐의 입술에 다시한번 바싹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황후폐하 실망이 대단하시겠네요?"
"말하나마나지."
카렐이 몸을 한 번 쭉 뻗으며 따뜻한 부드러운 진흙의 감촉을 만끽하고 있었다.
근 며칠동안 세네피스 황후의 소개로 카렐을 찾아온 여자는 모두 세 명이었다. 황후는 어디서 찾아냈는지 십여명이 넘는 내노라하는 북부의 상급귀족가 여자들을 차례대로 불러들이고 있었지만 결과는 신통치않은 수준을 넘어 참담할 지경이었다.
스스로 꽤나 매력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카렐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매달릴 여자들를 어떻게 떨궈낼까에 골머리를 썩기도 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건 카렐의 어마어마한 오판에 불과했다. 알현장소인 타르서스 별궁에 찾아온 북부 상급귀족가 딸들은 자신이 소개를 받으러 온 사람이 다름아닌 '가디언'이라는 사실에, 그것도 그 무시무시한 등급없는 가디언 카렐이라는 말에 혼비백산해서는 제대로된 만남도 모두 내팽개친 채 돌아가버렸던 터였다.
그 중 둘인가는 '꽤 높은 자리까지 갈 수 있다'는 기회를 버리는 것에 나름대로 갈등하는 듯 싶기도 했지만 실제 카렐의 모습을 본 순간 느꼈을 그 어마어마한 키와 살기가 감도는 눈매와 표정, 알게모르게 풍기는 묘한 피냄새는 물론이고, 고장난 셔틀 엔진이라도 통째로 삶아먹은 듯한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순식간에 주눅이 들어버리더니 결국 제대로된 대화한번 해보지 않은 채 '너무 무섭다'는 말만을 남기고 딱지를 놓아버린 것이었다. 어쨌든 카렐은 어머니나 이모 오르마즈 경에게 물려받은 그 훌륭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첫인상에서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는 사람은 못되는 것이 확실했다.
가디언을 짐승취급하는 제국 분위기도 그렇고, 자신이 산 사람 골을 파먹는다는둥 하는 세간의 말도안되는 소문 등등을 생각하면 그다지 이해못할 일도 아니었지만 카렐로서도 이만저만 자존심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어머니 세네피스 황후가 소개해준 여자와 '어떻게 해 보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는 카렐이었지만 '차는 것'과 '차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오죽하면 상견례를 뒤에서 재미반으로 구경하던 네페티 부인이 매번 '보자마자' 딱지를 맞는 카렐의 참담한 표정을 보다못해 '제발 대화만이라도 해 보고 가라'며 여자를 설득하는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카렐은 그들을 야속하게 여기는 것은 고사하고 아메스와 네페티 부인, 솔이나 자신을 그리도 따르던 이곳 페로 관의 미녀들이 도리어 이상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의심에 빠져있을 지경이었다. 하기사, 솔은 자신을 처음 보았을 때 너무 무서웠다고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고, 이곳 미녀들도 처음엔 카렐의 모습에 어지간히 겁내고 도망다니긴 했지만.
"전하같은 분을 아무나 감당하겠어요?"
케스난이 카렐의 귀에 입술을 바싹 들이대고는 들릴듯말듯 속삭였다.
"내일 전하를 딱지놓을 여자는 누구죠?"
"4제후 이쟈크 가 종장 손녀라지?"
"후훗, 잘해보시죠. 응원이라도 해드릴까요?"
케스난의 능청맞은 태도에 카렐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6번 행성의 트라티누스 가 종가 인근에 일단 숙영지를 마련한 동부연합군 최고지휘관들은 그곳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고있을 뿐이었다. 동부연합군 4만, 아니 마음만 먹는다면 14만명이라도 충분히 우겨넣을만한 면적의 숙영지였지만 당장 모인 병력은 슈트란 가 선발대 5천과 하크로딘 가 선발대 2천, 그리고 나머지 가문들에서 온 5백여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장 플라칼 가 주력군이 대대적인 기습이라도 해온다면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고있어야 할 형국이었다. 연합군 숙영지 반대편에서는 5번 행성에서 도망쳐 온 트라티누스 가 패잔병 6천여명이 분주히 숙영지를 마련하는 중이었다.
"하나 오긴 오는군."
눈을 조금 찌푸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페로가 낮게 중얼거렸다. 수송선 한 대가 멀리 서쪽하늘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스코프의 촛점을 조절한 제네르가 페로에게 말했다.
"은색 늑대니까......7제후 바툴 가입니다."
페로가 옆에 서 있던 제르베 경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예상대로 입가를 조금 일그러뜨린 그는 괜히 옆에 선 다히르 경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다.
"내가 지휘할 첫 병력이군."
페로 일행이 그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바툴 가 병력은 용병대가 아닌, 제후가 소속 군대인지라 원칙대로라면 플로브 경의 연합군에 함께 배속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편제상 트라티누스 가와 함께 움직여야 할 연합군에 '원수지간'인 이들을 함께 편제하는 것은 별로 현명치 않다는 제네르의 제안을 받아들인 샤자한 공의 결정으로 바툴 가에서 올 2천의 병력은 궁한대로 페로 휘하에 두기로 한 것이었다.
2천의 병력이 그다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제네르로서는 이래저래 연합군 사령관이며 종장인 플로브 경의 '눈밖에 날' 짓만 골라 한 셈이었다. 숙영지 한쪽의 '용병대' 구역에 착륙한 병력수송선의 큰 도크가 육중한 소리와 함께 열리고 있었다.
"아우,"
깜짝 놀란 아메스가 어깨를 들썩 하고 말았다. 흑갈색의 가벼운 라멜라 갑옷을 챙겨입은 탈라스 유목민들이 키큰 호마 두세마리씩을 몰고 열을 맞춰 내려서고 있었다. 하나같이 질끈 묶어 틀어올린 약간은 지저분한 머리에, 남자들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엔간한 시민들은 그대로 패댕이칠 수 있음직한 살기가 ㅤㅃㅕㄷ치는 건장하고 무시무시한 모습들이었다. 그 체격만 얼핏 보기에도 특별히 추려서 뽑은 최고의 용사들임에 틀림없어보였다.
"탈라스계 친구들답군."
제네르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대체로 체구들이 작은 동부에서도 특이하게 크고 우람한 체구를 자랑하는 저들은 서부제후지역과의 경계에 위치한 탈라스 행성계 유목민들이었다. 그리고 동부인답지않게 큰 키의 제네르 역시도 바로 저 탈라스지역 출신이었다.
이주 초기, 동부에 속하느냐 서부에 속하느냐를 놓고 꽤 오래 설왕설래했던 탈라스 지역은 정주문화 위주인 서부보다는 유목민의 동질감이 있는 동부를 스스로 택했고, 그 덕택에 화가 난 서부제후들의 공격으로 한동안 시달리기도 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환경만으로 따지면 사막과 반건조지역, 험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척박하기 짝이없는 그곳은 서부와 비슷한 외양을 갖춘 곳이었다.
"최대한 빨리 달려왔습니다."
카이두 경이 페로의 앞에 무릎꿇으며 특유의 굵고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페로의 앞에 도열해서는 2천 병력의 모습에 뒤에서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던 플로브 경이 아연질색하고 있었다. 2천의 궁기병 중 족히 4분의 1은 바툴 가 후손임을 뜻하는 늑대문양의 은빛 방패를 말에 걸고있었다. 가문에서만 그정도의 머릿수를 동원했다면 종장 카이두 경이 이번에 아예 '가문의 사생결단'을 하고 나온 것이 확실했다.
자신의 앞에 도열해서는 그들의 정연한 모습에 페로도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완벽한 기강으로 똘똘 뭉쳐있는 그들은 누가보아도 완벽한 최정예 경기병대의 모습 그 자체였다. 플로브 경은 저 말안듣는 제네르 덕택에 휘하에서 놓쳐버린 탐나는 2천의 기병을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는수밖에 없었다.
"베아트릭스라는 년이 이번에 장군으로 승급했다고 하는군."
페로가 카이두 경을 내려다보며 쌀쌀맞게 말하자 그 거구의 종장의 어깨가 잠시 움찔 하는 모습을 보였다.
"플라칼 가 소속 5천 경기병단의 사령관이 되었다고 한다."
"황공하옵니다."
카이두 경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저희 가문에서 직접 추려뽑은 450명과 각 부족들에서 선발한 최고의 궁기병 전사들이옵니다. 사격은 물론이고 근접전에도 최강인 자들이오니 망할 녀석들이 5천이든 5만이든 모두 고깃덩이로 만들어놓겠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거만하게 대답한 페로는 뒤로 휙 돌아섰다.
"6번 행성 공략은 이곳시간으로 내일 낮 12시. 지금부터 16시간 후에 개시한다."
십여명의 휘하 지휘관들을 모아놓은 헤즈 플라칼 사령관이 샤레이 행성계 수도인 6번 행성의 지도를 작동시키며 사뭇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이 자리에 함께한 베아트릭스는 목의 붕대를 풀고 가벼운 드레싱만을 한 상태였다.
'더럽게 빨리도 한다.'
신임 기사단장 히르직스가 또한번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그 뺀질거리는 세째남편녀석을 한 번 흘겨보았다. 얼떨결에 껄끄럽기 짝이없는 직속상관을 두게 된 제3기사단장 웰시 경이 그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속상관이자 첫째남편인 저 무서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현재 긴급조직된 4만의 동부연합군이 북반구의 트라티누스 가 부근에 집결하고 있는 것 갈다. 녀석들이 전열을 갖추기 전에 행성 내 안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종가를 직접 두들겨야겠군요."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이 양쪽 주먹을 탁탁 부딪히며 키득거렸다. '하임달의 결전'에도 근위대를 도와 참전한 바 있던 그는 누구보다도 중장보병단장으로 어울리는, 후퇴라고는 모르는 고집스런 강철같은 사나이였고, 세베토 경의 전사로 사실상 헤즈에 이어 전군의 2인자로 부상한 전형적인 '플라칼 가 사람'이었다. 물론 그 단순우직함 덕택에 종장 카나르 경에게서 유난한 총애를 받고있기도 했다.
"단순한 문제가 아냐."
헤즈 경이 그를 한 번 째려보았다.
"델루지 가 쪽에서 들어온 정보에 따르자면......"
'델루지 가'라는 말에 베아트릭스가 알게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자신들이 델루지 가의 칼받이로 여기 서 있다는 사실에 유감이 있는 건 베아트릭스 단 한명뿐인 듯 싶었다.
"페로 자이센 총리가 동부연합군과 함께있는 것 같다고 한다."
히르직스가 베아트릭스를 보란 듯 노려보았다. 제1타겟이었던 페로를 죽이지 못했다는 그 경멸의 표시임을 베아트릭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녀석이 안돌아가는 이유가 뭐랍니까?"
히르직스의 질문에 헤즈가 또다시 그 특유의 잘난체를 시작했다.
"뻔하지. 봐. 연합군 4만에 트라티누스 가 4만병력까지 도합 8만이나 되는 대군을 통제할만한 거물이 어디있나. 머리에 피도 안마른 제르베 녀석은 턱도없고, 하크로딘 가 종장 플로브 녀석이 연합군 사령관이라고 맡고는 있지만 녀석도 까마득한 옛날에 2차 혼란기때 군단장노릇 3년정도 했던게 고작이지. 부장이라는 다히르 녀석도 기병대 중랑장으로 2년 있었던게 고작이야. 그에 비하면 페로 녀석이야 5차 혼란기때 슈엘러 경에 이어서 20만의 대군을 지휘하기도 했고, 그동안 치러낸 크고작은 전투들만해도 이루 헤아릴수가 없지. 게다가......"
말을 이으려던 헤즈 경이 갑자기 히르직스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히르직스는 총사령관의 그 묘한 눈빛이 무엇때문이지 잠시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코아 전사단인지 머시깽이인지에 쓸만한 놈들이 꽤 있는 모양이야. 언제든 페로를 위해 뛰어들 수 있는 놈들이지."
헤즈가 모두의 앞에 파일을 작동시켰다.
"이놈은 지금 페로를 따라와있는 여자다.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유학자 겸 기병장교라니까 꽤나 괴상한 년이야. 녀석들이 재건한 슈로 기사단에서 지금 단장으로 있는 놈이다. 얼마전에 플레렌 가 맹장 하지즈 장군을 일기투로 꺾었다더군."
그 차갑던 히르직스의 표정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이 베아트릭스의 두 눈에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대단하던 슈로 기사단 시절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이번엔 베아트릭스가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파일을 집어든 히르직스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제네르의 신상을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문득 그의 얼굴을 확인한 베아트릭스가 자기도모르게 앗 소리를 내고 말았다. 바로 그 '노랑머리 년'의 모습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베아트릭스가 입술을 조금 씰룩거리며 중얼거렸다.
"만만한 년이 아니더군요. 제 부하들을 둘이나 죽인 년입니다."
"이번엔 내가 골을 빠개놓지."
히르직스가 턱에 핏줄을 세우며 중얼거렸다.
히르직스의 과격한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령관 헤즈 경이 껄껄대고 웃음까지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또 여자야. 누구랑 좀 닮지 않았어?"
파일 뒷장을 작동시킨 헤즈 경이 중얼거렸다.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페로 자이센 총리 바로 뒤에 있던 여자 같군요. 생긴것도 비슷하군요."
"그 딸년이야."
몇몇 장군들이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성깔도 그아버지나 똑같다더군. 아메스 로퍼크 자이센. 자이센 가 종손이고 동시에 로퍼크 가 종손이야. 아직 특별히 알려진 건 없지만 어쨌든 얼굴이나 알아둬. 지 애비하고 함께있는 모양이니까. 혹시 아나, 재수좋게 우리 손에 걸려들지."
"캬, 저런여자 마누라삼으면 죽여주겠네. 그재산이 다 내꺼아냐. 아참, 애비부터 죽여야겠군."
케세크 경이 여전히 주먹을 탁탁 치며 중얼거렸다.
"마지막놈은 아직 여기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코아 전사단 소속 정규군 지휘관이라니까 언제 다시 뜰지 몰라."
헤즈 경이 히르직스의 눈치를 다시한번 보며 다음번 파일을 넘겼다. 파일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는 히르직스가 무심결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토로 로버넬. 전 슈로 기사단 단장이었고 지금은 코아 전사단에서 5만의 정규군을 총괄하는 병부대신으로 있다. 물론 여기 있을 정도 친구들이면 거의 다 알겠지? 북부 출신이지만 관록이 대단한 무장이니 언제든 이곳에 지원올지도 모른다. 알아두기나 해."
자리에 모인 십여명의 지휘관들의 긴장한 눈빛이 일제히 히르직스 쪽을 향했다. 이를 한 번 악문 히르직스는 그들의 '동정섞인' 시선을 넌즈시 무시하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번 공략지점이 어딥니까?"
"남반구. -5561, 9577에 위치한 마랄루 시. 녀석들의 행성 에너지장벽 중앙통제소하고 중앙중계소가 있는 곳이다. 이곳을 접수하면 행정수도가 위치한 루사 평원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북반구의 트라티누스 종가를 초토화시킨다. 그러니 오늘들은 들어가서 잘 먹어두고 푹 쉬도록 해. 아참, 베아트릭스 경은 잠깐 나 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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