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4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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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끼들 다 어디갔어?"
한두발짝 앞도 구분할 수 없는 거대한 하마탄 때문에 기병들간의 싸움은 고사하고 적과 아군이 온통 뒤엉켜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던 플라칼 가 우군 쪽은 그 엄청난 하마탄이 언제그랬냐는 듯 잠잠해지자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말 목을 껴안고 그 몇십초를 가까스로 버텨낸 히르직스도 방금전까지 자신 앞에서 창을 휘둘러대던 거구의 유목민 족장 녀석은 물론이고, 등뒤를 찰거머리같이 쫓아오던 검은 머리쓰개의 '미친년'의 모습조차도 보이지 않자 멍 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놈들 다 어디갔어?"
"다, 달아난 것 같습니다,"
온통 남부기병들만 남아있는 주변을 둘러보며 히르직스의 부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로?"
반사적으로 되묻던 히르직스는 서쪽, 적 보병대 측면에 어느새 집결해있는 적의 또다른 기병대, 아니 그 하마탄을 틈타 잽싸게 퇴각한 뒤 그새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적 좌군 기병대의 모습에 아연질색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맞붙어싸운 유목민 기병들이 바로 이곳 샤레이 출신 원주민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몇백년간 이 초원에서 하마탄을 이겨내며 적응해 살아온 자들이라는 사실까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저 썩을 페로새끼!"
히르직스가 이를 뿌드득 갈며 거칠게 울부짖었다. 거의 무너뜨릴 뻔 했던 적들을 저 모래바람 때문에 고스란히 놓쳐버린, 아니 얼마간 다시 버틸 수 있는 여유를 준 셈이었다. 적 경기병대와 중기병대 사이를 가로지르며 피가 흐르는 겨드랑이에 붕대를 감은 채 직접 군기를 치켜들고 말을 달려가고 있는 페로 녀석의 당당한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다시 돌격해!"
히르직스의 명령에 대오를 정비한 1, 3기사단이 적 보병대 측면에 바싹 달라붙어 전의를 다지고 있는 페로의 유목민 기병대를 향해 다시 돌진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돌진할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을 향해 날아오는 수천발의 투창이 또다시 하늘에 포물선의 궤적을 그리고 새카맣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화가 치솟을대로 치솟은 히르직스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사령관님! 서북방에......"
"서북방에 뭐!"
히르직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적 보병대 후방을 돌아 적 중장기병대 1천 5백여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적 슈로 기사단 같습니다!"
'슈로 기사단'이라는 말에 순간 두눈이 뒤집어진 히르직스가 이를 드러내며 서북방을 노려보았다. 누런 모래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이쪽으로 세차게 달려오는 녀석들의 선두에는 4마리의 용 문양이 그려진 옛 슈로 기사단의 군기가 또렷히 보이고 있었다.
"2기사단은 지금 남쪽으로 퇴각중이라고 합니다! 적 중기병대와 유목민 경기병대에 쫓겨 피해가 막심하다고 합니다!"
히르직스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젠 이기느냐 지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2기사단을 쫓아내고 난 적 우군의 유목민 기병들은 틀림없이 중장보병대 후방이나 측면을 공격할테고, 적 중군은 이미 아군 중장보병대 우측을 돌파해 3열의 본진까지 무차별하게 유린했다는 소식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서 이기고 말고를 떠나 중군 보병대가 무너지면서 첫 '패전'을 기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망할 저놈의 하마탄만 아니었어도!"
히르직스가 자신의 불운을 처절하게 원망하며 울부짖고 있었지만 동부 역시도 하마탄 때문에 남부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을 어처구니없이 놓치는 불운을 당했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상관없어! 일단 돌격한다!"
히르직스와 그의 근위기병대를 선두로 2개의 플라칼 가 기사단이 페로와 그의 잔여 기병들을 향해 마지막 돌격을 개시했다.
최악의 모래바람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사이트의 모래를 마지막으로 털어낸 베아트릭스는 측근의 부하들이 지금까지 잘 따라왔는지를 확인했다. 다른 녀석들은 알 바 없지만 최소한 부장 루코프 녀석과 궁기병대장 달리 녀석은 자신의 뒤에 잘 붙어있었다. 최후의 몇십초는 속보는 고사하고 겨우겨우 방향만 잡아가며 걸어올 수 있었지만 어쨌든 눈앞에 보이는 아군 중장보병들의 모습에 최소한 엉뚱한 곳으로 온 것은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케세크 경! 어디계십니까!"
베아트릭스가 할룩스를 작동시키며 큰 소리로 악을 쓰며 물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에게서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퍼뜩 든 베아트릭스는 일단 부대를 몰아 중장보병대 후미를 빙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이미 박살이 난 채 적 중장기병들에게 사정없이 짓밟히고 있는 보병대 지휘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변을 2천여 바툴 가 정예 궁기병들이 빙빙 돌며 도망치는 보병들을 족족들이 학살하고 있었다. 보병대 좌익 최후방, 중장보병대 지휘부는 이미 완전히 적에게 유린당한 후였다. 베아트릭스의 눈앞이 순간 캄캄해지고 있었다.
"궁기병대! 조준직사한다! 창기병대 돌격!"
중장기병들에게 경장 창기병이 돌격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저 한구석 어딘가에---살아있든 죽었든---케세크 경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돌진하는 창기병들 뒤를 따라가던 베아트릭스는 조금 후방쪽에, 사령부를 지키다가 달려온 듯한 예비대 팔랑크스 한쪽에서 요란스럽게 일고있는 흙먼지를 발견하고 있었다. 보병대 지휘부를 구하러 몰려오는 듯 싶던 저녀석들은 이곳으로 오지 않고 무슨일인지 저곳에 모여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않음을 깨달은 베아트릭스는 십여명의 근위 궁기병들과 함께 그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참으로 황당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제길할! 이게 뭐야!"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창을 그대로 밟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카렐은 순식간에 대여섯명의 어깨를 뛰어넘었다. 무모함의 댓가는 가혹했다. 지금은 싸울 상황이 아니고 도망쳐야 할 때였다.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무조건 도망쳐나오는 동안 몸 곳곳에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를 입은 카렐은 또한명의 적 보병의 어깨를 박차며 뛰어올라 그나마 적 보병이 적은 공지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의 뒤를 쫓고 있는 건 적 총 사령관 헤즈를 경호하던 무려 1천명의 예비대 보병과 헤즈의 근위기병들이었다. 팔랑크스건 뭐건 쫙 흩어져서 땅을 새카맣게 뒤덮고 추격해오는 그들 때문에 궁지에 몰린 카렐은 케세크를 잡는 건 고사하고 당장 자기 목숨이라도 건지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넘어지면서 깨져버린 스코프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내던진 카렐은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가장 가까운 아군부대와의 거리는 아직 2스타디아 가까이 남아있었다.
"제길!"
카렐이 피가 솟는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보병들이 일제히 던진 창에 다리가 찔리면서 그 뒤로는 이렇게 뛰어 도망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저기다!"
누군가와 고함소리에 급히 뒤를 돌아본 카렐은 어느새 뒤를 또다시 쫓아온 적 근위기병들과 그 후방에서 땅을 덮고 새카맣게 몰려오는 수백의 보병들에 또다시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저려오는 다리에 막 힘을 주어 달아나려던 카렐은 오른쪽 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바람 가르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나게 빠른 그 몸놀림에 베아트릭스는 상대가 가디언임을 곧 깨달았지만 그도 저정도로 '날아다니는 듯한' 가디언은 난생 처음이었다. 게다가 긴 팔다리에 쭉 빠진 날렵한 몸매는 마치 잘 만들어진 전투용 안드로이드 같은 형상이었다. 죽인 아군의 피가 튄 것인지, 아니면 상처라도 입은 것인지 녀석의 온몸은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보병들을 뛰어넘는 그 모습을 보아 녀석은 틀림없이 다리를 약간이나마 절고 있었다.
"녀석이 착지하는 즉시 조준사격한다, 너희 공격에 등을 보이거나 자세가 흐뜨러지면 나와 달리가 끝내겠다!"
상대가 절대 한발로 잡힐 만만한 녀석이 아님을 깨달은 베아트릭스가 평소 빠른 야생동물을 사냥할 때 쓰는 방법을 반사적으로 궁기병 부하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시커먼 옷을 입은 저 괴물같이 빠른 녀석이 땅에 발바닥을 대기가 무섭게, 아니 조금 앞서서 십여명의 궁기병들이 일제히 투창을 날렸다. 한손에 자리드를 든 베아트릭스와 궁기병대장 달리 역시 말에 박차를 가해 양쪽에서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그의 '사냥물 목록'에 호랑이와 곰 외에 가디언도 처음으로 추가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창을 치켜든 카렐은 거의 동시에 날아오는 십여발의 강력한 투창을 가까스로 다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틈새에 두 명의 적 궁기병이 좌우 양쪽으로 자신을 향해 근접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둘이 자로 잰 듯, 동시에 자신의 가슴을 향해 양쪽에서 투창을 날리고 있었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카렐로서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피할 여유가 없었다.
"제길!"
오른손에 창을 쥔 카렐은 일단 창으로 한 발을 쳐내며 왼손으로는 가슴을 향해 날아오던 나머지 한발을 급한나머지 손으로 힘껏 내리쳐버렸다. 강력한 스핀과 함께 날아오던 검고 묵직한 자리드 중간이 그대로 꺾이면서 공중으로 솟구쳐오른 묵직한 투창의 촉 부분이 카렐의 가슴과 턱, 뺨을 세차게 긁고 바닥에 나딩굴렀다.
"이익,"
카렐이 순간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촉에 다친 상처는 물론이고 엄청난 마찰로 찢겨진 장갑 속으로 피가 흐르는 손의 붉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시민이 던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가히 엄청난 위력이었다. 카렐은 자신에게 이렇게 위력적인 공격을 날린, 경갑주 차림의 적 궁기병, 아니 장군을 한 번 매섭게 쏘아보았다.
베아트릭스는 태어나 처음 당한 너무나 놀라운 상황에 충격을 받아 입을 멍 하니 벌리고 있었다. 오십여보가 될동말동한 가까운 거리에서, 사이클롭스까지 장착한 채 힘을 최대한 받아 던진, 궁기병으로서 날릴 수 있는 위력의 거의 한계에 다달아있다는 그의 강력한 투창 공격이 두꺼운 방패에 막히거나 빗나가버린 것도 아니고, 날아가다말고 적 가디언의 손에 어처구니없이 튕겨나가버린 것이었다.
긴 적갈색 머리를 펄럭이는 상대의 옅은 회색빛 눈동자가 묘한 무지개빛을 뿜으며 자신을 잠시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그 짧은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적의 눈빛이 정말로 아름답다는, 이 상황에서는 말도안될 황당하기까지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얼굴에 흐르는 피를 털어내며 또다시 눈 깜짝할새 동부연합군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잡아!"
얼른 정신을 차린 베아트릭스가 또 한발의 투창을 뽑아들며 달아나는 카렐의 뒤를 맹렬히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 아니 가디언의 발이 말보다도 빠를 수 있다는, 믿기지않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에익!"
녀석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베아트릭스는 일단 들고있던 투창을 적을 향해 힘껏 발사했다. 하지만 달아나던 녀석은 뒤에도 눈이 달린 듯 투창이 자신의 손을 떠나기가 무섭게 방향을 휙 틀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태어나 처음 느낀 무참한 패배감에 축 늘어진 베아트릭스는 말을 멈춰세우며 잠시 멍 해져 있었다. 180년이 넘는 일생동안 그가 투창으로 잡지 못한 상대는 사람이건 짐승이건 단 한번도 없었다. 달아나는 호랑이, 사자도 잡던 그가 두발달린 가디언, 그것도 다리를 절룩거리는 표적조차 맞추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처음 위치로 되돌아와 맥없이 말에서 내려선 베아트릭스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자리드를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불쌍사납게 꺾여있는 자리드 중간부분에는 검은 칠이 벗겨진 채 약간의 피와 살점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을 막으며 손에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꼈을 그 녀석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자신을 바라보던 그 특이한 무지개빛의 강렬한 시선을 자기도모르게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도대체......누구지?"
"제기랄! 그 썩을 놈!"
카렐을 떨구고 총 지휘부로 가까스로 내뺀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은 투구를 벗어던지며 대뜸 욕부터 내질렀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그의 갈색빛 머리칼과 그을린 얼굴은 마치 목욕이라도 하고 나온 듯 흠뻑 젖어있었다. 대오에서 서너자리 정도만 뒤에 있었더라면 그의 뒤를 뒤쫓아온 그 시커먼 마귀같은 놈의 창에 이미 허리가 두동강나버렸을 상황이었다.
"썩을 경기병대 새끼들은 구하러 오랬더니 도대체 어디 처박혀있는겁니까!"
"10분쯤 전에 도착한 모양이야. 날 좋아지고 나서야 도착했더군. 지금 적 궁기병들하고 교전중일걸."
스코프로 전방을 살피던 총사령관 헤즈 경이 건성 대답했다.
"하이고, 그 잡종년 퍽이나 일찍 오셨군요,"
케세크가 물 한모금을 벌컥 들이키며 또한번 욕을 내뱉었다.
"입단속 좀 해."
헤즈 경이 막말을 내뱉는 케세크에게 대뜸 쏘아붙였다. 평소의 헤즈 경 답지않은 핀잔에 케세크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리 눈치없고 단순한 그였지만 사령관 헤즈가 저리도 화가 나 있는 이유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헤즈가 철석같이 믿었던 중장보병대 좌익은 이미 완전히 붕괴되어 수습불가능한 지경이었다.
"중장보병대 우익이 얼마나 버티어줄 수 있겠나?"
헤즈 경이 뻗치는 화를 애써 죽이며 물었다.
"한시간은 충분히......"
"지금 저꼴로?"
"......"
"적 좌군에 슈로 기사단이 보강되었다고 하니 히르직스 녀석의 기사단이 그쪽을 무너뜨리는데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리고 적 우군 기병대도 곧 보병대를 공격할게야. 잘못하면 앞뒤로 포위당하는 일이 생긴다."
"그럼......"
"일단 퇴각해. 수송선 이미 불렀으니까 30스타디아만 물러나. 500스타디아 후방에 사역병들보고 숙영지공사 시작하게 해놓았으니까. 녀석들 우군기병대 돌아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물러나야겠어. 우익하고 3열은 아직 그런대로 건재하니까 경기병들이 엄호하고 근위보병들부터 축차퇴각해서 일단 후방 숙영지라도 확실히 확보하도록 해."
무너진 중장보병대 때문에 전투의 승패를 가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에 자존심이 잔뜩 상해버린 케세크 경이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하임달의 결전 이후, 지금껏 단 한번도 무너져본 일 없던 남부 중장보병대의 대오가 일부나마 무너졌다는 치욕스런 불명예가 결국 그의 몫이 되고 만 것이었다.
"썅, 베아트릭스 그년이 10분만 일찍왔어도 이렇게는....."
책임전가를 할 상대를 찾아낸 케세크 경은 자신의 생각에 동의를 바라는 듯 사령관 헤즈 경을 힐끔 바라보았지만 헤즈는 그의 넋두리 따위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는 듯 줄곧 굳은 표정이었다.
"썅!"
시알피의 등뒤에 뛰어오르며 생각없이 왼손으로 말고삐를 움켜쥐었던 카렐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투창의 스핀이 어찌나 강했던지 끼고있던 가죽장갑을 찢은 건 물론이었고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있던 카렐의 손바닥 한쪽의 허물까지도 홀랑 벗겨내고 화상까지 입힌 모양이었다.
"좌군을 공격하던 적 기사단이 퇴각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적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카렐에게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온 토로 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이곳도 마찬가지야."
카렐이 손바닥의 피를 핥으며 대답했다. 적 중장보병들도 경기병들의 엄호를 받으며 정연한 대오를 이루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붕괴 직전까지 간 중장보병대의 모습에 적 사령관 헤즈 경이 일단 후퇴라는 결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이쪽 역시 페로를 비롯한 좌군이 붕괴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으니 양쪽이 사생결단을 하지 않을 양이라면 어차피 둘 중 어느 쪽이 물러나도 먼저 물러날 상황이었다.
"일단 기병들로 최대한 몰아붙여. 적 진형이 무너진 게 아니니 큰 피해는 입히기 어렵겠지만..... 제기랄, 보병들만 제값을 해줬어도 이지경은 아닐텐데......"
카렐이 손수건을 꺼내 피투성이가 된 왼손에 칭칭 감으며 불만이 그득한 표정을 지었다. 개전 이래 처음으로 동부기병들의 돌파력과 기량이 그 값을 톡톡히 한 일전이었지만 형편없는 보병들 때문에 충분히 얻을 수 있던 승리를 코앞에서 놓친 셈이었다.
"앞으로가 더 문제군. 저런놈들을 믿고 어떻게 싸워야 하지?"
퇴각하는 남부 보병들을 보며 눈치없이 환호성을 올리고 있는 동부보병들을 바라보며 카렐이 이를 갈았다.
결국 루사의 첫번째 대결에서는 어느쪽도 승리라고 단언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기병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낙오한 적 보병들을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적 보병대를 무너뜨릴 정도의 치명타를 안겨주지는 못한 것이 확실했다. 적을 꺾지 못한 것에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던 토로 경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녀석들이 마랄루로 돌아갈까요?"
"글쎄,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확실히 이겼다면 모르지만 양쪽이 다 이길 수 있는 문턱에서 밀려났으니.......대치상태로 재공격기회를 노리겠지."
무심코 하늘을 올려본 카렐은 방금전까지 하마탄이 몰려오던 동쪽 하늘에서 보이는 잿빛 비구름을 바라보았다. 이 건조한 초원에도 이제 끔찍스런 모래바람철이 끝나고 우기가 찾아오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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