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5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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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도 '가디언 카렐'과 '겁많은 괴상한 여자아이'를 헛갈리고 있던 페로는 '특별한 가디언'의 데뷔식이 1급 가디언과의 대결이라는 말에 아연질색할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페로가 미리 조사한 바로는 시아푸라는 그 1등급 가디언은 그 기량이 이미 특급에 손색없을만큼 대단한 녀석이라는 것이었다.
ㅤㅋㅞㄹ크에서 카렐이 자신을 막아주었던 카렐의 진짜 모습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페로는 이번의 데뷔전 역시 못된 베흔이 카렐을 죽이고 황실을 망신주려고 꾸민 음모의 일부라 마음대로 단정해놓은 후였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자신의 어마어마한 착각임을 깨달았을 때, 페로는 9토막난 시아푸의 참혹한 시체를 바라보며 자신을 따르던 그 귀여운 계집아이는 이제 황실, 아니 근위대의 무서운 살인기계가 되고 말았다는 현실을 어느정도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카렐이 남자 둘을 얹어놓은 끔찍한 거구였다면, 털이 숭숭 돋은 추악한 괴물이었다면 깨끗이 모든 것을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홀가분해졌을 페로에게 너무나 매혹적으로 자란 카렐의 모습은 도리어 저주에 가까왔다.
파티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카렐의 진짜 얼굴--- 페로가 세네피스 황후를 보며 지레짐작했던 그 모습과 너무나 비슷한---에 넋을 잃은 페로는 카렐을 어떻게해서든 자기 품으로 되찾아오고 싶다는 그 욕망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황실 가디언 신분인 카렐을 자신에게 데려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잘 알고있기에 그의 가슴은 더더욱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안봐도 뻔하지."
혼자 투덜거리던 부총리 페로 자이센은 149층의 황후 알현실로 바삐 걷고 있었다. 그동안 잠잠한가 싶었던 실리페 황후가 요즘들어 또다시 부마위를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심심찮게 해오면서 페로에게 두통거리를 안겨주고 있었다. 하지만 '종장' 신분인 페로는 자칫 가문의 멸문까지도 가져올수도 있는---이미 카파키 가의 멸문에서 그 끔찍함을 충분히 보았던----모험을 저지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대신급 중 대표인 지금의 부총리 신분으로도 이미 할아버지가 올라섰던 총리라는 지위의 바로 턱밑까지 가 있는 셈이었고, 단순하기 짝이없는 총리 슈엘러 경은 이미 페로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이상, 부마위 따위는 행여 황제가 자신에게 제위라도 물려준다고 맹세하면 모를까 페로에겐 관심 밖이었다. 아니, 직살나게도 오래사는 이놈의 수명개조 덕택에 저 게으르고 무능한 황제도 사고만 당하지 않는다면 천년만년 두고두고 살테니 황제 죽기만 기다리며 손가락이나 빨고있어야 할 '후계자'란 자리가 정말로 탐낼 가치가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 역시도 황후는 자신을 불러다놓고 부마위에 돌아올 떡고물들에 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것이 뻔했다. 하지만 종종걸음으로 149층의 황후 알현실에 다다른 페로는 그 문 앞에 서 있던 황후의 최측근 시녀의 얼굴과 마주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무얼 뜻하는것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페로가 자기도모르게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황후폐하께서는 급한일로 170층 '실크의 방'에 가셨습니다."
'제길할,'
페로가 무표정하게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저녁에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혹시나 하긴 했지만 오늘의 '안건'은 부마위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동안 웬일로 좀 조용하다 했더니만 저 못말리는 색광 황후가 결국 다른 남자들에게는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황궁 복도를 걷던 페로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혹시 카렐이 다가오지나 않을까 하는 상상에 빠져 있었다. 아직 카렐과 대화한번 해보지 못한 페로로서는 최소한의 '인삿말'정도라도 해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에 빠져 있었지만 눈빛마저도 조심해야 하는 답답한 공식석상이 아니라면 이 넓고넓은 황궁 안에서 카렐과 우연히라도 마주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황궁의 최고층인 170층에 위치한 '실크의 방'은 이전에도 황후와 여러번 함께한 일이 있던, 페로에게도 그럭저럭 익숙한 곳이었다. 원칙적으로 황제와 황제의 처첩들, 혹은 이들의 초대를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170층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그 은밀한 방은 오직 황궁 위를 향한 큰 천창만이 있을 뿐이었고 사방으로 몇겹의 휘장이 둘려쳐진, 꽤나 묘한 분위기의 황실 밀실이었다.
170층에 도착한 페로는 꽤나 익숙한 걸음으로 어느새 '실크의 방' 문앞에 다달아 있었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페로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흰 튜닉 차림의 웬 키큰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어, 엇......"
순간적으로 당혹한 페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문을 열어준 카렐은 얼핏 태연했지만 그 파랗게 얼어붙어있는 표정은 그 역시도 '하필 이순간' 페로와 마주쳤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서 들어오게나. 페로 자이센 경."
안에서 들려온 실리페 황후의 목소리에 카렐이 문 옆으로 조심스레 물러나며 페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흰 근위대 정복에 금빛 자수가 새겨진 눈처럼 하얀 튜닉을 걸치고있는 카렐의 아름답고 품위있는 모습은 바로 페로가 근 며칠간 페로의 잠자리를 괴롭히던 바로 그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황당함 그 자체였다. 페로는 덜덜 떨리는 발걸음으로 '실크의 방' 에 들어설수밖에 없었다.
"아아, 둘이 아는 사이겠군? 아주 어릴 때 친구처럼 지냈다지?"
얇은 휘장이 온통 둘러쳐진 침대 위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있던 실리페 황후는 고개숙인 카렐을 멍 하니 바라보는 페로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한손에 긴 카타나를 쥔 카렐은 다른 여느 가디언들처럼 황후의 침대 곁에 똑바로 서며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이리 오지 않고 뭐하나?"
황후가 아직까지 문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페로를 재촉하듯 손짓해 불렀다.
"다른 일로 부르신건줄......알았습니다."
페로가 카렐을 최대한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하긴, 같이 안한지 꽤 됐지?"
침대에서 일어선 황후가 페로에게 다가서서는 그의 머플러와 허리띠를 거리낌없이 끌르고 있었다. 난처함에 어쩔 줄 몰라하던 페로의 긴장감은 그의 바싹 굳어버린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그의 모습에 황후가 잠시 성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나?"
"아, 아뇨, 다만.....긴장해서......"
"풋, 여자 가디언 앞에선 차마 못하겠나보지? 하긴, 낯설기도 하겠군. 하지만 나름대로 짜릿하지 않아?"
페로의 웃옷을 모두 벗긴 실리페 황후는 그의 다부진 근육질의 가슴과 어깨에 연신 입을 맞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넌 구석에 가 있어."
"알겠습니다."
황후의 손짓에 태연하게 고개를 숙여보인 카렐이 요란스런 휘장 너머 방 한구석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의 무표정함이 자신의 난처함을 덜어주려는 배려인지, 아니면 차마 눈뜨고는 못보아주겠다는 분노의 표현인지 페로로서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뒤돌아서 멀어져가던 카렐이 자신을 돌아보며 억지스러우나마 가볍게 지어보인 입가의 미소는 그 중 전자에 가까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 도대체 왜이러는데?"
계속 뻣뻣하게 굳어있는 황후가 다시 짜증을 부렸다.
"그게......"
"그게 뭐?"
황후가 어물거리는 페로를 대뜸 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심상치않아보이는 페로를 재촉하려는 듯 손으로는 그의 바지를 끌러내리고 있었다.
"제, 제가 전립선에 이상이 생겨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의사 말이 한동안 자제하라고.....미리 말씀도 안주시고 갑자기 부르셔서......"
페로의 말이 영 의심스러운지 황후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쳇,"
황후가 뒤로 홱 돌아서서는 옷을 벗어던지고 도로 침대로 들어가버렸다.
"옆에 누워서 안아주기나 해. 제길, 사람 김빠지게 하긴....."
마지못해 옷을 벗고 침대에 누운 페로는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실리페 황후의 매끈한 몸을 품에 안았다. 그의 가슴에 안긴 황후가 아직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듯 페로의 몸을 더듬으며 교태를 부리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실크 장벽 너머의 카렐만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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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아니 네년이 잘루크가 누군지 감히 알고서 그따위짓을 한 건가?"
"모릅니다."
제네르를 자신의 막사에 불러들인 보병사령관 플로브 경은 도끼눈을 치켜뜨며 그를 무섭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묻은 갑주차림 그대로 이곳에 불려온 제네르 역시 기죽지 않으며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대답했다. 성이 나서 제네르를 몰아붙이고 있는 플로브 경의 뒤에는 뭣 씹은 표정의 잘루크 녀석이 고소하다는 듯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전 도중 우군사령관 제네르에게서 지휘권 박탈이라는 치욕적인 처분을 당했던 저 한심한 녀석이 창피한줄도 모르고 종장에게 그대로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잘루크가 내 장손자라는 걸 네년이 몰랐을리가 없겠지? 그런데 날 그렇게 엿먹여?"
"전 우군 총사령관으로서 할일을 다했을 뿐입니다. 잘루크 하크로딘 중랑장은 지휘능력에 문제가 있었고, 제 직권으로 지휘권을 정당하게 박탈했습니다."
"허, 그러셔? 잘난 유학자선생님? 가문 이름이나 빌려간 떨거지 하급귀족 주제에 감히 종가 적생자를 모독하고도 멀쩡히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나? 지금 정당한 직권이라고 그랬나? 내가 종장의 정당한 직권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모르고 그런 망발을 감히 입에 담고있나?"
플로브 경의 악담에 제네르가 그다지 곱지않은 시선으로 째려보았다.
"그새 아주 슈트란 가 사람이라도 된 듯 굴더군? 왜? 최고제후가 일원이 될 수 있다니 감격스럽던가? 훗, 내게 파혼시킬 권한.....아니, 약혼도 안했으니 파혼도 아니군. 내 말 한마디면 넌 슈트란 가하고는 빠이빠이야."
"마음대로 하시죠."
제네르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아무렇지않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런 제네르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플로브 경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네년을 네 천박한 격에 딱 맞는 어디 천하의 병신같은 새끼하고 결혼시켜버릴테다."
잔뜩 불쾌한 표정을 지은 제네르가 플로브 경을 다시한번 노려보았다. 종원에 대한 배우자 지정권이 종장에게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 야비한 종장의 말도안되는 협박에 제네르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뭐라 한마디 하려던 제네르는 갑자기 막사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쪽을 휙 돌아보았다.
"어서오십시오."
제네르가 얼른 카렐에게 고개를 숙이자 손자 잘루크를 서둘러 내보낸 플로브 경도 마지못해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카렐은 망토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이 막사 안의 묘하게 썰렁한 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척 제네르에게 웃는 낯으로 다가섰다.
"자네가 우군을 빨리 수습했다며? 정말 수고했네,"
"황공하옵니다."
"어디 다친데는 없고?"
"예. 그렇습니다."
팔을 활짝 벌려보인 카렐은 종장의 어처구니없는 협박에 기죽어있던 제네르의 어깨를 품에 다정하게 껴안아주고 있었다. 새 황제가 될 카렐과의 너무나 돈독한 친분을 과시하는 그 모습에 플로브 경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들고 있었다.
카렐의 의도를 잘 아는 제네르는 밖에서 엿듣고있던 카렐이 일부러 타이밍을 맞춰 이곳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 그의 품에 기대있던 제네르는 그 든든함에 자기도모르게 미소짓고 있었다.
"전하께서 많이 다치셨군요."
"별것 아냐."
왼손을 얼기설기 감싼 손수건을 다시한번 조이며 카렐이 아무렇지않게 대답했다.
"플로브 경도 보병대를 지휘하느라 수고하셨으니 오늘은 편히 주무시오. 뭐 날씨도 고약하고 적들도 한바탕 당했으니......한동안은 녀석들도 딴생각을 못할 것 같소이다."
제네르의 어깨를 껴안고 막사를 나서는 카렐의 뒷모습을 보며 플로브 경은 저 원수나 다름없는 종원 녀석을 당장은 자기 손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에 또한번 이를 갈고있었다.
막사를 나선 제네르는 시커먼 하늘에서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에 혀를 내둘렀다. 누런 황토모래가 잔뜩 섞인 진흙탕물에 가까운 이 빗물은 이 초원에는 봄마다 찾아오는 가장 반가운 단비였지만 한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신경쓰이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플라칼 가 제후군이 물러난 직후 동부연합군이 새로 마련한 대규모 숙영지는 루사 남쪽 초원 한중간의 약간 높은 비탈에 자리잡고 있었다. 적과 근접하고있는만큼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달려나갈 수 있도록 시야를 가로막지 않는 낮은 텐트들로 세워진 이 허름한 임시막사들의 위로 누런빛 찬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뼛속을 파고드는 초원의 쌀쌀한 날씨는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이 그나마 따뜻한 천막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또한가지 이유이기도 했다.
막사 백여개마다 하나씩 세워진 대형 취사천막에서는 지치고 배고픈 병사들을 위해 노예들과 사역병들이 저녁식사를 아예 직접 천막까지 날라다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플라칼 가 공격군을 물리친 이쪽의 사기나 분위기는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거의 반나절에 걸친 전투로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어느쪽에게도 '치명타'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서로서로 자기들이 이겼다는 어거지 주장을 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잠깐 쉬었다가 가시죠. 어차피 기다려줄 사람도 없으실테니."
망토를 함께 뒤집어쓰고 제네르를 기사단장 막사까지 데려다준 카렐은 그의 제안에 씁쓸한 표정으로 웃음짓고 있었다. 물론 기사단장 막사라야 다른 단원들 네명이 쓸 보통의 천막을 제네르 혼자 쓰는것이 고작이었고, 그 앞에 세워져있는 큰 깃발 정도가 조금 높은 사람이 묵는 숙소라는 것을 말해주는 정도였다. 어쨌든 '제후'인 플로브 경의 막사에 비하면 거지소굴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휴,"
제네르가 천막 중간의 화로에 주전자를 얹으며 손에 입김을 호 불었다.
"페로 경은 어디가셨죠?"
"부상 때문에 몸조리도 할 겸 일단 트라티누스 종가에 갔어. 명색이 총리인데 이렇게 날씨도 고약스러운 데서 다친 몸으로 밤을 보내게하기는 좀 그렇지않나. 거긴 쨍쨍하다니까 이삼일내로 곧 돌아올거야."
천막 위에 떨어지는 거친 빗물소리가 꽤나 소란스러웠다. 옆에 앉아있는 '주군'의 존재에서 새삼스럽게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제네르는 카렐을 돌아보며 가끔 이유없는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더럽고 거추장스러운 갑주를 벗어 옆에 밀어놓은 제네르는 주전자에서 덥혀진 뜨거운 버터차를 잔에 부어 카렐에게 내놓았다.
"북부에서 새 경기병단으로 천 명이나 확보하셨다죠?"
"응."
카렐이 짧게 대답했다. 카렐의 조금은 무덤덤한 대답에 엷은 웃음을 지어보인 제네르가 이번에도 카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있었다.
"지난번 슈로 기사단 때처럼 황후폐하 입김을 걱정하시는거죠?"
"자넬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어머님 사병조직이 될 뻔했던 기사단을 내 부대로 만들어줬으니."
"북부출신을 등용하는 데 전하께서 맞닥뜨려야 할 양날의 칼이죠."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 사람이 아닌 내 사람을 부대장으로 삼아야겠는데......마땅한 경기병단장감이 없단말이야."
얼굴을 잔뜩 찡그린 카렐이 버터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악으로 똘똘 뭉친 북부 저항군출신들하고, 거친 동부기병들하고......녀석들을 다 어우를 수 있을만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경기병 지휘관이 없어.....글쎄, 이미 틀이 잡힌 부대라면 상황판단 빠른 라손도 적임자겠지만 지금은 분위기를 압도할만한 강한 스타일의 지휘관이 필요해."
카렐의 한숨에 제네르가 씁쓸한 미소로 답하고 있었다.
"이야아, 여기 있었네?"
천막을 걷고 들어온 건 네피와 시로, 자이납이었다. 크지않은 천막 안은 누구하나 작은 덩치가 없는 이 5명 덕택에 순식간에 발디딜틈없이 꽉 차고 있었다.
"니 '보물단지' 머리쓰개 어디갔냐?"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하고 들어온 자이납의 모습에 카렐이 대뜸 물었다.
"헤헤, 비오는데 젖으면 안되잖아요. 막사에 고이 모셔놨죠."
"근데, 우베 녀석은?"
샤자한 공 부인이 오셨다길래 그거 구경한다고 가더라구요. 샤자한 공 부인이 끝내주는 미인이라니까 신나게 쫓아가더라구요."
시로가 제네르에게서 버터차가 담긴 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막문이 걷히더니 그 조그만 우베가 이 거구들 사이를 서둘러 비집고들어오며 화로에 손을 뻗었다.
"어휴, 추워,"
"뭐, 미인 구경하고 왔는데 몸에서 열이 펄펄 나야지 추우면 쓰나?"
카렐의 짖ㅤㄱㅜㅊ은 농담에 우베가 투덜대며 대답했다.
"쳇, 미인이면 뭐하냐구요. 남편하고 한번 껴안더니 그냥 막사에 들어가버리던데. 그림에 떡이지."
"그럼 너한테 윙크라도 해줄 줄 알았냐?"
카렐의 한마디에 당사자인 우베만 제외하고는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우베는 자기를 비웃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캬아.....역시 미인은 서부미인이 정말 최고란 말이야.....샤자한 공 부인도 서부 출신이시라면서요?"
"8제후가 출신, 알리아 아야톨라 부인. 네페티 부인 어머니였던 마하 사예브 발 부인하고 둘이서 서부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혔었지."
"푸헤헤, 나도 그럼 서부미인이네?"
자이납이 빗물과 모래바람에 헝클어져 떡이 된 머리를 연신 긁적거리며 떠들어대자 네피가 그를 향해 혀를 쑥 내밀었다.
"엑,"
그다지 화려할것도 없는 막사 안에서는 보잘것없는 버터차 주전자를 사이에 두고 간만에 오손도손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마하 부인이면......서부 3제후 사우드 발 부인 친동생이었죠?"
시로의 질문에 카렐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그러니까 사우드 부인은 네페티 부인한테는 이모가 되지."
"근데 총리각하하고 사우드 부인하고 곧 결혼할 것 같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가요?"
"글쎄, 아직 결정된 건 아니고......발 가 쪽에서 협력의 댓가로 총리한테 결혼을 요구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동부 말고 유일하게 지지의사를 표한 가문이니 총리도 함부로 거절하기도 난감한 상황일거야."
"근데 마하 부인이 투모카프 자이센 손에 끔찍하게 죽었다고 들었는데요? 자기 여동생 죽인 살인자의 손자하고 결혼하고 싶을까요? 나이 차이도 무지하게 날텐데......사우드 부인은 400살이 넘었잖아요?"
"그러니까 정략혼이란 게 요지경속 아니겠나. 그런거 다 따지다간 아무것도 못하지."
카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마지막 남은 버터차를 훌쩍 들이켰다.
동부연합군의 숙영지에서 남쪽으로 500 스타디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남부 플라칼 가 제후군 숙영지에서는 엄숙하다못해 살벌한 기운마저도 흐르고 있었다. 중앙의 거대한 사령관 막사 주변에는 이미 천여명이 넘는 병사들이 쏟아지는 빗속에도 불구하고 삼삼오오 모여 불안한 얼굴로 무언가 수군거리고 있었고, 특히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들 중에는 진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 끔찍한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왔을 경보병단 소속 병사들의 모습이 유난히 많이 띄었다. 이들 모두의 관심은 막사 안에 쏠려있었다.
"썅, 다 네년 때문이야! 구하러 오랬더니 전속력으로 달려오지는 못할망정, 느긋하게 걸어와? 내가 그 검은옷입은 마귀 녀석 손에 죽었으면 어쩔거야? 앙?"
베아트릭스의 멱살을 움켜쥔 케세크 경이 입에서 침을 튀기며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고 있었다.
"이거 놓으시라구요! 느긋하다니요! 한치앞도 안보이는데 말을 어떻게 달립니까! 기병대가 딱 달라붙어서 앞사람 등보고 전진하는 보병하고 같은 줄 아십니까? 그상황에서 부대 전체가 방향도 잃고 산산조각나는 꼴이 되면 어쩌란 말입니까!"
베아트릭스가 케세크 경의 팔을 거칠게 쳐내며 언성을 높였다.
"어, 산산조각? 그래, 니네부대 산산조각나건말건 내 상관할바 아냐, 명령을 받고 달려와 구하라면 산산조각나건 몰살당하건 구해야 할 것 아냐! 이 썩을 동부 잡종년아!"
"이제 그만하시죠. 케세크 경, 말씀이 좀 심하시군요. 다 끝난 일입니다."
둘의 싸움을 보다못한 히르직스가 결국 한마디 꺼낼 수밖에 없었다. 케세크 경의 원색적인 욕지거리에 흥분한 베아트릭스의 눈썹과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한 번 가볍게 두들겨준 히르직스는 아직까지 혼자 무어라 궁시렁거리고 있는 케세크 경을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실 자신의 실패에 대한 '희생양'이 하나쯤 필요한 케세크가 제정신을 차리기를 바라기는 아무래도 쉽지않아보였다.
베아트릭스와 케세크 경 간의 이런 팽팽한 신경전은 총사령관 헤즈 경이 입장하고서야 조금이나마 진정될 수 있었다. 그리고 헤즈 경의 뒤를 이어 거의 사색이 다 된 경보병단장 글라토프 플라칼 장군이 사령관 근위병들의 손에 거칠게 끌려들어왔다.
"다들 있었군."
헤즈 경이 쌀쌀맞게 입을 열었다.
"글라토프 경. 고개 좀 들어보게."
바닥에 꿇어앉혀진 채 벌벌 떨던 글라토프 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조금 들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자신이 가까스로 수습한 삼천명의 경보병들을 데리고 부대에 귀환했던 그는 그 즉시 근위병들에게 체포되어 사라진 이후로 도무지 보이지를 않아 지금까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던 터였다.
"이번 전투를 완벽한 승전으로 이끌지 못한 잘못은 전적으로 장군에게 있으니 그 책임을 순순히 지겠나?"
"하, 하지만......저도 이탈병을 막기 위해 최대한 애를 썼으니 그 사정을......경험없는 신병이 너무 많았고....."
"죽이되든 밥이되든 싸우다가 무너진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우리 플라칼 가 보병대가 적 기병 앞에서 싸움도 안해본 채로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친 건 여지껏 역사에 없는 일이야. 치욕스럽게 사병들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여기서 끝내주지. 전사에 준해서 쳐 줄테니 남는 처자식들 걱정은 말게나."
헤즈의 눈짓을 받은 근위병 한 명이 큰 도끼를 쥐고 그의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완전히 절망해버린 글리토프 경은 머리를 바닥에 붙인 채 벌벌 떨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건 좀 심했군......"
히르직스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베아트릭스 역시 잔뜩 굳은 얼굴로 헤즈가 혹시 막판에 자비라도 베풀지 않을까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헛된것에 불과했다. 헤즈가 이번 공격실패의 희생양으로 고른 사람은 부대들 중 제일먼저 무너진 경보병단장 글라토프 경이 되고 만 셈이었다. 헤즈 경의 가벼운 손짓에 그 근위병의 손에 들린 큰 도끼는 바닥에서 떨고있던 한 불쌍한 남자의 목을 그자리에서 몸과 떨어뜨려 버렸다.
착찹한 기분으로 자신의 막사에 돌아온 베아트릭스는 한쪽에 세워져있는 투창---그 검은옷의 괴물같은 놈의 손에 꺾여버렸던---을 또한번 바라보았다. 전투 직후의 브리핑시간에 녀석이 '등급없는 가디언 카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모든 지휘관들이 아연질색했지만 특히나 녀석의 손에 죽을뻔한 케세크 경과, 녀석을 바로 코앞에서 마주했던 자신의 놀라움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투창을 집어든 베아트릭스는 그곳에 남아있는 피흔적을 바라보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대화 한 번 나누어본 적 없는 그 사람의 특이한 시선에 묘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에게 당혹해하고 있다는 편이 좀 더 정확했다.
"우편물입니다."
병사 한 명이 그의 막사 안에 작은 봉투를 넣어놓고 사라졌다. '검열완료'라는 표시가 선명한 봉인된 봉투 안에는 작은 칩 한장이 들어있었고, 비엔 6번 행성의 주소와 어머니 엘룬 바툴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망가졌던 기분이 한결 나아진 베아트릭스는 칩을 재생기에 꽂아넣고 기계를 작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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