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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68화 (168/1,132)

< -- 168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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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 학장은 돌아갔습니까?"

남극성당에서 타르서스 별궁으로 돌아온 세네피스 황후를 맞이하며 미리 기다리던 카렐이 물었다.

"1시간쯤 전에 황궁으로 가더군."

"황궁으로요?"

카렐이 눈을 반짝이며 황후를 홱 돌아보았다.

"듣자하니 베흔 녀석이 돌아가기 전에 한번 와 달라고 청한 모양이던데."

얼굴이 굳어져버린 카렐이 말없이 황후의 옆을 걸었다.

딸과 나란히 걸으며 세네피스 황후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왜 그 사이코 녀석에게 그리도 집착하는거지? 네가 그리 아끼는 개혁파 녀석들을 40명이 넘게 학살했는데?"

"아무래도......그사람을 보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잡아주지 않는다면 폭주할 사람입니다."

카렐의 자신없는 대답에 갑자기 움찔 한 세네피스 황후가 얼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네가 보호 안해도 충분히 똑똑하고도 남는 놈이야."

"때없이 순수하고 여린 사람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큰 만큼......비뚤어나가기도 쉽죠."

"허! 순수? 그래서 독에 범벅이 되어서 실려간 생명의 은인한테 기껏 아직 안죽었냐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나 하고있냐?"

"평소의 그였다면 그런 얘기조차도 할 가치를 못느꼈을겁니다."

카렐의 너무나 아무렇지않은 태도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듯한 표정의 황후는 몇발짝 앞서서 멈춰선 딸의 뒷모습을 잠시 멍 하니 바라보았다. 황후를 향해 가볍게 웃어보인 카렐은 갑자기 어머니의 어깨를 한팔로 가볍게 돌려안았다. 그의 평소같지않은 태도에 도리어 놀란 쪽은 세네피스 황후였다.

"베흔 하나만으로 어려운 시기에 적을 일부러 둘을 만들 필요는 없지않습니까. 리쿠 학장은 나중에 두고 생각하더라도 일단 베흔 쪽에 힘을 실어야죠."

"그, 그래......그건 네말이 맞구나."

난생처음 받아보는 딸로부터의 가벼운 스킨쉽에 약간 당황한 황후는 잠시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황후의 이마에서 입술을 뗀 카렐은 별궁 접견실로 나란히 향했다.

접견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기다리던 수명개조 당대로 보이는 나이든 종장과 젊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북부 4제후 이쟈크 가 종장인 세쿠엘 이쟈크 이옵고 이쪽은 제 직계 손녀인......"

말을 이으려던 세쿠엘 부인은 황후의 뒤에 서 있는 카렐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시 말을 잇지를 못했다. 키가 꽤 크다는 황후보다도 한참 올라간 큰 키는 물론이었고 넓은 어깨와 살기로 번득이는 회색 눈동자에 처음부터 주눅이 들어버린 세쿠엘 부인은 옆에 선 손녀의 자그만 키와 고운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카렐 옆에 서 있던 우베가 급히 카렐의 눈치를 살폈지만 어차피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카렐은 도리어 태연한 표정이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3명의 종장은 '그래도 일단 만나봐라' 권하고, 카렐의 진짜 신분을 알 턱이 없는 여자 본인은 경악을 하며 빼는 양상이었다면 이번엔 그 반대라는 것이 유일한 차이였다.

"보시다시피 소인의 손녀는......체구도 작고.....심장도 약하고 겁도 많아......"

"그래서요?"

황후가 신경질적인 투로 묻자 세쿠엘 부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카렐의 눈치를 다시 살폈다.

"아직 태어나 피한방울 본적 없이 고이 자란 아이이오니....."

"그럼, 경의 손녀에게 무슨 해꼬지라도 한다 했소? 아니면 협박이라도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지금 피라 하셨소? 여기서 피가 대체 왜 나오는거요?"

결국 폭발한 황후가 눈앞의 노인을 사정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보다못한 카렐이 흥분한 황후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옆으로 밀어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타르서스 남부는 기후가 온화하고 햇빛이 좋은 곳이니 춥고 험한 북부에 비해 쉬고 가시기 좋을 것입니다. 이젠 제가 장악하고 있으니 손님으로 편히 머무르다 가십시오."

이미 3번째 여자까지 보내고 자포자기해버린 카렐은 아예 북부 각 가문 종장들에 대한 얼굴도장찍기 정도로 생각하기로 마음대로 결정지어놓은 후였다. 이제 여자들은 어차피 카렐의 관심사 밖이었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카렐의 태도에 그나마 조금 마음이 풀렸는지 세쿠엘 부인이 옆의 손녀딸을 보며 민망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는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혼자 무언가 중얼중얼거리더니 신경질을 부리며 혼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카렐은 그제서야 여자쪽을 돌아보았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를 한 선해보이는 인상의 아가씨는 북부인이라기보다는 서부인에 가까운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이쟈크 가는 원래가 서부와의 경계인 하임달에 영지를 가지고있는 가문이니 그다지 이상할것도 없었다.

할머니의 '경악'과는 별도로 여자의 호기심어린 시선은 카렐의 길고 날렵한 몸매와 잘록한 허리, 가디언답지않은 날씬하고 긴 팔다리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평소 입는 검은 수트 위에 발목까지 오는 긴 가죽 튜닉을 입은 카렐의 몸매는 접견실의 약간은 침침한 조명 아래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카렐의 무지개톤 회색눈에서 천천히 내려온 여자의 시선은 카렐의 허리에 채워져있는, 엔간한 사람의 어깨높이는 되고도 남을 위협적으로 긴 카타나에 가서 멎었다.

"카토!"

카렐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던 카토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나타났다. 여자가 칼 때문에 겁을 집어먹었다고 생각한 카렐은 허리에 차고있던 무기벨트를 끌러 그에게 내밀었다.

"네가 가지고 있어라."

"저어......"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문득 돌아본 카렐에게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렇게 멋진 칼은 정말로 처음이군요.....한번 구경 좀 시켜주실 수......있으십니까?"

잠시 머쓱해진 카렐은 카토에게 주려던 칼을 집어들고 상대가 겁내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주 천천히 뽑아보였다. 주인의 몸매만큼이나 날렵하게 뒤로 휘어진 붉은빛의 날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 칼로......몇명이나 베셨죠?"

"글쎄요.....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백 명은 넘겠죠. 원래 쓰던 칼은 5달 전에 망가져 버려서....."

칼날에 멎어있던 여자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결국 카렐과 마주치고 있었다. 이 낯선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 카렐은 난처한 나머지 가벼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둘 사이의 묘한 눈치를 파악한 세쿠엘 부인이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는 손녀딸을 급히 곁으로 잡아끌었다.

"제 손녀딸이 괜한 데 신경을 쓰이시게 하는군요. 황공합니다."

"아닙니다. 손녀따님이 호기심이 많으시군요....."

세쿠엘 부인 일행과 잠시 별 말 없이 어색하게 서 있던 카렐이 다시 물었다.

오늘은 여기 묵으실테죠?"

"예."

"그럼 영빈관에서 편히 주무십시오. 전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칼을 다시 허리에 찬 카렐은 카토의 호위를 받으며 접견실을 나섰다. 하지만 방을 나서면서야 카렐은 자신이 여자의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앞으로 더이상 만날 일도 없을테니.

"우베!"

카렐의 고함소리에 그때까지 넋놓고 여자구경에 빠져있던 우베가 허겁지겁 뒤를 따라 달려나왔다.

"헤헤, 항상 생각하는거지만 역시 북부미녀가....."

"어디 좀 가야겠다. 베네루스한테 워프비행 준비시켜."

접견실에서 나오면서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린 카렐이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디요?"

카렐의 심각한 태도에 우베가 눈을 갑자기 동그랗게 떴다.

"자네들은 좀 내키지않겠지만......서부 아켐에 가봐야겠다. 리쿠 학장을 다시 만나야겠다."

창밖으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본 카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기장까지 따라나온 베흔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셔틀에 올라탄 코리온은 셔틀 아래로 멀어져가는 거대한 황궁의 야경을 큰 창으로 내려다보며 꽤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샤드니 역시 그런 학장의 사색시간을 훼방놓지 않은 채 묵묵히 그 아름다운 옆모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셔틀이 황제령의 대기권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무렵에야 코리온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조금 치켜들었다.

샤드니가 코리온에게 바싹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꽤......파격적인 제안이더군요."

코리온은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은 채 어두운 스페이스공간을 바라만보고 있었다.

"남극성당 대제학 겸직이라니......손잡자고 말만 던지고 만 카렐 녀석에 비하면......어차피 개혁파와 손잡은 카렐 녀석과 저희는 기본적으로 가는 길이 틀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베흔과는 같은가?"

코리온의 한마디에 샤드니가 잠시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근위대 제안을 거절하실 생각이십니까?"

"생각중이다."

"또다시 껍데기뿐인 황제가 오르면......"

"그 형과 근위대장이 또다시 제국을 좌지우지하겠지."

코리온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내가 원하는 건 무능해서 다루기쉬운 황제가 아니고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철인으로서의 황제다."

"하오나 현실이......"

'현실'이라는 말에 코리온이 샤드니를 홱 돌아보았다. 중도파 학자들이 즐겨쓰는 이 단어는 코리온이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실수를 직감한 샤드니는 급히 자리에 꿇어앉으며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큰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표정을 가다듬은 코리온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샤드니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이 요구한 병력 10만은 어려운 숫자는 아니옵니다."

코리온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플레렌 가에서 3만을 충당하고 나머지 제후가에서 7만을 파견하면 문제는 없을것입니다. 페로와 손잡아 가능성이 낮은 3제후 발 가 쪽은 접어두더라도 2제후 세호 가는 탈라스 지역에 대한 권리를 끊임없이 주장해 왔으니 '교리정치'와 표면적으로는 무관한 것으로만 한다면 이번 원정에는 동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동부를 앞뒤에서 친다.....10만은 고사하고 3,4만 정도가 쳐도 못당해내겠지. 손잡아줘야 할 북부가 저모양이니....."

코리온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무심결에 자신의 왼쪽 손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카렐에게 세게 잡혔던 그의 왼쪽 손목은 손가락 자국을 따라 피멍이 들어있었고 암기가 스친 손등 부근은 검게 변색되어 약을 발라놓은 상태였다.

베흔의 제안은 간단했다. 남부가 샤레이를 공격하고 있는 새 서부가 10만의 대군을 동원해 동부의 그 반대편 끝자락인 탈라스를 공격해 함께 무너뜨리자는 것이었다. 북부와 동부, 서부, 황제령과도 연결되는 워프루트의 허브에 위치해 있고, 제국 최대의 군마 주산지이기도 한 탈라스는 그 험악한 자연환경과는 별도로 그간 정치, 군사적 요충지로 손꼽히고 있었다.

이미 몇번이나 되는 탈라스 침공을 통해 그곳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왔던 서부에는 말 그대로 귀가 솔깃한 제안일수밖에 없었다.

"한패거리인데 남부는 날 죽이려들고 근위대는 나와 손잡자고......정말 우습군."

코리온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근위대장은 남부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런 바보짓을 하기는 너무 철저한 놈이야."

"윤허만 해주신다면 이번 동부 원정군은 제가 맡겠습니다. 동부만 무너지면 페로 녀석도 배후지원세력을 잃게 되니......녀석도 몰락할테고.....도미노처럼 카렐 녀석까지 무너질테니......그때 학장님께서 양대 학교의 수장을 모두 맡고계신다면 제국의 사상계는 이제 저희가......."

"난 아직 원정군을 파견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코리온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워프 비행에 들어간 기체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샤드니를 돌아본 코리온이 그답지않게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물었다.

"지금 내가 하는 선택을 이후에 누군가가 내 이름과 함께 반복한다 해도 정녕 부끄럽지 않을 것인지를 생각하라 하셨다."

샤드니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자 코리온이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주페 태자저하께서 협상을 위해 황궁으로 떠나시기 전날 내게 하신 말씀이셨지."

창을 향해 돌아선 코리온의 눈시울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뒤에 선 사람들 중 누구도 볼 수가 없었다.

"내 알기로......오넬론 태자, 아니 세네피스 태자빈 쪽에서 놀랄만큼 파격적인 제안이 들어왔다고 들었지. 그걸 거절하고 장태자에게로 떠나시면서 그분도 지금의 나처럼 고민하셨을까?"

왼손에 낀 페리도트 반지를 꽤 한참동안 어루만지던 코리온은 뒤에서 말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예킨터스 교수를 바라보았다.

"학교에 연락해서 벌초 준비를 하라고 일러라."

"어딜 가시려 하십니까?"

"선언 이후로 태자저하 묘소를 3달이나 찾아뵙지 못했구나......내 혼자 갈테니 낫과 간단한 주과포만 준비하도록 해라. 찾아뵙고 그간 있던 일을 말씀드려야겠다. 저 극악무도한 악녀의 몰락이 가까와졌다니......기뻐하시겠지......"

샤드니는 묘하게 시무룩한 학장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제국의 양대 명문교인 남극성당과 파예드 아카데미의 양쪽의 수장을 모두 겸직한다는 것은 지금껏 유례가 없었던, 코리온에게는 어마어마한 명예가 될 것이 확실했다. 샤드니는 행여 다른 생각을 갖고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던 학장이 결국 베흔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음을 깨닫고는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지시를 내린 코리온 자신은 검게 변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솟구치는 묘한 양심의 가책을, 그리고 지금 자신의 뜻이 진정 주페 태자가 원했을 방향으로 나가는 것인지에 관해 웬지모르게 드는 의구심을 떨굴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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