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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82화 (182/1,132)

< -- 182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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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예상대로군."

플라칼 가 사령관 헤즈 경이 스캐너에 나타나는 동부 제후군의 모습을 바라보며 별것 아니라는 듯 중얼거리자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또 기병선두로 돌격해오시겠다? 지난번에 마랄루에서 당한걸로도 부족했나보지?"

"녀석들한테 믿을게 기병밖에 더있겠소."

히르직스가 어깨에 걸친 망토자락을 단정히 바로잡으며 대꾸했다.

"전방하고 양익에 유목민들 아닙니까?"

굳은 표정의 베아트릭스가 한마디 덧붙이자 케세크가 성의없이 되물었다.

"저놈들이야? 하고있는 꼴들 하고는......"

"선두는 탈라스계 유목민 궁기병 같습니다. 족히 6천은 되어보이는군요."

'궁기병 6천'이라는 베아트릭스의 대답에 생각없이 있던 히르직스가 순간적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사실에 놀라고 있는 건 히르직스와 베아트릭스 단 둘 뿐이었다.

스캐너 조사결과를 바쁘게 분석한 참모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적 사령부 위치 확인되었습니다. 보병대 중군 후방에 함께 있습니다. 페로 자이센 총리는 확인되지 않고 있고.....지난번 3기사단을 공격했던 바툴 가 궁기병대가 전위대 선봉에서 포착되었습니다."

베아트릭스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시는 모습을 히르직스가 즐기듯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분석에 바쁜 그들의 발밑으로 수송선이 착륙하는 가벼운 충격이 전해져왔다.

이번의 플라칼 가의 진형 역시 남부제후군 특유의 '견고한 돌파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최적화된 '전형'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력군인 5만 5천여 중장보병이 중심에, 양익의 만오천 기사단이 배치되고 중장보병 전방에 적 전위부대 교란을 위한 경기병과 기병돌격을 막기 위한 경보병 장창수 만여명이 포진한 것은 지난번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경보병을 전방에 세우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병도 많은데다가 전위대인 적 궁기병 6천의 전력을 고려하면 차라리 경보병은 기병대와 함께 측면에서......"

베아트릭스가 경보병을 또한번 소모품으로 사용하려는 헤즈의 계획에 처음으로 반기를 들고 나서고 있었다. 히르직스 역시 베아트릭스의 생각에 동감이었지만 일단은 돌아가는 모양을 보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헤즈 사령관은 자신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기병단장의 당돌함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목민들한테 당한 걸 그런 식으로 합리화시킬려고 그러나?"

헤즈 경이 지난번의 실패를 들먹거리자 순간적으로 흥분한 베아트릭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 만 명의 놈들 다 쓰러지기 전에 우리 중보병단이 이미 적 기병과 맞닥뜨리고 있을거야. 그땐 궁기병이 육천이든 육만이든 별 의미가 없다구,"

싸우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 타이밍에 눈치없이 끼어들어 베아트릭스를 몰아붙인 건 다름아닌 중보병단장 케세크 경이었다.

"그 전에 경보병대가 먼저 무너질수도 있습니다! 지금 경보병대의 절반이 이번에 처음 배치된 신병입니다."

"닥치라구, 지금껏 우리 플라칼 가 보병대가 기병대에 놀라 내뺀적은 한번도 없었어!"

케세크 경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정작 '소모품' 신세가 된 경보병단장 글라토프 장군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물론 가문의 사생아인 그가 함부로 끼어들 자리도 되지 못했다. 케세크 경을 한 번 째려본 베아트릭스는 말없이 휙 돌아서서 자신의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하여간, 동부 잡종년 주제에 시건방지긴,"

케세크 경의 악담을 못들은 척 하며 베아트릭스는 중군 선두인 경보병 바로 후열의 자신의 부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 전투의 첫머리에서 자신과 외할아버지가 맞붙어야 한다는 사실이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 문제에 있어서는 며칠 전부터 어차피 마음을 다잡아오고 있었다.

"양쪽 패를 다 내보이고 하는 게임도 볼만하군. 아니, 다는 아니고 대부분이라는 게 맞으려나?"

말을 몰고 전위대로 다가온 카렐이 수송선에서 내려서고 있는 플라칼 가 제후군들을 돌아보며 궁기병대를 맡은 카이두에게 말을 건넸다. 적들 역시 워낙 잘 훈련된 병사들인만큼 눈 깜짝할새 위치를 잡아가고 있었다.

카렐에게 웃음지어보인 카이두 경이 쥐고있던 대사를 번쩍 치켜들자 바툴 가 기수를 맡고 있는 그의 장남 다얀이 탈라스 지역의 문장과 바툴 가의 문장 두 개가 달린 큰 기를 공중에 높이 치켜들었다. 그와함께 6천여 유목민 궁기병들이 일제히 일렬로 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초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카이두의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6천의 궁기병들이 돌진을 시작하면서, '루사의 회전'으로 알려질 큰 전투가 개시되고 있었다.

"저놈의 기병들 이젠 진절머리나는군, 게다가 이번엔 야만족들까지?"

헤즈 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치고빠지는 적들의 투창공격을 얌전히 맞아주고 있을수도 없으니 맞돌진하는수밖에 없었다. 큰 방패와 장창수를 포진한 '투창받이' 경보병들을 선두로 9만여 플라칼 가 제후군들도 속보로 일제히 전진을 시작했다.

1선 경보병들의 0.5스타디아정도 후열에서 궁기병들을 이끌고 있던 베아트릭스는 적 궁기병 대열의 선두에서 보이는 외가의 큰 깃발의 모습에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을 애써 다잡고 있었다. 어쨌든 자신은 플라칼 가 제후군의 장군 신분이었다. 약 10스타디아 정도 떨어진 적 보병대 본진까지는 잘 훈련된 플라칼 가 중보병의 걸음, 아니 달리기로 5, 6분 정도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그 전에 적들 역시 돌격을 개시해올것을 생각해보면 실제로 투창공격을 감내하며 돌격해야 할 시간은 3, 4분 정도가 고작일 터였다.

"궁기병 공격준비!"

적당한 거리가 가까와오자 남부의 천오백여 궁기병들이 베아트릭스의 명령에 일제히 투창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이쪽 보병을 공격하는 적의 궁기병은 무려 6천여명이었고, 빠른 궁기병들에 대한 자신들의 공격은 경보병들의 엄호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충분한 속도를 받기 위해 베아트릭스의 궁기병들이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공격!"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쪽에서 날린 천 오백발의 투창과 상대방에서 날린 육천여발의 투창이 동시에 공중으로 치켜오르고 있었다. 그순간 베아트릭스는 선두에서 달려오는 외할아버지 카이두와 깃발을 든 외숙부 다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또한번의 투창공격이 공중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수백의 경보병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두 번의 공격을 마친 적 궁기병들이 서둘러 뒤로 빠지고 있었고, 그새 방패에 박힌 적의 걸르적거리는 투창을 도끼로 잽싸게 잘라내는 나름대로 똘똘한 경보병녀석들도 보였다.

'창과 방패의 장벽'을 쌓고있는 1선의 이들 경보병들은 6천이나 되는 적 유목민 궁기병들이 날리는 그 무시무시한 공격에 차례대로 쓰러지고 있었지만 등뒤를 지키는 참수대들의 철퇴 때문에 아무도 물러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의 눈에는 그들 중 신병으로 보이는 상당수의 녀석들이 공포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종종, 아니 꽤 자주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안좋은데,"

얼굴을 찡그린 베아트릭스가 옆에 선 부장 루코프를 문득 돌아보았다. 저 경보병들은 이대로 계속 나가느니 적 투창이 자신의 몸의 적당히 덜 치명적인 곳에 '운좋게' 명중해서 합법적으로 이 대열을 이탈하기만 바라고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정도의 인내심을 갖지 못한 두셋의 경보병들이 대열에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다가 참수대의 철퇴에 머리를 얻어맞으며 그 끔찍한 모습을 전우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베아트릭스의 앞으로도 겁에질린 경보병 한 명이 운좋게 참수대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딜!"

대뜸 칼을 뽑아든 베아트릭스가 즉시 말을 몰아 달려가 그 도망병의 목을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대열을 무단이탈한 아군병사를 죽이는 것은 소속을 떠나 지휘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이기도 했다.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는 경보병들을 자리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도저히 다른 수가 없었다. 참수대 뿐만이 아닌, 그 후열의 아군 경기병들에게 죽을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부 경보병들 사이에 공포분위기가 번지고 있었다.

"또옵니다!"

루코프 녀석의 고함소리와 함께 적 궁기병의 2차 사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도망병을 잡느라고 조금 앞으로 혼자 나와있던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모습이 적에게 얼마나 잘 띌는지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당혹해하는 베아트릭스의 앞쪽 멀리로 외할아버지 카이두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이런!"

베아트릭스는 바로 자신을 향해, 바툴 가에서 날린 수백발의 투창이 한번에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의 투창을 채 던져볼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 와중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베아트릭스의 방패에는 이미 두 발이나 되는 투창이 깊이 박혀있었다. 투구를 눌러쓴 그의 얼굴에도 식은땀이 이미 송송 맺혀있었다.

"썅! 저 망할 쥐새끼같은 년!"

카이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까지의 치고빠지는 공격으로 적어도 2, 3천 명 이상의 적 경보병들을 쓰러뜨렸지만 적들은 여전히 몰려오고 있었다. 장창을 들고 다가오는 적 선봉의 경보병을 와해시켜 후방에서 돌격할 동부 정규군 기병대의 길을 뚫는 임무를 맡은 그에게는 이제 한 번의 돌격, 2번의 공격기회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카렐의 특명을 받은, 이번 마지막 공격은 이전과는 조금 다를 것이 확실했다. 그는 스코프의 촛점을 제대로 맞추며 투창을 높이 치켜들고 큰 고함을 올렸다.

"젠장! 또야!"

루코프가 소리를 질렀다. 몰려오는 적진에서 또한번 수천개의 투창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경보병들의 엄호를 맡은 베아트릭스의 궁기병대 역시 그에 맞받아 응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엔지 방금전의 공격보다는 날아오는 투창의 숫자가 조금 적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2, 3초 후 드러났다.

다른 궁기병 앞을 일렬로 갑자기 쳐오기 시작한 이천여명의 바툴 가 정예 궁기병들은 베아트릭스의 궁기병들이 막 투창공격을 마친 그 짧은 순간을 비집고 경보병들의 바로 코앞까지 몰려나오고 있었다. 이미 일제사격을 하고 난 베아트릭스의 궁기병들로서는 당장은 그들을 저지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번 표적은 경보병들이 아니었다.

"맙소사!"

베아트릭스가 상황을 깨달았을때는 이미 조금 늦은 후였다. 달아나는 경보병들만 도끼눈을 뜨고 살피던 참수대 기병들이 느닷없는 자신들에 대한 집중사격에 손써볼새도 없이 우수수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또다시 날아온 수천개의 마지막 투창공격에 '감시자'를 잃은 경보병들은 흔들릴수밖에 없었다.

"녀석들 본대가 옵니다!"

루코프 녀석이 고함을 질렀다. 탈라스 궁기병대의 후방에서 이곳을 향해 돌진해오는, 만 명이 넘는 동부제후군 정규군 기병대가 그의 눈에 들어오자 베아트릭스는 아연질색할수밖에 없었다.

"도망가는 경보병들을 잡아! 창기병들은 참수대 자리를 대신해!"

베아트릭스가 손을 치켜들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으, 으악!"

눈앞에 드러난 동부 기병대의 그 무시무시한 위세에 신병으로 들어온 듯한 몇몇 경보병들이 창과 방패를 내던지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휘관들과 선임병들이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한 대열은 중심에서부터 걷잡을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전투에서 치명타를 입었던 경보병대는 병력의 절반 정도가 이번이 첫 전투였다. 바로 베아트릭스와 히르직스가 염려하던, 바로 그 헛점을 적들이 정확히 포착한 모양이었다.

"도망병을 잡아! 무조건 죽여!"

베아트릭스가 휘하의 창기병들에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경기병대가 직접 나섰어도 무너지기 시작한 '창의 방벽'은 손쓸 수 없는 수준이었다. 몇몇 남아있는 용감한 병사들만으로는 도저히 적 기병을 감당할 수 없었다.

"2선 퇴각한다!"

수습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베아트릭스가 경기병대에 큰 소리로 지시했다. 어차피 경기병대는 적 정규군 기병이 돌진해오면 2선으로 퇴각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경보병으로 돌격해오는 적 정규군 기병을 1차 저지한다는 헤즈의 계획은 이제 틀렸으니 이젠 주력 중장보병대가 적 기병대와 한판대결을 벌이는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는 남부 경기병대의 뒤로 완전히 와해된 채 바툴 가 정예부대와 창을 든 탈라스 궁기병들에 짓밟혀 죽는 남부 경보병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플라칼 가의 제1열 경보병들을 무너뜨린 카이두의 6천여 궁기병들은 후방으로 달아나는 적 경기병대를 쫓았지만 베아트릭스의 휘하에서 잘 훈련된 그들 경기병들은 만만하게 적에게 헛점을 보이지는 않았다. 궁기병의 위협적인 엄호를 받으며 중대별로 흩어져 정연하게 퇴각하는 그들의 모습에 카이두 스스로도 저 원수같은 외손녀의 지휘력에 감탄할 지경이었다.

일단 정규군 1선의 경기병대에 합류한 카이두는 중장기병대 선두에서 긴 장창을 한손에 쥐고 무서운 기세로 검은 말을 몰아오고 있는 카렐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정규군 경기병대까지 합세해 카이두를 비롯한 무려 만 4천여 경기병이 적 주력인 5만 5천 중장보병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썅! 병신새끼들!"

1열의 경보병들이 도망병들때문에 어처구니없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에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이 대뜸 분통을 터뜨렸다. 경보병대가 무너졌으니 이젠 저 무시무시한 동부기병들의 예봉을 자신의 중장보병들이 고스란히 받아내야 할 형편이었다. 평소에도 대 기병전 훈련을 철저하게 해온 그들에게 어차피 어느정도는 예상된 일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주력군인 자신들의 피해도 어느정도는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개전 직전, 베아트릭스가 헤즈에게 이미 신병이 유난히 많은 경보병단의 문제점을 지적했었다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후였다.

"궁기병을 포함한 동부 경기병 만 4천입니다! 그 2열엔 중장기병 5천입니다!"

부장의 고함소리에 케세크 경이 큰 소리로 모든 팔랑크스 지휘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 사격은 한두번만 버티면 끝난다! 그 뒤는 훈련받은대로 하면 된다!"

잘 훈련된 남부제후군의 주력 '전쟁기계' 중장보병들이 일제히 쥐고있던 길지않은 창을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적 경기병들이 날린 어마어마한 수의 투창이 햇빛을 가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하던 경보병들과는 달리 이들은 팔랑크스 지휘관의 명령과 함께 일제히 방어자세를 잡고 몸을 낮추며 날아오는 투창 상당수를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수가 수인만큼 수백의 중장보병들이 그자리에 쓰러졌지만 보병들의 대형은 여전히 견고했고, 뒤이어 쏟아진 두번째의 사격도 마찬가지였다.

두번째 사격을 날린 동부 경기병들이 일제히 뒤로 돌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고대하던' 동부 중장기병들이 경기병의 뒤에서 그 무서운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은 뭐야?"

중앙에 포진한 팔랑크스의 1열 보병들은 참으로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무섭게 돌진해오는 번쩍이는 동부 중장기병의 선두, 아니 그들보다 한참 앞서서 갑주는 고사하고 몸을 가려줄 금속쪼가리 하나 대지않은 웬 미친놈이 시커먼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창을 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중장보병들은 달려오는 말이라도 일단 막기 위해 평소 훈련받은대로 창끝을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달려오던 말이 갑자기 옆으로 방향을 휙 들었다. 그리고 말등을 박차고 뛰어오른 그 시커먼 괴물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보병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어 3,4열의 서너명의 병사를 발로 짓밟으며 그 밀집대형의 중간에 확 뛰어들었다.

"이놈 뭐야!"

순간, 그 시커먼 창이 주변을 한바퀴 휭 돌자 십여명이 넘는 보병들이 미처 손쓸새도 없이 그 날에 찢겨서, 혹은 샤프트에 얻어맞은 무서운 충격에 온몸이 짓이겨지며 마치 폭풍이라도 맞은 갈대밭마냥 '쓸려넘어지고' 있었다. 두팔로 창을 단단히 쥔 카렐은 가을걷이라도 하듯 창을 무자비하게 휘두르며 팔랑크스 전열 수십명을 눈깜짝할새 산산조각내놓고 있었다. 적 중장기병을 막아야 할 '창의 방벽'이 한구석이 팔랑크스 중간에 뛰어든 이 '한 명'의 손에 완전히 붕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적들이 미처 자신을 에워싸고 제대로 덤벼들기 전에 얼떨떨해져있는 적 보병들의 어깨를 밟고 뛰쳐올라 도망친 그는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말 등에 훌쩍 올라탔다.

동시에 카렐 손에 무너진 그 무방비상태의 작은 틈새로, 천여명으로 이루어진 슈트란 가 근위 중장기병대의 쐐기꼴 진형 선두가 마치 터진 둑 구멍으로 물이 몰려들듯 남부 중장보병들을 밟으며 짓쳐들어왔다. 제국에서 가장 견고하다 믿었던 자신들의 팔랑크스가 너무도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에 플라칼 가 중장보병들의 얼굴에도 공포의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휘하 기사단을 이끌고 동부제후군의 양익으로 돌진해들어가던 히르직스는 중군 선두의 경보병대가 어처구니없이 무너졌다는 말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는 경보병들이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 정확히 예견하던 베아트릭스 앞에서 그리도 큰소리를 치던 뚱땡이 헤즈 녀석과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녀석의 얼굴을 돌아가거든 꼭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방에 동부 보병대의 양익을 호위하고 있는 유목민 기병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전방에 적 좌군 경기병 3천, 중기병 2천 5백입니다!"

부장이 말에 달려있던 스캐너를 확인하며 소리를 질렀다. 히르직스는 자신을 따르고 있는 기사단 우군의 1, 3기사단 9천명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반대편 적 우군은?"

"그쪽 보고에 따르자면 경기병 3천, 중기병 2천과 중장기병 천오백입니다. 슈로 기사단은 그쪽에 있는 듯 합니다."

"쳇,"

히르직스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의 생각에는 '사이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저 신생 슈로 기사단을 자신의 손으로 박살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번에도 방향을 잘못잡은 모양이었다.

자신이 이쪽의 우군에 9천명을 집결시켜 돌파를 시도하는 것처럼 저쪽 역시 우군에 전력을 집중해 2기사단 5천명이 맡고있는 이쪽 좌익을 먼저 부수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저녀석들을 얼마나 빨리 박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아앗!"

부장의 비명소리에 히르릭스가 그를 휙 돌아보았다.

"뭐!"

"황소문장 방패와 망토를 한 자가 포착되었습니다! 페로 자이센 총리인 듯 합니다!"

"드디어 걸렸군,"

투구에 감추어진 히르직스의 입가에 번지고 있는 미소를 아무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대장의 스타일상 페로를 노리고 달려들 것이라는 사실은 안봐도 뻔한 노릇이었다.

"가디언들의 호위를 받고있을테니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아."

적 경기병들과의 거리가 차츰 가까와오고 있었다. 그리고 스코프에 그들과의 거리가 0.5스타디아를 보이기가 무섭게, 적 경기병 3천이 날리는 3천발의 투창이 이쪽을 향해 매섭게 날아왔다. 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저 진절머리나는 투창공격을 겪어냈던 이쪽 기사단도 이젠 전같이 쉽게 당황하지 않았다. 기사단의 목표는 신경쓰이는 유목민 경기병들을 잡는 것이 아니고 기병들을 돌파해 적 중군인 보병대를 박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력 또한 이쪽이 압도적인 우위였다.

투창에 명중해 말에서 떨어지는 백여명의 동료들을 뒤로하고 이들은 셀림이 지휘하는 삼천여명의 샤레이 유목민 중기병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삼천여 유목민 경기병들 역시 사방으로 흩어져 지원사격을 퍼부으면서 5천 5백 유목민 기병들과 9천여 기사단간의 일대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희 지휘관은 어딨냐!"

창을 치켜든 히르직스가 큰 소리로 외쳤지만 워낙 많은 기병들이 어울려있어 목표삼은 페로 자이센의 모습을 도저히 찾을수가 없었다.

"오호라! 네가 대장이냐!"

히르직스의 오른쪽 앞에서 웬 미친놈---경갑옷 차림에 머리만 겨우 가리는 캡에 그 위에 해괴한 검은 터반을 빙 두른---이 손에 거대한 화극을 쥐고 소리를 지르며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아니, 목소리로 보아 '미친놈'이 아니고 '미친년'인 모양이었다. 제대로된 갑주도 갖추지 않은 주제에 백병전에 뛰어들어서, 그것도 기사단장인 히르직스에게 싸우자고 덤비는 꼴로 보아 정말로 미친년에 틀림없었다.

"투구 벗어봐라! 헤헤, 미남이면 살려줄께!"

"뭐야? 저년은?"

즉시 히르직스의 휘하 기사 2명이 달려나가 자이납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를 향해 내달리던 그들은 '기사'라는 신분이 무안해질 정도로, 녀석이 무섭게 휘두른 화극날에 목과 어깨가 잘려나가며 말에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상대의 실력을 깨달은 히르직스는 바로 자신의 창을 꼬나잡았다.

"꽤나 당돌한 년이구나, 사로잡아다가 오늘밤 데리고 놀아야겠다."

자이납에게 막 돌진하려던 히르직스를 부장의 큰 고함소리가 붙들었다.

"11시 전방에 페로 자이센입니다!"

곧바로 자이납에게서 신경을 꺼버린 히르직스는 그에게 대여섯명의 기병들만을 남겨둔 채 휘하 기병들을 모두 이끌고 바로 페로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다히르 녀석처럼, 이번엔 그 잘난 페로만 잡으면, 그의 앞으로의 길은 탄탄대로나 다름없었다.

주인에게 몰려오는 적 기병들의 대열을 눈치챈 페로의 가디언 5명과 호위기병들이 즉시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앞서서 달려온 오십여명의 기병들과 맞서싸우느라 그들 역시 난전에 돌입하고 그리고 그 틈새로 단장의 깃발을 앞세운 히르직스가 창을 꼰아쥐며 모습을 나타냈다.

"황제령 쉐너 가와 타마르 가의 아들이며 플라칼 가 기사단 사령관을 맡고 있는 히르직스입니다. 페로 자이센 총리각하께 정중히 한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후군 기사단장 따위와 일기투하기는 격이 안맞는다. 네놈들 대가리인 제롬 공이나 데려와라."

쌀쌀맞게 대답한 페로의 앞을 또다른 호위기병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발끈 한 히르직스가 창을 치켜들며 곧바로 페로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페로 역시 타고있던 붉은 말에 박차를 가하며 호위기병들과 함께 돌진했다.

"그래! 잘났다! 이 어린 풋나기새끼!"

히르직스가 자신의 창으로 페로의 화극을 비껴내며 악을 썼다. 히르직스의 창이 목 옆을 스쳐나가면서 뒷골이 서늘해진 페로 역시 이에 질세라 소리를 질렀다.

"배신자 주제에 어디 뚫린 주둥아리라고!"

히르직스의 날카로운 찌르기 공격을 가까스로 쳐냈지만 페로는 자신의 열세를 이미 충분히 절감하고 있었다. 동부기병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현란한 기마술과 빠른 창놀림은 저돌적인 '내려찍기' 공격을 위주로 몰아붙이는 스타일의 페로에게도 단 한번의 변변한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페로는 아는 기술과 체력을 모두 동원해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중갑주에 긴 창을 쥐고도 놀랄정도로 빠른 몸놀림을 보이는 히르직스는 힘을 위주로 강력하게 몰아붙이는 페로의 창을 별 힘들이지 않고 교묘하게 떨궈내며 페로의 몸 곳곳 갑옷이 약한 곳마다 '스치듯이' 상처를 내고 있었다.

'제길!'

몇분간의 대결로 힘을 소진한 페로는 난생 처음으로 등을 보이고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섣불리 몸을 돌릴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히르직스는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며 체력소모가 심한 스타일의 페로가 지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사이 히르직스의 창날이 페로의 겨드랑이의 갑옷 사이 틈새를 정확히 노리고 파고들어왔다.

"이익!"

이번엔 겨드랑이를 베인 페로가 몸을 잔뜩 움츠렸다.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페로를 흥분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페로가 갑자기 괴력이라도 얻은 듯  화극을 거칠게 휘두르며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어라? 이 새끼 여기 와 있었네!"

쫓아오는 적 기병들을 떨구고 뒤늦게 따라온 자이납이 페로와 싸우고있던 히르직스의 등뒤를 갑자기 쳐오기 시작했다. 자이납의 화극날에 하마터면 목이 통째로 달아날 뻔 했던 히르직스는 상황이 자신에게 더 불리해졌음을 깨닫고는 급히 뒤로 물러나는수밖에 없었다.

"썅! 어딜 도망가? 나도 공훈 좀 세우자!"

여전히 조잘대는 자이납이 물러나는 히르직스의 뒤를 검은 터반자락을 날리며 쫓아가고 있었다. 거의 탈진할 정도로 지친 페로는 말 갈기에 이마를 기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당장 히르직스는 쫓아냈지만 이쪽의 전황은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셀림이 이끄는 2천 5백의 유목민 중기병대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었지만 9천이나 되는 적 기사단을 막기는 역부족이었고 3천의 유목민 경기병들의 투창을 이용한 측면지원도 기병들간의 난전상황에서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투창공격을 당했던 이녀석들도 나름대로 대응방법을 터득한 모양인지 여분의 방패를 하나씩 더 소지하거나 작은 손도끼를 하나같이 말 어깨에 매달고 방패에 박힌 투창을 재빨리 잘라내는 기민함까지 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을 끄는 것이 좌군의 주임무였지만 페로가 이끄는 동부연합군 좌군은 생각보다도 빨리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젠 카렐이 앞장서 공격하고 있는 중군이 적 중장보병대를 붕괴시키던가, 아니면 제네르가 이끄는 반대편 우군의 기병대가 적 나머지 기사단을 일초라도 빨리 무너뜨리고 이쪽을 도와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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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 회의 본문에 있던 일러스트, 삽화, 전황도는 유조아 개편으로 태그 사용이 불가능해져서 일단 지웠습니다.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으로 가시면 지워진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개편이 끝나는대로 그림은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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