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90화 (190/1,132)

< -- 190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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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마랄루의 요새로 돌아온 플라칼 가 제후군의 분위기는 침통하다못해 절망 상태에 가까왔다. 지금까지 단 한번의 패전도 없이 이곳까지 승승장구했던 그들은 적 우군 기병대의 전격적인 돌파에 어처구니없을정도로 쉽사리 무너져버린 3기사단과 경보병단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특히나 북부 용병대와 바툴 가 부대에 당한 것만 빼면 거의 피해가 없이 나름대로 분전했던 중장보병단은 적 보병대 후열을 코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야 했던, 억울하기 짝이없는 결과였다. 더 억울한 건 그 느린 속도 때문에 퇴각중에 가장 큰 인명손실을 입은것도 바로 보병대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보니 패전을 불러온 기병대에 대한 그들의 원망은 말하나마나한 일이었다.

그나마 적 기병의 말굽에서 벗어나있던 중군 보병들은 그럭저럭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우군에 기병대와 함께 배속되었다가 얼떨결에 함께 포위되었던 5천의 중장보병들은 거의 귀환하지 못하고 적 기병 손에 사실상 전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헤즈 사령관은 마랄루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명령도 없이 전장을 무단이탈해 도주하고 기사단을 전멸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2기사단장을 끌어내 공개참수해 버리고 말았다. 당초에는 시간을 끄는 역할을 망각하고 너무 빨리 물러나버린 3기사단장도 함께 참수하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3명의 기사단장 중 2명을 참수하는 건 곤란하다며 뜯어말린 참모들 덕에 '죄질이 덜 나쁜' 3기사단장은 가까스로 목을 보존할 수 있었다.

어쨌든 사령관 막사에 들기 전부터 멱살잡이로 부대를 시끌시끌하게 했던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과 기사단 사령관 히르직스는 헤즈 앞에까지 불려나와서도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뭐? 좀 자세히 말해 봐!"

깜짝 놀란 히르직스의 호통에 베아트릭스의 '실종' 소식을 가져온 부장 루코프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장군님을 따라갔던 기병중에 2명이 죽어서.....제가 나머지 두 명을 이끌고 히르직스 타마르 장군님 후미를 호위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뒤를 따라오는 적 기병 둘과 접전을 벌이셨는데......그 뒤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깨에 응급처치를 받으며 가까스로 부대에 돌아온 히르직스는 계속 자리를 서성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남부에서는 유일하게 내놓을만한 경기병지휘관이었던 베아트릭스를 잃는 것이 플라칼 가에 얼마나 큰 손해가 될지는 그가 가장 잘 알고있었다.

장군들의 눈치를 살핀 루코프가 더듬더듬거리며 말했다.

"장군님이 할룩스 코드를 해제하신 것으로 보아서.....전사보다는 적 포로가 되신 것이 아닌지....."

"포로는 얼어죽을 포로."

케세크 경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자 히르직스와 헤즈 경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구요. 그 동부 잡종년이 히르직스 경을 썩 좋아했던 것 같지도 않고, 미쳤다고 경을 구하러 적진 한중간까지 뛰쳐들었겠소?"

케세크 경의 분별없는 말투에 히르직스가 얼굴을 약간 찡그렸지만 그의 말에 갑자기 의아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이 베아트릭스를 마땅치않아했던 것처럼 베아트릭스 역시 히르직스를 꽤나 떨떠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베아트릭스를 공개적으로 '미친년'이라 불러대며 못잡아먹어 안달이던 케세크 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포위망에서 빠져나오던 우리 보병들 말이 파란 망토 두른 우리쪽 장군이 적 주력군 쪽으로 미친듯이 달려갔다고 하더군."

"집어치시오. 지금 보병대 사병 따위의 말로 플라칼 가의 장군을 모독하려는 거요?"

히르직스가 케세크 경을 쏘아보며 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물론 그도 베아트릭스가 이뻐서라기다는 방금 전 패전의 책임을 놓고 옥신각신하던 그 감정이 그대로 남아서라는 편이 정확했다.

어쨌든 지금 이런 상황에서 '너무나 빤한 거짓말'로 조직에 분란을 일으키려 드는 저 안하무인의 중장보병단장을 그대로 놔둘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년이 동부 피가 섞였다는 것을 잊었소!"

"그래서요!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아는겁니다! 새삼스럽게 그게 왜요!"

"가족도 싹 다 죽었는데 녀석이 여기 미련을 둘 것도 없지않소!"

"녀석 어미가 있는 걸 모릅니까!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시라구요! 녀석은 동부로 돌아가면 갈갈이 찢겨죽지않으면 다행이라구요! 녀석이 그런 바보인줄 아십니까?"

히르직스의 언성도 케세크 경을 따라 높아지고 있었다. 적의 포로가 된 자, 그리고 적에 자진투항한 자는 그 결과로서는 별다를바가 없었지만 그 주변 사람에게 가해지게 될 운명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갈리는지를 히르직스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한참 얼굴을 붉히며 싸우고 있는 케세크와 히르직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사령관 헤즈 경이 갑자기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녀석이 정말 포로가 된 것이라면 동부놈들이 복수한다며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우고 잔혹하게 처형하겠지? 안그런가? 히르직스? 우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투항인지 아닌지를 놓고 골아프게 왈가왈부하지 않아도 동부놈들이 스스로 밝힐테니."

"그렇습니다."

히르직스가 씩씩거리며 케세크 경을 다시한번 째려보았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은 헤즈 경이 자신의 부장을 손짓해 불렀다.

"본가에 연락해서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 어미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해."

눈이 휘둥그레진 히르직스가 사령관을 휙 돌아보았다.

"뭐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녀석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따라서 그 어미 운명이 결정되겠지."

좌중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가라앉아버린 분위기를 추스리려는 듯 헤즈가 다른 주제로 입을 열었다.

"2기사단장이 공석이 되어버렸으니 이제 누굴 앉히지? 내부승진시켜야 하나? 지난번 세베토 경도 그렇고 웰시 경까지 지휘관급이 많이 전사해서 마땅치가 않은걸?"

"릴라크 예리노프 동서를 불러오죠."

히르직스의 대답에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뜬 헤즈가 중얼거렸다.

"막내 제수씨? 이제 나올만 한가? 나올수만 있다면야......"

"출산하고 5개월쯤 지났으니 이제 나올만 할 겁니다. 루시도프 처남이 워낙 아이도 좋아하고 가정적이니까 아이는 혼자 잘 돌볼 수 있겠죠."

케세크가 얼굴을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루시도프 그새끼, 도대체 플라칼 가 종가 적생자 맞긴 한거야. 도대체 하는 짓거리 하고는......"

"그정도 천사표니까 릴라크 그 성깔 다 받아주죠. 최고의 전사 하나 가문에 붙들어두고 아들까지 하나 낳아줬으니 있으니 그정도면 가문에서 할일은 다 한 것 아닙니까."

히르직스의 조금은 조롱섞인 농담에 웃음이 번지면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잠시나마 풀어지고 있었다.

술잔을 높이 들어올린 카렐이 동부제후들을 돌아보며 크게 웃음지어보였다. 제일 먼저 잔을 치켜든 최고제후 샤자한 공을 따라서 처음으로 자신의 땅을 지켜내게 된 2제후 제르베 트라티누스 경과 보병대를 총지휘한 3제후 플로브 하크로딘 경, 용병대를 이끌고 남부보병을 가장 훌륭히 저지한 4제후 나람 부인까지, 모두가 첫번째로 거둔 큰 승리에 잔뜩 도취되어 있었다. 카렐과 페로는 서로의 머리 위에 술을 확 쏟아붓고는 힘있게 껴안고 있었다.

"이번에 적 기병대가 치명타를 입었으니 앞으로의 전투는 한결 쉬워질겁니다."

"모두 장태자 전하의 공이십니다."

플로브 경이 고개를 숙여보이자 카렐이 손을 가로저으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 여러분의 공이겠죠."

단상에서 내려온 카렐은 술로 범벅이 된 몸으로 샤자한 공부터 제후들을 하나하나 껴안아주었다. 제후들로부터 처음으로 제대로된 '장태자' 대우를 받고있는 그의 모습에 미래의 배우자 아메스와 부상을 입은 토로 경, 제네르가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인지 뭔지 그 잡은 년은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한참 좋은 분위기에 튀어나온 제르베 경의 눈치없는 질문에 카렐의 한참 밝던 표정이 조금 굳어지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녀석을 저희 가문에 인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렐은 이번엔 샤자한 공을 힐끗 돌아보았다. 잘못하면 슈트란 가와 트라티누스 가 사이에 '베아트릭스 쟁탈전'이라도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렐이 베아트릭스를 제후군에 넘겨주지 않고 직접 데리고 있는 또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샤자한 공도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눈치없이 떠들어대는 제르베 경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제르베 경은 고집스런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가문 최고재판소에 넘겨서 정식 재판을 받도록 처리하겠습니다."

표정을 살짝 찡그린 카렐이 즉시 대꾸했다.

"그자는 플라칼 가 지휘관이고 정식 포로요. 명령을 따르는 일개 지휘관이었던 그에게 암살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지우기는 어려울 거요. 지난번 일도 플라칼 가에서 자신들의 소행임을 공개선언한 이상 범죄사건이라기보다는 교전행위로 보아야 할 것 같소. 이 사건에 공개재판을 열어서 그자에게 책임을 묻는 건 플라칼 가 지도부에 면죄부를 주는것과 뭐가 다르겠소?"

카렐의 대답에 제르베 경이 발끈 하고 있었다. 말이 '정식 재판'이지 종장을 죽인 베아트릭스에게 선고될 형은 보나마나한 것이었다. 참수형은 턱도 없을테고 유목민 귀족들 사이에서 그나마 명예로운 처형으로 치부되는 말에 밟혀죽는 것 또한 내려지기 힘든 것이었다. 아마도 사지절단형이나 팽형같은 흉칙한 처형이 내려질 것이 뻔했다.

샤자한 공의 눈짓을 받은 제르베 경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도 어떤 식으로건 그 댓가를 치르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건 아직 생각해 본 일 없는데, 명령받은 군인에게 살인책임을 묻는다는 건 영......"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던 카렐이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대신......두 가문에서 녀석을 데려가 심문할 수 있도록 해 주겠소. 공동으로 하든 따로따로 하든 상관없지만 가혹행위를 가하지 않는다는 약속만 해주시오."

카렐의 '타협안'에 제네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렐에게 바싹 다가선 제네르가 걱정스런 얼굴로 귀엣말을 건넸다.

"전하, 그건 지켜지기 어려운 약속일 듯 합니다. 차라리 슈트란 가라면 모를까 종장이 죽은 트라티누스 가 같은 경우는 가만놔두려 들지 않을겁니다. 막상 해친다면 나중에 또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전하께서 따질 수단도 없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되면 전하의 위신만....."

제네르의 간언을 짐짓 못들은 척 한귀로 흘려버린 카렐이 입가에 잔뜩 미소까지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게 충성스러운 두 가문에서 '내 포로'에 마음대로 손을 대는 무례한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제르베 경이 저리 원하니 내 트라티누스 가에 먼저 보내드리리다."

축하파티를 끝내고 페로와 나란히 사령관 막사를 나선 카렐은 제대로된 숙영지 공사가 한참 마무리중인 루사의 초원을 빙 둘러보았다. 이미 어두워진 숙영지 곳곳에는 감시탑과 임시 조명이 황량하기까지 한 초원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공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술로 더러워진 갑주를 벗어놓은 페로는 평소같은 비단포에 화려한 악세사리를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그는 입고있는 화려한 옷이 행여나 비에 젖을까 우산을 든 카렐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카렐이 깨끗한 새 막사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기 덕도 얼마 못보고 이번엔 탈라스로 떠나야 한다니 섭섭한걸."

카렐이 옷에 묻은 술을 털어내며 웃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투덜대지 말고 가서 목욕이나 해. 명색이 장태자 꼴이 그게 뭐냐."

"알았어, 알았어."

카렐이 여전히 잔소리를 늘어놓는 페로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페로는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카렐의 손길을 느끼며 또한번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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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을 끝내고 돌아온 페로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무능과 독단으로 휘청거리고 있는 슈엘러 경을 대신해 총리로 오르는 것이었지만 멍청이같은 황제는 여전히 페로를 부마로 삼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허울뿐인 자리인 부마는 도리어 베흔을 비롯한 그를 지지하는 남-서부 지방제후세력들에게 페로를 공격할 명분만 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에 비하면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종신직에 가까운 '총리대신'은 저 망할 근위대장보다 두 단계나 높은 1품직의 고관이었고, 각지역 최고제후들과 같은 반열의---실질적으로는 한단계 높은---세력자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페로는 황권을 농락하고 있는 슈엘러 경을 몰아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내던지고 있는 황제의 멍청함에 또한번 실망하며 '공주를 선택하라'는 황제의 무언의 압력을 빠져나갈 수 있는 핑게거리만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난처함에 주변을 둘러보던 페로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아닌 카렐이었다.

그러다보니 페로가 카렐을 '선택'하던 그순간까지도 그는 이 등급없는 가디언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도리어 110년만에 되찾아온 이 '괴상한 여자아이'를 자신의 여자로 할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얼토당토않은 기대에 들떠 있을 뿐이었다. 카렐의 밋밋한 가슴과 좁은 엉덩이는 카렐 역시 다른 가디언처럼 2차 성징이 있기 전에 완전히 거세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아직 거세당한 여자를 본 적이 없는 페로는 그것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카렐은 아직 가디언이 아닌, 한 명의 여자일 따름이었고, 카렐이 여지껏 나온 가디언들 중 최강이라는 말조차 그에게는 그다지 의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 '카렐과의 첫날밤'만을 상상하며 그날 보여줄 '검은 상자'만을 매만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읽어보십시오."

페로 관에 온 바로 다음날, 카렐은 직접 북쪽 사랑채를 찾아와 작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전날, 베흔이 보내온 토막시체 사건으로 내내 의기소침했던 카렐을 애써 달래주었던 페로는 카렐이 행여 '연애편지'라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어린애같은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지만 생각외로 카렐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뭔데?"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도움이 될 겁니다."

자신을 부르는 카렐의 호칭에 페로가 다시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만 있을때는 자신에게 그냥 이름을 부르라며 신신당부했지만 카렐은 영 익숙치 않다며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고집하고 있었다. 생각없이 쪽지를 펼쳐본 페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카렐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총리대신 슈엘러 경은 90여명의 첩들로 하렘을 만들면서 재산낭비가 심해 가문 종원들로부터 많은 비난에 직면해 있습니다. 가문의 부채가 심각한 수준이어서 뒤로 직계 종원들의 재산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막강한 쉐너 가와 적이 되는 것은 현명치 않으니 슈엘러 경의 여동생을 한 번 만나보십시오. 야심이 크고 가문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니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게......어디서 난 정보지?"

"전 어제까지도 근위대 보안국 최고 기밀문서에 접근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보여드린 건 올해 3월 4일에 보안국 제11과에 접수된 동향문서의 일부분입니다."

"네가.....적어온건가?"

"아닙니다. 그냥 머릿속에 넣고 있었습니다."

"이......계보들하고 부채 리스트를 몽땅 다?"

"예."

페로는 잠시 얼떨떨해져 있었다. 수백가지 꽃이름들이 그득하던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보안국의 어마어마한 문서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도저히 믿기지않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에 한참 기뻐하려던 페로는 덜컥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카렐에게 꽤나 조심스런 말투로 물었다.

"보안국에서......내 동향은 어느정도까지 파악하고 있지?"

"거의 대부분입니다."

카렐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출생부터 동부에서의 생활, 수련장 규모나 구조, 체계, 학업성적이나 4제후 나람 부인과의 파혼과 낙태, 실리페 황후와의 관계, 저택의 규모와 구조, 심지어 섹스 스타일과 식사습관까지 모두입니다. 보안국 제2과 앙그라 팀 관할입니다."

카렐이 자신의 여자관계까지도 너무도 무덤덤하게 말하자 페로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페로는 서둘러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수밖엔 없었다.

"그......총리 여동생이 원하는 게 뭔데?"

"5천만골드 정도만 동원한다면 쉐너 가의 급한불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여 그에게 장관직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쉐너 가와 타협이 가능할 것입니다. 어차피 슈엘러 경의 퇴진은 기다리기만 하면 이루어질 시간문제지만 주인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총리로 오르셔야 할 형편 아니십니까. 덧붙여 적이 될 수도 있는 쉐너 가를 우군으로 만들 수 있으니 시도해보심이 좋을 것입니다."

페로는 마음만 같아서는 '너무나 기특한' 카렐을 확 껴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제 선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지금까지 믿음직한 수족 한 명 없이 혼자만의 고분군투로 지금까지 가문과 조직을 이끌어온 그에게 '머릿속까지 무언가 특출난 것임에 틀림없는' 카렐은 단순한 가디언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개개가 용맹은 하지만 지휘력에 있어서만은 어딘지 믿음이 가지 않는, 자신의 5천여 가디언들에게도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음에 틀림없었다.

"고마워, 카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페로는 카렐의 앞에 무릎을 마주대고 앉아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렐이 어색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100년동안......너무 힘들었어....."

"그래, 알아. 나도 알아."

페로는 자신의 앞에 꿇어앉은 카렐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그는 자신이 카렐의 그간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카렐은 100년동안의 고통의 와중에도 몸도, 마음도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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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흔 그새끼 오는 날짜 단단히 잘못잡았군."

카렐이 피식 웃음지었다.

"딴에는 생각해서 잡은 날짜겠지."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지만 거지소굴같던 지난번보다 한결 나아진 시설의 새 숙영지에 자리잡은 지친 병사들은 오랫만의 꿀맛같은 휴식에 빠져들어 있었다. 압축을 풀어놓은 이동용 막사들은 충분히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었고, 유목민들도 큼직한 겔에 옹기종기 모여 술과 양젖을 나누어마시고 있었다.

슈로 기사단의 숙영지 중앙을 걷던 페로가 카렐에게 물었다.

"네 막사는?"

"난 아직 천막살이야. 나 이동주택 무지하게 싫어하는거 알잖아."

"하여간, 취향도 별나."

페로가 입을 삐죽거렸다. 카렐이 손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기껏 두세사람 들어갈만한 야전용 천막이 숙영지 울타리에 기대 세워져 있었다.

"그래도 신소재로 내가 직접 만든거라 방풍방음은 잘돼. 익숙해지면 살만하다구."

카렐이 천막 한쪽을 걷으며 안쪽을 보여주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한 두툼한 매트리스 위로 중간에 놓인 자그만 화로와 잡다란 물건들이 들어있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 책과 옷가지가 들어있는 상자 한쪽으로 온갖 짐승털을 엮어 카렐이 직접 짠 요와 담요가 고작이었다.

"낭만적이긴 하네."

페로가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둘을 멀찍이서 줄곧 바라보던 샤자한 공이 페로를 부르고 있었다. 페로와 함께 베흔을 만나러가는 그 역시도 이미 비단옷으로 다 갈아입은 후였다.

"총리각하, 빨리 오시죠. 베흔은 이미 거의 도착했답니다."

"수고해. 내일 낮에 온댔지?"

천막 안에 엉덩이만 궁색하게 들여놓고 앉은 카렐이 신발을 벗어 뒤집자 안에서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혀를 쑥 내밀어보인 페로가 뒤로 휙 돌아섰다.

"내일 보자."

"다녀와. 난 간만에 목욕이나 해야겠다."

공용 샤워장에서 며칠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몸을 씻고 나온 카렐은 세탁한 옷가지들을 껴안고 재빨리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가벼운 흰 가운 차림의 카렐은 행여나 누가 볼까 후다닥거리는데 또한번 그의 놀라운 달리기실력을 이용하고 있었다.

"훗,"

약간 열려있는 천막 입구를 보고는 카렐이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 그 틈새로 매캐한 연기와 함께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덜 마른 땔감을 넣으셨군요."

천막 입구를 걷으며 카렐이 중얼거렸다. 매운 연기가 솟는 화로 앞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던 아메스가 멋적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전 그냥 오실 때 따뜻하게 해드리려고......"

여전히 웃는 낯의 카렐은 화로의 불구멍을 조금 열어 천막 밖에 내놓았다. 젖어있던 땔감들이 연기와 함께 말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카렐은 아메스와 나란히 천막 입구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 상처는......"

"이젠 괜찮아요."

상처를 어루만지는 카렐의 손길에 아메스가 살짝 미소를 흘렸다. 목이 깊이 패인 흰 실크가운 위로 섬뜩할정도의 힘줄과 굵은 핏줄이 드러난 카렐의 그다지 '예쁘지는' 않은 강건한 목이 그대로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카렐과 마찬가지로 방금 목욕하고 온 듯 아직 축축한 아메스의 머리카락에서 묘한 향수 냄새가 풍겨오자 카렐이 조심스레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천연 사향이군요. 후훗,"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카렐의 속삭임에 아메스가 다시한번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을 거쳐 귀 뒤와 목까지 샅샅들이 그 향취를 즐기는 카렐의 태도에 아메스가 벌써부터 조금 흥분했는지 입을 조금 벌린 채 옅은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카렐이 다시한번 속삭였다.

"방음 되는 천막을 치길 잘했군요. 그다지 세련된 곳이 못되어서 탈이지....."

"독특하고 좋은데요."

카렐의 날카로운 시선을 살짝 피해버린 아메스가 마른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렐은 땔감이 거의 마른 화로를 다시 천막 안으로 들고들어왔다. 천막을 단단히 잠그고 따라들어온 아메스가 화로 내용물을 뒤집고있는 카렐의 허리를 뒤에서 어루만지고 있었다. 화로 안에서 뿜어나온 따뜻한 공기가 좁은 천막 안을 잠깐새 훈훈하게 만들었다. 어두컴컴한 천막 안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만 가까스로 구분될 뿐이었다.

"무슨 향을 쓰신거죠?"

반 쯤 드러난 카렐의 가슴에 뺨을 부비며 아메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랑입니다. 몸에 피냄새가 배서 항상 향수를 써야하죠."

"전하의 피냄새섞인 체취는 절 미치게할만큼 자극적이죠."

카렐의 손이 막 그의 가슴을 드러내려는 순간, 할룩스가 꽤 소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받지 말아요."

아메스가 카렐의 손을 움켜쥐며 쥐어짜내듯 말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카렐은 아메스의 몸 위에 털가죽 담요를 덮어주며 낮게 말했다.

"잠깐이면 될겁니다."

아메스를 자리에 편하게 눕혀준 카렐은 잠자리에서 엉금엉금 기듯이 빠져나가 옷을 단정히하고 할룩스를 집어들었다. 완전히 삐져버린 아메스는 이불을 홱 뒤집어쓰며 뒤로 돌아누워버렸다. 할룩스 안에서 나타난 건 아니나다를까 '단골 훼방꾼' 우베와 제네르였다.

"큰일났습니다, 전하,"

"뭐가? 지금 잠들 안자고 뭐하나?"

카렐이 잔뜩 짜증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을 인수해간 트라티누스 가에서 지금 가혹행위를 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예?"

우베가 카렐의 너무나 태연한 태도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카렐이 무뚝뚝하게 다시 물었다.

"어느정도인데?"

"장군을 데려간 기사단 장교 말이 지금 집단폭행을 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말려도 듣지도 않고......"

"죽을 정도만 아니면 그냥 놔둬."

"무슨 말씀이신지......전하께서 가혹행위를 하지 말라고......"

우베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우베를 급히 밀치고 나선 건 제네르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하와는 연락이 되지 않은 것으로 해두겠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제일먼저 간파해내는 제네르의 모습에 카렐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까 지시한 거, 남부에 있는 장군 어머니 엘룬 바툴 부인 찾아내라는 건 어떻게 됐지?"

"마스터 케스난이 지금 남부길드에 부탁해 찾고 있다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소식이 올 겁니다."

"그래, 알았다."

할룩스를 끊은 카렐은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뾰로통해져있는 아메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메스 황후폐하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군요."

담요 속으로 파고들어가 아메스의 등에 몸을 바싹 붙인 카렐이 그의 목 뒤를 가볍게 깨물자 그 큰 몸에 폭 감싸여진 아메스는 긴장감에 몸을 조금 움츠렸다. 카렐은 이미 반 쯤 벗겨져있던 아메스의 어깨를 완전히 끌러내리고 어깨와 겨드랑이에도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아메스는 그제서야 카렐 쪽으로 조금 돌아누우며 그의 눈을 한 번 흘겨보았다. 그런 아메스에게 카렐이 여전히 뻔뻔스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눈동자가 어머님을 꼭 닮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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