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9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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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에 걸친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3번 도시 부근의 도적떼를 무려 4만명이나 '학살' 해버리고 시민들의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3번 도시의 새 시장으로 추천된 페로는 그동안 계속 고사해오던 관직을 '마지못하는 척' 받아들였다.
사실 도적소탕은 페로 입장에서는 꽤 쓸만한 훈련수단이기도 했다. 주로 대규모 도적집단을 쫓아다니며 천 명이 넘는 가디언들과 그 절반 정도의 견습가디언들을 데리고 '작전'을 벌이는 것은 휘하 가디언들에게 등급을 올리기 위한 경험과 근위대 외의 다른 가디언들이라면 얻기 어려운 전투감각, 지휘력을 길러주는 데 더할나위없는 방법이었다.
이런 실전감각을 익힌 자신의 가디언들은 시장에 내놓는 일 없이 몇몇 유력가에 개인거래 형식으로 팔려나가고 있었지만 페로는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대부분의 '쓸만한 녀석'들은 자신이 그대로 데리고 그 등급이 올라가는 광경을 즐겁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가디언들로 재산전을 벌여 가문 하나의 재산을 통째로 차지해버린 것도 이맘때의 일이었다.
페로가 새로 시장으로 오른 프라임 3번 도시는 프라임 지역의 10개 도시들 중 황궁이 위치한 1번 도시에 이어 2번째 규모에 해당하는, 남부 프라임지역의 수도이기도 했고, 할아버지 투모카프 시절부터 살아온 자이센 가의 텃밭 지역이었다.
대신급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시장직은 장차 더 큰 무언가를 노리는 페로가 관직 경력을 시작하기에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지위였다. 물론 페로의 기대대로라면 직접 황궁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않았지만 당시 황궁의 분위기는 들어가 일할만큼 좋은편이 되지를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모두 '장태자'가 될 것으로 믿었던 맏태자 푸츠 공주가 '결함심사'에서 발작성 정신질환으로 부적격으로 드러날 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베로 황후는 무려 5명이나 되는 딸들을 낳았고, 그 밑으로 심사를 대기하고 있는 4명이나 되는 동생들이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네 명 중 세째와 네째공주는 어릴때부터 심각한 정신지체를 보여 애시당초 심사통과가 기대되지도 않았고, 어딘지 이상한 모습을 보여오던 둘째공주 역시 아니나다를까 그 언니에 이어 부적격으로 판정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내 라이 공주마저도 '후계'를 바라던 제국민들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면서 제국은 후계구도를 놓고 또한번 어마어마한 혼란사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천재가 많이 나오는만큼 반대급부로 정신질환자 역시 많은 이 S혈통 특유의 비밀은 제국의 기술수준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미스테리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5명이나 되는 태자들에게서 모두 이상이 감지된 건 지금까지의 S혈통에서도 유례가 없는 황당하기까지 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이것을 실리페 황후 탓으로 돌려버리기는 황비와 황빈에게서 나온 대군과 군 3명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작증세나 정신지체를 보인다는 점에서 함부로 단정지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다못한 일부 유전자은행 전문가가 나서서 보관된 표본세포에 행한 결함여부 조사에서도 그 결과가 극히 정상으로 나왔다는 것아 결국 이 S혈통의 미스테리를 또한번 확인해준 결과에 지나지않았다.
어쨌든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황제로서도 무언가 대책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황제가 1차 후계권 지명으로 수우를 선택한것도 후계구도에 불안해하는 제국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황제 스스로는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후계자 문제를 누군가가 꺼내는 것 자체를 무척이나 불쾌해하고 있었다. 결국 '총대를 멘' 베흔이 나서서 혼란스러워진 민심수습을 위한 전시효과임을 극력 강조한 설득에 넘어간 황제는 '1차 지명'에 불과함을 몇번이나 강조하며 남부 최고제후와 서부 최고제후의 차남인 수우를 공주 중 한명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후계자로 발표한 것이었다.
최소한 후계가 '무주공산'으로 남아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황제의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수우의 후계자 지명식에 가문을 대표해 참석한 페로의 머릿속에서는 묘한 희비가 교차하고 있었다.
황실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로 지내오던 저 똑똑한 녀석은 남극성당이라는 꽉 짜여진 공간에 들어간 이후로 어딘지모르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오고 있었다. 약간의 방랑벽에 놀기좋아하는 기질, 기발한 상상력으로 똘똘 뭉쳐있던 저 바람둥이 친구녀석의 어린시절 꿈은 어처구니없이도 가수 혹은 희극배우였다. 하지만 타고난 멋대가리 없는 목소리 덕에 가수의 꿈은 일찌감치 접었던 저녀석은 어릴적 황실학교에서도 매년 직접 주연과 연출에 각본까지 겸한 장편 희극을 공연해서 학교의 큰 행사마다 인기스타로 각광받기도 하던, 꽤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황실학교를 졸업하는대로 연극학교를 가는 것이 소원이던 수우가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남극성당에, 그것도 수우가 그나마 원하던 사장지학도 아니고 정치철학인 육서과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육서과정은 십경과정과 더불어 남극성당에서 가장 힘있는 학과였고, 가장 많은 막강한 동문선배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어머니인 네페티 부인이 '정치가는 맏아들 제롬으로 족하니 수우는 소원대로 해 주자'며 설득을 했지만 그 늙은 아버지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수가 없었다.
결국 생도생활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수우의 성적은 학부를 졸업할 무렵에는 가까스로 낙제수준을 넘는 정도였고, 수석졸업에 박사생도의 위치에 올라선 친구 페로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학부만을 마친 채 그대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물론 그것은 수우 녀석 스스로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남극성당 졸업 후 어머니의 지원으로 소원하던 연극학교에 다시 들어간 수우는 이번엔 황당한 현실의 벽과 마주치고 말았다. 학생들의 대부분이 평민 출신인 연극학교에서 '남부 최고제후와 서부 최고제후 사이의 아들에 남극성당 졸업생' 이라는 누구나 놀랄만한 이 대단한 출신은 도리어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의 순수한 열정은 '부잣집 도련님의 호기'정도로 무시되기가 일쑤였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꽤 많은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모두 잘난 그의 뒷배경을 보고 몰려든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6년의 연극학교를 꿋꿋이 마치고 졸업장을 따낸 수우는 졸업 직후, 집안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극단을 만들어보려 나름대로 꽤 애썼지만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의 손에 다시 남부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강제로 '가문 일'을 보게되면서 그는 부쩍 더 말이없고 소심한, 오직 술과 여자에게만 탐닉하는 이상한 성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페로는 황제에게 절을 올리는 수우 녀석의 탁하고 흐려진 눈에서 옛날의 그 명랑하고 당돌하기까지 하던 그의 모습을 도저히 찾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페로에게 더 착찹하게 다가온 건, 자신의 어릴적 친구인 저 녀석이 다른것도 아닌 제국의 제위 후계자에---저 게으른 황제는 멀쩡한 자식이 새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이번 일을 다시 번복하는 귀찮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올랐다는 데서 드는 스스로에 대한 패배감이었다. 친구라면 당연히 축하해줘야 하는 일이겠지만 사실 페로가 수우에게 던졌던 그 입에발린 말들은 전혀 진실이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후계자가 수우가 아니고 생판 모르는 가문의 엉뚱한 사람이었더라면 지금처럼 착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서 '장태자'의 문장을 받아드는 수우의 어딘지 무거운 표정은 그 역시도 지금의 상황이 원하던 바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고있던 페로에게는 책봉식 이후 술에 빠져 살던 수우가 그로부터 6달 후 갑자기 행방불명되어버린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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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잠에서 일찍 깬 베아트릭스는 아직까지 옆에서 깊이 잠들어있는 쿤제를 문득 돌아보았다. 병영에서 약혼자와 잠자리를 함께한다는 것이 매사 엄격한 베아트릭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사령관 헤즈 경은 회의 후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는 베아트릭스의 막사에 '승급기념 선물'이라며 이 덩치를 밀어넣고 나가버린 것이었다.
문득 내다본 밖에는 자신의 막사 경계를 서던 경기병 네 명 정도가 초원의 추운 새벽공기에 발을 동동 구르며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망할,"
부하들에게 미안한 기분이 든 베아트릭스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벗어놓았던 옷을 도로 집어들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쿤제가 침대에 옆드려 실눈을 뜨며 베아트릭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매가 정말로 매력적이시네요."
"......"
"피부도 매끄럽고......"
"내 손이 갈라진 나무껍질같다며?"
베아트릭스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군에 들어온 이상 '아름다움' 따위는 포기하고 사는 삶이라지만 '손이 갈라진 나무껍질같다'는 핀잔에 기분좋을 여자, 아니 남자라도 세상에 있을 턱이 없었다. 물론 평균치나 될지도 의심스러운 볼품없는 얼굴생김에 매일 쉴틈없는 훈련으로 다져지고 갈라진 그의 손도 그 지경이라는 것은 베아트릭스 스스로가 더 잘 알고있기는 하지만 굳이 남의 입에서 들어서 유쾌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이 눈치없는 덩치 녀석도 자신의 실언을 눈치채고는 지난 저녁 내내 '싹싹 빌다시피' 했지만 베아트릭스의 여자로서의 자존심은 여전히 생채기가 남아있었다.
"아이, 또그러시네. 제가 실수라고 그랬잖아요."
쿤제가 손을 뻗어 베아트릭스의 '나무껍질같은' 손을 붙들고는 대뜸 입을 맞추었다.
"몸매가 탄력있으신게 정말 예술이네요."
쿤제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엔간한 여자라면 쓸데없는 아부라며 아구창을 날리고도 족할 말이겠지만 실제로도 기마생활과 사냥, 훈련으로 다져진 베아트릭스의 다부진 근육과 날렵한 몸매, 6척 1촌의 훤출하게 큰 키는 누가보기에도 '군인' 그 이외의 단어는 생각하지 못하게 할 모습이었다. 게다가 흑인종 특유의 탄력과 순발력에 탈라스 혈통 특유의 강인한 근력까지 겸비한 그의 전사로서의 자질은 엔간한 사람은 흉내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옷을 벗은 채 찬물로 가볍게 세수를 하고 난 베아트릭스는 갑주 밑에 받쳐입는 패딩 수트를 챙겨입고 있었다.
"벌써 나가시게요?"
"지휘관이 먼저 일어나 아랫사람을 살피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스비아토 중랑?"
단호한 태도로 갑주를 챙겨입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에 쿤제도 입을 삐죽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날수밖에 없었다.
"알았습니다.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님. 하지만 때때로 좀 웃어주시면 어디 덧나냐구요."
개전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된 갑주를 챙겨입고 나타난 베아트릭스의 모습에 히르직스가 묘한 웃음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경기병단 특유의 갈색 라멜라 갑옷에 독수리문양의 푸른 망토와 궁기병용 스코프, 왼쪽 어깨의 견갑까지 제대로 갖춘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궁기병대장시절 쓰던 '사이클롭스'까지 그대로 하고 있었다.
"자네 아직 궁기병대장인줄 착각하고 있나?"
히르직스 경이 여느때처럼 반쯤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었지만 베아트릭스는 여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제 특기니 그대로 쓰는거죠. 장군님께서 경기병단장이시면서 매번 돌격전을 하셨던 것처럼."
베아트릭스의 반격에 히르직스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하지만 둘간의 묘한 신경전은 사령관 헤즈 경의 등장과 함께 일단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모두 탑승이 끝났으니 이제 출발해야겠군. 중장보병 5천과 경보병 5천이 남아서 여길 지킬테고 이번 공격병력은 중장보병 오만 오천과 경보병 만 오천, 기사단 만 오천과 경기병단 오천이다. 모두 이상 없겠지?"
"예!"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부터 경기병단장 베아트릭스까지 네 번의 큰 대답이 울리자 만족스러운 표정의 헤즈 경이 큰 소리로 출발지시를 내렸다. 동부 공략의 두번째 전투가 그들 앞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번 전투는 첫번째의 그것보다 어려울 것임을 모두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상륙 예상지역은 모두 4군데입니다. 행정수도 루사 평원일수도 있고 아니면 이곳을 직접 강습할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공업단지가 위치한 카라키 지역일수도 있습니다. 적들이 신중하게 진격할 예정이라면 에너지장벽 중앙통제소가 있는 마랄루 시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단 모든 지역에 1급 경계령을 발동시켰습니다."
5번 행성을 장악한 플라칼 가 제후군의 이상동향을 보고받은 제르베 경은 페로와 플로브 경, 다히르 경을 차례대로 돌아보며 말했다. 3만여 연합 지원군과 슈로 기사단, 카이두 경이 이끄는 바툴 가 지원군은 이미 모두 수송선에 오른 채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3천여밖에 모이지 않은 유목민 용병대는 하무편제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로 당장은 출전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일단은 제외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무겁던 분위기는 결국 5번 행성에서 십여대의 수송선이 출발했다는 소식에 팽팽한 긴장감까지 더해져 있었다.
"6번 행성을 곧바로 치지 않고 5번 행성을 거친 것으로 보아서"
페로가 역시나 제일먼저 입을 열었다.
"적 지휘관은 신중한 녀석이거나 우유부단한 놈이거나 둘중의 하나일거요. 아무래도 마랄루 시 쪽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군."
"마랄루의 에너지장벽 통제소 쪽에는 우리 수비병 4천이 있습니다. 예비병력 3천을 미리 파견해야겠습니다. 지금 곧 행성 에너지장벽 가동합니다. 뚫으려면 한두시간정도 소요될 겁니다."
제르베 경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도 종장의 지위에 있는만큼 일단 갑주를 챙겨입고 있기는 했지만 2, 4차 혼란기에도 참전했던 어머니 마굴루 부인과 달리 실전 지휘경험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푸우, 행성 에너지장벽이 있다는 소리가 반갑게 들린것도 참 오랫만이네요."
서부에서 에너지장벽에 '학을 떼었던' 시로가 제네르를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웃음을 지었다. 갑주 차림으로 제네르 옆에 서 있던 아메스는 첫 출전에 많이 긴장되는지 연신 마른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페로가 갑자기 딸 쪽을 바라보며 뚱딴지같은 말을 꺼내놓았다.
"넌 여기 숙영지에 머물러있도록 해라."
"예? 하오나 전 아버님의......"
아버지의 뜻밖의 말에 크게 당황한 아메스가 제네르를 잠시 돌아보았다. 하지만 제네르 역시 수긍한다는 듯 아메스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있었다. 장차 황후가 될 몸이기도 했고, 페로와 카렐의 동맹의 끈이기도 한 아메스를 함부로 적에게 노출시켜서는 안된다는 데 제네르 역시 동감이었다.
"말안듣는 유목민새끼들이 무슨 사고칠지 모르니까 네가 일단 통솔하고 있어."
페로가 딸의 눈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하자 아메스도 더이상 어쩔수가 없었다. 그는 지난번 페로 관에서처럼 옆에 카렐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시나마 침묵이 흐르던 회의장 안의 분위기는 누군가 뛰어들어오며 외친 한마디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적들이 에너지장벽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자폭셔틀들이 포스트위성에 충돌하며 생기는 아름답기까지 한 폭발이 불꽃놀이처럼 하늘을 수놓았다. 그 광경을 멍 하니 바라보던 히르직스는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의 표정이 오늘따라 유난히 밝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단순무식한 녀석의 얼굴표정만 봐도 오늘의 작전이 어찌 전개될지는 능히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었다. 오늘은 중장보병이 평소의 스타일대로 돌격의 최일선에 서리라는 것이 확실했다.
지난번에 궁기병대가 세웠던 탁월한 전과를 생각해보면 또다시 궁기병대를 앞세우지 않는 헤즈 경의 의도가 조금 궁금했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잘난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은 가만히있어도 어차피 제 입으로 다 털어놓을테니.
"통제소 남측 전방에 중보병 12열 밀집 방진을 짜도록 해. 기사단은 측면후방대기하고."
히르직스가 고개를 약간 멀뚱한 표정으로 헤즈를 바라보았다. 기병 개개의 전력이 동부보다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번엔 선두에서 돌격해올 '동부기병'의 예봉 자체를 보병으로 막아보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역사도 짧은데다가 제대로된 지휘관도 없을 동부 보병은 남부 '전쟁기계' 중장보병의 상대가 아니었다.
히르직스는 그제서야 경기병단에 아무 명령도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병단들과는 별도의 수송선에 따로 모여타고 있는 그들에게는 무언가 다른 역할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6번 행성 남반구 최대의 도시인 마랄루 시 남쪽 외곽에 위치한 에너지장벽 통제소는 여느 다른 주요 행성들의 통제소들과 마찬가지로 고도로 요새화된 기지 한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엔간하면 험준한 산악이나 섬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제대로된 산악이나 섬이 도무지 없다보니---동부인들 기준에서는 산이겠지만 다른 지역 사람 눈에는 그냥 조금 가파른 언덕배기에 불과한, 드넓은 초원 한중간에 멀뚱하게 솟아있는 꼭대기에 위치시킨 것이 이곳 사람들이 나름대로 한 최선의 노력의 결과였다.
256개의 에너지장벽 포스트위성 중 160여기가 파괴되면서 남반구쪽 장벽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식은 이 통제소에서 제일 먼저 종가를 향해 발신되었다. 그리고 장벽이 파괴되는동안 보강된 3천여명의 수비병까지 합쳐 도합 7천여명의 수비병이 통제소를 둘러싼 요새를 촘촘히 메우며 농성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5번 행성의 패전에서 나름대로 정보를 얻은 트라티누스 가 수비병들은 궁기병들의 궁사를 막기 위한 대형 파비스 방패와 다수의 대마 장애물들을 1스타디아 밖까지 설치해놓은 후였다. 그정도의 대비라면 플라칼 가의 공격군을 상대해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을것으로 누구나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제센터의 서쪽 언덕에는 이미 요격준비를 갖추고 있는 제르베 경의 트라티누스 가 지원병 2만과 플로브 경의 동부연합군 3만 정도가 대기중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페로가 이끄는 바툴 가 지원병과 슈로 기사단에 가디언부대까지 4천여명 만일을 대비해 적도 부근에 대기상태로 남아있었다.
"예상대로군요."
기병대를 맡은 다히르 슈트란 경이 잔뜩 흥분해있는 말 목을 쓰다듬으며 플로브 경에게 중얼거렸다. 미리 설치한 에너지장벽 바깥으로 행성 에너지장벽을 돌파해 들어온 십여대의 플라칼 가 병력수송선이 접근해오고 있었다.
"일단 에너지장벽으로 시간을 끌다가 장벽이 뚫려서 녀석들이 쳐오기 시작하면 보병들은 요새에서 수성전을 실시하고 우리 연합군과 페로 경의 기병대로 삼면에서 적 후방을 조여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깟 기병 4천한테 뭘바라겠소."
기병사령관 다히르 경의 교범적인 제안에 플로브 경이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3만의 연합군과 우익의 트라티누스 가 2만 병력을 죽 둘러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제르베 경. 에너지장벽을 기습적으로 풀고 녀석들이 진형을 제대로 갖추기 전에 기병으로 선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실전 지휘경험이라는 전무한 2제후 제르베 경은 플로브 경의 제안에 카타부타 대답도 없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약간 당황한 다히르 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요새의 수비병과 연계해서 안전한 농성전을 펼치는 것이......"
"지난번 6번 행성에서 보았지않습니까. 적 기병들은 우리 상대가 안된다니까요. 적 궁기병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접근해서 거리를 없애놓는 게 중요해요."
제르베 경을 설득하는 플로브 경의 말이 그럴듯한지 다히르 경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어차피 전쟁에서 전술이란 지금 이 상황에만 적당하면 되는 것이지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은 의미없는 짓이었다.
"경의 제안대로 하죠."
제르베 경이 기병대를 맡은 다히르 경을 돌아보았다. 긴장한 얼굴의 다히르 경이 스코프의 배율을 높이며 적진 쪽을 돌아보았다. 적 병력수송선들이 통제소 남쪽 평지에 차례대로 내려서고 있었다. 경기병 7천과 중장기병 5천까지, 도합 만 이천의 동부 기병들은 이미 돌격 준비를 마치고 진의 선두에서 공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정을 굳힌 다히르 경이 천천히 말을 몰아 그들의 선두에 자리잡았다. 형인 아르군의 그늘에 가려 그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온 그의 능력을 보일 때라는 믿음이 솟구쳐올라오고 있었다.
"중앙의 적 중장보병이 진형을 갖추기 전에 돌파한다! 준비!"
다히르 경의 힘찬 고함소리와 함께 도열한 1만 2천의 기병들이 일제히 창을 치켜들었다. 번쩍이는 갑주와 함께 치켜든 그들의 무기가 한낮의 햇빛을 일제히 반사시키며 그 유명한 '동부기병'들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함께 통제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붉은 에너지장벽이 일제히 사그러들었다.
"돌격!"
진격을 명령하는 지휘관의 창이 앞쪽으로 채 기울기도 전에 선두의 성질급한 경기병들이 일제히 전방 20스타디아 정도 전방에서 병력수송선에서 한참 내려서고 있는 플라칼 가 제후군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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