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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72화 (172/1,132)

< -- 172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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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군은 다 빠져나간 트라티누스 종가의 숙영지를 혼자 지키던 아메스는 갑주도 벗지 않은 채 괜스리 새 창만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전장으로 떠나던 아버지가 딸에게 남겨두고 간 건 삼천명의 말도 지지리 안듣는 유목민 용병들과 가디언 다섯명이 고작이었다.

"쳇. 이게 뭐야."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근사한 새 갑주를 바라보며 아메스가 또한번 신경질을 부렸다. 아르군 경이 쓰던 이 은회색 갑주와 사모창은 꽤 관리가 잘 되어 있었지만 군데군데 '실전의 흔적'도 제법 남아있었다. 막사 안에서 혼자 '폼'만 잡고있던 아메스는 창을 어깨에 둘러메고 아무생각없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쪽 천막에서 유목민들이 양젖으로 만든 치즈를 잘라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페로에게 신나게 얻어터졌던 그 샤레이 출신 유목민 족장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 부기가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싶을 정도로 큰 소리로 껄껄대고 웃어가며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아메스는 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지난밤 페로에게 호되게 당한 저 골칫덩이 유목민들은 아직까지는 비교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언제 또 말썽을 부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같이 좀 먹자구."

아메스는 치즈를 자르는 그들의 손에서 한덩이를 냉큼 나꿔채 입에 집어넣었다. 지독하게 짠 데다가 쌉싸름하기까지 한 그 맛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지만 동부에서 종종 유목민들과 지내온 아메스에게는 새삼스러운 느낌도 아니었다. 페로에게 얻어맞아 한쪽 눈이 시커멓게 변해있는 족장이 아메스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치즈 한조각을 더 입에 넣은 아메스가 그 거구의 족장에게 무표정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셀림입니다."

"간단해서 좋네."

아메스가 술 한모금을 삼키며 대꾸했다.

그도 유목민들에겐 '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술이 독해서인지 아메스의 얼굴이 잠깐새 조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분이 조금 풀린 아메스는 낮은 풀이 자라는 바닥에 엉덩이를 털퍽 대고 앉으며 창을 옆에 내려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별로 상급귀족 귀공자답지못한 그 모습에 몇 유목민들이 큭 하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웃지마, 이새꺄, 지휘관이 궁뎅이를 대고앉건 시궁창에 디비자건 뭔상관이야."

도대체 누굴 닮아서인지 상급귀족가 귀공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아메스의 막말이 튀어나오자 유목민들이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애써 틀어막았다. 아마도 이들이 눈앞의 이 품위없이 구는 아가씨가 나중에 황후가 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자리에 배꼽을 뽑아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아? 용맹한 병사는 적군보다 지휘관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 거라구."

아메스는 눅은내가 풀풀 풍기는 곰팡이난 마른 양고기를 입에 넣으며 콧노래를 이어갔다. 요동과 샤레이 행성계의 유목민 후손 동부인들 사이에서 흔히 불리는 꽤나 촌스런 옛 노래였다. 셀림은 아메스가 한입 잘라먹은 이빨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 고깃덩이를 다시 한입 베어물며 함께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아메스가 비어있는 셀림의 잔에 양젖술을 가득 담아주자 셀림도 자기가 베어먹은 양고깃덩어리를 아메스에게  거리낌없이 내밀었다.

"제에길할, 겨우 이걸 먹으라고 남긴거냐?"

고깃덩이를 입에 통째로 우겨넣은 아메스는 몸을 뒤로 조금 기울이며 다시한번 하늘을 올려보았다. 고개를 뒤로 꺾은 채 기분좋게 흥얼거리던 아메스의 시야에 가디언 한 명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아메스 아씨, 남쪽에서 웬 수송선이 접근해온다고 합니다."

"수송선? 오늘 들어오는 병력이 또 있었나? 트라티누스 가 쪽에서 뭐래?"

아메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깃덩어리를 입에 잔뜩 문 채 되물었다.

"오늘 들어오는 연합군 병력은 저녁에 들어올 카나 가 중장기병대 3천명이 전부라고 합니다만."

"우리쪽도 오늘 들어올 유목민은 저녁에 들어올 탈라스 궁기병 4천 뿐인데?"

얼굴을 조금 찌푸린 아메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속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친 아메스가 급히 투구를 눌러썼다. 한참 기분좋게 올랐던 그의 술기운이 순간 확 사라지고 있었다.

"비상경보 울려! 당장!"

휘하의 오천여 경기병단을 이끌고 트라티누스 종가를 기습하기 위해 가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기분은 지난번 요동에서 슈트란 가를 기습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착찹하기 짝이없었다. 지지리 운도 없게도 그에게는 동부의 심장부를 강타하는 내키지않는 일들만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번엔 하크로딘 가 종가만 기습하면 동부 3개 상급제후가는 다 가보는 셈이겠군."

베아트릭스가 투구끈을 조이며 쓴웃음을 짓자 옆에 서 있던 그의 새 부장 루코프 녀석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건장한 근육질 붉은 말의 등에 앉아있는 베아트릭스의 검고 날렵한 몸에는 경기병단장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새겨진 푸른 망토가 덮혀 있었다. 각각 열 개씩의 자리드가 꽂혀있는 두 개의 퀴버와 말 엉덩이에 달린 중간 길이의 기창, 윤기흐르는 라멜라 갑옷을 차려입은 그는 누가보기에도 전형적인 경기병 장교의 모습이었다.

기사단 소속이었다가 마지못해 경기병을 맡았던 히르직스와는 달리, 이번 단장은 경기병으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중의 베테랑임을 부하들도 잘 알고있었다.

"에너지장벽 작동됐나?"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무혈입성이군."

베아트릭스가 웃음짓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갑자기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선봉을 맡은 궁기병대 천 오백의 뒤를 이어 삼천 오백의 창기병대가 진격명령만을 기다리며 잔뜩 흥분상태로 대기중이었다. 최소한 베아트릭스의 생각에는 가문에서 천대받는 이 경기병대가 그 겉멋만 잔뜩 든 기사단 녀석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효율적인 싸움을 벌이는 인재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계획대로, 조만간 이들 모두를 동부 경기병들처럼 창기병과 궁기병을 모두 겸하게 만들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바가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베아트릭스는 발밑으로 트라티누스 가 종가 주변의 도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돌파한다. 루코프가 이끄는 창기병 1연대 1천 기는 20분 내에 종가를 초토화시키고 궁기병대와 나머지 창기병 이천오백은 적 숙영지와 동쪽의 보급품 창고를 파괴한다."

이미 정해져있는 계획을 마지막으로 확인시키는 단장 베아트릭스에게 각 중대장들이 고개를 숙여보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기병들은 강력한 인화물질이 들어있는 큰 통 하나씩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이것으로 트라티누스 종가와 보급품창고를 태워없앤다면 동부연합군의 사기저하는 물론이고 보병보다 몇배는 많은 보급품과 식량을 필요로하는 동부 기병대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일이었다.

스캐너를 바라보는 베아트릭스의 눈에 뒤늦게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적 숙영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두질한 가죽옷 혹은 드물게 라멜라 갑옷을 입고있는 꽤 많은 사람들이 밑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놈들은 뭐지?"

아무 생각없이 중얼거렸지만 저들이 누군지는 베아트릭스가 이자리에 모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트라티누스 가의 소수의 패잔병들만 제외하면 이곳이 텅텅 비어있으리라는 말을 사령관 헤즈 경으로부터 들었던 베아트릭스는 양 미간을 찡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유목민들이 여기에?"

"썅! 빨리빨리 움직여! 중기병들은 오른쪽에! 경기병들은 왼쪽에! 씨발! 느린 놈들은 궁둥이를 걷어차줄테다!"

직접 말을 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는 아메스의 외침에 숙영지 곳곳에 흩어져있던 유목민들이 허둥지둥 갑주와 무기를 챙겨들고 달려나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함께있던 셀림이 샤레이 지역에서 온 휘하 중기병들을 직접 쫓아다니며 독려해준 덕에 중기병 쪽은 비교적 빨리 분위기가 잡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오전에서야 가까스로 부대편성과 부족별 진형배치 훈련을 마친 이들의 혼란은 거의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부 부족에서는 저희들끼리 대장을 뽑은 경우도 있었지만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반대편 숙영지에 있던 5번 행성 정규군 패잔병들이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추고 달려나가는 것에 비하면 아직 '아수라장'에 다름없는 이곳을 바라보며 아메스의 입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상황파악을 못한 몇몇 유목민들은 고개를 내밀고 나가기 싫다며 투덜대고 있는 황당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는 녀석들을 지휘관으로 삼겠다! 분대장 봉급은 사병의 2배다! 마궁수는 3배! 비장은 4배니까 나오기 싫은 놈들은 자빠져 자다가 적 기병에게 밟혀 뒈져도 상관없다! 포로를 잡는 녀석은 몸값의 반을 차지할 수 있다!"

아메스가 방송에 대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정신을 퍼뜩 차린 그들의 발걸음이 순식간에 두배는 빨라지고 있었다. 샤레이 가에서 온 셀림이 이끄는 천여명은 유목민에서는 보기드물게 중갑주를 입고있는 중기병이었다. 셀림의 주도로 군장을 끌어안고 제일 먼저 연병장에 집결한 그들은 말을 세워두고 그 옆에서 갑주를 챙겨입느라 아우성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경기병인 2천여 요동계 유목민들도 말 위에서 경갑주를 주섬주섬 집어입는 희한한 꼴로 그들 옆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새 남쪽에서 날아온 병력수송선이 숙영지 북쪽에 착륙하고 있었다.

"셀림!"

샤레이 가 중기병 쪽이 그나마 통제가 되고 있음을 발견한 아메스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너희 부대는 동쪽 보급품창고쪽을 지켜! 경기병은 나를 따라 북쪽으로 간다!"

아직 제대로된 기병 지휘경험이라고는 전무한 아메스로서는 이정도가 그가 내릴 수 있는 명령의 한계였다. 그가 옆에서 드물게 본 다른 지휘관들은 마치 바둑을 두듯 부대 하나하나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지만 아직 아메스에게 그정도를 바랄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바랄 수 있는 건 그저 자신의 명령대로 잘 알아서 움직여주기를---얼마나 무책임한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있었지만---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유목민쪽을 돌아본 아메스는 깜짝 놀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거의 통제가 불가능할 듯 보였던 이들 유목민들은 아침에 했던 진형훈련 따위는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부족별로 대오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 먼저 전열을 정비한 셀림이 앞으로 먼저 치고나가며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뭐야?"

셀림의 선창과 함께 자리에 모인 삼천여명의 유목민들 사이로 노랫소리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메스는 그제서야 언젠가 책에서 읽은 바 있던 '전사와 병사의 차이'라는 내용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이들이 훈련과 통제로 싸우는 '병사'가 아닌, 본능과 자유의지로 싸우는 '전사'들이라는 사실도.

"성을 쌓는 자는 망할 것이며 움직이는 자만이 살아남으리라! 저 나약한 남부 작자들에게 너희의 힘을 보여줘라!"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유목민의 격언을 큰 소리로 외치며 창을 들고 앞장서는 아메스를 따라 이천여명의 유목민 경기병들이 북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을 향해 내달리면서도 아메스는 도대체 적이 어떤 놈들인지,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지도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귀에 트라티누스 가 종가 쪽에서 들어온 정보는 그나마 큰 위안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포이기도 했다.

"수송선에서 내리는 적 병력 파악되었습니다! 적 경기병단 5천명이 이쪽을 기습한 것 같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창기병 삼천오백과 궁기병 천 오백입니다! 지휘관은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장군으로 추정됩니다!"

수송선에서 내려선 베아트릭스는 상황이 예상보다 녹녹치는 않음을 깨달았다. 트라티누스 가 정규군으로 보이는 제법 많은 보병들이 숙영지에서 종가를 향해 달려나오고 있었고, 반대편 숙영지 쪽에서도 유목민으로 보이는 꽤 많은 기병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흙먼지가 눈에 똑똑히 들어오고 있었다. 오천여 병력을 눈깜짝할새 토해놓은 병력수송선이 공중대기하기 위해 다시 이륙하고 있었다.

"느긋하게 해도 돼. 적 주력군은 마랄루에서 작살나고 있다니까."

베아트릭스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부장 루코프가 웃음지었지만 사실 부하들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닌,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는 말었다. 단장인 베아트릭스가 루코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자 그는 큰 함성을 지르며 자신의 뒤를 따를 천여명의 창기병을 이끌고 뛰쳐나갔다.

"동측 숙영지에서 몰려나오고 있는 트라티누스 가 보병은 1천 7백여명, 서측 숙영지에서는 유목민으로 보이는 2천여 병력이 장군님을 향해 돌격중이고 중기병으로 보이는 천여명의 병력이 동쪽 보급품창고 정면에 대기중입니다."

이륙한 수송선에서 들려오는 정황보고와 함께 그의 스코프에 전방으로 몰려오고 있는 적 기병의 위치와 거리가 표시되고 있었다. 약해빠진 동부보병 1천 7백 정도라면 루코프의 창기병 천여명으로 쉽게 제압이 가능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유목민 경기병이라는 보고에 베아트릭스는 얼굴을 가볍게 찡그릴수밖에 없었다. 그들이라면 첫 조우에서 어느정도의 투창공격도 해올것이 분명했다. 유목민들의 전력은 절반 유목민인 베아트릭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스코프를 똑바로 고쳐쓴 베아트릭스가 투구의 반투명한 사이트를 내리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창기병 선두로 2선에 궁기병 돌진한다! 궁기병은 1스타디아 안에 표적이 들어오면 창기병 후방에서 1차 곡사로 공격한다! 2차 공격은 자리드로 하되 투창 4개 이상을 사용하지 말도록! 일단 기병 난전에 들어가면 창기병대는 녀석들을 붙들고 시간을 끌고 궁기병대는 동쪽으로 이동해서 창고쪽의 중기병을 원거리 공격하고 창고를 불태운다!"

대응방법을 결정한 베아트릭스가 오른손에 자리드를 뽑아들며 앞장서 달려가자 4천여 남부 경기병대가 큰 함성과 함께 그의 뒤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제일 앞장서서 달려가던 아메스는 어느새 자신이 진형의 중간에 위치해있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혼자 '튀게' 중장갑에 마갑까지 갖추고 있어 속도 자체가 처지는 탓이었지만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는 요동출신 족장과 그를 따르는 삼십여명의 건장한 기병들의 존재에서 이들의 자연스런 '보호대형'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버지가 특별히 골라준 서부산의 이 흰 명마는 아메스와 이 무거운 중장갑을 지고도 거의 경기병에 맞먹는 속도로 씩씩거리며 잘 달려가고 있었다.

"옵니다!"

아메스의 스코프에 멀리서 접근해오는 삼천기가 넘는 남부 경기병이 일으키는 어마어마한 흙먼지가 보이고 있었다. 아메스는 자기도모르게 창을 꽉 움켜쥐었다. 어릴 때부터 그 아버지처럼 가디언들과 함께 커오면서 칼과 창 쓰는법을 나름대로 배우기는 했지만 '야전'에서 이렇게 맞붙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게다가 제네르의 말대로라면 적의 경기병단장은 전장에서 닳고닳은 최악의 무서운 자였다. 어쩌면 '형식상이나마 대장인'자신이 직접 맞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던 아메스의 눈앞에 무언가가 햇빛을 가리며 공중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투창이다!"

선두 족장의 고함소리와 함께 유목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간격을 벌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 오백여개의 투창이 공중으로 솟구쳐 날아오고 있었다. 난생처음 당해보는 원거리공격에 아메스가 당황했지만 제네르에게 배운대로 들고있던 방패를 급히 얼굴 위로 들어 가렸다. 그의 귀 옆으로 쉿 하는 소리와 함께 투창 한 개가 스쳐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1격은 그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1격에 명중한 족히 백여명의 유목민들이 돌격하던 말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부상을 입거나 죽은 자도 있었지만 성한 채로 떨어진 나머지는 다시 말에 뛰쳐올라 본대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다.

"시격준비!"

아메스의 명령이 채 떨어지기 전에 이미 유목민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손에 투창을 뽑아들고 있었다. 아메스의 스코프에 적과의 거리가 표시되고 있었다. 그 거리가 정확히 0.5스타디아를 표시하자 이번엔 아메스가 소리를 질렀다.

"공격!"

2천여개의 경투창이 일제히 공중을 날았다. 궁기병처럼 특수장비 풀셋을 갖추지 않은 보통 경기병이 던질 수 있는 사정거리의 한계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상대방 쪽에서도 또 한무리의 투창이 날아오며 서로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투창들이 공중에서 번쩍거리며 교차하고 있었다. 양쪽에서 수백기의 기병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있었다.

아메스의 방패에도 묵직한 중투창이 박히면서 그 충격에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다. 아메스는 적 경기병대의 선두에서 한손에 중투창을 쥔 채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달려오는 한 사람을 똑똑히 구분할 수 있었다. 부하들이 모두 투창을 던지는 와중에도 그는 투창을 던지지 않은 채 들고만 있었다. 그가 '특정한 누군가'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아메스의 머릿속을 확 스쳤다.

"2격 실시!"

아메스의 외침에 유목민들이 이번엔 직사로 '마지막이 될' 투창공격을 날렸다. 적진에서도 조우 직전, 또한번의 자리드가 공중으로 솟구쳐올랐다. 충분히 직사할 수 있는 거리인데도 곡사하는 것으로 보아 적 궁기병들은 2열에서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메스는 고삐를 놓고 두팔로 창을 움켜잡으며 어깨높이로 치켜들었다. 제네르에게 배운대로 연습은 몇번 해보았지만 잘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자리드를 움켜쥔 베아트릭스는 적 선두에서 달려올 '대장'을 단발로 쓰러뜨릴 참이었다. 사이클롭스까지 차고 그가 직접 던지는 자리드의 위력은 엔간한 기병 방패 따위는 간단히 꿰뚫고 그 뒤의 중장갑을 입은 사람까지도 단번에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선두에서 대장으로 볼 만한 녀석이 눈에 띄지 않자 그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명령대로 궁기병대장 달리 플라칼 교위가 이끄는 궁기병대는 마지막 공격 직후, 바로 방향을 틀어 적의 보급품 창고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이젠 이곳에서 자신이 지휘하는 2천 5백여 창기병들이 유목민 경기병들을 잡아두는 동안 빠른 궁기병대가 둔중한 중기병들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창고를 불태우면 되는 일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일단 선두에서 제일 높아보이는듯한 푸른색 술을 단 불쌍한 녀석에게 들고있던 자리드를 직사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 위력은 같은 플라칼 가 사람들마저도 경악에 떨게 했던 그 위력 그대로였다. 말 목을 관통한 자리드는 갈기에 몸을 바싹 대고있던 그 주인의 명치까지 그대로 파고들어 단번에 바닥에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유목민 경기병 2천과 플라칼 가 경장 창기병 2천 5백명이 큰 소리를 내며 격돌했다. 곧바로 창을 뽑아든 베아트릭스의 눈에 무언가 번쩍 하는 형상이 들어왔다.

"저ㅤㄱㅣㅆ다!"

그의 약간 왼쪽에, 번쩍이는 은빛 중갑으로 중무장한, 혼자 꽤나 튀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저 녀석이 대장임이 틀림없었다.

"이놈!"

그쪽으로 막 말을 몰아가려던 베아트릭스에게 유목민 족장 혹은 꽤 높은 녀석임에 틀림없는 한 녀석이 창을 위두르며 덤벼들고 있었다. 자신이 입고있는 화려한 망토와 갑주를 보고 덤벼든 녀석임에 틀림없었지만 베아트릭스로서는 녀석과 한가롭게 상대해줄 시간이 없었다.

"썅! 귀찮게!"

녀석과의 상대를 부하에게 넘긴 베아트릭스는 다시 투창을 뽑아들고 그 '은빛 무사'를 찾아나섰다. 다른 지역의 수비군에서 지원병이 오기 전에 대장을 죽여 빨리 녀석들을 와해시키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베아트릭스에게는 '덤벼드는 적' 외에 시간 또한 적이었다. 부장 녀석이 뛰어든 트라티누스 종가 쪽에서는 이미 세찬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심한 지휘관이군,"

베아트릭스의 좋은 눈은 호위하는 유목민들 중간에서 가까스로 말을 제어하며 주변만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 은빛 갑옷의 녀석을 몇초못가 찾아낼 수 있었다. 거울빛 사이트에 가려진 녀석의 표정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고있는 짓을 보아 아마도 놀란 토끼같이 허둥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베아트릭스의 짐작대로라면.

투창을 겨누던 베아트릭스는 순간적으로 녀석이 들고있는 방패에 새겨진 황소 문장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이센 가의 문장임을 깨달은 그는 혹시 페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창을 들고 허우적거리는 저 한심한 꼴로 보아 백전노장이라는 페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단 하나뿐이었다.

어깨를 감싼 사이클롭스가 작동하는 묘한 진동감을 느끼며 베아트릭스가 있는힘껏 자리드를 던졌다.

아메스가 자신을 향해 투창을 겨누고 있는 그 푸른망토의 무서운 녀석을 멀찍이에서 다시 발견한 건 이미 녀석이 사격을 위해 팔을 뒤로 꺾고있을 때였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지만 몸을 피하기는 이미 늦은 후였다.

검은색의 무시무시한 자리드를 향해 아메스는 일단 방패를 치켜들었다. 베테랑 기병인 제네르의 어깨를 탈구시켰던, 아니 장비를 갖추고 있는 지금은 그보다 몇배는 더 강력한 힘으로 날아올 것이 확실했지만 그것이 어느정도의 위력일지는 아메스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 검은 괴물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메스는 눈을 감고 싶은 본능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방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으아악!"

아메스의 앞을 가로막은, 지금까지 아메스를 지켜온 유목민 기병의 두꺼운 팔이 자리드에 꿰뚫리면서 아메스의 방패를 거세게 들이받았다. 유목민의 방패를 꿰뚫고 건장한 전사의 살과 근육마저도 돌파한 강력한 자리드는 아메스의 방패에 갚이 박히고서도 힘이 남는지 그 끝을 떨고 있었다. 거의 말에서 떨어질뻔한 아메스의 흉갑에는 그 끝에 긁힌 깊은 흠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저 망할! 죽일 년!"

자신을 대신해 투창에 찔려 떨어진 기병을 바라 보며 아메스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의 몸과 엉켜버린 방패를 옆에 내던진 아메스가 창을 앞으로 똑바로 세우고 눈앞의 푸른 망토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지휘력이건 자시건, 자신의 창술이 형편없건 말건 별 상관없었다.

"썅! 내손에 죽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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