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70화 (170/1,132)

< -- 170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

.

.

"쯔쯔, 성질도 어지간히 급하시네."

적 기병이 돌진해오는 모습에도 헤즈 플라칼 사령관은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을 뿐이었다. 천하의 겁장이라 여겨왔던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히르직스가 웬일이냐며 의아한 표정을 지은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삐 진형을 갖추고 있는 중장보병 팔랑크스들의 사이로 경보병들이 우루루 몰려나가고 있는 모습에 그는 그제서야 이 사령관의 의중을 깨달을 수 있었다.

"4열 정렬!"

하나같이 손에 장창을 쥔 만 오천여 경보병들은 특유의 날랜 몸동작으로 4열 반밀집대형을 이루며 정면을 향해 돌격해오는 무시무시한 기병들을 향해 겨누었다. 항상 중장보병들이 선두에 서서 나오는, 평소 스타일에서 또한번 벗어난 셈이었다.

"경보병들 다 죽이려고 환장했군."

헤즈 특유의 또한번의 변칙전술을 바라보며 히르직스가 얼굴을 가볍게 찡그렸다. 워낙 평소에도 훈련이 잘 되어있는 플라칼 가 보병들, 특히 다재다능함을 생명으로 하는 경보병들에게 장병기와 단병기 양쪽을 다 맡을 수 있도록 만들어 온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지만 저정도의 돌파력을 지닌 무서운 동부기병들에게 겨우 만 오천의 창병을 대주는 것은 저들 경보병에게 다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긴 창을 들고 기병을 저지하는 역할에는 중장보병이나 경보병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는것이 사실이고 중장보병의 중장갑도 기병이 던지는 위력적인 투창 앞에서는 어치피 뚫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저 뚱땡이 사령관이 '보조용 싸구려 보병'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경보병들이 '부담없이 소모해버릴수 있는' 존재로 보이는 것이 별반 이상한일도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겁에 질려있는 그들 경보병들의 후열에는 말에 올라탄 '참수대' 기병들이 큰 철퇴를 들고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적 기병을 늦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늘의 희생물이 될 경보병들 뒤에서 느리지만 강력한, 주력 중장보병들이 분주히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제길!"

말을 타고 맹렬히 돌진하던 다히르 경이 얼굴을 찡그렸다. 당연히 선두에서 나오리라 생각했던 중장보병이나 기사단이 아닌, 경보병들이 1열로 몰려나오고 있었다. 선두의 동부 경기병들이 들고있던 투창을 일제히 치켜들어 정면을 향해 내던지자 족히 천 명은 넘는 플라칼 가 경보병들이 비명과 함께 뒤로 나동그라졌다. 몇몇은 겁을 먹고 달아나려 했지만 그래봤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참수대의 철퇴에 머리가 부서져서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계속 공격해!"

적들이 여전히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자 당황한 동부 기병사령관 다히르 경이 경기병들을 급히 닥달하고 있었다. 꽤 많은 남부 경보병을 쓰러뜨렸지만 앞뒤 모두에서 죽음의 공포에 몰려있는 적 경보병들은 전혀 흐뜨러지지 않은 채 여전히 장창의 방벽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히르 경으로서는 계속 돌진하느냐 일단 돌격을 중지하고 다른 수를 강구해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이 정작 노리던 적 중장보병은 경보병 뒤에서 이 모든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저 망할 플라칼 가가 경보병부대를 '내주고' 1차 충돌로 속도를 잃은 동부기병을 중장보병으로 반격해 궁지에 몰려는 계획이 확실했다. 그들 계획대로 말려든다면 어느모로 보아도 동부쪽의 손해였다.

"정지! 정지!"

다히르 경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무려 만 이천이나 되는 대규모 기병이 미리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떨어진 정지명령에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제식 훈련에서같이 후퇴 명령에 일제히 뒤로 홱 돌아서 빠져나갈수만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현실에서는, 그것도 보병도 아닌 기병들이 가장 흥분상태에 빠져있는 첫 돌격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것이 문제였다.

치고 빠지기가 전문인 경기병은 비교적 쉽게 자리에 정지했지만 뒤따라오던 중장기병들이 문제였다. 명령을 미처 듣지 못한 몇몇 선두 기병들이 어처구니없이 적 경보병들에게 머리를 처박는 황당한 광경은 물론이었고 생각없이 경기병을 앞서나갔던 중장기병이 무슨 일인가 멀뚱하니 서 있는 광경까지, 갖은 촌극이 연출되면서 진형이 엉켜있는, 몇초간의, 황금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히르 경은 그제서야 적 '기사단'은 도대체 어디있는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의 이 의문은 제대로 퇴각을 하려 가까스로 등을 돌리자마자 풀릴 수 있었다. 그리고 돌격 자체만큼이나 돌격을 중지시킨 것 역시 바보짓이었다는 사실도.

"다히르라는 젖먹이새끼 어디있냐!"

히르직스 특유의 귀청을 찢는 유난히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와 함께 양 측면 끝부분의 수송선에서 내려선 무려 만 오천의 남부 중장기병들이 측면을 돌아 진형이 어지러이 흩어진 이들 동부기병들의 양익을 무서운 기세로 쳐오고 있었다.

"이, 이....."

크게 당황한 다히르 경이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플로브 경이 이끄는 동부 보병대가 기병에 뒤이어 진격해오면서 아군에 의해 기병의 퇴로마저 막혀가고 있었다.

"플로브 경! 물러나십시오! 기병이 움직여야 합니다! 빨리......"

사색이 다 된 다히르 경의 처절한 목소리가 할룩스를 타고 뒤따라오는 동부 보병대 쪽으로 전해졌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얼마 안되는 기병이라면 그 보병들과 함께 그 틈새로 어찌어찌 물러날수도 있겠지만 무려 1만 2천의 대규모 기병은 아군 보병을 짓밟지 않고서는 퇴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적 보병들을 깨부수며 돌파해야 했을 동부기병들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에서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망치' 역할을 맡은 저 망할 남부 중장보병까지 움직이기 시작하면 모든것이 끝이었다.

제네르가 이끄는 슈로 기사단과 카이두 경의 바툴 가 경기병대와 함께 병력수송선에 올라탄 페로는 이미 마랄루 시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긴급보고를 통해 다히르 경이 궁지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페로가 옆에 서 있던 제네르를 힐끗 바라보았다. 슈트란 가와 하크로딘 가의 계획대로라면 다히르 경은 조만간 제네르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네르는 이 뜻밖의 보고에도 작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적 중장보병은 대기중이고, 기사단은 양익을 기습했고, 경보병은 중간에서 창받이를 하고 있다면 적 경기병대는 도대체 어디있는거죠?"

제네르가 페로에게 작게 물었다. 안그래도 페로의 고민거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송선의 장교에게 교전지역 주변의 다른 매복병력 여부를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드러난 외에 다른 병력은 없는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타겟'이 없다는 말에 카이두 경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어디에 착륙할까요!"

수송선 조종사의 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스캐너로 살펴본 전장에서는 이미 어마어마한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창을 든 적 경보병과 기사단의 협공을 받고 있는 기병대는 후방의 아군 보병에 가로막혀 옴쭉달싹도 못한 채 가까스로 현상유지만 하고 있었고, 4만여의 보병대 역시 측면의 기사단에 막혀 제대로된 싸움도 못한 채 아우성만 치고 있었다.

"적 중장보병대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끝이군."

페로가 투구를 눌러쓰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나다를까 밀집진형을 제대로 갖춘 5만명이 넘는 남부 중장보병대가 이미 거의 붕괴되다시피한 남부 경보병을 대신해 아군 기병대쪽으로 접근해들어가고 있었다.

"적 중장보병대 후방을 기습한다."

"예!"

카이두 경의 유난히 큰 목소리가 수송선 안을 울렸다. 남부와는 철천지 원수에 가까운 이천여명의 바툴 가 용사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미친듯한 함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기괴한 얼굴분장을 하고 전장에서 얻은 전리품---대개가 잘라낸 귀나 코, 성기 등등인---하나 정도는 부적처럼 지니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 제네르가 애써 불쾌함을 감추며 역시 투구를 눌러썼다. 이천여명이 질러대는 함성소리인지 노랫소리인지가 꽤나 떠들썩한 이 괴상한 병력수송선은 한참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적 후방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남부제후군에는 참으로 악몽과도 같은 바툴 가 문장의 큰 깃발을 앞세운 이천여명의 경기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몰려나오고 있었다.

"후방기습입니다! 기병 이천......"

스캐너를 살피던 장교의 고함소리에 후방에서 전장을 살피던 헤즈 경이 무심결에 뒤쪽을 휙 돌아보았다.

"기습없이 넘어가는 날이 없군. 뭐 이천 정도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헤즈는 얼굴을 조금 찌푸렸을 뿐이었다.

"아니, 기병 삼천 오백정도 됩니다! 경기병 2천을 선두로 2열에 중장기병 천오백 정도 같습니다."

헤즈의 옆에 있던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이 명령을 기다리는 듯 사령관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이제 중장보병 진격하기 시작했으니까 끝난거나 마찬가지야. 경보병 떨거지들하고 기사단 예비대 뽑아서 막아."

중장보병단 출신의 이 사령관의 출신부대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철저했다. 장교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뭐?"

헤즈 경이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깃발이......동부 7제후 바툴 가 같습니다."

"엑?"

자기도모르게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던 헤즈 경이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그리고......중장기병대는 슈로 기사단으로 보입니다."

"제길할,"

헤즈 경이 투덜거리며 뒤를 향해 돌아섰다. 수천기의 기병들이 돌격해오면서 솟구치는 엄청난 흙먼지가 이곳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그년......"

"그리고.....보병이 500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만......조금 이상합니다. 이동속도가 거의 중장기병과 맞먹는게......"

또다시 눈살을 있는대로 찌푸린 헤즈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디언이다......그럼 페로......."

예비대로 대기중이던 휘하의 5천여 제 3기사단을 몰고나온 웰시 경의 기분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저 망할 첫째남편놈이 기사단 사령관에 오를 때부터 어느정도 짐작은 했지만 아니나다를까 적의 양익 기습을 1기사단과 2기사단이 나눠먹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1기사단의 꽁무니를 따라 전장에 기웃거려보기는 했지만 전열을 상실한 적 기병과 한바탕 싸우는 그 호쾌한 장면---물론 그놈들이 동부기병들이란 게 좀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지만---을 기대했던 그로서는 이만저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더니 이젠 경보병과 연계해서 적의 후방 기습부대를 막아내라는 역시나 '때깔 안나는' 명령을 받고 달려오던 차였다.

"사령부 참모진에서 온 연락입니다! 적 기습병력을 페로 자이센 경이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옆에서 달리는 부장의 고함소리에 웰시 경의 눈에서 번쩍 하고 빛이 솟았다.

"웬 떡이야."

'뜻밖의 기회' 임을 깨달은 웰시 경이 창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잘하면 굉장한 대어를 잡을수도 있는 기회였다. 페로 자이센을 잡을수만 있다면 그 잘난체하는 첫째남편놈 콧대를 확 꺾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더 큰 군권, 아니 잘만하면 델루지 가 제후군으로 뽑혀가는 어마어마한 영광까지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기다!"

웰시 경의 시야에 플라칼 가 중장보병단 후열의 방진을 덮치고 있는 적 경기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길, 저새끼들 뭐야!"

거의 야만인에 가까운 그들 경기병들의 행색에 웰시 경이 경악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눈에 끼고있는 궁기병용 스코프와 어깨의 '사이클롭스'만 아니라면 저승에서 내려온 사자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흉악스럽기까지 한 거한들 수천명이 겁에질린 이쪽 중장보병 후미부대들을 무지막지하게 밟아뭉개고 있었다. 투창에 맞아 쓰러진 중장보병들 시체가 사방에 널부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원거리공격으로 진형을 1차 무너뜨리고 직접 돌격까지 한 모양이었다.

천 명씩으로 이루어진 중장보병 팔랑크스 두세개가 이미 산산조각나서 흩어져 있었고 적들 역시 흩어진 아군 중장보병들을 때려잡느라 흩어져 있는, 난전상황이었다. 틀림없는 경기병임에도 보병들을 난전 속에서 몰아치는 그들 개개의 기량으로 보아 보통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정예부대임에 틀림없었다. 피아가 뒤엉켜 '돌격목표'를 잡을 수 없자 순간적으로 당황한 웰시 경이 일단 기사단을 정지시켰다.

"동부 제7제후 바툴 가 종장 카이두다! 거기 오고있는 깡통 뒤집어쓴 떨거지들 우두머리새끼 당장 나와!"

붉은 호마에 올라탄 웬 괴물같은 거구가 서너명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겁도없이 기사단 코앞까지 쳐오며 기사단의 온몸이 덜덜 떨려올 정도의 큰 소리로 외쳤다. 저 덩치를 태우고 달릴 말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저 거인의 손에는 창인지 도끼인지 분간못할 해괴망측한---흔히 '대사'라고도 불리는---거대한 무기가 쥐여져 있었다. 날 길이만 족히 어린아이 키 높이는 됨직한 거대한 도끼날이 붙은 이 무기의 전체길이는 엔간한 어른 키보다도 훨씬 더 길었지만 눈앞의 저 괴물은 저 무시무시한 무기를 마치 장난감다루듯 공중에 휘둘러대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썅! 안나올거냐! 이 겁장이 깡통 새끼들아!"

고함을 버럭 지른 카이두는 갑자기 말을 몰아 달려나가더니 앞에서 도망치던 두 명의 보병의 허리를 마치 가을 추수라도 하듯 순식간에 두토막을 내어버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웰시 경이 이를 빠드득 갈고 있었다.

"저 건방진 경기병새끼들 싹 쓸어버려!"

3기사단의 5천여 중장기병들이 일제히 창을 앞으로 겨누며 겨드랑이에 고정시켰다. 5천명의 방패와 갑옷에서 반사된 한낮의 햇빛이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돌격!"

웰시 경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땅이 들썩일정도의 어마어마한 진동을 울리며 5천여 중장기병들이 일제히 2천여 바툴 가 정예 기병들을 향해 내달렸다. 보병들을 짓뭉개던 경기병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절단을 내버려!"

고함을 지르는 웰시 경의 머리 위로 갑자기 무언가 시커먼 것들이 일제히 솟구쳐올랐다.

"자리드다!"

웰시 경의 부장이 마치 비명처럼 소리쳤다. 바로 자신들의 동료이기도 한 베아트릭스의 주특기인 중투장 자리드 2천여개가 한낮의 햇빛을 가로막으며 3기사단의 머리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계속 돌진한다!"

웰시 경이 방패를 머리위로 치켜들며 외쳤다. 어차피 지금 당장의 역할은 중장보병들의 후방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경기병인 녀석들을 잡지는 못하겠지만 멀리 쫓아내면 일단은 할만큼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째지는 금속성의 충격음, 비명이 어우러지면서 적어도 백 기는 넘는 중장기병들이 일부는 성한채로, 일부는 죽거나 다친 채로 말 뒤로 나동그라졌다. 방패에 투창이 박힌 웰시 경이 신경질을 부리며 투창을 뽑아내려 했지만 도무지 빠지지를 않았다. 사람 키만한 긴 투창이 한귀퉁이에 박힌 역삼각형의 방패는 그의 왼팔을 짓누르며 앞으로 계속 처지고 있었다. 그리고 웰시 경과 같은 처지가 된 많은 기병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제길할!"

바툴 가 경기병들이 정신없이 달아나면서 쫓아오는 기사단을 향해 두번째, 세번째의 자리드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경기병인 그들과 뒤를 쫓는 3기사단과의 거리는 도무지 가까와지지를 않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수준 이상 떨어지지도 않고 있었다. 경기병의 '속도'를 생각하면 무언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선두에서 돌격하며 열 번 가까운 사격을 버티어낸 웰시 경의 방패에는 이미 두 개나 되는 묵직한 자리드가 박혀 있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익,"

뒤를 따르는 기사단의 절반 이상의 방패에 최소한 한개 이상의 자리드가 박혀 있었고, 일부는 아예 걸르적거리는 방패를 내버린 후였다. 녀석들이 또한번의 자리드 공격을 날리자 비명소리와 함께 다시 적지않은 기병들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웰시 경이 스코프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이제 녀석들의 자리드도 다 떨어지고 난 후였다. 앞에서 달아나는 경기병들의 퀴버들은 하나같이 텅텅 비어있었다. '골아픈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한 웰시 경이 큰 소리로 부하들을 독려하며 걸르적거리는 적의 뒤를 바싹 쫓았다. 바로 그때였다.

"슈로 기사단 돌격!"

앞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중장기병의 특이한 말발굽소리에 웰시 경이 무언가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에서 달아나는 바툴 가 경기병들이 지나간 뽀얀 흙먼지 속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룩무늬 말에 올라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긴 창을 꼰아잡은 한 녀석을 선두로 어림잡아 천 오백은 됨직한 중장기병들이 쐐기꼴 진형을 이루고 그들의 정면으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돌파해!"

웰시 경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아무생각없이 방패를 치켜들려던 그는 왼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제3기사단 선두에서 달려오던 대부분의 기병들의 형편이 비슷했다.

"제길할!"

웰시 경의 머릿속이 아찔해져왔다. 자리드가 두개나 박힌 그의 방패는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몇초 내로 적과 부딪힐 돌격상황에서 방패를 빼서 버릴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동부 혹은 북부 스타일의 양손창을 사용하는 상대 기사단의 창은 돌격시에는 한팔로만 창을 사용하는 이쪽과 그 길이와 위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방패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저들을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것이 확실했다. 웰시 경은 있는힘껏 방패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정도의 능력을 지닌 기사들은 많지않았다.

"으익!"

푸른 망토를 두른 조그만 체구의 기사가 내지른 창을 가까스로 받아낸 웰시 경이 자기도모르게 비명을 토해냈다. 그렇지만 그처럼 공격을 막아낸 행운아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목숨과도 같은 방패가 순식간에 거추장스런 장애물로 둔갑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수백의 남부기병들이 흙먼지 속에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쓰러진 그들을 무참하게 짓밟으며 제3기사단 측면을 돌파해버린 천오백여 슈로 기사단은 산산조각난 채 뒤에 남겨진 플라칼 가 기사단을 놀리듯 그대로 뒤에 놔두고는 방금전 바툴 가 경기병들이 공격을 퍼붓던 남부 보병들의 후미로 몰려가고 있었다.

"뒤쫓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웰시 경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저 귀신같이 빠른 궁기병들을 뒤쫓는것이 의미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번엔 상대가 중장보병이니 따라잡을수도 있다는, 당연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슈로 기사단의 뒤를 쫓으려던 그의 귀에 또다른 힘찬 말발굽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깡통새끼들아! 아직 살아있었냐?"

그새 새 말로 바꿔타고 나온 카이두 경과 2천여 바툴 가 용사들이 슈로 기사단에 이미 전열 일부가 무너진 제3기사단을 또다시 덮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퀴버에는 다시 이십여개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자리드가 꽉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경기병들의 후열에는 딱 보기에도 보통의 '사람'이 아닌 것이 확실한, 파란 팔찌를 지닌 수백의 거한들이 각자 제각각의 무기를 들고 거의 기병에 맞먹는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얼핏 제멋대로로 보이는 그들 가디언 전열의 중간에는 붉은 준마에 올라타고 은색의 화려한 갑주를 입은 무사가 거대한 화극을 치켜들고 앞장서고 있었다. 웰시 경의 가슴 속이 무언가로 꽉 막혀버리는 듯 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