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1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
.
.
베흔의 기분이 최악일 것은 뻔한 노릇이었지만 그가 기분을 그대로 드러낼 정도로 서툰 인물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샤자한 공은 잘 알고있었다.
"이곳에서의 대화만 끝내면 플라칼 가 쪽으로 갈 예정입니다."
베흔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플라칼 가가 패전하고 난, '최악의 타이밍'에 협박이라고 하러 온 건 사실이지만 베흔 역시 당근은 없이 채찍만을 들고 찾아온 건 결코 아니었다. 무어라 입을 열려는 베흔의 앞에서 샤자한 공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선대폐하 즉위 이후 220년간 평온하게 치러온 대제례를 이제와 문제삼다니, 치졸하기 짝이없다고 전해주시오."
"그쪽에서는 대제례에서 '복수'의 의미만 빼준다면 그다지 문제삼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대제례에는 애시당초 복수의 의미따윈 없소이다."
샤자한 공이 차분하기로 소문난 그답지않게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꾸했다.
"또한 동부가 황제령의 제위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것을 타 지역이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할 겁니다. 작금의 사태 역시 그들 눈에는 2차 혼란기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죠."
베흔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동부는 영향력을 행사할 의사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소."
"그 뜻만 남부에 명확히 표현해주신다면 제가 플라칼 가와 한번 대화를 시도해보지요."
"너무나 당연한 뜻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우스꽝스럽구려."
베흔의 속내를 간파한 샤자한 공이 우회적으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베흔이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그리고......이 문제와는 별 상관없는 사항입니다만......델루지 가 쪽에서 수우 플레렌 델루지 경의 첫번째 소실을 찾고있는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슈트란 가에서 맞을까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종장이신 제롬 공께서 샤자한 공의 9번째 따님인 구르베스를 마음에 두고 계시니 한 번 의사를 타진해보라 하셨습니다."
조금은 놀란 샤자한 공이 베흔의 눈을 잠시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흔이 차기 '황비' 자리를 샤자한 공에게 제안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차피 황후는 공주들 중 한명을 택할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베흔으로서도 꽤 큰 제안임에 틀림없었다.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쪽에는 이미 네페티 부인이 예정되어있는 '황비'는 제국 1품에 해당하는 최고제후와 동격인, 어느 가문이라도 충분히 탐내고도 남음직한 자리였다.
"아시다시피 실리페 황후의 다섯 공주가 모두 지능에 문제가 있으니 실질적으로는.....무슨 뜻인지는 잘 아시겠죠?"
베흔의 친절한 미소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베흔 말마따나 수우가 결혼해야 할 다섯 공주는 모두 정신이 온전치를 못했다. 그렇다면 포고령에 따라 황후의 공식적인 대리인이 가능한 황비가 사실상 제국의 황후 노릇을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샤자한 공이 침을 꿀꺽 삼켰다.
결국 베흔이 들고온 카드는 동부에 사실상의 황후 자리를 내주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샤자한 공이 대답을 꺼냈다.
"동부의 군비통제와 경제제재조치 해제를 약속하고, 페로 경의 현 총리직을 보장하고, 황실내각의 공부대신과 재무대신을 동부에 수여한다면......한번 고려해보겠소."
목소리를 가다듬은 샤자한 공이 베흔에게 씨익 웃음을 짓자 할아버지와 함께 있던 그의 장손자 보벤 경이 할아버지의 ‘변심’에 조금 긴장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휙 돌아보았다.
황비 정도면 나름대로 꽤 큰 베팅이라 생각했던 베흔이 머릿속을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군비통제와 경제제재는 어차피 동부출신의 새 황비, 아니 사실상의 황후가 등장하면 유명무실해질 것 정도는 각오했지만 페로의 유임과 황실 주요 5대신 중 2자리를 달라는 건 사실 베흔이라고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장 대답드리긴 저도 조금 곤란하겠군요."
베흔이 한숨을 내쉬며 파일을 덮고 샤자한 공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저 노련한 최고제후가 조건만 맞는다면 언제든 카렐을 등질 태세는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 루사의 승전에 한참 기뻐하고 있을 카렐이 이번 승전을 도박판에서 자신의 판돈이 늘어난 것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샤자한 공이 머릿속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며 내심 웃음짓고 있었다.
"그 문제는 수우 전하와 상의하고 결정해야 될 듯 하니 조만간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베흔이 파일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핏 싱겁게 끝나버린 대화인 듯 싶지만 베흔으로서도, 샤자한 공으로서도, 서로의 의중을 확인했다는 큰 의미가 있었다.
접견실 밖으로 사라지는 베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짓는 샤자한 공에게 함께있던 페로의 수석보좌관이며 그의 장손자인 보벤 경이 물었다.
"정말로 근위대와 협상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넌 총리께 이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도록 해라. 명심해라. 넌 슈트란 가의 장손자이고 내 후계자라는 걸."
샤자한 공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보벤 경이 다시 물었다.
"저녀석이 할아버님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아마 마랄루 요새를 우리가 되찾느냐 아니냐를 지켜볼 생각이겠지. 보병이 강한 남부제후군이 수성전에서 우리에게 밀릴 턱이 없으니.....전황이 우리에게 불리해질 때 쯤 되면 다시 나타나 수정안을 내놓겠지. 우리가 이긴다면 정말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당장은 전황이 유동적이니 저녀석도 조금 더 지켜보려는 것일게다."
"하긴, 그 북부출신 가디언 잡종놈은 저도 영....."
보벤 경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놈도 그놈이지만 그 어미도 문제지......내가 기병 5만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어겨서 카파키 가가 하임달에서 패전하고 멸문당했으니.....아마 당장은 표현 못해서 그렇지 언젠가는 날 잡아먹으려고 이를 갈고있을거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페로 경이라면 모를까 카렐 그자에 대한 충성에 연연해 실속을 버릴 필요는 없을거다. 이번엔 카렐 그 자 쪽에서 뭘 더 내놓을 수 있을지 알아봐야겠구나."
샤자한 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침묵이 감돌던 접견실에 문을 두들기며 들어선 건 다름아닌 페로였다. 이 똑똑한 종손자에게 갑자기 과할 정도로 큰 웃음을 지어보인 샤자한 공이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아 시녀가 가져온 따뜻한 찻잔을 받아든 페로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이 종조부에게 물었다.
"근위대장이 무슨 조건을 제시했죠?"
페로 역시도 베흔이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그에 대해 샤자한 공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그라고 알 턱이 없겠지만.
"제 딸 구르베스에게 수우 경의 첫째소실자리를 제안하더군요."
"풋, 새끼, 나름대로 꽤 썼구만,"
차 한모금을 들이킨 페로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샤자한 공의 두번째 정실인 알리야 아야톨라 부인에서 태어난 적생 막내딸 구르베스는 총명한 머리와, 서부 출신 미인인 어머니를 꼭 빼닮은 훌륭한 외모로 아버지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베흔이 일부러 그를 지목했음에 틀림없었다.
"수우 녀석에게 딸을 보내느니 저라면 평민과 사돈을 맺겠습니다."
페로의 속보이는 한마디에 샤자한 공이 또한번 웃음을 지었다.
"물론 저도 그런 자에게 제 귀한 딸을 시집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샤자한 공이 '조금 더 큰 몫'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페로가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제 증손녀인 아메스가 이미 황후로 예정되어있으니 저희 가문에서 또다시 태자전하의 배우자 중 하나를 들이라고 한다면 꽤 우스꽝스럽겠죠. 다만......"
"다만?"
페로가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황빈 2위가 아직 모두 비어있다 들었습니다."
페로가 보일듯말듯 얼굴을 찡그렸다.
"세네피스 태후폐하께서 그 중 하나는 어차피 북부 출신으로 삼으려 하실 것이니......동부 하급제후 가문 출신으로 나머지 하나를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페로가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그는 샤자한 공의 치밀한 계산에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명목상 중앙귀족이지만 사실상 동부인인 아메스를 필두로 서부 출신의 황비, 북부와 동부 출신의 2명의 황빈으로 내명부를 동부가 장악하게 되는 셈이었다. 게다가 상급제후가 아닌 하급제후로 못박은 것은 황빈을 황후인 아메스의 수족으로 삼는 동시에 동부의 나머지 상급제후들의 쓸데없는 야심을 차단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정도라면 총리께서도 별 이의 없으신 줄 압니다만....."
샤자한 공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내명부에서 아메스의 권력을 강화시켜줄 것이 확실한 마당에 페로 역시 이견이 있을 턱이 없었다. 페로도 카렐이 자신에게 타협의 전권을 맡긴 이상 돌아가면 샤자한 공 이름을 팔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대면 되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리고,"
샤자한 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
"어차피 구르베스도 과년했으니 적당한 혼처를 찾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샤자한 공의 의중을 일찌감치 눈치챈 페로가 최대한 표정을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총리께서도 지금 홀몸이시니,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대로 구르베스를 새 정실로 맞으시면 어떨까 합니다. 어릴때부터 총리각하를 친오빠처럼 잘 따른 총명한 아이니 이제 각하의 훌륭한 배우자이며 부부인으로도 손색이 없을겁니다.
페로가 잠시 대답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구르베스는 사실 페로보다 꽤 연하이기는 했지만 촌수로만 따지자면 그와 5촌지간이 되는 이모뻘의 근친이었다.
"허, 허허.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시기 당혹스럽기까지 하군요."
페로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답지않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제가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조금 시간을......"
"아, 그럼요."
샤자한 공이 또다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서두를 일이 아니니 찬찬히 생각해보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그애가 가문을 배신했을 리가 없습니다."
헤즈 경 앞에 양 손목이 묶인 채 꿇어앉혀진 여자는 그냥보기에도 평범한 보통 여자의 외모는 결코 아니었다. 양옆으로 벌어진 넓은 어깨와 다부지게 각진 턱, 갈색 피부는 그 아버지인 카이두 경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밤중에 뜬금없이 '잡혀온' 엘룬 바툴 부인은 딸히 적에게 포로로 잡혔거나, 혹은 투항했을 것이라는 헤즈 경의 말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겨우 가다듬으며 가까스로 한마디 했을 따름이었다.
"장군의 모친을 이렇게 다루시다니 심하신 듯 합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히르직스가 옆에 선 케세크 경을 째려보며 말했다. 포로가 된 것인지, 투항한 것인지 아직 불명확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모셔'왔던 엘룬 부인을 윽박지르고 이렇게 포박해 묶어버린 것이 베아트릭스와 그간 원수처럼 으르렁거려왔던 저 오만방자한 중장보병단장이었다.
"세작 보고를 들어봐선 솔직히 지금 좀 의심스럽긴 해."
히르직스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무시해버린 헤즈 플라칼 사령관은 다듬어지지 않은 꺼칠한 수염이 그대로 남아있는 두툼한 턱을 어루만지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실 그도 베아트릭스가 투항할 정도로 생각없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있었다.
"투항자의 식솔은 무조건 처형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꿇어앉아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엘룬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사단장이었던 남편을 따라 남부에 와서 지금껏 이방인 신세로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껏 시가인 플라칼 가에 못된 생각은 단 한번도 없이 살아온 터였다.
하지만 이제 딸의 '의심스러운' 행동 한 번에 이렇게 죄인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그애가 투항했을 리가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그런데말이야, 동부 최고제후 장남과 2제후를 죽인 녀석인데도 녀석들이 아직 그냥 놔두고있다니 이게 어찌된거지? 정말 포로로 잡힌 것이라면 녀석들이 원수를 잡았다고 신이나서 펄쩍펄쩍 뛰면서 당장 어젯저녁부터 잡아죽이던가, 줘패던가, 고문을 하던가 해야 되는데 너무 조용하거든? 그런데......행여라도 투항한것이라면.......대신 네가 그 운명을 맞아야겠지?"
엘룬 부인은 그 끔찍스런 아이러니에 순간 아연질색하고 말았다. 그는 딸이 포로가 되었기를 바라야 하는 것인지, 투항했기를 바라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에 머릿속이 아찔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는데......우리로서도 그녀석의 충성이 여전한지 한번 확인해봐야겠어."
헤즈 경이 갑자기 근위병에게 눈짓을 보내 엘룬 부인의 포박을 풀게 했다. 그리고 부인의 앞에 작은 쪽지 하나가 던져졌다.
"써."
"예?"
"녀석들중에 우리 세작이 있으니 잡혀있는 네 딸에게 쪽지 하나 정도는 보낼 수 있을거다."
"그......그래서요?"
"별것 아냐, 그냥 내 보호 아래 잘 있다고 있는 그대로 써. 죽을지도 모르는 딸한테 편지한장 보내주겠다는거야. 나로서는 최대한 인도적인 처우를 해 주는 거라구."
엘룬 부인은 기묘하게 웃음짓는 저 기분나쁜 사령관에게 다른 속뜻이 있음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종이를 든 엘룬 부인은 차마 글을 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헤즈 경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쓰라니까! 최대한 애절하게!"
근위병의 칼끝에서 오는 서늘한 느낌이 어느새 부인의 목에 닿아있었다. 엘룬 부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짤막한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를 써내려가는 부인의 눈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먼저 눈을 뜬 카렐은 자신의 허리를 부둥켜안은 채 깊이 잠들어있는 아메스의 옆얼굴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선명한 상급귀족문과 도도하고 고집스러워보이는 그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를 닮은, 갈색빛이 감도는 피부에서 오는 그의 강인해보이는 인상은 씨다른 동생 솔과는 영 딴판이었다. 카렐의 팔을 베고 누운 그는 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연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휴,"
머리맡에 놓았던 물을 몇모금 삼킨 카렐은 아메스를 다시한번 내려다보았다. 그의 긴 머리칼이 얼굴을 스치자 아메스가 간지러운듯 목을 조금 움츠렸다.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결국 '자신의 사람'이 된 아메스를 내려다보는 카렐의 회색빛 눈동자는 출생부터 지금까지 그를 계속 지켜보아온 지난 30여년간을 뒤돌아보는 듯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렐은 아메스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붉은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메스는 아직 잠결인 듯 카렐의 허리를 다시한번 껴안았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그 모습에 빙긋 웃음지은 카렐이 그의 뺨과 어깨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먼저 깨셨네요,"
그제서야 잠이 반 쯤 깬 아메스가 카렐의 옆구리를 더듬으며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카렐을 밀어 바닥에 눕힌 아메스는 그의 가슴을 껴안은 채 말없이 웃음만 짓고있었다.
"추워요."
"화롯불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화로로 뻗으려는 카렐의 팔을 가볍게 붙든 아메스는 그의 팔에 연신 입을 맞추며 가끔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카렐의 어깨에 있는 검은 '황족문'을 이로 깨물며 속삭였다.
"너무 따뜻해서 떨어지기 싫어요."
아메스는 맨살에 닿는 그 감촉이 꽤 기분좋은지 모피담요를 어깨까지 끌어당기고는 카렐을 바싹 품어안았다.
"아직 일어나긴 조금 이른데....."
약혼자의 코과 입술을 매만지며 아메스가 색기어린 눈동자를 번득이고 있었다.
"전하 계십니까?"
"푸우,"
기껏 잡은 분위기가 망가지자 아메스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밖에서 들려온 건 다름아닌 '교수님' 제네르의 목소리였다. 천막의 방음을 해제한 카렐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나?"
"트라티누스 가 포로수용소에 한번 가보심이 좋겠습니다.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의 상태가 많이 안좋은 듯 합니다."
"......알았다. 한시간 후에 자네 막사 앞으로 가지."
힙겹게 몸을 일으킨 카렐은 아직 미련이 남은 듯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탐닉하는 아메스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아메스의 이마와 뺨에 키스를 해 준 카렐은 어제 벗어놓았던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에그머니,"
카렐의 천막 앞에 서 있던 우베가 열린 천막 안으로 보이는 아메스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얼른 시선을 어디두어야 할지 당혹해하고 있었다. 어깨를 반 쯤 드러내고 있던 아메스는 우베 보란듯이 키득거리며 비단포를 챙겨입었다.
"저, 전하......어젯밤에......"
"왜? 뭐가?"
세면도구를 들고나오던 카렐이 아직 피곤한 눈을 비비며 태연하게 물었다.
"아, 아뇨, 뭐, 그냥......헤헤헤."
우베가 멋적게 웃음지으며 옷을 입고있는 아메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카렐을 따라나온 아메스가 차가운 아침공기에 몸을 조금 떨자 카렐이 그를 자신의 두꺼운 망토 안으로 잡아끌었다. 결코 작지않은 체구의 아메스지만 워낙에 큰 카렐 덕분에 그 겨드랑이 안에 폭 감싸여지고 있었다. 꼭 달라붙은 채 샤워장으로 향하는 둘을 바라보며 우베가 부러운 듯 잠시 멍 해져 있었다.
갈갈이 찢어진 천조각만 겨우 걸친 채 피가 흥건한 심문실 바닥에 팽개쳐져있던 베아트릭스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에 자기도모르게 몸서리치고 있었다. 평소같았다면 이정도 한기는 웃으며 넘겼을만큼 충분히 강인한 그였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지난 밤은 그에게있어 일생 최악의 시간이었다. 자신을 장군으로 깍듯이 대우해주던 용문양을 새긴 기사들---그들 스스로는 '슈로 기사단'이라 소개했던---에게서 제후군들로 넘겨지면서부터 자신에 대한 대우는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밤새도록 계속된 매질에 온몸은 멍투성이였고 살이 찢겨나간 어깨와 등, 다리에서는 아직까지도 피가 흐르고 있었고 왼손의 손톱도 그들 손에 4개나 빠져버린 후였다.
"헉, 헉,"
베아트릭스가 떨고있는 몸을 다시 움츠렸다.
무언가를 따져 묻는 고문도 아니었고 그들은 그저 돌아가며 자신을 미친 듯이 괴롭혔을 뿐이었다. 지독한 매질로 완전히 무기력해진 자신을 마지막으로 강간까지 하겠다며 저희들끼리 순서를 뽑고있던 그들 트라티누스 가 녀석들은 '누군가' 온다는 말에 방금 전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고 난 후였다.
베아트릭스는 숨을 힘들게 몰아쉬며 반 쯤 마비된 다리를 끌어당겨 몸에 바싹 붙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몸을 움츠리는 것만이 추위를 피하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심문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아침식사다."
병사 한 명이 큰 빵을 쓰러져있는 베아트릭스의 앞에 던졌다. 어젯밤엔 아예 아무것도 주지 않더니 그나마 나아진 셈이었다.
"내용물을 꼭 보고 먹어."
병사가 희한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문의 명령이다."
쓰러져있던 베아트릭스의 얼굴에 또한번 당혹스러움이 스치고 있었다. 병사가 나가자 베아트릭스는 굳어버린 손을 겨우 움직여 빵을 반으로 찢었다. 그 안에는 반 뼘 정도 되는 길이의 흑요석날의 예리한 칼과 쪽지 한 장, 그리고 손가락 크기의 작은 앰플이 들어있었다. 흑요석 칼날은 독이 묻어있는지 작은 집에 싸여있었다.
"가문이 이렇게 자비로왔을 줄이야."
흑요석 비수를 바라보며 베아트릭스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앰플 뚜껑에는 맛을 느낄 수 없도록 캡슐화된 알콜이라는 표시가 쓰여 있었다. 술 한 모금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자결 명령'임에 틀림없었다. 어차피 최악의 끔찍한 처형을 당할 운명인 그에게 정말로 자비로운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플라칼 가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복감'은 동봉된 쪽지를 펼쳐든 순간 산산조각나버리고 말았다.
눈물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그 작은 쪽지에는 어머니의 필체로 쓰여진 짧은 편지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듯한 몇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순서대로 적혀있는 이름은 지난번 그가 요동으로 암살을 위해 떠나면서 받았던 그 리스트와 별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이 리스트 중 한명이 그를 심문할테니 어떡해서든 기회를 만들어 죽이라는 것과, 그 맨 꼭대기에 카렐의 이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카렐을 죽일 때는 동봉된 알콜을 먼저 먹이고 나서 인사불성을 만든 후 급소인 경추를 정확히 찔러야 한다는, 너무나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였다.
예리한 흑요석날을 준 것도 그때문인 모양이었다.
편지를 찢어 삼켜버리고 벽에 기대 잠시 우두커니 앉아있던 베아트릭스는 입고있던 바지 벨트 틈새에 칼과 앰플을 조심스럽게 집어넣고는 차가운 바닥에 다시 몸을 뉘였다. 그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또다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자신의 더럽기 짝이없는 운명을 또한번 저주하고 있었다.
"페로 자이센......샤자한......제르베......플로브....."
'리스트'를 순서대로 중얼거리던 그는 정작 1번인 카렐의 이름을 빼먹었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지난번에 요동으로 떠나면서 머릿속에 각인시켰던 그 순서가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는 때문이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카렐이 이순간 자신의 앞에 제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심문실 문이 갑자기 열리며 나타난 사람들의 면면을 본 순간, 그는 도대체 자신의 바램이 제대로 들어맞는 날이 없다는 데 또한번 절망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