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92화 (192/1,132)

< -- 192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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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익,"

초죽음이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는 베아트릭스의 모습에 우베가 기겁을 하며 카렐을 올려보았다. 카토와 제네르, 아메스를 대동하고 심문실 안에 들어선 카렐이 이를 빠드득 갈며 자신을 뒤따라온 트라티누스 가 장교의 멱살을 확 붙들었다.

"제르베 경 당장 오라고 해라."

"하......하지만......"

그 장교는 일개 가디언인 카렐이 자신의 종장을 불러오라고 지시하자 조금 기가막힌지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아메스가 그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당장 명을 따르지 않고 뭐하나!"

"알겠습니다."

장교가 황황히 사라지자 카렐은 쓰러져있는 베아트릭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밤새도록 매질을 당했는지 몸 어디한군데 성한곳이 없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베아트릭스에게 머리를 얻어맞는 치명상을 입었던 아메스조차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해도 너무했군요. 그런데 전하께선......"

그제서야 카렐이 어젯밤 '그냥 놔두라'고 지시했던 일을 떠올린 아메스는 문득 제네르를 돌아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짐짓 굳은 표정의 제네르는 베아트릭스의 상태를 살피는 카렐의 뒷모습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카렐은 흐느적거리는 베아트릭스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히며 헝클어진 머리칼을 양 옆으로 넘겨주었다. 피가 엉겨붙은 베아트릭스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카렐을 똑바로 올려보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이순간 카렐의 눈이 정말로 아름답다는, 말도안되는 생각에 또한번 잠겨있었다. 입고있던 망토를 벗은 카렐은 너덜너덜해진 누더기를 겨우 걸치고있는 베아트릭스의 몸을 꼼꼼하게 감싸주었다.

"이런,"

생손톱이 모두 뽑히면서 피투성이가 된 베아트릭스의 손을 발견한 카렐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조금만 참으시오. 다신 이러는 일 없을테니. 내 정식으로 사과하겠소."

카렐의 가슴에 헐떡이며 기대앉아있던 베아트릭스가 문득 그의 눈을 올려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베아트릭스의 시선을 짐짓 못본 척 덜덜 떨리고 있는 그의 손에 손수건을 꼼꼼히 묶어주었다.

창백해진 제르베 경이 허둥지둥 심문실 안에 뛰어든 건 이때였다.

"제르베 경, 감히 하실 말씀 있으시오?"

베아트릭스를 다시 바닥에 눕혀놓은 카렐이 제르베 경을 무섭게 돌아보며 물었다. 제르베 경이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건......가문의 하급 종원들이 제 명을 어기고 멋대로......"

"내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의 심문권을 넘겨준 건 가혹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양가의 약속이 있어서였거늘, 지금 내 명을 정면으로 어기고 그따위 변명이 통할 줄 아셨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제르베 경의 행동이 순전히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를 꾸짖고있는 카렐도, 그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는 카렐의 수하들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걸핏하면 '피의 복수'를 부르짖던 제르베 경에게도 종원들의 단순한 분노를 어떤 식으로건 털어낼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 뻔했다. 제르베 경이 종원들의 가혹행위를 못본 척 묵인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물론 제르베 경을 꾸짖고있는 카렐의 극도로 분노한 듯한 행동 역시도 연극임은 뻔한 노릇이었다.

"저도 어제 일찍 잠자리에 드느라 아랫사람들이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을 단속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제 지도력 부족이오니 절 탓해주십시오."

"지도력 부족? 지금 지도력 부족이라 하셨소?"

제르베 경에게 바싹 다가선 카렐이 당장이라도 멱살을 움켜쥘듯한 기세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 경을 해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넘겨준 건 내 수하들도 다 알고있는 일이거늘, 지금 내 얼굴에 먹칠을 하고 그따위 수작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인가!"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호통을 치는 카렐의 기세는 엔간한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리며 자리에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카렐은 덜덜 떨고 있는 제르베 경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가 누구요! 내가 누구냐고!"

"자, 장태자전하.....십니다......"

"그런데, 감히 장태자를 아랫사람 앞에서 바보를 만들어 놓고, 그정도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절대 이런 일이......"

제르베 경의 사과에 카렐이 갑자기 표정을 싹 풀며 되물었다.

"오호, 그러시오? 제르베 경? 이제 그럼 트라티누스 가 종원들의 화풀이는 다 끝난 것으로 믿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저희가 어찌 또다시 가혹행위를......"

카렐의 말에 생각없이 이끌려가던 제르베 경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럼 됐군요. 그럼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 처리문제는 이제 내가 결정하겠소이다."

베아트릭스를 두팔에 안은 채 벌떡 일어난 카렐은 아직 떨고있는 그를 카토의 팔에 넘겨주었다.

"의무관에게 데려가 제대로 치료받게 해라."

제르베 경이 당혹스러움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지만 감히 장태자의 명을 대놓고 어긴 입장에서 또다시 베아트릭스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년은 어차피 처형될 자이온데......"

"처형? 누가? 지금 저자가 저지경이 되어 장태자인 내 얼굴에 먹칠이 되었는데, 저자의 목까지 치면 바닥에 떨어질 내 체면을 그대가 다 책임질거요? 제르베 경?"

"하오나......"

"방금 화풀이는 다 끝났다 하지 않았소? 내 보긴 그대의 복수 상대는 저자가 아니라 플라칼 가 사령관인 헤즈 플라칼 녀석이나 종장 녀석이 아닌가 하는데. 지금 명색이 제2제후 가문 종장의 복수를 일개 장군 따위를 처형하는 선에서 유야무야 넘어갈 참이었단 말이요?"

그제서야 자신의 '리스트 1번'이 카렐인 이유를 깨달은 베아트릭스는 카토의 팔에 안긴 채 자기도모르게 몸을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자신이 '당했음'을 깨닫고 망연자실해있는 제르베 경을 뒤로하며 카렐이 잔뜩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감방을 나섰다. 결국 다시한번 밝은 햇살을 마주한 베아트릭스가 눈이 부신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기사단 숙영지 쪽으로 가자."

카토의 팔에 안겨 나온 베아트릭스는 검은 비단튜닉 자락을 펄럭이며 앞서 걸어가는 카렐의 뒷모습에 어느새 시선이 멎어 있었다.

잠시 좌우를 둘러보던 베아트릭스는 바로 자신의 좌우를 걷고있는 두 여자를 보고는 순간 아연질색하고 있었다. 자신과 악연이라면 꽤 악연이랄 수 있는 '노랑머리 년' 제네르와 '정신나간 년' 아메스가 자신의 양옆을 호위하듯 함께 걷고 있었다. 순간 베아트릭스와 시선이 마주친 아메스가 아직 반창고가 붙어있는 자신의 머리 상처를 가리키며 놀리듯 입을 삐죽거렸다.

그의 악의없는 황당한 태도에 베아트릭스는 이 와중에 하마터면 웃음을 지을 뻔 했다. 자신을 안은 이 행렬은 어제의 그 용무늬 기병들이 묵는 숙영지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숙영지 입구에는 웬 겔 하나가 보통의 막사들 사이에서 멀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선두의 카렐이 겔 문을 확 열며 안에 들어섰다.

"솔직히 어제는 어쩔 수 없었어. 트라티누스 가나 슈트란 가 녀석들도 체면치례를 해야 하니까. 아무리 아프다고는 해도 죽는것보다야 죽을만큼 얻어터지는 편이 차라리 낫지. 하루종일 저 두 가문 놈들한테 신경질 꽤나 내줘야겠군."

카렐이 주머니에서 마른 간조각을 꺼내 씹으며 겔 안을 빙 둘러보았다. 구석의 작은 이부자리와 테이블, 중앙의 작은 화로가 고작이었지만 베아트릭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동부 탈라스 유목민의 겔 모습 그대로였다.

"저기, 잠자리 미리 마련해놨으니까 저기 눕혀줘."

카렐이 겔 한쪽의 두툼한 잠자리를 가리키며 카토에게 일렀다. 유목민들이 쓰는 따뜻한 양털담요와 이불에 눕혀진 베아트릭스는 함께 들어온 카렐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어버리고 말았다.

"내 장군 머물라고 특별히 유목민들 시켜 세우게 했으니까 편히 쉬시오."

카렐의 친절한 한마디에도 베아트릭스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잘 알고있었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 사람을 반드시 죽여야 함을,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이런 쓸데없이 사사로운 감정 따위도 모두 다 접어버려야 한다는 것도.

"네 이년!"

갑자기 겔 문이 확 열리더니 거구의 카이두 경의 고함소리가 겔 안을 울렸다. 누군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뛰쳐든 카이두는 한구석에 누워있는 외손녀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 단검이 쥐여져 있음을 발견한 제네르가 기겁을 하고 달려들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카이두의 손에 멱살이 잡힌 베아트릭스가 숨이 막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이 망할......"

"그만두시오. 카이두 경."

찻잔을 입에 댄 카렐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네년의 목을 비틀어 뽑아서......"

"그만두라 하지 않았소!"

겔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 큰 목소리에 당사자인 카이두는 물론이고 베아트릭스까지 순간적으로 압도당하고 말았다. 카렐의 눈에서 갑자기 흐르기 시작한 무서운 살기에 카이두가 외손녀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스르르 놓으며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카이두의 속셈을 눈치챈 카렐의 입가에 뜬금없이 미소가 퍼지고 있었다.

"외손녀는 걱정 마시오. 카이두 경."

고개를 돌린 카렐이 자신에게만 들릴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바닥에 엎드려있던 카이두 경이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와 베아트릭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끔찍할 처형을 당할 것이 확실한 자신의 외손녀를 차라리 카이두 자신의 손으로 편하게 저세상으로 보내주려 했음에 틀림없었다.

"베아트릭스 경은 나와 함께 탈라스로 가게 될 것이요."

"예에?"

"그리고 경의 외손녀는 내 정체를 아는 정도로 내게 복종하는 길을 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난 베아트릭스 경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후에 스스로 운명을 택하도록 할 것입니다."

다친 다리로 일어나려 버둥거리는 베아트릭스를 가볍게 안아든 카렐은 그를 다시 이부자리에 뉘여주었다.

"그리고 비엔 행성에 있는 경의 13번째 딸 엘룬 바툴을 찾도록 지시했습니다. 찾으면 비밀리에 동부로 데려오도록 조치할테니 조금만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어머님은....."

베아트릭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카렐이 그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실수로 입을 열었던 베아트릭스였지만 차마 남부 진중에 있는 어머니의 행방을 밝힐수는 없었다.

자신의 감정이야 어쨌든, 반드시 없애야만 할 자이기에.

베아트릭스가 묵었던 막사에 억류된 엘룬 바툴 부인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는 딸의 자잘한 소지품들에 결국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피묻은 드레싱과 옷가지, 무기들, 여분의 갑주 부품들과 마구, 간단한 로션들에까지, 죽음을 앞둔 딸의 체취는 모든 물건들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엘룬 부인을 찾아온 신임 경기병단장 루코프 플라칼 장군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집무를 보던 테이블에 맥없이 앉아 눈물짓던 엘룬 부인은 루코프를 돌아보며 목멘 소리로 물었다.

"베아트릭스가 투항한 건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루코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베아트릭스는.....끔찍하게 죽게 되겠군요......"

엘룬 부인의 눈에 글썽글썽해진 눈물을 바라보며 루코프는 차라리 '투항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해줄걸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분 정도면 가문의 사당에 충분히 헌액될 수 있을 겁니다. 적 제 2제후와 최고제후 장남을 사살하는 큰 전공을 세우셨으니....."

엘룬 부인은 베아트릭스의 손때가 묻은 단검을 만지작거릴 뿐 아무 말도 하고있지 않았다.

"플라칼 가 자손으로 그 이상의 명예가 없습니다. 부인도 헌액자 유가족으로 가문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실 겁니다."

자신의 말이 부인에게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지만 루코프로서도 별다르게 해줄 말이 없었다. 막말로 이 모든 건 원수가문으로 시집온 저 운없는 부인의 팔자 탓이었다.

"베아트릭스가 살아 돌아올 방법은......없겠죠?"

"......"

"어젯밤에 쓴 편지는 어찌됐죠?"

"세작 보고에 따르면 그쪽 시간으로 오늘 아침에 장군님께 전달됐다고 합니다."

"그런 말까지 다 해주는 걸 보니......당신 사령관도 그애가 투항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있는 모양이군요."

엘룬 부인의 지적에 루코프도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적에게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다른 지휘관들처럼 종전 후에 몸값을 주거나 포로교환으로 되찾아오지도 못할 것이 빤한 상황에서 가문에서 이 여자를 계속 돌보아줄 의무감을 느낄 리가 없었다. 엘룬 부인은 더이상 플라칼 가의 전사를 생산해낼수도 없을 뿐더러 '꽤 쓸만한 전사'였던 베아트릭스를 잡아두는 볼모로서의 역할도 이젠 다한 셈이었다.

"......그래요. 그게 아니라면 투항했을지도 모를 무장에게 세작을 노출시키는 바보짓을 할 리가 없겠죠. 베아트릭스가 바보가 아닌데 죽을것을 빤히 알면서 그쪽에 투항했겠어요?"

"당토않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루코프가 얼굴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편지가 그냥 가지는 않았겠죠?......제 이름을 볼모로 어떤 지시가 내려갔죠? 중요 정보를 토설하기 전에 자결하라는 건가요? 아니면......처형당하면서 이쪽의 사기를 올려줄 꽤나 멋진 말을 토하라며 간 건가요?"

궁지에 몰린 루코프는 엘룬 부인의 냉정하기까지 한 판단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는 엘룬 부인의 눈동자가 무슨 이유엔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그건......"

한손에 들고있던 단검을 탁자 위에 놓은 부인은 주머니에서 작은 칩을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홀로그램 재생기에 꽂아넣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엘룬 부인의 검은색 눈동자 위로 짐짓 명랑한 표정의 딸이 이곳 마랄루의 요새 위에서 찍은 동부의 석양 풍경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루사 회전을 떠나기 직전, 베아트릭스가 이곳에서 직접 녹화해 보냈던 마지막 칩이었다.

웃음짓는 딸의 목과 이마에 감은 드레싱에 피가 배어있는 것을 발견한 엘룬 부인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길 다쳤을 때.....얼마나.....아팠을까......"

"부인,"

이미 몇십번은 반복해 보았을 홀로그램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부인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부탁하나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저기......베아트릭스가 이거 찍은 요새 성벽 위에 잠깐만 올라가볼 수 있을까요?"

부인의 뜬금없는 요구에 잠시 망설이던 루코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무장한 근위병을 동반한 엘룬 부인은 앞장서는 루코프를 따라 요새 남서쪽 성벽을 걸어올랐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받고 싶다'며 동부 유목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선 엘룬 부인은 눈앞에 펼쳐진 눈에익은 동부 초원의 모습에 얼굴가득 미소를 지었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듯한 부인의 모습에 루코프도 내심 잘한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큰 털모자와 유난히 화려한 빛깔로 치장된 유목민 전통복장 차림의 부인의 모습은 성벽에서도 눈에 확 띄고 있었다.

"여기로군요."

베아트릭스가 홀로그램을 찍었던 바로 그 위치에 선 엘룬 부인이 또한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황금빛의 아름다운 석양이 그의 얼굴을 비쳐주고 있었다.

성벽 안쪽으로는 때마침 저녁식사를 위해 몰려나온 수백명의 병사들이 이 남쪽 성벽에 기대 만들어진 취사장에 꾸역꾸역 모여들면서 발디딜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성벽 위에 '희한한' 차림으로 서 있는 부인을 가리키며 저희들끼리 쑥덕거리고 있기도 했다. 부인이 그들을 빙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여기 군인들 중에도 동부 세작이 숨어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마도."

루코프가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요새 안쪽 성벽에 기대 세워져있는 무기장에 빽빽하게 꽂혀있는 창을 힐끔 바라본 엘룬 부인이 눈을 지그시 감고 두 팔을 벌리며 고향 동부의 그리운 공기를 가슴깊이 들이마셨다.

그런 부인의 모습에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거두고 있던 루코프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근위병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에 옆을 휙 돌아보았다. 눈을 감은 부인의 몸이 성벽 밑으로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순간 루코프의 입에서도 비명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안됩니다!"

뒤늦게 달려온 근위병이 채 그런 부인을 붙들 새도 없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엘룬 부인의 몸은 유난히 화려한 옷의 색색의 궤적을 공중에 그리며 수십개의 창이 세워져 있는 무기장 위를 향해 무서운 가속과 함께 곤두박질쳤다. 밑에 모여있던 수백의 남부 병사들 사이에서도 일제히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나 흩어지는 무기장과 부러진 창의 파편들이 선명한 피, 살점과 어우러져 공중에 붉은 피보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치솟아오른 피안개가 사라지고 난 그곳에는 허리가 뒤로 꺾인 채 10개가 넘는 창에 온몸이 꿰여 산산조각난 동부 유목민 전사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꺾인 창들 사이로 솟아올라와 있는 유난히 거친 피투성이의 손에서는 같은 모양의 오래된 결혼반지 2개가 핏빛 석양에 유난히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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