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81화 (181/1,132)

< -- 181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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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루사 평원은 말이 행정수도지 사실 좀 웃긴 곳이야."

플라칼 가 사령관 헤즈 경이 홀로그램을 작동시키며 입을 열었다. 마랄루 시를 수중에 넣은지 겨우 사흘만에 다시 대공세를 준비한다는 소식에 헤즈의 굼뜬 성격을 잘 아는 지휘관들은 '웬일인가'하고 있었다. 트라티누스 가의 행정수도인 루사 평원은 가문 영지의 정보망의 허브이기도 했고 물류의 중심지였던 덕에 이곳의 침략자라면 반드시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2차 혼란기 당시에도 이곳은 주페 태자가 이끄는 35만의 남-서부 연합군과 오르마즈의 23만 북-동부 연합군이 그 40년간의 전쟁의 승패를 가른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했다.

"트라티누스 가 영지에 워낙에 유목민이 많다보니까 아예 유목민들 제일 많이 사는 곳 중간에 행정수도라고 만들어놓은건데, 그 주변은 되게 썰렁해. 인구도 마랄루 시 절반이 될동말동이고. 사방으로 뻥 뚫린데다가 동서남북중에 적어도 두 방향으로는 지평선까지 보일 정도니까. 아마 처음에 만들었을때는 동부 기병새끼들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일부러 그런데다 잡은걸거야."

"양쪽 모두 매복이나 기습은 어렵겠군요."

베아트릭스가 홀로그램을 살피며 말했다.

"오호라, 한바탕 힘대결이라."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이 여느때처럼 히죽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핏 가벼워보이는 그의 모습에 표정을 조금 찡그렸던 기사단 사령관 히르직스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다히르 녀석 후임자가 누군지 밝혀졌습니까?"

"글쎄, 그게 의문이야. 이번에 결국 샤자한 놈이 직접 사령관으로 나선 건 알겠는데, 글쎄, 기병대를 누가 이끌지는......최고제후가 설마 직접 기병대를 이끌지는 않을테고?"

헤즈가 홀로그램을 빙빙 돌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거나 이번 전투가 우리로서는 샤레이 행성계를 쉽게 차지하느냐 못하느냐의 분수령이 될거야. 양쪽 다 총력을 다하는 전면전에 될테니 한쪽은 치명타를 입을수밖에 없겠지. 물론 저네들이 되겠지만."

헤즈 경이 싱글거리며 주머니에 있던 과자를 꺼내씹자 히르직스가 또한번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눈에 도무지 군인다운면이라고는 전혀 없는 저 겁쟁이 뚱땡이녀석이 저 지위에 있는것도 신통할뿐더러 지금까지 한번도 패전하지않은것도 정말로 신통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의 생각엔 지금까지의 승전은 순전히 잘 훈련된 플라칼 가 제후군의 탄탄한 기초체력과 우수한 지휘관들 때문일 뿐 저 뚱돼지녀석의 전략전술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령관이었다면 이미 샤레이 정도는 다 집어삼키고 요동으로 진격하고있을 것이 뻔하다며 혼자 상상에 잠겨있었다.

"결국은 부대의 지구력이 모든 걸 결정하겠군요."

베아트릭스의 한마디에 모두들 수긍하고 있었다.

"그쪽으론 우리를 상대할 놈들이 없지."

케세크 경이 여전히 히죽거리며 큰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큰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현실에 어느정도 근접한것도 사실이었다. 원래가 일당백인 근위대 보병이나 많지않은 서부 장갑보병대를 제외하면 견고한 남부 중장보병들을 상대할만한 정규군 보병부대는 현재로는 없다는 것이 틀린말도 아니었다. 물론 '저 잘난' 중장보병녀석들도 지난번에 바툴 가 경기병에 깨진 걸 생각해보면 히르직스 자존심에 저런 큰소리를 그냥 넘어가지 않을성도 싶었지만 3기사단 역시 녀석들에게 깨진 것으로 한바탕 반격을 당할 것이 뻔하기에 일단 참기로 했다.

"오늘 본가에서 기사단 지원자 1천 1백하고 경보병단에 4천이 증원되어올테니 루사 공략때는 지난번과 별다를바 없는 전력으로 다시 싸우게 될 거야. 중보병단에도 한 8백쯤 새로 오는 것 같던데? 보름 후면 훈련끝난 신병들이 한무더기 올테니까 그때까지만 이놈들 데리고 해봐."

증원대상에서 경기병단만 빠져있자 베아트릭스가 입가를 조금 씰룩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인기없는 병종 신세에 누굴 탓할 노릇도 아니었지만 경기병단에서 전사자와 부상자는 이미 5백여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헤즈에게 이미 몇번이나 설명했지만 기사단 지원자 중 일부를 회유 혹은 협박해서 경기병단으로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결국 물건너간 모양이었다.

"내일아침 9시니까 오늘은 마지막으로 편하게 쉬도록 해."

목과 머리의 상처가 채 다 낫기도 전에 계속된 강행군과 전투로 베아트릭스도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피곤한 표정으로 통제소 회의실을 빠져나온 베아트릭스는 요새 방벽 위에 우두커니 서서 해가 저물어가는 동부 초원의 아름다운 석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

바툴 가 종장 카이두 경의 4번째 부인에게서 난 13번째 딸인 어머니는 원래 아버지인 종장의 곁에서 근위 궁기병을 이끌던 촉망받는 지휘관이었다. 그렇게 탈라스의 평원과 계곡을 누비던 활달한 어머니가 이곳 남부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감옥이나 다름없는 고통스런 삶을 감내할수밖에 없는 건 순전히 아버지와 베아트릭스 자신 때문이었다.

베아트릭스도 아버지의 전사 후, 향수에 괴로워하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 탈라스로 돌아가기 위해 몇번이나 전역을 신청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사의 충원을 지상과제로 삼고있는 이 괴상한 가문에서 어차피 가능하리라 예상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거절될것이 뻔한 전역신청을 거듭해 넣은 건 이 위험천만한 군대에 딸을 놔둔 채 고향으로 편히 돌아갈 수 없다는 어머니의 쓸데없는 희망, 아니 망상에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나마도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이미 몇년 전에 미쳐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머니에서 작은 홀로그램 녹화기를 꺼내든 베아트릭스는 이 아름다운 동부의 석양과 넓은 초원, 그리고 '아직은' 그럭저럭 건재한 자신의 모습을 차례대로 그 안에 담았다. 그는 거의 다 녹화한 후에야 목과 얼굴에 한 드레싱을 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전장에서 있어보신 어머니도 그냥 전장에서 흔히 입을 수 있는 작은 상처 정도로 여기실테니.

녹화기에서 칩을 꺼내든 베아트릭스는 그것을 봉투에 정성스럽게 집어넣고 비엔 6번 행성의 집 주소를 또박또박 적어넣었다. 아마도 자신이 루사 평원 공략까지 다 마치고 난 이후가 될 4, 5일 정도면 보안검열도 통과하고 집에서 염려하고 계실 어머니의 손에 도착할 것이 확실했다.

고개를 치켜든 베아트릭스는 멀리 보이는 붉은 지평선을 다시한번 확인하듯 바라보고는 자신의 막사가 있는 요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네자드한테 안부전해주마. 정말 기뻐할거다."

못쓰게 된 왼팔 대신 오른팔만으로 제네르를 다정하게 껴안아준 다히르 경이 셔틀에 오르기 직전에 웃으며 말했다. 뜨끔 한 제네르가 옆에 선 시로의 눈치를 얼른 보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시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녀석, 여기에 그렇게 따라오고 싶어하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지원장교로라도 데려올걸 그랬나."

"네자드 경께서는 가문 행정일로도 바쁘시니 이곳은 제게 남겨두시고 돌아가셔서 몸조리에 신경쓰십시오."

"전쟁이 끝나서 하루라도 빨리 널 새 며느리로 맞았으면 좋겠구나."

제네르의 표정에서 이래저래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다히르 경을 태운 요동으로의 귀환셔틀이 완전히 공중으로 사라지자 사탕수수를 질겅거리고 씹던 네피가 제네르의 어깨를 툭 쳤다.

"캬, 누군 운도 더럽게 좋아. 이 전쟁통에 끝내주는 신랑감까지 얻고. 내 허전한 겨드랑이는 누가 채워줄꼬."

"쳇, 그렇게 품위없이 굴어서 참이나 여자가 꼬이겠네요."

자이납이 혀를 차며 머리에 두른 터반자락을 어루만지자 우베가 킥킥거리며 자이납의 옆구리를 확 꼬집었다.

"오호, 품위? 그쪽은 너도 별 할말없는 것 같은데?"

"뭔소리예요? 나도 리쿠 학장님 앞에만 가면 귀부인처럼 세련되어질 거라구요."

"그러세요? 그래서 이번엔 속옷훔치시게요? 변태아가씨?"

평소처럼 여전히 악의없이 투닥거리는 우베와 자이납 앞에서 시무룩하게 서 있는 제네르의 어깨를 누군가가 부드럽게 돌려안았다.

"다 좋게 풀릴거야."

카렐의 목소리에 제네르가 마지못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제 어쩌죠?"

제네르가 카렐에게만 들릴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깨를 마주한 카렐과 제네르는 사람이 없는 길을 따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기다리는밖에. 혹시 아나, 자네 기대대로 네자드 경 앞에 끝내주는 미인이 짠 하고 나타날지?"

"전하께서 뒷구멍에서 미인계라도 좀 써 주시죠?"

제네르가 기분이 조금 풀린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후훗, 그런가? 아니면......내가 막강한 전제황제가 되고, 슈트란 가가 찍소리도 못할정도로 끝내주는 위치에 자넬 올려줘서, 두 사람 다 남편으로 맞게 해 줄까? 아니, 내친김에 터프한 발리까지 세명 다 남편으로 맞지 뭐. 두셋 정도야, 고관으로서 기본 예의지. 부총리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겠지?"

"푸하하, 그거 정말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네요?"

제네르가 모처럼 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아, 슬슬 루사 평원으로 출발해야할테니 준비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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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내기' 페로의 지휘력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이 한낱 기우였음이 드러났을 때, 제국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아닌 베흔이었다. 정규군 20여만은 견제와 주요지역 경비에만 배치하고, 가디언들만으로 구성된 소규모 타격부대로 적진을 기습하는 변화된 방법으로 1년은 족히 넘게 걸리리라 예상했던 반군 잔당소탕을 단 7달만에 사실상 마무리한 페로는 황궁에서의 성대한 개선 기념행사 석상에서 이미 자신이 베흔과 맞먹는 유명인의 반열에 올랐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페로에게 수여된 '부총리' 직책은 근위대장 베흔과 동격의 품계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그는 공식석상에서 더이상 베흔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의 배후에 후계 문제로 베흔과 사사건건 충돌을 벌이고 있는 실리페 베로 황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둘의 후계구도에 대한 생각은 근본적으로 합의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극명하게 대조적이었다.

이미 어디론가 잠적해버린 1차 후계권 지명자 수우를 찾아내서 후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베흔과는 달리, 황후는 어떤 식으로건 자신이 직접 낳은 태자로 제위를 잇겠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358년인가에는 실제로 실리페 황후가 여섯번째 태자를 포태하기도 했었지만 무슨 이유엔지 4개월만에 유산되어버렸고, 그 사실에 심하게 상심한 황후는 몇달동안을 외부인과 거의 접촉도 없이 칩거한 일도 있었다.

그렇게 베흔과 대립하고 있는 황후가 무섭게 성장하는 신흥 실력자 페로에게 눈을 돌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페로는 황후의 보이지않는 손에 의한 자신의 지위상승이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성일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실리페 황후와 베흔의 관계는 계속 동지도, 계속 원수도 아닌, 그때그때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를 반복하는 복잡미묘한 그것이었다. 게다가 페로가 판단한 실리페 황후는 나름대로 꽤 똑똑한 인물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페로가 믿고 기댈만큼 큰 인물---세네피스 황후처럼 제국을 쥐고 흔들며 베흔과 당당히 맞설 정도로---은 결코 아니었고, 차갑기로 말하면 덜떨어지는 딸이나 사위 하나 정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버릴수도 있음직한 인물이었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부마위를 통해 내심 차기 제위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페로와, 페로를 자신의 친자가 제위를 잇게 하는 '사냥개'정도로 이용해먹으려는 실리페 황후와의 지향점 자체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똑똑한 페로는 황후에게 그렇게 이용되고 난 자신은 황권강화를 위한 제1번 제거대상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러다보니 페로는 일단 실리페 황후와 손을 잡고, 베흔을 물리친 후에 나중에 황후와 '최종결전'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베흔과 실리페 황후 사이의 알력을 일단은 느긋하게 구경하다가 이길만한 쪽에 적당히 편승할지를 저울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실리페 황후가 페로에게 끊임없이 부마위를 받아들여줄 것을 간접적으로 요구해오고 있었지만 페로가 이핑게 저핑게를 대가며 시간을 벌고있는 것도 이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자신의 결혼문제는 물론이었고 실리페 황후와 근위대 사이의 줄타기로 이래저래 골머리를 썩고있던 페로에게 유일한 낙은 그 해가 바로 자신의 110세 되는 때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근위대 쪽에서 '모종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페로에게 베흔이 보내온 '특별한 가디언의 데뷔식 초대'는 정신이 퍼뜩 들게 하는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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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레이 6번 행성의 북반구 저위도에 위치한 행정수도 루사 평원은 '웃긴 곳'이라는 헤즈 경의 말마따나 땅을 군데군데 뒤덮고있는 푸른 풀들만 아니라면 끝없는 모래사막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방으로 뻥 뚫린, '가장 동부다운' 특이한 곳이었다. 이곳 유목민들의 주요 교통로 한중간에 위치한 이곳에는 2천만여 트라티누스 가 영지민들을 통치하는 중앙청사와 정보 및 통신센터, 시장이 자리잡고 있는 요지였지만 끊임없이 떠도는 유목민들의 특성상 정작 고정적으로 거주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결국 모든것이 드러날수밖에 없는 이곳은 공격하는 측이나 수비하는 측이나 전술구사에 있어 엔간한 '잔꾀'를 용납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동부 기병들이 제국 전체에 명성을 날리던 2차 혼란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다른지역 제후들에게는 '바람같이 빠른 동부기병' 들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는 최악의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동부의 기병전력 몰락 이후로는 도리어 가장 방어하기 어려운 골칫덩이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2차 혼란기때가 생각나는군요."

병력 수송선에서 내려선 샤자한 공이 멀찍이 보이는 얕으막한 언덕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과 함께 카렐에게 중얼거렸다. 슈트란 가의 맹호 문장이 새겨진 회색빛 갑옷을 차려입은 샤자한 공은 그 크지않은 체격에 어울릴까 싶은 위협적인 크기의 긴 관도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그때도 여기서 근위대와 결탁한 남-서부 연합군하고 맞붙었는데 양쪽 군세가 정말로 대단했죠. 그래도 근위대만 아니라면 우리가 충분히 이길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샤자한 공이 카렐이 쥐고있는 오르마즈의 창을 힐끔 돌아보며 다시한번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때 바로 저 언덕 위에서 양측 일기투로 시작되었죠. 그때 그쪽에서 GOE 사령관인가 하는 가디언 녀석이 적 보병사령관 마누엘 델루지 놈 갑주를 입고 그 행세를 하면서 달려나왔죠. 거기 속은 오르마즈 경이 맞서서 나갔는데 나중에 그 사실이 드러났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지.....후훗, 그런데도 오르마즈 경이 이긴 건 정말로 믿기지않을 일이었죠. 이 창이 그 때 오르마즈 경이 그 가디언놈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었죠."

"그 유명한 '가짜 일기투 사건' 말이군요."

카렐이 자신의 창을 들어보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랬어도 정작 전투에서 진 건 할말이 없지만 천하무적이라고 믿었던 우리 십만 기병들이 베흔이 이끄는 가디언 기병대 천 명에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할줄 누가알았겠습니까. 북부 보병대를 이끌던 오르마즈 경한테 나중에까지 두고두고 면목이 없었죠."

나란히 선 둘은 비장한 표정으로 병력수송선에서 내려서고 있는 동부 기병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밀리면 동부 제2의 중심지 샤레이 행성계는 사실상 플라칼 가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수도인 요동 행성계도 고스란히 이들의 사정권 안에 드는 셈이었다.

중갑주를 차려입고 기병들을 독려하고 있는 토로 경을 바라보던 카렐이 조금은 걱정스런 투로 말을 건넸다.

"유능하고 용맹하지만 자존심이 세서 가끔 돌발행동을 하기도 하는 무장이니 샤자한 공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 주십시오."

"몇번 밑에 두고 싸워보아서 잘 알고있습니다."

태연하게 대답한 샤자한 공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는 누렇게 변해있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하마탄이 오는군요. 참모들 말로는 곧 우기가 올거라더니 올해 마지막 하마탄인가봅니다."

동부 초원과 사막의 살인적인 모래폭풍 하마탄은 제국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제대로된 바다나 큰 강도 없는 이곳에서 초원을 기름지게 하는 고마운 존재라고는 하지만 우기 직전 한두달동안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이 끔찍한 모래바람은 최소한 당하는 동안에는 '고마움' 따위는 깡그리 잊어버리게 하기에 충분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죠."

카렐은 검고 윤기나는 몸을 자랑하는 애마 시알피를 몰고 기병대 선두쪽으로 걸었다. 직접 중군 선두로 나아가는 그 모습에 샤자한 공이 약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보시면 아실 겁니다."

태연하게 창을 어깨에 걸친 카렐은 적들의 수송선이 몰려올 남쪽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랄루의 요새에서 10대의 적 병력수송선이 출발했다는 정보를 접한지 30여분이 지난 후였으니 조만간 녀석들의 수송선이 지평선 너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 확실했다.

이런 뻥 뚫린 곳에서 어차피 양쪽 다 뭐하나 숨길수도 없으니 녀석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이번엔 아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착륙해 이쪽의 기습을 막고 안전하게 진형을 짜고 행군해올것이 확실했다. 결국 양쪽 다 제대로된 힘대결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카렐은 진형을 짜고 있는 동부제후군쪽을 돌아보았다. 연합군은 동부제후군의 정석에 가까운 그 진형 그대로, 선두의 8천여 경기병과 2열의 5천여 중장기병, 3열의 가장 약한 보병 3만여가 지키고 서 있었다. 보병이 기병 바로 뒤에 서는 포진이 다른 지역 사람들 눈에는 얼핏 어색하기까지 한 건 사실이었지만 단독작전능력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동부보병들은 기병을 도와 '마무리'를 하는 보조부대 역할 이상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야전에 참가한 만여기의 유목민 용병대가 페로의 지휘로 연합군의 양익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우익 후방에는 슈로 기사단이 적의 약점을 찾아 돌격해들어가기 위한 예비대로 숨어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주력군의 최전방에는 카이두가 이끄는 2천여 바툴 가 특수부대와 4천의 탈라스계 유목민 궁기병들이 헐겁게 늘어서서 전위대를 이루고 있었다.

붉은 말에 오른 페로가 기병대 선두에 있는 카렐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3만에 가까운 기병들이 선두를 이루고있는만큼 전열의 길이는 이 평원에서도 반대편 끝이 거의 보이지 않을만큼 길었다. 그 좌군 끝에서 한참을 달려왔을 페로는 싸움은 시작하지도 않은 벌써부터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다. 페로는 자신의 화극으로 카렐의 창끝을 툭툭 치며 말을 건넸다.

"이제 드디어 최정예멤버 총출동이군."

카렐이 페로 어깨의 먼지를 털어주며 웃어보였다.

"네피하고 시로는 보병대쪽에 있고......그런데 자이납 이녀석은 또 어디갔어? 도대체 그놈은 어떻게 전투할때마다 행방불명이야?"

"그녀석 아까 내 옆에서 보이다말다 하던데? 그 시커먼 머리쓰개 덕택에 눈에 확 띄잖아."

"하여간, 못말릴 녀석이군,"

페로의 대답에 카렐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렐이 페로의 어깨를 힘있게 잡으며 작게 말했다.

"제발 몸조심해. 지난번에 루쿠스탄에서같이 바보짓하지 말고."

"남말하지 마. 지가 제일 위험한 자리는 맡았으면서."

카렐에게 입을 삐죽거려보인 페로는 투구를 꾹 눌러쓰고는 원래 있던 좌군 쪽으로 다시 말을 몰아 돌아가고 있었다. 족히 몇분은 걸렸을 거리를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달려온 페로의 뒷모습을 보며 카렐이 웃음짓고 있었다.

중장기병대의 중심에 있는 샤자한 공 직속 최정예 근위기병대 천여기는 이미 쐐기꼴 진형을 이루고 돌격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카렐의 희한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갑주도 전혀 입지 않은 채 검은 수트에 비단튜닉, 망토, 할룩스와 연결된 스코프만 달랑 눈에 낀 시커멓고 낯선 가디언의 손에는 황실 문장의 작은 배너가 달린 역시 시커멓고 위협적인 큰 창이 들려있었다.

카렐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남쪽 하늘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스코프에도 적 수송선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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