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4 회: Part 8. 떡갈나무 언덕에 홀로 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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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서부제후지역 수도인 아켐 4번 행성 남극에도 어느덧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 행성에서 유일하게 '눈'을 볼 수 있는 이곳에서는 아직 초겨울에 불과한 시기임에도 작은 눈발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어쩌면 고지대인 이곳이나 그렇지 저지대에서는 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은 셔틀 한 대가 진눈깨비가 내리는 이 남극의 야산 소나무숲 중간에 조용히 착륙하고 있었다. 조종석이 열리면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들어 있었다. 길고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에 검은 무명포, 용 무늬가 새겨진 머플러를 두른 그 남자는 조종석에서 훌쩍 뛰어내려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작은 묘지, 아니 그 옆에 서 있던 긴 갈색머리의 키큰 가디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네놈 그 추악한 손을 당장 떼지 못할까!"
코리온의 추상같은 고함소리에 묘지의 풀을 베어내고 있던 카렐 역시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낫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코리온은 카렐과, 묘지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세워져있는 그의 아르다가 셔틀을 번갈아 노려보며 그답지않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똑바로 서 있었다. 카렐이 고개를 조금 숙여보이며 말했다.
"여기 들렀다가 아카데미로 찾아뵐 예정이었는데.....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이곳에 다시오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코리온의 갈색 눈동자가 그의 격노를 드러내듯 거칠게 꿈틀대고 있었다. 카렐이 한숨을 내쉬며 묘지에서 몇걸음 물러나주었다. 지저분하게 널려있던 주변의 오래된 낙엽들을 한쪽으로 모두 치워낸 이 소박한 봉분에는 반쯤 깎아내다 만 풀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봉분 앞의 검은 비석에는 코리온의 친필로 쓰여진 무덤 주인의 이름과 짤박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너같은 천것이 감히 이 고결한 분의 묘소에 손을 대다니,"
카렐의 코앞에 바싹 다가선 코리온이 카렐의 회색빛 눈동자를 똑바로 올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불쾌하시다면......사과드리겠습니다."
입술을 가볍게 깨문 카렐은 자신이 타고온 아르다가 셔틀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카렐을 거칠게 밀어낸 코리온은 직접 낫을 들고 카렐이 반 쯤 깎아놓은 나머지 풀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카렐은 그런 코리온의 기분을 더이상 다치지 않게 하려는 듯 봉분에서 조금 멀찍이 떨어져 서서 하늘에서 흩날리는 진눈깨비만 멍 하니 올려보고 있었다.
풀을 베어내던 코리온은 조금은 썰렁하던 묘지 뒷켠에 몇 그루의 적송 묘목이 새로 심어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렐의 뒷켠에는 나무를 심는 데 쓰였음직한 삽과 자잘한 도구들, 한 다발의 흰 꽃이 놓여져 있었다.
카렐을 쫓아내고 주페 태자의 묘소를 직접 정리한 코리온은 술 한잔을 그 앞에 올린 채 봉분을 올려보며 차가운 땅바닥에 잠시 말없이 꿇어앉아 있었다. 카렐 역시도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애써 다른곳만을 바라보았다.
한참의 어색함이 지나간 후에 카렐이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황실 묘지에 안모신게 뜻밖이더군요."
"평소에 이분이 원치 않으셨으니."
코리온이 짧게 대답했다.
"이곳을 손보라는 어머님의 부탁도 있으셨고.....조카로서 이곳에 손대는 것이 큰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네 어미? 그리고 네까짓것이 감히 조카라고? 네 모녀의 착각도 대단하구나, 앞으로 너같은 천박한 것이 또다시 이곳 부근에 얼씬대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
코리온이 눈을 무섭게 부릅뜨며 카렐에게 쏘아붙였다.
"......알겠습니다."
깊은 한숨을 푹 내쉰 카렐이 힘없이 묘소에서 돌아섰다. 그제서야 카렐 쪽을 한 번 돌아본 코리온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날 찾아온 이유는?"
"......오라버니와 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날 설득하러 온 건가? 살려달라고?"
"앞의 말은 맞지만 뒤의 말은 부적절하군요."
카렐이 흙묻은 손을 털며 코리온에게 천천히 돌아섰다.
"베흔이 꽤 파격적인 제안을 했을 것을 압니다. 대제학직이나 뭐 그런 것이었겠죠."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주페 태자에게 올렸던 술잔을 자신의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술을 삼키는 그의 굳은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조차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전 그런 귀가 솔깃한 제안을 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유학자들의 순수한 믿음을 통치수단으로 악용하지 않겠다는 약속밖에는."
베흔의 의도를 이미 간파한 듯 한 카렐의 목소리에 코리온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원하는 건 네 어미와 그 더러운 씨인 네년의 피로 이분의 한맺힌 묘비를 닦아드리는 것 뿐이다."
술 한모금을 더 들이킨 코리온은 잔을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카렐이 갑자기 코리온을 향해 바닥에 털석 꿇어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오라버니와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옛 원한은 이제....."
낮게 깔린 채 파르르 떨리고 있는 카렐의 목소리는 처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코리온은 주페 태자의 묘소를 쓰다듬으며 여전히 쌀쌀맞게 대답했다.
"태자저하의 묘소 앞에서 지금 그런 애원이 내게 통하리라 생각하나?"
"더 큰 비극을 피할 수 있다면 애원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못하겠습니까."
"다시말하지만 난 네년과 네 어미의 피가 필요해."
묵묵히 고개를 숙인 카렐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코리온이 문득 돌아본 카렐은 허리에 아무 무기도 지니고있지 않았다.
"이제 날 죽여야겠지? 남부 녀석들 손에서 날 구해준 은혜에도 전혀 감동받지도 않았고, 뭐 하나 네 계산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으니......태자저하 곁에서 죽을 수 있다니 정말 영광이군."
"제가 지키고 싶은 건 죽어도 서러울것 없는 제가 아니고 복수심에 멍들어가고 있으신 오라버니입니다."
코리온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카렐을 노려보았다.
"듣자하니 가소롭기가 짝이없구나. 천한 네년이 감히 날 지켜? 왜? 몰락할때가 다되어가니 판단력까지 잃어버렸구나?"
"전 생각하시듯 그렇게 쉽게 몰락하지는 않을겁니다."
카렐의 회색눈이 바닥에 떨어지는 진눈깨비들을 반사시키며 특유의 무지개빛 톤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깔려있는 묘한 '힘'에 코리온은 내심 조금 놀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또다시 무능한 황제로 제국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제위전쟁으로 유학자들의 피를 흘리게 되는 일은 지난 4차 혼란기 한번으로 족합니다. 전 베흔처럼 어마어마한 감투나 재물을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유학자들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제국을 만들 것이옵니다."
"난 저 황궁의 무능한 무리를 황제로 만들어주자는 것이 아니고 엄한 교리가 주체가 되어 이끌어가는 세상를 만들고자 함이다. 너나 황실의 무리나 내겐 모두 적일 뿐이다. 그리고 네가 먼저 목표가 된 것 뿐이다."
코리온이 무덤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단호하게 대답하자 카렐이 고개를 번쩍 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왜 그런 식으로 복수심을 합리화시키려 하십니까? 여동생을 죽게 만든 장태자와도 기꺼이 협상을 시도하셨던 주페 태자께서도 그러셨습니까?
"그분은 그것 때문에 실패하셨다."
코리온이 남은 술잔을 한번에 확 들이키며 대답했다.
"아뇨, 그게 아니어도 실패하셨을 겁니다. 왜 알면서도 인정치 않으십니까!"
"네가 그때 상황에 관해서 감히 뭘 안다고! 넌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
코리온이 자신에게 언성을 높이는 카렐을 돌아보며 그답지않게 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 역시 기죽지않은 채 다시 맞받아쳤다.
"주페 태자께선 이미 그걸 알고계셨죠? 장태자가 모디아크 공주의 군대를 전멸시키는 자충수를 놓고, 태자가 자살하면서 상황이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죠. 그 바보짓 덕택에 경계심을 품은 근위대가 북부와 손잡은 오넬론 태자쪽으로 기울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장태자가 근위대에 뒤늦게 화친을 청하면서 그 조건이 뭐였죠? 협상을 빌미로 동생 주페 태자를 끌어들여 넘길테니 다시 자신과 손잡자는 것이었죠! 당시에 세력이 있던 3명의 태자중에 베흔이 가장 꺼리던 인물이 바로 주페 태자셨으니까!"
"이....이....."
코리온이 얼굴이 어느새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소식을 입수하고 당황한 오넬론 태자도 근위대에 똑같은 제안을 했다는 겁니다. 정말 황당한 상황이었죠. 주페 태자는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계셨을겁니다. 결국......어느 한쪽과의 협상을 선택하면, 아니, 어느 한쪽의 손에 의해 근위대에 넘겨지면 태자들끼리 싸우는 큰 희생 없이 그쪽이 근위대의 지원을 받으며 황제가 될 수 있었겠죠. 물론 형제의 목숨을 댓가로 말이죠."
"그땐......."
코리온이 묘비를 더듬거리며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카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주페 태자는 당신이 황제를 택할 수 있게 된 그 상황을 차라리 다행스럽게 여기셨죠. 그리고......무능한 오넬론 태자 대신 그나마 조금 나은 형 로노 태자 손에 의해 근위대에 넘겨지는 것을 택하셨죠. 새 황제가 될 장태자가 윰 포고령에 열 개의 조항을 추가시켜 주고, 황제가 되더라도 동생 오넬론을 죽이지 않는 것이 주페 태자의 목숨값이었죠. 그리고......마지막으로 혼자 남을 오라버니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요구까지 말입니다."
묘비에 얼굴을 기댄 코리온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오라버니는 그걸 미리 아셨겠죠? 그분은 제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신 겁니다! 결사적으로 말리는 오라버니를 학교 감옥에 가두어버리고 새벽에 서둘러 떠나신 건 그때문이었죠. 안그런가요?"
꿇어앉아있던 코리온이 천천히 카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날카로운 갈색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공허한 빛을 뿜고 있었다.
"네가.....그걸 어떻게 다 알고있지?"
코리온의 질문에 카렐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제네르를 왜 버리셨습니까? 그때까지 오라버니와 태자저하의 둘도없는 충실한 생도였던 제네르를 퇴학시키고, 포로가 된 후에 몸값도 지불하지 않고 수용소에서 죽게 놔두신 건 무엇때문이시죠?"
"......제네르 그자에게 들었나?"
"그분의 죽음에 따지고보면 오라버니 책임도 있었다는 것을 그리도 인정하기 싫으셨습니까?"
"닥치지 못해!"
코리온의 큰 목소리가 이 낮은 야산자락을 순간 쩌렁 하며 울렸다.
축 처져버린 코리온은 주페 태자의 봉분에 얇게 쌓인 눈을 털어내며 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발이 어느새 꽤 굵어져 있었다. 검은 무명포만 걸친 코리온의 검은 머리와 어깨에도 하얗게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 카렐은 그의 어깨에 얹힌 눈을 털어내고는 자기가 입고있던 두꺼운 모직망토를 벗어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카렐의 따뜻한 체온과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그 망토를 어루만지던 코리온은 굵은 눈발이 떨어지는 하늘을 멍 하니 올려보았다.
"네 말이 맞아."
코리온이 갑자기 피익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분은 이미 알고계셨지. 알면서도 가셨어. 내게 유서까지 남겨두시고.....하지만 네 말마따나 근위대와 추악한 거래를 한 로노 태자도 결국 배신을 당하고 말더군. 그분이 며칠동안 고심해 준비하셨던 10개 조항은 결국 세상 빛도 보지 못했지.....그리고 태자들은 결국 다 죽었지."
어느새 눈보라로 변해버린 거센 바람에 코리온의 뺨이 붉게 변해 있었다. 카렐은 봉분 앞에 침통한 표정으로 꿇어앉아있는 코리온의 뒤에 말없이 서서 그의 등뒤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다."
코리온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하십시오."
"그때......오넬론 태자 쪽에서......아니, 카파키 가 쪽에서 태자저하께 제시했던 협상조건은 무엇인지 혹시 알고있나?"
코리온의 뜻밖의 질문에 카렐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코리온은 너무나 간절한 눈빛으로 뒤에 선 카렐을 올려보고 있었다.
"로노 태자의 제안은 협상에 응하면 윰 포고령에 태자저하의 뜻을 일부 반영해준다는 것이었지. 북부의 제안은 도대체 뭐였지?"
추운 날씨 때문인지,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지 코리온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망설이던 카렐이 결국 입을 열었다.
"협상에 응해주면......형식적으로만 억류해서.....근위대에 넘기지 않고.....이후 사면해서 남극성당 대제학을 수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파격적이었죠......그런데도......당신을 배신하고 죽음을 요구한 장태자에게로 가셨습니다. 협상사자로 가셨던 어머니께.....명분없는 세력이 제위에 오른 선례는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더군요."
차가운 눈바닥에 이마를 들이댄 코리온의 넓은 어깨가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긴 눈썹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에 쌓인 흰 눈을 녹여갔다.
"못난사람 같으니.....알면서 죽을길만 골라가다니....."
카렐은 흐느끼는 코리온의 뒤에 말없이 서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내내 그대로 꼼짝도 않던 코리온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거의 탈진한 표정으로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카렐이 덮어준 모직 망토 위에도 눈이 잔뜩 쌓여있었다. 주페 태자가 살 수도 있는 길들을 모두 버리고 죽을 길을 찾아갔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충혈된 갈색빛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카렐의 물음에 아무 대답이 없던 코리온은 긴 검은머리를 흩날리며 옆으로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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