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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186화 (186/1,132)

< -- 186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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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주님 오셨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귀여운 딸을 번쩍 안아든 제롬 공은 아빠의 얼굴을 더듬는 이 아홉살배기 여자아이의 재롱에 한껏 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갈색눈을 반짝이는 이 꼬마아이는 제롬의 적장자에 남부 최고제후 후계자였고, '만일의 사태'에는 최고제후이며 종장인 그 아버지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소중한 존재였다. 제롬 공의 뒤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베흔의 입가에도 보일듯말듯 미소가 번져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오르테 라자루스 부인."

베흔이 딸과 함께 황궁을 찾아온 제롬 공의 부인 오르테에게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검은 피부에 품위있는 검은 원피스와 케이프를 입은 오르테 부인은 시어머니인 네페티 부인과는 대조적으로 꽤 날카롭고 매섭기까지 한 인상을 지닌 여인이었다. 황제령에서 '대업'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남편을 대신해 남부를 혼자 이끌어가고 있는 그는 4제후 중 가장 막강한 남부의 최고제후 부인으로 손색없는 품위와 위엄, 지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오르테 부인이 베흔에게 살짝 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세데스가 올해 1번도시 황실학교에 들어갑니다. 저까지 남부를 비울 수는 없으니 아빠하고 황궁에 있어야 할 겁니다."

"황궁에 드나드는 훌륭한 교사들과 시종들이 많으니 걱정 마십시오. 부인."

오르테 부인에게 웃음지어보인 베흔은 제롬 공의 품에 안겨있던 그의 딸 세데스 라자루스 델루지, 아니 자신의 '친손녀'에게 팔을 뻗어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무섭도록 큰 손과 날카로운 얼굴을 바라본 세데스는 그의 손을 피하며 아빠의 목을 와락 껴안고 있었다. 한번이라도 손녀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괜한 욕심을 부렸던 베흔은 자신을 무서워하는 손녀의 태도에 멋적은 얼굴로 뒤로 물러나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못써."

딸을 꾸짖은 제롬은 벌벌 떨고있는 세데스를 베흔의 품에 안겨주었다. 엎드려 절받기로 손녀를 안아보게 된 베흔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한 색깔을 띠고있는 어린 손녀의 붉은빛 머리카락과 자신을 닮은 유난히 큰 손을 눈앞에 마주하며 그의 입가에도 다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아이를 보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베흔이 오르테 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페티 부인께서 타르서스 별궁에 머무르고 계시니 남부에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들르십시오. 며느리와 손녀를 보시면 무척 기뻐하실겁니다."

네페티 부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베흔은 부인이 유난히 아끼던 이 손녀딸을 이용해서라도 돌아서버린 부인의 마음을 다시 되돌려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며느리인 오르테 부인은 '시어머니'를 언급하는 베흔에게 대뜸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님께서 더이상 제롬을 돕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르테 부인의 매정하기까지 한 한마디에 베흔이 입가를 조금 일그러뜨렸다.

"돕지 않으신다기보다는......서부 최고제후에서 밀려나신 충격이 크셔서 일시적으로 칩거하고 계신다는 편이......."

"그러시다면 왜 맏아들에게 안오시고 그 무도한 페로 자이센의 보호를 받고 계신겁니까? 그것도 당신 가족을 몰살시킨 작자의 손자녀석에게서 말이죠."

"그보다는 타르서스 지방의 보호라고 해야겠죠. 타르서스는 전통적으로 서부지역과의 관계가 돈독했으니......"

"어쨌든 그분께서 제롬에게 등돌리고 계신 한은 저도 그분을 시어머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저으기 놀란 제롬 공이 부인에게 무어라 눈짓을 보내고 있었지만 오르테 부인의 단호한 태도는 여전했다. 당돌하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베흔은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당장으로서는 도리가 없었다.

외부문제에만 온 신경을 쏟았던 남편 테번 공 덕택에 남부의 내정은 그간 거의 네페티 부인의 손에 맡겨져있다시피 했고, 어린 나이에 동맹지역인 서부에서 시집와 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남부 내에서 쌓아온 네페티 부인에 대한 지지나 호감은 황제령 출신으로 이제 막 최고제후 부인으로 올라선 오르테 부인이 감히 필적할 것이 아니었다. 오르테 부인은 서부에서 시어머니가 힘을 잃은 이기회에 남부에서도 시어머니의 영향을 거세해버리려 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내심 부아가 돋은 베흔은 틈나는대로 저 당돌한 '며느리'를 한 번 손봐주어야겠다고 내심 다짐하고 있었다. 세데스를 내려놓은 베흔은 그의 반짝이는 적갈색 머리칼과 유난히 큰 손을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세데스 역시도 이 '무서운 아저씨'의 생각외의 다정한 태도에 방금전처럼 벌벌 떨지는 않고 있었다.

"금색이네......예쁘다."

세데스가 베흔의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너무도 귀하고 소중한, 흔한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 아홉살배기 귀여운 손녀 앞에 쭈그려앉아 그 예쁜 얼굴과, 자신을 닮은 큰 손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베흔은 지금 이런 비슷한 순간을 옛날에도 한번쯤 경험해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묘한 느낌을 느닷없이 받고 있었다.

'내가 미쳤군.'

이유없이 착찹해지는 기분을 흔해빠진 데자뷰의 결과 정도로 애써 치부해버린 베흔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에 안기며 까르르 웃음짓는, 너무도 행복해보이는 영락없는 아홉살배기 계집아이의 모습에 묘한 섭섭함과, 이유없는 죄책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아참, 근위대장 동부에 간다고했지?"

서먹해진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제롬 공이 입을 열었다.

"내일 떠날 예정입니다. 샤자한 공을 만나봐야죠."

"그 중늙은이는 뭐하러?"

"이제 슬슬 협박을 시작해야죠. 매서운 맛을 좀 봤을테니......제가 중재자 명목으로 화친을 유도할 계획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더이상 '대제례'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거고, 이면으로는 더이상 페로나 카렐을 돕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야겠죠."

"화친이 아니고 사실상 항복선언이겠군?"

"그렇게 되나요?"

베흔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비가 얼마나 더 올 것 같답니까?"

샤자한 공과 함께 폭우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러 나와있던 카렐은 비가 들이치는 망토자락을 여미며 물었다. 방수가 되는 중갑주 덕택에 비 따위에는 별 관계없는 샤자한 공이 비를 그대로 맞으며 서 있는 카렐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앞으로 이틀정도 계속될것이라는군요."

"빨리 이곳을 마무리하고 탈라스로 가야 할텐데......"

카렐이 저으기 걱정스런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털어냈다.

"내일 낮에 우리 쪽에서 대대적인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어차피 매복이나 기습 모두 불가능하니 우리에게 유리한 타이밍으로 골라서 그대로 끝장을 봐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샤자한 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새 사령관을 맡고 치른 첫 전투에서 비록 승부는 가리지 못했지만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플라칼 군대의 진격을 일단 막았다는 데 샤자한 공도 기분이 꽤 좋아보였다. 게다가 이틀동안을 영내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서인지 다른 지휘관들처럼 '꺼칠해진' 모습도 그다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이곳의 식객 신분이라 제대로된 시설도 없는 하급지휘관 막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카렐은 사흘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해 엉망이 되어있는 자신의 몰골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빗속에서 등에 흰 깃발을 단 양측 비무장 사역병과 노예들이 지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시신을 거두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이미 이틀이나 계속된 작업이었지만 워낙 전장이 방대한데다가 비까지 오는 ㅤㄱㅜㅊ은 날씨 때문에 이제야 마무리수색을 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아군과 적군들 사이에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지만 양측 기병들의 감시하에 작업은 그럭저럭 순조로와 보였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가 어느정도입니까?"

"경기병 전사 천 백에 중장기병 3백, 보병 3천8백 정도. 용병대에서 천5백정도.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지만 의료상황이 양호하니 절반 정도는 내일 전투에 참가할 수 있을 겁니다. 후방에서 지금 대대적으로 지원병이 들어오고 있으니 이번만 넘어가면 상황은 호전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마랄루 인근 도시들에서 학살행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쪽을 탈출한 주민들 6만여명 중에 군 경력이 있는 5천여명이 그제 아침에 집단으로 트라티누스 가 보병대에 지원했다고 합니다. 그중에 신분도 확실하고 무훈도 있는 천여명은 당장이라도 실전에 투입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제르베 경이 꽤 기뻐하고 있더군요."

"꽤 쓸만하겠군요."

카렐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플로브 경에게 그 천 명은 별도부대로 편성하라고 말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빗속에 말없이 서 있던 샤자한 공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카렐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그리고오......여쭐 게 있습니다."

"뭐요?"

카렐이 눈가의 빗물을 털어내며 건성 되물었다.

"지금 서부를 전향시키기 위해 전하께서 애쓰고 계신 걸로 압니다."

"현실적으로 북부와 동부만으로 강성한 남부와 근위대를 막기는 어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손잡을데는....."

교과서적인 대답을 내놓던 카렐은 이 동부 최고제후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북부가 동부에 경제적으로 충분한 지원만 해 준다면 동부는 충분히 이전같은 군사력을 회복할 수 있는 저력이 있습니다."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 카렐이 샤자한 공을 힐끔 돌아보았다. 일핏 그럴싸하게 들리는 그의 말은 동부가 이전같은 강대함을 되찾을테니 북부에서는 직접 싸울 생각 말고 돈만 내라는 뜻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후 제국의 주도권 역시 동부가 쥐겠다는 야심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군대가 돈만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닙니다. 지난 전투에서 한심한 보병들의 모습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전사단의 보병대가 북부의 지원을 받아 옛 북부보병대보다 더 강화된 형태로 재건되고 있으니 동부는 제 곁에서 지금처럼 기병을 맡아주십시오. 여기에 서부까지 끌어들이면 승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카렐이 최대한 평상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서부까지 끌어들일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샤자한 공이 카렐의 의견에 다시 반기를 들고 나왔다.

"지금 리쿠 학장의 스승이었던 주페 태자가 어떤 작자였는지 아십니까? 2차 혼란기때 35만의 남-서부 연합군을 이끌고 북-동부에 항복을 받아냈던 그 당사자였죠. 서부의 주페 태자 세력 떨거지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달갑게 여길 사람은 지금 전하 수하의 북부 출신들 중에도 거의 없을줄로 압니다. 저희 동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샤자한 공의 거의 협박에 가까운 한마디에 카렐의 속에서 순간 부아가 확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주페 태자는 자녀 중에 경험있는 훌륭한 무장을 얻으려는 어머니 세나우스 2세 폐하께 등떠밀려 사령관을 맡았을 뿐이었습니다. 태자를 나무랄 일이 아니었죠. 실제로 동부 민간인학살을 종식시키고 전후 제후들에 대한 처형을 막으려 애썼던 건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까."

"리쿠 학장은 그보다도 한술 더 뜨는 인물이죠. 로노 장태자 전하를 대신해 주페 그 작자가 태자에 올라야 한다며 주사한 자가 바로 리쿠 학장 아닙니까. 세를 불리는 것도 좋지만 최소한 뜻과 이상이 맞는 사람을 모아들이셔야 합니다. 지금껏 200년이 넘게 복수심 하나만으로 살아온 그 정신병자를 전향시킬수도 없을 뿐더러, 설사 된다 하더라도 그 작자는 절대 전하와 어울릴....."

카렐이 샤자한 공을 살짝 째려보았다. 그가 알기로 이 최고제후 역시 자신의 과욕으로 자신이 지지하던 로노 장태자의 몰락에 한몫 거들었던 인물이었다.

"내가 장차 다스릴 제국의 일원이니 지방색이나 옛 일 따위를 따져 분열을 조장할 생각은 없소. 서부든 남부든 언젠가 나의 통치에 따를 제국민들이요."

갑자기 뻣뻣해진 카렐의 단호한 대답에 샤자한 공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물론 쓰고있는 투구 덕에 카렐이 그의 표정을 직접 보고있지는 못했지만 저자가 얼마나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있을지는 말하나마나였다.

그리고 카렐은 잘 알고있었다. 주페 태자와 코리온의 전력을 끌어들여가며 이런저런 말로 포장을 했지만 어딘지 믿음이 가지 않는 저 노련한 최고제후의 속내는 결국 이번에도 '파이를 남과 나눠먹지는 않겠다'는 것임을.

"어쨌든 저희 동부의 통일된 뜻은 그러하오니 알려드리는 겁니다."

마치 최후통첩처럼 쏘아붙인 샤자한 공이 말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총리각하의 혼인건에 관해 요즘 해괴한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동부제후들이 그 소식에 불쾌해하고 있으니 두분께서 그 헛소문의 근원을 찾아내 엄단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동부제후가 사람 중에서 새 황실의 부부인이 나올 것이라 굳게 믿고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허리를 굽히고 때를 기다리는 것에 이미 충분히 익숙해있는 카렐이었지만 말을 타고 멀어져가는 샤자한 공의 건방져진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렐은 순간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에는 댓가 없이 얻어지는 것은 절대 없는 법이었다. 심지어 황족으로서의 자존심조차도.

샤자한 공과 함께 본대로 돌아간 카렐은 사령관 막사 앞에 눈에 익은 파란색 셔틀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피익 웃음을 지었다. 막사 문을 확 열고 들어간 카렐과 샤자한 공의 앞에는 트라티누스 종가에서 돌아온 건강한 모습의 페로와 아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3일만에 확인한 카렐의 모습에 얼굴가득 웃음지은 페로가 포옹을 하려 두 팔을 벌려보였다.

"그만, 그만, 사양할께. 내 꼴 좀 보라구."

카렐이 깔깔대고 웃으며 페로의 팔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카렐의 지저분해진 몰골에 페로가 기가막힌 표정을 짓고 말았다. 비를 맞은 적갈색 머리카락은 이미 반쯤 헝클어져 있었고 꺼칠하고 더러워져있는 얼굴이나 옷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하면 제국 제일의 멋장이답게 이 비오는 날에도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검은 타이즈 위로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치마가 달린 흰색 실크 원피스에 붉은 케이프, 망토로 한껏 멋을 낸 페로의 모습이 완전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샤자한 공, 엔간하면 전하께 목욕탕 한시간만 빌려주시죠, 이게 뭡니까. 혼자만 깔끔하게 하고 계시고."

페로의 반쯤 원망섞인 농담에 샤자한 공이 머쓱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하께서 혼자만 목욕하실 수 없다고 고사하셔서.....저도 어쩔 수 없었죠."

그 더러워져있는 카렐의 가슴에 누군가가 갑자기 다가서더니 기꺼이 그 품에 안기고 있었다. 기겁을 한 카렐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메스 아씨, 옷 더러워집니다."

"같이 더러워지죠, 뭐."

머리에 했던 큰 드레싱을 풀어내고 가벼운 반창고만을 붙인 아메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황후 예정자'임을 확인시키듯 카렐의 옆에 바싹 붙어서서 그 관계를 과시하고 있었다. 페로가 샤자한 공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전투에는 꼭 참가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샤자한 공께서 직접 곁에 두시고 가르침을 주십시오."

"지난번에도 중군 선봉이셨다더니 이번에도 또 앞장서실건가요?"

"별수없죠."

아메스의 질문에 카렐이 빙긋이 웃어보였다. 카렐의 얼굴 곳곳에는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입고있는 수트에도 칼이나 창에 스친듯한 곳이 군데군데 널려있었다.

"아참, 페로, 새 장갑 갖다준댔지?"

"아아, 그렇지."

페로가 주머니에서 꽤 튼튼해보이는 새 가죽장갑을 꺼내 내밀었다. 카렐은 떨어져 너덜거리는 낡은 장갑을 벗고 새 장갑을 손에 끼웠다.

"내가 본 게 틀린 게 아니라면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이었을거야. 훗.....적군이지만 정말 탐날 지경이더군."

무어라 대화를 시작하려는 이들의 귀에 샤자한 공의 부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4제후 나람 칼리 눌레딘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카렐이 쫑긋해진 눈으로 페로를 돌아보자 그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샤자한 공이 입술을 깨물여 중얼거렸다.

"말씀드리는 걸 깜박 잊었군요. 마랄루에서 도착한 시신중에 경기병대 하급지휘관으로 참전했던 나람 부인 둘째딸이 있었습니다. 일단 실종으로 처리했었는데.....전사로 확인되어서 시신 수습하러 직접 온 모양입니다."

샤자한 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시 문이 열리면서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나람 부인이 제르베 경과 플로브 경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유감입니다......나람 부인."

샤자한 공이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뇨......가문의 딸로 자랑스럽게 죽었으니 됐습니다. 실종통보가 왔을 때......이미 마음의 준비는 했습니다."

딸의 시체를 확인하고 온 나람 부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가는 이미 눈물자국으로 엉망이었고 탁자를 쥐고있는 손끝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샤자한 공과 제르베 경, 플로브 경이 흐느낄 기운조차 잃어버린 그를 돌아가며 한번씩 껴안아주었다.

"죄송합니다. 부인."

페로가 마지막으로 나람 부인을 품에 안아주자 그는 결국 참고있던 울음을 또다시 터뜨리고 말았다.

"내 잘못일까요?......."

부인의 울음 속에 섞여있던 들릴듯말듯한 소리를 알아들은 건 그를 안고있는 페로와 카렐 뿐이었다. 페로의 가슴을 부둥켜안은 나람 부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 안긴 채 떨어지지 않는 나람 부인의 모습에 페로가 조금은 난감한 얼굴로 둘러선 동부제후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딸의 죽음에 상심해있는 그에게 이자리에서 핀잔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이곳은 연합군에 맡겨두고 돌아가 쉬십시오.”

"이번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한참 후에야 내놓은 페로의 위로인지 아닌지에 나람 부인이 그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며 중얼거렸다.

"예?"

"말과 갑주도 가져왔습니다. 제 직할 용병대 5천이 오늘저녁 여기 도착할겁니다. 오르마즈 경 휘하에 있던 북부보병대출신 용병들이니 쓸만할겁니다. 다음 전투에 보병대 선봉에 세워주십시오. 제가 직접 앞장서겠습니다."

북부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눌레딘 가는 전통적으로 북부에서 용병을 구해 주력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진 가문이었다. 연합군 구성때도 내놓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 보병대를 이번에 자진해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을 보아 나람 부인이 이번에 받은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든 나람 부인이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페로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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