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83화 (183/1,132)

< -- 183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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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로 기사단 돌격!"

계속된 치고빠지는 사격과 중기병들의 압박으로 플라칼 가 제2기사단이 무너지고 있음을 발견한 제네르가 자신의 창을 앞으로 향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2기사단은 지금까지의 동부와의 2번의 큰 전투에서 단 한번도 크게 당한 적이 없는, 가장 건재한 부대였지만, 그러다보니 역설적으로 동부 스타일의 경기병-중기병 연합공격에 대한 대응력 또한 부족한것이 사실이었다.

그동안 유목민 기병대의 선전만을 지켜보며 뒤에서 돌격명령만 기다리던 천 오백여 슈로 기사단원들이 썰물처럼 갈라지는 유목민 경기병들의 사이를 꿰뚫고 각각 5백명씩 이루어진 3개의 쐐기꼴 진형으로 돌진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기병들의 엄호사격과 함께 2기사단 좌측면으로 돌진해 들어간 슈로 기사단은 이미 와해되기 시작한 플라칼 가 2기사단을 눈깜짝할새 두동강내고 있었다.

"제길! 보병들 뭐하는거야!"

1차 돌격을 마치고 말을 돌리며 제네르가 그답지않게 대놓고 신경질을 부렸다. 하지만 그의 이런 평소같지않은 모습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기껏 와해시켜놓은 적 기사단을 토끼몰이해서 완전히 붕괴시켜야 할 동부 창보병 5천은 아직 외곽에서 쩔쩔 매고 있었고 기병들만 사방을 오가며 고생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빨리 이쪽을 마무리하고 페로가 있는 좌군을 지원해야 할 제네르로서는 입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형편이었다.

"중군쪽은 어떤가!"

제네르가 뒤따르는 부장 발리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동부 정규군 기병대가 나름대로 분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쪽도 보병들이 와해된 적 중장보병들을 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중군쪽은 장기전이 될 것 같습니다!"

"젠장! 전사단 장창병들 같았으면 이미 저새끼들 다 골로 갔을텐데!"

이미 갑주 위에 피를 잔뜩 뒤집어쓴 제네르는 역시 피가 엉겨붙은 자신의 창을 굳게 쥐고 아직까지 똘똘 뭉쳐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적 2기사단을 향해 또한번 돌진해들어갔다. 흥분한 제네르의 입에서 그답지않은 거친 말이 계속 쏟아져나오자 발리가 어깨를 으쓱 하며 뒤따르고 있었다.

6열 정도의 반밀집대형을 이룬 동부 하크로딘 가 창병들이 1000명 단위로 남부 중장기병들 주변에서 알짱대고는 있었지만 도무지 기병을 상대하는 훈련이나 제대로 받은것인가 싶을정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훈련은 접어두고 지휘하는 놈조차 허둥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속도를 잃고 서성대는 기병들에게 집단으로 돌진해 말에서 떨어뜨리고 확인사살해야 할 그들은 적 주변에서 창만 들고 말 그대로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제네르는 다른 가문도 아닌 자신의 출신가문 보병들이 보이는 저런 한심한 모습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날씨가 왜이러죠?"

발리가 투구 사이트를 손으로 닦아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동쪽하늘에서부터 점점 진해지기 시작한 누런 모래바람은 이미 시계를 절반이상 줄여놓았을 정도로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런 하마탄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해본 제네르는 모래바람이 심해진다면 경기병들의 주무기인 장거리 궁사에도 심각한 지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육안확인 없이 스코프에만 의지하는 공격은 그 위력이 반감될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휘관새끼 도대체 누구야!"

보다못한 제네르가 기사단을 라손에게 맡겨둔 채 몇 명의 호위기병만 거느리고 보병들의 대열에 뛰어들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하급장교가 가르키는 곳을 쫓아간 제네르는 뿌연 모래바람 속에서 삼십여명의 기병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부장들에게 연신 신경질만 부리고 있는 한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가 지휘관인가!"

소리를 버럭 지른 제네르는 움찔 하고 말았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그 녀석의 팔에 들린 둥근 방패에는 하크로딘 가의 문장인 자칼이 새겨져 있었다. 가문 사람이 틀림없었지만 그 사실에 또다시 화가 솟구친 제네르는 또한번 언성을 높였다.

"우군 사령관 제네르 하크로딘이다! 관등성명을 밝혀!"

"하크로딘 가 보병대 중랑장 잘루크 하크로딘입니다."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제네르의 기세에 조금 기가 죽은 듯 순순히 대답하고 있었다.

"망할! 지금 이따위 걸 지휘라고 하고있는건가! 부대들 중에 적 주력과 맞붙어 싸우고있는 게 절반이나 되냐고! 떨어져나간 소부대는 기병들에게 맡겨두고 무시하라고 내가 몇번이나 강조했나! 떨거지들 잡으러 허둥대고 있으니 뭐하는 짓인가!"

"그.....그게......"

제네르의 호통에 제대로된 대답도 못하고 쩔쩔매는 것을 보아 제대로된 지휘 경험이 전무한 아주 초짜임에 틀림없었다. 잘난 가문이나 혈통 덕택에 처음부터 높은자리를 꿰찬 속칭 '낙하산' 지휘관임이 뻔했다. 저런 녀석에게 보병대를 맡겼다가는 하루종일 몰아붙여도 저 응집력강한 남부 기사단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할것이 뻔했다.

"제길! 우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네 지휘권을 박탈하겠다! 부장들 중 가장 선임자가 누구인가!"

날벼락을 맞은 보병 지휘부가 잠시 조용해져 있었다. 하지만 우군의 명령권을 지닌 제네르의 결정이니 아무도 토를 달 수는 없었다. 부장들 중 한명이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이제 네가 지휘한다! 그리고 잘루크 하크로딘 중랑장은 경호병을 붙여줄테니 중군 본대로 돌아가라! 명령이다!"

잘루크 하크로딘에게 다가선 제네르는 그의 어깨에 달려있던 지휘용 통신장비를 확 잡아빼 새 지휘관에게 넘겨주었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치욕을 당한 그 녀석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따위 것을 따질 겨를은 없었다.

"당장 전 창병을 적 북동쪽으로 집결시켜 집중공격해라! 그 양익은 경기병대가 호위할거다! 알았나! 또다시 저따위 모습을 보인다면 이번 후임자는 지휘관의 권한으로 이자리에서 내가 직접 목을 쳐버리겠다! 알았나!"

정말로 칼을 뽑아들며 외친 제네르의 명령은 얼핏 잔혹하게 들렸지만 실상 임시지휘관에 대한 협박이 아닌, 면죄부 부여였다. 임시지휘관이 더 힘을 내 싸운다면 본 지휘관의 체면이 이만저만 망가지는 것이 아닐테니 그에게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는 셈이었다. 제네르의 서슬퍼런 태도에 뒤따라온 발리조차도 놀란 표정을 짓고있었다. 창을 꼰아잡은 제네르는 다시 전선으로 말을 달려가고 있었다.

제네르가 놓은 지휘관 교체라는 초강수의 효과는 몇분 지나지 않아 바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저리 흩어진 적 기병들을 잡는데 허송세월하고있던 창병들이 그제서야 제대로된 창의 벽을 쌓고 아직까지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2기사단 주력부대의 측면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네르가 적들을 빨리 무너뜨리지 못한 결과는 그의 할룩스로 들어온 사령부의 긴급한 전문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좌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페로 경이 위험합니다!"

거칠게 창을 휘두르며 적 중장보병대를 무너뜨리는 선봉에 서 있던 카렐은 자기도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탄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에어필터가 달린 갑주를 착용한 정규군들이야 어느정도 괜찮겠지만 알량한 가죽수트 한벌과 튜닉, 망토가 고작인 카렐은 거의 숨도 쉬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손수건을 꺼내 입에 묶었지만 심각한 호흡곤란은 여전했다.

전적으로 자연적인 오감에 의지하는 카렐에게 이런 상황은 그의 감각조차도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방금전까지 중장보병들을 함께 '때려잡던' 네피는 죽은 아군 시체중에서 자기 몸에 맞을만한 갑주를 입은 것이 혹시 없나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어보였지만 그 덩치에 맞는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토로 경!"

거칠게 침을 뱉어낸 카렐이 중군의 동부 중장기병대를 지휘하고 있을 토로 경을 큰 소리로 불러냈다.

"예! 말씀하십시오!"

"서둘러야겠다! 적 중장보병대 사령관 케세크 경의 위치를 당장 파악해 알려!"

다시한번 말에 박차를 가한 카렐은 한쪽에서 아직까지 굳건하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적 팔랑크스에 달려들었다.

만 4천의 경기병과 오천의 중장기병이 주축이 된 동부기병대 주력군은 성공적으로 적 팔랑크스 선두대열을 무너뜨렸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기병대에 잠시 와해된 적 보병은 눈깜짝할새 다시 집결해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고, 와해된 적 중장보병을 마지막으로 '깨부수어야 할' 동부 보병들은 기껏 흩어져 도망가는 몇 안되는 녀석들에게나 덤빌 뿐이었지 다만 삼사십명만 집결해있어도 우물쭈물거리거나 쩔쩔 매기가 일쑤였다.

물론 남부 보병이 원래 강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은 물론이고 전투경험이나 역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동부 보병들이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있다는 편이 정확했다. 상황이 그지경이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이나마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일단 위안을 삼는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카렐이 직접 뛰어든 팔랑크스는 여지없이 깨져 무너지고 있었고 그 뒤를 강력한 중장기병대가 뛰쳐들어 '괴물의 출현'에 당황하고 있는 적 중장보병들을 사방으로 흩어놓았다. 선두인 카렐의 활약에 힘을 얻은 동부 보병들이 흩어진 적 보병들을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했지만 망할 보병들의 '발동'이 너무 늦게 걸린 것이 문제였다. 페로가 있는 좌군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에 입이 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한 카렐은 '결단'을 내리는수밖에 없었다.

"케세크 경 위치 파악되었습니다! 적 보병대 3열 최후방이고, 전하 계신 곳에서 1시 방향으로 4스타디아에 4천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팔랑크스 중앙에 있습니다!"

토로 경의 보고와 함께 스코프에 들어온 지도 영상에 카렐이 얼굴을 찌푸렸다. 4천이나 되는 팔랑크스라면 아무리 전열의 적 보병 대부분을 이미 와해시킨 상황이라도 함부로 덤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적 2열은 아직 절반 정도도 무너뜨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네피! 이리 와!"

말에 뛰어오른 카렐은 슈트란 가 근위 중장기병대 오백을 이끌고 네피와 함께 그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고, 지시를 받은 바툴 가 정예부대 2천 역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적 중장보병대가 와해되기 시작했으니 이제 최정예부대를 총집결해 적 보병대 사령관인 케세크 경을 직접 쳐서 끝장을 낼 양이었다.

중장보병대를 엄호하던 베아트릭스의 5천 경기병대는 총 사령관 헤즈 경의 명령으로 히르직스가 거의 무너뜨려가고 있다는 적 좌군의 유목민 부대와 지휘관인 페로 자이센 녀석을 '끝장내기 위해' 서둘러 달려가고 있었다. 저곳만 뚫으면 적 중군 보병대 측면을 강타하고 그 후방에 있는 적 최고지휘부를 순식간에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터였다. 하마탄으로 온통 뿌옇게 변해버려 육안 시계는 채 1스타디아도 되지 못했지만 그의 스코프에는 혼전양상인 5스타디아 전방의 상황이 지도와 함께 나타나고 있었다.

적 중심부를 지켜야 할 유목민 중기병들은 이미 3, 4토막이 난 채 사방에서 산발적인 저항만 할 뿐이었고 유목민 경기병들이 원거리 사격으로 중기병의 붕괴를 가까스로 막고있는, 적을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시계가 불량하니 장거리 곡사는 하지 않는다! 0.5스타디아에서 조준직사만 행한다! 목표는 적 중기병들이다! 창기병대는 외곽의 적 경기병을 공격해 기사단의 공격을 돕는다!"

한참 기세를 올리며 달려가던 베아트릭스의 귀에 갑자기 헤즈 경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이미 적 부대에 거의 근접해서 투창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당장 돌아와서 케세크 경을 구하도록 해라!"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쪽만 무너뜨리면 곧....."

"지금 항명하나! 빨리 귀환해서 중장보병대를 도우란 말이다! 지금 케세크 경이 위험에 처해있던 말이다!"

"아......알겠습니다,"

막 공격하려던 투창을 다시 거둬들인 베아트릭스는 눈앞에서 거의 무너져가고 있는 적 부대를 놔둔 채 다시 말머리를 돌릴수밖에 없었다.

"썅! 저 새가슴 뚱땡이새끼!"

베아트릭스가 사이트에 뿌옇게 달라붙은 모래먼지를 털어내며 홧김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적 중군 보병대는 측면의 기병대만 뚫리면 곧바로 와해될것이 뻔했다. 그러면 중장보병대를 당장 포기해도 결과로는 이쪽의 승리가 되는 셈이었고 케세크 경이야 지가 알아서 살아 도망치던 말던 하면 되는 노릇이었다. 경보병대는 그렇게 쉽사리 소모품으로 써버리면서도 출신부대를 저리도 '끔찍히 아끼는' 사령관 덕택에 자신들만 끼면 당장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적 좌군의 생존시간을 잠시나마 늘려준 셈이었다.

점점 심해져가는 망할 모래바람 때문에 말을 몰기가 점점 고역스러워지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먼지낀 사이트를 또한번 닦아냈다. 방금전보다 더 불량해진 시계는 채 열 보 앞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고속으로 달리는 이 상황에서 육안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고 모두 스코프에만 의존해 가까스로 방향을 잡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온갖 빛을 모두 산란시키는 이런 모래바람에서는 스코프의 시야도 그다지 완벽하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달리다가 장애물에 부딪혀 낙마하거나 자기도모르게 행렬을 이탈하는 기병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안되겠다! 속도를 늦춰! 속보로 이동한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베아트릭스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적 좌군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이래저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케세크 경을 비롯한 이십여명의 중장보병대 핵심 지휘관들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팔랑크스는 얼핏 보기에도 그 위용이 대단했다. 하지만 중장보병들의 방패마저도 족히 뚫어내 버리는 바툴 가 정예병들의 위력적인 중투창공격으로 그 모서리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뒤이어 달려온 카렐과 네피가 창과 도끼를 꼰아잡고 그 중간으로 휙 뛰어들자 정연한 밀집대형을 이루고 있던 그들 사이에서도 일대 혼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카렐로부터 '자신과 네피가 있던말던 무조건 던져라'는 명령을 받은 카이두와 휘하 궁기병들은 적 주위를 빙빙 돌며 무시무시한 투창공격을 계속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몇초 지나지 않아 오백여 슈트란 가 근위중장기병대의 무서운 말발굽소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덮치고 있었다.

"썅! 뭐가 보여야 말이지!"

네피가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를 꽥 질렀다. 결국 맞는 갑주를 찾아내지 못한 네피 역시 카렐처럼 입과 코에 찢어낸 옷자락을 대고는 있었지만 점점 짙어져가는 모래바람은 그것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카렐과 네피에게 '쐐기'를 박힌 팔랑크스는 중장기병대의 마지막 '망치질'에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말았다. 케세크 경을 지키던 수십의 호위기병들이 지휘관의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바툴 가 부대가 와해된 보병들을 공격하고 있는 사이 동부 중장기병대는 중앙의 남부 중장보병대 지휘부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적 보병대 후방에서는 누렇고 짙은 모래바람 속에서 일대 혼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케세크 경 어딨나!"

창을 쥔 카렐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까스로 소리를 질렀다. 스코프 덕택에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앞이 거의 분간되지 않기는 감고있는것과 매한가지였다. 몇발짝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말 시알피도 어디갔는지 찾을수 없었다.

"동쪽에서 큰 모래바람이 옵니다!"

카렐 옆에 선 동부 기병의 고함소리와 함께 거의 폭풍과도 같은 큰 바람이 전장을 덮치고 있었다. 카렐은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망토를 뒤집어썼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산발적인 접전은 벌어지고 있었지만 케세크 경을 잡는것은 고사하고 어느 구석에 숨어있는지 찾을수도 없었다. 바람때문이 웅웅거리는 귀 역시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지경이었고, 나머지 감각도 마비되다시피 한 카렐은 스코프마저도 말을 듣지 않자 이전처럼 빠른 공격도 할 수 없었다.

망토로 온몸을 가린 채 케세크 경만 찾아다니며 적진 속을 말 그대로 '헤매던' 카렐은 어느순간 적군과 아군과의 격돌소리가 멈춰버리자 잠시 방향감각을 잃고 말았다. 그때 그의 앞쪽 멀찍이에 십여기의 플라칼 가 기마 지휘관들이 달려가는, 아니 정신없이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반짝이는 갑주와 화려한 보라빛 망토로 보아 최고위급 지휘관임이 틀림없었다.

"걸렸다!"

반사적으로 창을 치켜든 카렐은 말보다도 훨씬 빠른 그 긴 다리에 폭발적인 힘을 가하며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쿠!"

한참 속도를 내던 카렐은 앞에 멍 하니 서 있던 대여섯명의 적 보병들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그 무서운 충격에 두 명의 보병이 한참을 나동그라졌고 카렐 역시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나머지 보병들 역시 카렐에게 너무나 놀랐는지 창을 든 채 잠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카렐이 거칠게 휘두른 창에 얻어맞으며 제대로된 공격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모래바람 너머 어디론가 튕겨가 버렸다. 넘어진 충격 탓인지 카렐의 스코프마저도 깨져 금이 간 채로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제길! 어디갔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카렐은 왼쪽에서 들려온 말발굽소리에 다시 그쪽으로 내달렸다. 꽤 따라잡았던 것을 저 망할 적 보병들 때문에 다시 뒤처지고 만 모양이었다. 앞뒤 안가리고 그쪽을 쫓던 카렐은 어느새 제일 후미를 달리던 기병의 등이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카렐이 막 창을 치켜들던 그 순간, 거세게 몰아치던 모래바람이 갑자기 잦아들기 시작했다.

"잘됐다!"

공중으로 뛰쳐오른 카렐이 말등에 뛰쳐오르며 녀석의 몸을 순식간에 두토막내 버렸다. 남쪽에서 큰 바람 한 번이 몰아치면서 방금전까지의 모래바람이 언제그랬냐는 듯 시야가 갑자기 훤히 트이고 있었다. 그리고 카렐은 자신이 쫓고있던 무리가 바로 케세크 경의 호위부대가 맞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말 몇마리 앞으로 펄럭이는 케세크 녀석의 망토가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신나게 창을 치켜들며 그쪽으로 몸을 날리려던 카렐은 순간적으로 움찔 하고 말았다. 그의 주변 상황이 차츰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는 우굴거리는 수백, 아니 수천명의 적 보병대 후방 팔랑크스 사이에 홀로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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