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88화 (188/1,132)

< -- 188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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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칼 가 우군 쪽에서 휘하의 경기병대를 이끌고 스코프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베아트릭스는 히르직스의 상대로 외할아버지 카이두가 나오자 저으기 당황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부장들 중 어느 누구도 베아트릭스의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느끼는 난처함은 피해갈 수 없었다. 부장 루코프 녀석이 놀라 있는 대장을 의식한 듯 그를 향해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정말 거구네요, 휴우~ 저라면 일찌감치 심장마비걸려 쓰러졌을텐데, 역시 히르직스 경이시군요, 전혀 기죽지 않고 싸우는 것 보십시오."

베아트릭스는 사뭇 굳은 얼굴로 일기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거구의 카이두가 휘둘러대는 그 살벌한 대사의 위력에 빠르기로 소문난 히르직스도 아예 다가설 엄두조차 못내고 있었다. 도끼에 가까운 저 창은 설사 막아도 제대로 비껴내지 못하면 창 샤프트가 부러져버릴 것이 확실했다.

거의 숨쉴틈새도 주지 않은 채 대사를 무섭게 휘둘러대는 모습에 선제공격을 포기한 히르직스는 지구전으로 나가려 함이 확실해보였다. 그는 계속해 물러나는 자신의 뒤를 따라붙으며 공격을 퍼붓는 카이두의 창을 가까스로 비껴내기만 하며 계속 시간을 끌고 있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를 잘 알고있는 베아트릭스는 히르직스의 선택이 그다지 현명치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카이두는 저상태로 창을 족히 삼십분도 넘게 휘둘러댈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일기투가 계속되면서 전장의 긴장감도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둘의 결판이 쉽사리 나지 않자 헤즈 플라칼 사령관의 입도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저 썩을새끼 도대체 언제까지 싸우겠다는거야?"

지구전으로라도 승부를 내겠다며 계속 물러나고 있는 히르직스를 바라보며 헤즈가 버럭 신경질을 부렸다. 얼핏 본다면 틀림없이 히르직스가 밀리고있는듯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변변한 1대 1 싸움이라고는 단 한번도 해 본 일 없는 헤즈가 '이기기 위한 지구전'과 '밀리는 싸움'을 분간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제기랄, 저런 괴물이 있다니,"

헤즈 경은 자기도모르게 베아트릭스 녀석이 있을 우군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진격한다."

"예?"

"결판날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지금 진격한다고!"

"히르직스 경은......"

"알아서 도망치라고 해!"

사령부쪽에서 울린 진격나팔과 명령에 플라칼 가의 8만 대군이 일제히 전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썅! 뭐야?"

카이두와 어울려 한참 사투를 벌이던 히르직스는 자신의 싸움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아군이 선공한다는 통신내용에 아연질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동부제후군 중군의 1열 유목민 궁기병대 역시 무서운 속도로 돌진을 개시했다.

"썅! 망할 헤즈 새끼!"

히르직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상대방 선두는 궁기병이고 이쪽 선두는 보병대였다. 이대로 카이두와 싸우고 있다가는 아군보다 먼저 이곳을 덮칠 적 기병들에게 휩쓸려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히르직스는 상대방의 말에 투창이 달려있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녀석 몸통이 워낙 거구다보니 말의 달리는 속도는 중장갑을 한 자신과 별반 다를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섣불리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가는 등뒤에서 날아오는 투창에 몸이 꿰여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잇!"

카이두를 꺾는것을 포기한 히르직스는 대신 녀석의 안장에 달려있는 퀴버에 기습적으로 창을 내질렀다. 히르직스의 느닷없는 말 공격에 놀란 카이두가 얼른 대사를 들어 막았지만 이미 그의 창이 자신의 말 어깨에 달려있던 퀴버를 바닥에 쏟아버린 후였다. 카이두의 투창들이 바닥에 떨어져 흩어지자 기회를 잡은 히르직스는 말을 잽싸게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카이두가 바닥에 쏟아진 투창들은 아랑곳없이 그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히르직스의 갈색 준마는 중장갑의 주인을 태웠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쳇!"

동부제후군에서도 가장 앞서 돌진하는 우군의 선두를 달려오는 '검은 마귀' 카렐을 상대하는 불운을 떠맡은 플라칼 가 부대는 6천의 경보병단이었다. 보병 보강을 위해 네피를 보병대에 보내준 카렐은 이번에는 혼자 적들을 돌파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카렐은 일제히 투창을 던지는 5천의 경기병들과 함께 운없는 적 경보병들 앞에 그대로 뛰쳐들었다.

경보병들이 반사적으로 창을 치켜들었지만 이미 말에서 뛰어내린 카렐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대열 앞에서 어마어마하게 긴 검은 기병용 창을 회오리몰듯 휘둘러대며 앞을 가로막는 상대의 같잖은 창 정도는 산산조각내버리는 카렐 앞에서 그들은 대오을 무너뜨리던가, 아니면 멍 하니 서서 죽어가던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 물론 그들이 지휘관에게서 받은 명령은 후자였지만 이건 최소한 어느정도 '동등한' 적병과 맞붙어 따울 때 대오를 지키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들의 앞으로 제네르의 슈로 기사단과 3천여 동부기병까지 가세한 4천 5백여 중장기병들이 거칠게 몰아닥쳤다.

"경보병들이 몇분이나 버티어줄까요?"

좌군의 경보병단 쪽으로 시커먼 괴물을 앞세운 적 '돌격군'이 쳐왔다는 소식에 우군을 지휘하던 베아트릭스에게 부장 루코프 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삼십분 버티어주면 잘한 거겠지."

지난번 본 바 있던 카렐의 모습을 떠올린 베아트릭스가 짧게 대답하며 자리드를 뽑아들었다. 그는 지금 '남 걱정'을 해줄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국 이번 전투의 승패를 결정할 그쪽으로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의 앞을 향해 돌격해오고 있는 적 좌군은 경기병 4천에 중장기병 3천이었다. 뒤를 받쳐주고 있는 중장보병대 5천을 생각하면 충분히 맞상대할만한 전력이었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리면 후방의 기사단 8천이 이곳을 도울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적군이 자신들의 우익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이쪽에서도 우익에서의 돌파에 이번 공격의 사활을 걸고있었다. 서로가 상대방이 투창공격을 해올것을 알기에 흐뜨러지지 않는 한도내에서 대열을 최대한 벌려놓은 상태였다. 선두에서 달려오는 상대방 경기병대와의 거리를 체크한 베아트릭스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궁기병대 공격!"

선제공격은 전문 궁기병대를 보유한 베아트릭스의 차지였다. 가랑빗속을 날아간 플라칼 가의 투창에 동부 선두의 경기병들이 말에서 나동그라지자 뒤이어 두번째 공격이 개시되었다. 양쪽이 거의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 날린 수천발의 투창이 하늘을 우산처럼 덮으며 공중을 갈랐다. 그리고 사격을 이겨낸 동부 경기병대가 속도를 늦춰 후열의 중장기병 사이로 썰물처럼 빠지고 길을 열어주면서 '걱정하던' 적 중장기병대가 장창을 움켜쥔 토로 경을 선두로 모습을 나타냈다.

"퇴각!"

베아트릭스의 고함소리와 함께 플라칼 가 경기병단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는 저 무시무시한 동부 중장기병들의 돌격 앞에 자신의 경장 창기병들을 들이밀 정도로 무모한 바보가 결코 아니었다. 5천의 남부 중장보병대와 경기병대가 적들의 돌격을 1차 저지하면 뒤에 대기하던 1, 2 기사단 8천이 저들의 측면을 일제히 타격할 계획이었다.

약속된대로 뒤로 몸을 피하는 경기병단 뒤에는 섬뜩한 창을 앞세운 중장보병대가 정연한 대오를 이루고 토로 경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4천의 동부 경기병대가 그들의 머리 위에 새카맣게 투창의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몰려오는 3천의 동부 중장기병은 사실 5천의 보병으로 막기는 틀림없이 버거운 상대였다. 하지만 이 중장보병들의 오늘 역할은 그들의 무서운 돌격을 정지시키는 것이었지 적들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었다. 적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그정도는 알고 돌격하는 것이겠지만.

"썅! 막아봐!"

경기병들의 집중사격에 무너진 구석을 발견한 토로 경이 그 짧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무모할정도의 기질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단단한 마갑을 가슴에 두른 채 공중으로 뛰쳐오른 그의 흰 준마는 중장보병들의 미처 대오를 복구할 틈을 주지 않고 그 사이로 단신으로 무작정 뛰쳐들며 몇 명의 보병들을 말굽 밑에 짓밟아버렸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그 광적인 돌격에 남부 중장보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맛이 어떠냐! 이새끼들아! 다 죽어버려!"

토로 경은 마치 옛 291년의 복수라도 하듯 자신에게 몰려드는 남부 보병들에게 미친 사람처럼 창을 휘둘러댔다. 대장의 그 황당한 돌진에 힘을 얻은 다른 중장기병들도 뒤를 따라 적 팔랑크스와 차례대로 충돌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플라칼 가 중장보병-경기병 조합의 군대와 동부기병들간의 처절한 백병전이 개시되었다.

동부의 중군을 향해 돌격하던 플라칼 가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은 공격해오는 적의 속도가 평소보다 많이 느리다는, 아니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적 보병대의 우익 부분에 배치되었던 유목민 기병들이 반대편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병들이 이동하면서 적 보병대 우익의 '기병 보조군' 동부보병들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미친놈들아냐? 설마 우리하고 보병끼리 맞붙으려는건 아니겠지?"

코웃음을 치던 케세크 경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들기 시작한 건 적 우익쪽에 보이는 검은빛의 무언가---130년 전, 하임달의 결전에 참전했던 그를 끔찍하도록 떨게 만들었던---를 발견한 때였다. 큰 방패와 도끼를 든 1열에 이어 2열 병사들 이후에 쥐여있는 저 무시무시한 장창은 한심한 동부보병들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절대 아니었다.

케세크 경의 부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뭡니까! 도대체 저놈들은......."

그들 장창보병대 중앙에 펄럭이는 검은 깃발에는 아무 표시도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케세크 경은 저것이 한때 북부제후군과 카파키 가를 상징하는 색깔이었음을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아무 표시가 없는 가문깃발은 전투 후 귀환시 자신들의 대장이 전사했음을 나타낼 때 드는 일종의 조기였다.

"제기랄, 북부용병들이군."

케세크 경이 이를 악물었다. 양측 보병대들이 가까와오자 특이한 나팔소리와 함께 그들이 일제히 소름끼치는 장창을 일제히 앞으로 기울였다. 무려 6열 보병들의 창까지 삐져나와있는, 저 소름끼치는 고슴도치같은 진형은 접근전을 중시하고 짧은 창과 검으로 무장한 남부 중장보병들에게는 천적과도 같은 끔찍한 그것이었다. 게다가 제국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힘도 센 데다가 장병기 단병기를 모두 자유자재로 다루는 거친 북부 보병들은 1대1 난전에서도 밀리는법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약점이랄 수 있는 양익까지 기병들의 호위 받고있는 적의 저 무서운 진형에 정면으로 뛰어들 정신나간 놈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케세크의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괜찮아.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다른 쪽에서 밀어붙이면 돼."

케세크 경이 놀란 속내를 감추며 얼핏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6천여 유목민 궁기병들이 던지는 어마어마한 투창공격이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중장보병의 머리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뒤이어 일반경기병들까지 합세해 던지는 투창이 한번에 날아오는 갯수는 무려 만 개가 넘고 있었다. 아무리 잘 방어된 중장보병들이라도 이정도의 밀도로 날아오는 살인적인 투창공격에서 무사할수는 없었다. 유목민들은 거의 기는듯한 느린 속도로 전진하며 육중하고 느린 플라칼 가 중장보병들의 머리 위에 계속해서 중투창을 쏟아붓고 있었다.

"썅, 저 지독한 놈들,"

부하들이 계속해서 쓰러져나가는 모습에 케세크 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저 끔찍스런 접근시간도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적 중기병들의 돌격시간이 가까와졌음을 뜻하기도 했다. 유목민 기병대를 이끄는 페로의 큰 고함소리와 함께 셀림이 이끄는 3천의 중기병들이 바툴 가 정예병 2천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플라칼 가 중장보병대 우익으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돌격!"

창을 움켜쥔 4제후 나람과 용병대장 양쪽으로 마름모꼴 돌격진을 이룬 북부 용병 5천이 광기어린 고함소리를 지르며 긴 창을 앞세우고 대오를 맞춘 채 일제히 속보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기병돌격의 그 공포를 능가하는, 북부제후군의 장기인 밀집보병들의 장창돌격에 남부보병대 좌익 병사들은 이번에 자신들이 얼마나 불운한 위치에 배정받았는지를 깨달을수밖에 없었다. 북부의 창과, 남부의 방패가 충돌하면서 마치 천둥소리같은 충격음이 조금씩 굵어지는 가랑비 사이를 뚫고 전장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찢어지는 비명이 사방에서 그 뒤를 이었다.

"좌익 1열 팔랑크스 선봉대 무너졌습니다!"

카이두와의 일기투를 가까스로 접고 본대에 돌아온 히르직스는 다 마시고 난 수통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집어던지며 악을 썼다.

"썅! 저 미친 헤즈 새끼때문에 죽을 뻔 했어!"

일기투 내내 어찌나 긴장했던지 갑주 속에 가려진 그의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투구를 벗고 잠시 숨을 가다듬던 그의 귀에 그 '썩을 새끼' 헤즈의 명령이 들어오고 있었다.

"중장보병대와 경기병단이 적 좌군 기병돌격을 1차 저지했으니 당장 녀석들 좌군 기병들을 작살내고 보병대 후방을 쳐!!"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쳇."

히르직스가 망토자락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2기사단은 남동쪽에서! 1기사단은 동북쪽에서! 예정대로 적 좌군에 돌진한다!"

다시 투구를 눌러쓴 히르직스는 채 숨을 고를 새도 없이 8천여명의 중장기병들을 이끌고 베아트릭스가 적 기병들과 맞서고 있는 우군 쪽으로 말을 몰았다.

다시 말에 오른 카렐은 거의 산산조각난 적 경보병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측면에 웅크리고있던 적 3기사단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이 운없는 경보병단을 두토막냈으니 절반은 성공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플라칼 가' 정예병의 일원인 경보병단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진 건 카렐로서도 꽤나 뜻밖이었다. 경보병단 사령관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다더니 어쩌면 그 영향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 3기사단 4천여기가 남서쪽에서 공격해오고 있었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제네르 경!"

"예!"

"내가 앞설테니 적 기사단을 부순다."

"알겠습니다."

피와 먼지로 엉망이 되어있는 제네르가 카렐의 뒤로 천 오백여 슈로 기사단을 집결시켰다. 경보병대가 기대를 저버리고 일찍 무너져 버리면서 중장기병과 경기병이 적절하게 조합된, 만 명에 가까운 압도적인 동부기병들에게 순식간에 둘러싸이게 된 4천여 플라칼 가 3기사단은 이미 특유의 돌파력을 상실한 채 흩어져 집중사격을 막아내는데 급급하고 있었다.

선두의 카렐이 창을 치켜들며 먼저 달려나가자 돌격대형을 이룬 슈로 기사단 천 오백이 제네르의 큰 고함소리와 함께 그 뒤를 따라 돌진하기 시작했다.

"적 기사단장은 어딨나!"

"잡히지 않습니다!"

"쳇,"

투덜거린 카렐이 자신의 창을 높이 치켜들고 앞을 가로막는 두 명의 적 중장기병들을 그대로 말에서 떨어뜨려버리자 그 뒤를 이어 천오백여 슈로 기사단이 이미 와해되기 시작한 제3기사단 측면을 어마어마한 충돌의 굉음과 함께 그대로 반으로 토막내며 돌파해들어갔다. '검은 마귀' 카렐을 앞세운 강력한 일제돌격에 수백의 기사들이 그대로 말에서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병들과 어울려 싸우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적진을 그대로 뚫고나온 카렐과 슈로 기사단이 방향을 조금 틀어 또한번의 돌격을 감행하자 와해된 적 3기사단이 결국 진형을 무너뜨리며 뒤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떡하실겁니까? 계속 쫓으실 겁니까?"

경기병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도주하는 적 3기사단을 바라보며 헐떡이며 말을 몰아 달려온 제네르가 급한 어조로 물었다.

"어느 세월에."

짧게 대답한 카렐이 시계를 보았다. 공격 개시가 떨어지고 1시간도 훨씬 넘게 지난 상황이었다.

"적 보병대는 어차피 포기한다. 기사단과 경기병 2천을 이끌고 저 적 기사단 녀석들이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게 쫓도록 해. 난 나머지 기병 6천을 이끌고 적 보병대 후방을 돌아 적 우군 후방을 치겠다."

지구력 강한 적 중장보병들을 두들기는 것이 의미없는 시간낭비라고 판단한 카렐은 이번에 아예 양익의 적 기병만을 집중적으로 박살낼 참이었다.

"저새끼들은 뭐야?"

케세크 경은 중군 중장보병들의 돌파가 예상외로 늦어지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플라칼 가의 군마보다 상대적으로 힘과 지구력이 좋고 체구가 작은 말을 타는 유목민 기병들은 작은 단위로 순간적인 집결과 분산을 번갈아가며 뒤따르는 보병진들의 사이를 휘저으며 연합공격에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느린 중장보병의 팔랑크스는 바람처럼 자신들의 사이를 휘젓는 유목민 기병들에게 마땅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보니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치명타를 입히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그렇긴 해도 북부 용병대에 쩔쩔매고있는 보병대 좌익을 빼면 우익은 그럭저럭 적 보병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좌군의 아군 3기사단이 퇴각했습니다! 적 우군이 돌진해옵니다!"

부장의 보고에 케세크 경이 애ㅤㄲㅜㅊ은 말 배만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저 야만족들 쫓아다니지 말고 보병이라도 제대로 잡으라고 해!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녀석들 본진까지 부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기랄, 적 우군은 이미 우리 좌군을 부쉈다는데 히르직스놈은 뭐하는거야!"

케세크 경의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좌군의 3기사단이 퇴각했다면 그들을 부순 적 우군의 무려 1만에 달하는 기병이 어떻게 움직일지에 따라 보병대가 당장 반응해야 할 형국이었다. 케세크 경은 저 망할 '검은 마귀'년이 이번엔 제발 자신 쪽을 공격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토로 경이 이끄는 동부제후군 좌군은 조금 앞서서 카렐에게 박살난 적군의 3기사단과 마찬가지로 이미 와해 직전의 상황이었다.

물론 3천의 중장기병과 4천의 경기병을 이끌고 나온 토로 경은 '시간끌기'라는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5천의 적 경기병과 무려 8천이나 되는 적 기사단, 그리고 아직도 서남쪽을 건재하게 틀어막고 있는 중장보병 3천여명은 기병들 개개의 기량이 남부보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의 부대가 쉽사리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대가 와해되기 전에 카렐이 적 좌익을 먼저 깨부수었다는 소식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큰 고함을 올렸다.

선봉에서 직접 창을 휘두르며 분전하던 토로 경은 전 부대원들에게 통신을 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적 좌군이 부서졌다! 지금 그쪽의 전우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동료들이 녀석들의 뒤를 칠테니 조금만 견디면 된다!"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는 그의 주변에는 이미 호위기병들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적 좌군을 부순 아군이 이쪽을 도우러 오고 있다는 소식에 거의 패닉 상태까지 빠졌던 기병들의 몸놀림이 일제히 틀려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을 향해 겁없이 돌진해오는 기병을 그대로 창을 휘둘러 쓰러뜨린 토로 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적 기사단 사령관의 모습에 멈칫 하고 있었다.

"저놈이다!"

'최후의 발악'을 하는 적 좌군 기병을 상대로 짜증을 부리고 있던 히르직스는 결국 몇 안되는 호위기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분전중인 토로 경의 모습을 발견했다. 선명한 파란색 망토와 화려한 갑주로 보아 꽤 높은 녀석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히르직스는 평소의 습관대로 자신의 호위기사들과 함께 그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기사단 사령관 히르직스다! 네놈은 누구냐!"

"오호라! 드디어 네놈이구나!"

토로 경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창을 움켜쥐었다. 어디서인가 들어본 목소리임을 깨달은 히르직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의 이런 의아함은 토로 경의 어깨에 달린 방패에 선명하게 새겨진, 카파키 가의 문장인 현무의 형상에 곧바로 풀리고 말았다.

"전사단 병부대신이며 동부제후연합군 기병사령관을 맡고 있는 토로 로버넬이다! 드디어 배신자놈과 만나는구나!"

투구 속에 감추어진 히르직스의 얼굴에서 순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질세라 언성을 높였다.

"슈로 기사단이 황후의 사병이라고 착각하고 황상의 명을 어긴 건 네놈이 아니더냐!"

"두말 필요없다! 내손에 죽어봐라!"

창을 치켜든 토로 경이 앞뒤 볼것없이 옛 자신의 부장에게 돌진해가기 시작했다. 거의 미친듯한 토로 경의 기세에 히르직스도 바싹 긴장하며 자신의 창을 치겨들었다. 토로 경의 처절한 분노가 실린 첫 공격을 가까스로 방패로 받아낸 히르직스가 뒤로 주춤거리며 반격을 개시했다. 히르직스가 반사적으로 뻗은 창날이 토로 경의 팔꿈치, 갑주 틈새를 베고 지나가며 혈선을 그었다.

"네놈의 간과 창자를 꺼내 씹어먹어줄테다!"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도 모르는지 토로 경은 히르직스의 목을 향해 창을 뻗으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히르직스는 이마저도 어렵지않게 피해버리며 토로 경의 옆구리를 향해 창날을 날렸다. 토로 경은 또한번 몸을 찔렸지만 끄떡도 않으며 그의 창을 거칠게 올려쳤다. 그 엄청난 힘에 히르직스도 하마터면 얼굴을 베일 뻔 하고 말았다.

"많이 무뎌지셨구려. 토로 경."

히르직스가 거친 공격 일변도로 나오는 토로 경을 비웃듯 쏘아붙이고는 그의 가슴을 향해 일격을 날렸다. 힘이 실린 공격을 가까스로 쳐낸 토로 경의 공격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저새끼 완전히 미쳤군,'

상대가 흥분해 이성을 잃었음을 깨달은 히르직스는 계속 그의 공격을 받아내주며 놀리듯 고함을 질렀다.

"세네피스 그년 고문할때 지하감방 근위대놈들 무지하게 신났었다지? 그 이유를 아나?"

"이 망할 놈! 닥치지 못해!"

토로 경이 또한번 무지막지하게 창을 휘둘렀다.

"그 하늘같던 황후한테 돌아가며 그짓을 했다니 녀석들 꽤나 황홀하긴 했을거야."

"썩을 놈! 주둥아리를 찢어줄테다!"

"아냐, 아냐, 그 많은 남자들이 돌아가며 오입질해주는데 세네피스년이 더 좋아 미쳐 날뛰었다지? 소리까지 꽥꽥 질러가면서?"

"이, 이....."

순간, 눈이 돌아가버린 토로 경은 창이 부러질정도의 참격을 무작정 내휘둘렀다. 그의 창을 쳐내며 기습적으로 목을 찌르려던 히르직스는 토로 경의 내리치는 공격이 생각외로 묵직한 데 놀라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뿜어져나온 그의 광기어린 괴력에 밀린 히르직스는 이 짧은 시간, 자신이 뱉어낸 말들을 후회하고 있었다.

"악!"

히르직스의 창을 부러뜨리며 그대로 돌진한 토로 경의 묵직한 창은 그 원수같은 적의 왼쪽 견갑을 산산조각내며 주변에 피를 흩뿌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공격의 위력을 나타내듯 토로 경의 창 역시 끝이 부러지며 공중으로 솟구쳐올랐다.

"썅!"

상처가 심상치않음을 깨달은 히르직스가 허둥지둥 말을 돌렸다.

"이 비겁한 새끼! 서란 말이야!"

호위기병들의 뒤로 도망치는 히르직스를 바라보며 토로 경이 도끼를 집어들고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덤벼! 다 죽여줄테다!"

앞을 가로막는 적 기병들에게까지도 무작정 뛰어들려던 토로 경의 귀에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려온 카렐의 목소리는 구세주의 그것이었다.

"토로 경! 지금 적 후방에 거의 도착했으니 북동쪽 외곽으로 빠지도록 하시오! 적들을 남쪽부터 조여가겠으니 그쪽도 차단하시오!"

너무도 기다리던 목소리에 머릿속이 갑자기 아득해지기 시작한 토로 경은 그제서야 자신의 옆구리와 팔에서 쏟아지는 피를 바라보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어깨에서 피를 쏟으며 근위병들 사이로 돌아온 히르직스의 모습에 부장들이 질겁을 하며 물었다. 응급의료함을 진 기병이 부서진 견갑을 들추고 상처를 들여다보고는 급히 상처에 드레싱을 하며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사령관님, 후방의 사령부로 돌아가시는 편이......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썅, 됐어!"

히르직스가 신경질을 버럭 내며 옆의 부장에게서 창을 빼앗아들었다.

"후방에서 적 기병 6천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경기병 3천과 중장기병 3천입니다! 우리 좌군을 부순 녀석들 같습니다!"

"뭐?"

설사 아군의 3기사단이 무너진다 해도 적들이 중군 보병대 측면을 치면서 보병들이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줄로 믿었던 히르직스는 적들이 뜻밖에도 후방을 우회해 자신들 쪽으로 오고있다는 소식에 아연질색하고 있었다. 적들은 중장보병대를 무너뜨리는 것을 아예 포기한 것이 확실했다.

"제길할! 그놈들은 왜 보병대 쪽으로 안가고 이리로 오는거야! 2기사단이 막아! 쌍놈의 경기병대는 어딨어?"

"궁기병대는 외곽에서 지원사격중이고 창기병들은 적 경기병들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1기사단 나와함께 돌진한다! 녀석들 지원병 오기 전에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려!"

"사령관님! 그몸으로는....."

부장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히르직스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먼저 달려나가고 있었다. 3천여명의 기사단을 이끌고 북쪽의 적 좌군 잔여병력을 다시한번 무너뜨리려던 히르직스는 또한번 미친듯이 저항하는 적들과 마주쳐야만 했다. 배후를 지키러 간 2기사단 쪽에서는 남쪽에서 적의 '검은 마귀'가 앞장서 달려온다는, 처절한 비명에 가까운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이.....이런......"

'최후의 돌파'에 실패한 히르직스는 자신의 기사단, 그리고 베아트릭스의 경기병단마저도 적에게 남북이 모두 막혔음을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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