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93화 (193/1,132)

< -- 193 회: Part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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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카렐이 제네르, 아메스와 함께 앉아있던 겔로 라손과 자이납, 네피, 시로가 여전히 꽤나 소란스러운 수다를 떨며 모여들고 있었다. 천막을 둘러보며 자이납이 또 한마디 덧붙였다.

"푸헷, 전하 주무시는 천막 열 배는 되겠네요."

"난 청소하기 귀찮아서 이런 큰 천막따윈 관심없어."

웃으며 대답한 카렐이 버터차 한 모금을 다시 들이켰다.

한구석의 두툼한 잠자리에 여전히 말없이 누워있던 베아트릭스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건 제네르가 내민 뜨거운 버터차 한잔이었다.

"눈치는 챘겠지만 나도 탈라스 출신이야. 3번 행성이라 분위기는 조금 틀릴지 모르겠지만. 버터차니까 마셔 봐. 익숙한 맛일테니까. 여기 호밀떡도 있어."

마지못해 잔을 받아든 베아트릭스는 카렐의 일행들에게서 다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의 옆에 호밀떡 접시를 내려놓은 제네르는 부담러워하는 그에게 굳이 말을 걸 생각은 없는지 화로 주변에 동그랗게 둘러앉은 일행들 사이에 다시 끼어들었다.

"버터차 들입대 짜기만 한 게 느글거려서 싫어. 호밀떡 맹맹한 것도 그렇고, 저걸 뭔맛으로 먹나 몰라."

시로가 내민 버터차를 고사하며 네피는 사탕수수만 씹고 있었다.

"먹어보면 괜찮다니까."

제네르가 직접 만든 버터차와 호밀떡을 꽤나 맛있게 입에 넣으며 시로가 네피의 옆구리를 괜히 쿡 찔렀다. 제네르가 입을 삐죽거리며 네피의 버터차를 빼앗아들었다.

"아, 됐어요, 됐어. 나도 딴에는 신경써서 만든 거 싫어하는 사람한테 억지로 먹이고싶지는 않으니까."

"캬, 역시 요리솜씨는 솔이 최곤데......솔이 만들어준 비둘기구이만한 게 없다니깐."

우베가 약간 넋나간 얼굴로 멍 하니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 요리솜씨 덕 별로 못보는 내신세도 꽤나 한심하군,"

허탈하게 웃음지은 카렐은 자이납이 가져온 피범벅의 내장조각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카렐의 옆에 바싹 붙어앉은 아메스는 생 내장을 먹고있는 카렐의 '결코 아름답지는 못한' 그 광경도 꽤나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손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아참, 탈라스는 언제 가실 거예요?"

"내일 저녁."

돌아누워있던 베아트릭스가 잠시 자신을 돌아보았다는 것을 카렐은 잘 알고있었지만 그는 짐짓 못본 적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바툴 가 정예부대도 이제 임무가 끝났으니 나하고 함께 돌아가야지. 카이두 경도 일단은 돌아가야 할 테니까 당장은 아들 다얀이 유목민 궁기병 부대를 이끌어야 할거야. 카이두 경이 둘이라면 딱 좋겠지만 쓸만한 궁기병 지휘관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라손 부단장이 원래는 경기병 아니었나?"

네피의 질문에 카렐이 키득거리며 대꾸했다.

"그렇긴 한데 투창쪽은 젬병이잖아. 도대체 동부 경기병출신 맞긴 한거야? 혹시 딴사람 다 던질때 시늉만 한 거 아냐?"

"어? 어떻게 귀신같이 아시지? 옛날에 제네르하고 둘이 쌍으로 그랬었는데?"

라손의 한마디에 얼굴이 빨개진 제네르만 제외하고는 모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괜스리 자신까지 물고늘어진 친구에게 그답지않게 입을 삐죽거려보인 제네르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둘 다 경기병에서 중장기병으로 '업종전환'까지 했겠냐구요."

"탈라스엔 그럼 누구누구 같이가는거죠?"

아메스가 눈을 반짝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글쎄, 제네르는 페로를 도와야하니 여기 있어야 할테고, 네피하고 시로도 보병대를 지원하려면 여기 있어야겠지? 자이납 넌 서부제후군하고 싸우긴 좀 그럴테지. 그럼 당장은 우베하고 카토, 라손 셋만 데리고 가는 밖에. 어차피 전황에 따라 이동이 있을테니까 고정적인 건 아냐. 그러니까 라손 자네도 페로하고 떨어진다고 펑펑 울지는 말라구."

"그럼 저는......"

순식간에 울 듯한 표정이 되어버린 아메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버님께서 아메스 아씨는 데려가지 말라 부탁했습니다. 탈라스의 거친 바위사막에서 경기병대로 발빠른 서부제후군 경보병과 낙타병들을 상대하는 일입니다. 환경도 극도로 열악할테고 아직 경험이 적으신 아씨께서 하실만한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명령'이라는 말에 아메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카렐은 그의 어깨를 꼭 껴안으며 달래듯 말했다.

"틈날때마다 올테니 걱정 마십시오."

"서부제후군 지휘관은 결정 된 것 같습니까?"

제네르의 물음에 카렐이 뜨거운 버터차 한 모금을 들이키며 대답했다.

"사령관이야 전에 말한대로 샤드니 누라프 플레렌 경일테고......부사령관은 라바니 세호 경일 것 같아."

"후~ 만만치않겠네요."

서부 파견군 출신인 카토가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그 두 사람이 모두 온다면 서부 최고의 지휘관들이 출동한 셈이었다.

"듣자하니 아쉬드 하지즈 장군도 또 온다지?"

"엑,"

시로가 지난번 하지즈 장군과 일기투를 벌였던 제네르를 돌아보았다. 제네르가 허리춤의 칼을 어루만지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아예 콱 죽여버릴 걸 그랬나?"

"그놈들 꽤나 생각없는 놈들일세, 일기투에서 지면 그 전쟁 끝날때까지 다시는 안나온다는 신사협약도 모르나? 맨날 도리타령하던 코리온 그 개새끼는 도대체 뭐야?"

네피가 단검으로 손장난을 치며 중얼거렸다.

"뭐, 탈라스 침략이야 걔들 입장에선 다른 전쟁으로 해석하고있나보지. 뭐."

화로와 약간의 수수한 먹을것들을 사이에 두고 꽤 화기애애한 대화가 흘러가고 있었다. 카렐의 겨드랑이에 기대 울상을 짓고있는 아메스만 빼면 모두의 표정 역시 꽤 밝았다.

"썅, 우베. 의사 부르긴 부른거야? 뭔 새끼가 아침에 한번 고개 디밀더니 저녁때도 다되어가는데 코빼기도 안보여?"

이부자리에 신음소리 한번 없이 말없이 누워있는 베아트릭스를 힐끗 돌아보며 카렐이 물었다.

"글쎄요, 1시간 내로 온댔는데요? 토로 경 담당하고 있는 유명한 의사 불렀는데요."

"1시간? 젠장할, 사람 아예 잡을 일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전사단 의사도 몇 데려오는 거였는데."

"근데 저게 누군데요?"

아직 분위기파악도 못한 자이납이 생각없이 질문을 던졌다가 우베의 꿀밤만 벌고 말았다. 자이납이 눈물을 찔끔거리며 쏘아붙였다.

"쳇, 나도 막내신세 좀 면해보나 해서 그런거라구요. 맨날 술심부름이나 시키고."

"직접 소개하지 그러나?"

카렐이 자신을 돌아보자 베아트릭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홱 돌아누워 버렸다. 카렐이 어깨를 으쓱 하며 중얼거렸다.

"아직 많이 아픈가봐. 어쨌거나, 자이납 너 막내신세 면할 상황은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아이씨,"

투덜거리는 자이납의 모습에 웃음지은 카렐이 버터차를 마시면서 베아트릭스 대신 입을 열었다.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하급귀족. 182세. 장군이고 플라칼 가 제후군 경기병단장. 탈라스 2번 행성 출생.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동북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물리학 박사까지 땄지. 바툴 가 경기병단에 초급지휘관으로 있다가 57세에 남부로 이주했지? 플라칼 가 기동특전단에 있다가 경기병단이 창설되면서 5중대장으로 배속받았고, 궁기병대장을 거쳐서 얼마 전에 경기병단장으로 승급했어. 나보다도 나이 많아."

돌아누워있던 베아트릭스는 카렐이 자신의 약력을 '줄줄이' 읊어대자 자기도모르게 몸서리치고 있었다.

"엑, 물리학이래,"

자이납이 혀를 쑥 내밀었다.

"뭐, 고대어 5만자 외워야하는 유학보다야 낫겠지."

네피가 애꿎은 제네르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키득거리자 우베가 호밀떡을 잘근거리고 씹으며 덧붙였다.

"나라면 차라리 고대어 5만자를 외우겠네."

"히야아~리쿠 학장님은 수학하고 물리에도 도통하시다던데. 역시 멋져."

저마다 딴소리를 지껄여대는 황당한 부하들을 바라보며 카렐은 몸을 반 쯤 기울인 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이납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저 누구냐.....베아.....머시기 장군님도 이제 우리 식구 되는거예요?"

"글쎄,"

자이납의 질문에 카렐이 여전히 돌아누워있는 베아트릭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누워있던 베아트릭스는 저들의 저 황당한 '김칫국'에 기가막혀올 지경이었다. 그는 단 한번도 투항 의사를 밝힌일이 없음은 물론이었고 투항할 의사 역시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플라칼 가의 장군으로서 당당한 죽음을 맞을 각오로 다져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띠 속에서 만져지는 독묻은 비수를 다시한번 느끼고 있었다.

부하들을 모두 각자의 숙소로 돌려보낸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겔에 여전히 혼자 남아있었다. 우베 말마따나 거의 한 시간을 꽉 채워서야 나타난 의사가 의자에 앉아있는 베아트릭스의 발목을 살펴보고 있었다.

"내일 정도면 풀 수 있을겁니다. 다행히 뼈가 부러지지는 않아서 3,4일 정도 치료받으면서 안정하면 나아질 것 같습니다."

베아트릭스의 발목에 댄 프레임을 다시 조여주며 의사가 웃음을 지어보였다. 치료받는 중에도 베아트릭스는 한손에 지팡이를 쥔 채 의자에 내내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겔에 카렐과 단 둘이 남게 된 베아트릭스는 최소한 부하들과 있을때처럼 대놓고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있지는 않았다.

치료를 끝낸 의사가 자리를 비우자 카렐은 베아트릭스를 다시 번쩍 안아들고 이부자리로 향했다.

"내일 탈라스로 떠나려면 미리 푹 자두는 게 좋을거요. 밤이 늦었으니......"

"그냥.....잠깐만......의자에 앉아있고 싶습니다."

베아트릭스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제대로된 말'을 건네자 카렐의 입가에도 희미하나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묘한 박자감이 느껴지는, 흑인종 특유의 약간 탁한 목소리였다.

"잠깐만 앉아있고 자도록 하시오. 밤이 늦어가니까......"

의자로 돌아온 베아트릭스의 등에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며 카렐이 한마디 덧붙였다. 베아트릭스는 옆에 놓인 작은 탁자, 아니 그 위에 놓은 물컵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베아트릭스는 하루종일 '다른 목표물'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의 흑요석 비수의 희생물이 될 리스트의 다른 인물들은 단 한번도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리스트 1번을 해치울 절호의 기회임을 베아트릭스는 잘 알고있었다.

짠맛의 버터차 덕에 소금을 너무 많이 먹었다며 저녁내내 투덜대던 카렐은 거의 20분에 한번꼴로 물을 족히 반컵씩은 들이키고 있었다. 게다가 이유도 없이 눈물을 계속 찔끔거리던 카렐은 그것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베아트릭스에게 '소금 때문'이라며 이해못할 황당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염분을 눈물로 배출하는 '악어'라는 동물과 카렐이 친척지간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 턱이 없겠지만.

"우베입니다."

겔의 입구를 열어젖힌 우베가 안에 있던 카렐에게 나와달라는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눈치를 보며 겔 밖으로 나선 카렐의 귀에 우베가 꽤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속삭여주고 있었다.

탁자 옆의 의자에 앉아있던 베아트릭스는 카렐의 관심이 다른 곳에 팔린 틈을 타 벨트에 숨겨놓았던 알콜 앰플을 급히 꺼내 방금전까지 카렐이 마시던 물컵에 잽싸게 쏟아부었다.

"케스난 시켜서 계속 알아봐."

우베에게 지시를 내린 카렐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베아트릭스에게로 돌아왔다.

"비엔 6번 행성쪽에서 장군 주소를 찾아보았지만.....엘룬 부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요. 어디 멀리 간 듯 하지만 그 부근을 계속 수색하라 했으니 조만간 행방에 관해 알려줄 수 있을거요."

고개를 조금 떨군 베아트릭스는 또다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담요 속에 숨은 그의 오른손은 벨트 안에 숨겨진 작은 비수를 굳게 쥐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잘난 이녀석이지만 술을 조금만이라도 먹으면 곧바로 인사불성이 된다 했으니 저 많은 양의 순수 알콜이 포함된 물을 마신다면 배겨낼 턱이 없었다.

그때가서 이 작은 흑요석 칼로 급소인 목을 찔러버리면 모든 것은 마무리되고 자신은 가문에 최후까지 충성을 다한 사람으로 남게 될 터였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바 없지만 '장태자'라는 이녀석이 살해되면 결국 자신은 또다시 죽음의 운명에 접하게 되겠지만 그것이 어머니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겔이 쓸데없이 너무 큰가? 화로를 켰어도 별로 따뜻하지를 않군."

화로 속을 후비며 카렐이 혼자 중얼거렸다. 온기를 뿜는 화로를 베아트릭스의 발밑에 가져다놓은 카렐은 조금 흘러내린 베아트릭스의 담요를 잘 여미어주었다.

"지금 약혼자도 있다고 들었소. 전쟁만 끝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테니 차분하게 기다리면 될 거요."

약혼자 쿤제를 머릿속에 떠올린 베아트릭스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잘난 주군 가문의 사위가 된다는 일생일대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그 덩치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있을지 머릿속에서 익히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었다. 하긴, 베아트릭스의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썩 나쁘지는 않은 남자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어쩌면 녀석을 아깝게 여긴 가문의 결정으로 자기 대신 가문의 다른 여자와 혼인시켜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베아트릭스는 카렐의 큰 손을 문득 바라보았다.

"아, 여기? 허물이 좀 벗겨졌는데 이제 거의 나았고......"

장갑을 벗고 손바닥을 보여주는 카렐의 밝은 웃음에 베아트릭스의 속이 울렁거릴정도로 가슴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새하얀 비단 튜닉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자신이 찔러야 할 목의 급소와, 무지개빛으로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동부에서는 물론이었고 플라칼 가에서도 최고의 군인다운 군인으로서 엄격함과 무뚝뚝함의 상징같던 그에게 참으로 낯선 감정이었다. '나무껍질같은' 자신의 손바닥보다 한술 더 뜨는 거칠고 큰 손을 검은 뱀가죽 장갑 안에 감추며 카렐은 묘할만큼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말 그놈의 버터차 짜긴 더럽게 짜네. 뭔놈의 눈물이 이렇게 계속 나오냐."

카렐이 물컵을 집어들자 베아트릭스의 눈동자가 긴장감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물 한모금을 벌컥 들이키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낸 카렐은 밖에서 문을 걷으며 다시 들어온 우베의 모습에 더 마시려던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뭐지?"

"마랄루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보고되었습니다."

베아트릭스를 한 번 돌아본 카렐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베에게 바싹 다가갔다.

"이상하다니?"

"중장보병대 세작이 급히 올린 보고입니다. 두 시간 전에 마랄루 성벽에서 한 여자가 투신자살했다고 합니다."

"자살? 그런데? 그게 왜?"

"그런데 죽은 여자가 동부 유목민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꽤 큰 체구에 갈색 피부고......그쪽에 도는 소문으로는 경기병단장 어머니라고......"

"엘룬 바툴 부인?"

베아트릭스의 눈치를 살핀 우베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카렐이 탁자 옆에 말없이 앉아있는 베아트릭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맙소사, 한발 늦었군......."

머리를 싸쥔 카렐이 자리에서 조금 비틀거렸다. 무슨 이유엔지 갑자기 그의 머리가 아찔 해오고 있었다.

"왜 자살한 걸까요?"

"동부 유목민 복장으로 투신했다고 그랬나?"

"예. 때마침 저녁식사시간이어서 병사들 수백명이 모여있다가 다 봤다고 합니다. 근위병들이 접근을 차단하고 허둥지둥 시체를 치우고 입단속을 시켰지만 워낙 목격자가 많아서......소문이 다 퍼진 모양입니다. 무기장 위로 투신해서 시체가......말하기도 끔찍한 지경이었다고...."

"자신의 끔찍한 죽음을 동부 지휘부에까지 알리고 싶었겠지......"

카렐이 계속 무거워지는 머리를 연신 흔들었다. 그제서야 카렐의 말뜻을 이해한 우베가 안쪽에 앉아있는 베아트릭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대신 죽을테니 딸을 선처해 달라고요?"

"아마도 그렇겠지…….그런데......부인을 왜 진중에 데려왔을까? 그것도 딸이 포로로 잡히자마자?"

멍멍해진 머리를 또한번 가로저은 카렐이 숨을 푹 내쉬자 우베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 드셨습니까?"

"나? 아니. 왜?"

"아, 아닙니다. 코가 이상해졌나?"

자신을 돌아보며 절망스런 표정으로 밀담을 나누는 카렐과 우베의 모습에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고 있었다. 우베를 내보낸 카렐이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며 베아트릭스에게로 돌아왔다.

베아트릭스가 용기를 내 카렐에게 물었다.

"마랄루에서......무슨 일이 있습니까?"

베아트릭스의 질문에 카렐이 긴장한 얼굴로 물 한모금을 다시 들이켰다. 그의 얼굴이 이유없이 화끈거리기 시작했지만 카렐 스스로는 이 난처한 상황에서 당황한 스스로의 탓이라 여겨버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입술을 잘근 깨문 카렐이 물컵을 내려다보았다.

"엘룬 바툴 부인에게 안좋은 일이 생겼는지도......"

지팡이를 짚은 베아트릭스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똑바로 올려보는 그의 모습에 카렐이 한숨을 쉬며 또다시 한모금의 물로 긴장을 달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얼굴은 이미 혈색이 가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컵에는 이제 반 정도의 물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설마......날 회유하기 위한.....거짓말은 아니겠죠?"

카렐에게 질문을 던지는 베아트릭스도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강인한 바툴 가 전사였던 어머니가 행여나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도 전전긍긍해오던 것이 사실이었다.

"마랄루 남쪽 성벽에서.......엘룬 부인으로 보이는 유목민 복장의 사람이 투신을......"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인 베아트릭스의 눈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던 카렐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또다시 물컵을 입에 가져갔다. 허리춤의 비수를 쥔 베아트릭스의 오른손이 혼자 미친것처럼 떨려오고 있었다. 그는 물컵을 입술에 대고있는 카렐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목이 메어오기 시작한 베아트릭스가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엇,"

갑자기 왼손을 뻗은 베아트릭스는 카렐의 손에서 잔을 거칠게 나꿔채버렸다.

"이게......"

카렐을 올려보던 베아트릭스는 빼앗은 물컵을 스스로 벌컥 들이키고 말았다.

그 이상한 행동에 순간 당혹해했던 카렐은 자신을 향해 비수를 내미는 그의 오른쪽 손목을 반사적으로 확 붙들었다. 어린아이라도 능히 막을 수 있었음직한, 거의 형식적인 공격이었다. 카렐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 자리에 털석 꿇어앉은 베아트릭스의 두 눈으로 눈물이 주체못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태자전하를 감히 죽이려 했으니......이젠 절 처형하십시오....."

흑요석 비수에 묻은 독기운을 직감한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손목을 쥔 채 잠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술기운이 잔뜩 오른 카렐의 흰 얼굴이 온통 검붉게 변해 있었다.

“이거였던 거요?……그들이 어머니 이름으로 요구했던 게?”

한참만에 입을 연 카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대고 앉은 카렐이 울고있는 베아트릭스의 턱을 조용히 치켜들었다.

"제발......절 처형해주십시오.....이젠 증거도 모두 있지 않습니까......"

카렐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 없는지 베아트릭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든 카렐은 푸른색 독이 묻어있는 날을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눈물젖은 얼굴로 자신에게 기대있는 베아트릭스를 잠시 응시하던 카렐은 독묻은 짧은 비수 날로 스스럼없이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찔렀다.

"베아트릭스 플라칼 장군은 가문의 명에 따라 가디언 카렐을 죽이려 했지만 아깝게 실패했군."

옆구리를 반 쯤 파고들어간 비수를 이를 악물며 다시 뽑아낸 카렐은 그 피묻은 칼을 바닥에 그대로 내던져 버렸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순간 경악하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떨고있는 어깨를 그 피묻은 손으로 가만히 감싸주었다.

"이런 바보같은 암살 미수범은 재미없게 죽여버리느니 계속 옆에 끌고다니며 장태자의 우월함을 똑똑히 보여주는 게 낫겠군."

가슴을 껴안으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베아트릭스를 카렐이 따뜻하게 품어안고 토닥거려 주었다. 이성을 잃고 울부짖는 그의 탁하고 뭉개진 목소리에서 유일하게 분간이 되는 건 '어머니'라는 반복된 말 뿐이었다.

처음으로 기대어 울 사람을 찾은 베아트릭스는 남부와 동부 그 모두에서 이방인으로 일생을 살아오며 눌러두었던 묵은 한을 부둥켜안은 카렐의 가슴에 지독한 눈물과 함께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카렐의 흰 튜닉 위로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조금씩 번져나갔다.

머리를 덮쳐오는 지독한 술기운에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한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단단한 어깨 위에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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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파트 9 [쓰러진 베로니카를 품에 안고] 가 마무리되었군요. 2부 집필은 여전히 지지부진하군요. 10페이지밖에 못썼으니…. 가속이 붙어야 되는데 워낙 발동이 늦게 걸리는 스타일이라…..-_-;;;

어쨌든 뒤이어질 파트를 간단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파트10. A Drooped Dracaena (시들은 드라세나)

무대는 이제 탈라스까지 넓어집니다. 베아트릭스와 함께 탈라스로 옮겨간 카렐과 카이두가 바툴 가의 얼마안되는 유목민을 이끌고 샤드니가 이끄는 서부제후군 대군에 맞서게 됩니다.

그리고 남부와 맞서고 있는 샤레이에서는 지난번 어처구니없이 빼앗긴 마랄루를 수복하기 위한 전투에 돌입합니다.

과거 이야기는 카렐과 마리안, 어린 시절의 솔과 아메스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제 글의 과거이야기 중 가장 ‘현재’에 가까운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솔에 대한 카렐의 로리타(?)가 등장할지도……

약 150페이지정도 되는 부분이지만 손을 덜 본 부분이 많아 탈고시 많이 늘어날 것 같습니다.

<드라세나는 백합의 한종류로 ‘굳은 맹세’를 상징합니다.>

파트11. Who loves hydrangea?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현재 이야기는 전 파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제 과거 이야기는 조금씩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넘어가는, 제 글의 본격적 과거이야기의 기술방법인 역진행의 첫번째인 ‘4차 혼란기’가 시작됩니다. 파트 11부터 파트 14까지는 세나우스 2세의 죽음부터 카렐의 출생까지가 세세하게 다루어집니다.

지난번 잠깐 등장했던 오르마즈, 주페 태자와 아직 나이어린 풋풋한 모습(?)의 코리온, 그리고 모든 소용돌이의 원인이었던 세네피스 태자빈, 베흔과 네페티 부인까지, 등장합니다.

과거이야기의 분량이 많아 약 200여페이지정도 되는 부분입니다만 이부분도 탈고시 분량이 많이 늘어날 것 같습니다.

<수국은 차갑고 냉혈한 여인의 이미지를 뜻합니다..>

참고로 제 글의 과거이야기는

1. 기원 196년 세나우스 2세의 죽음~카렐의 출생 <1부>

2. 기원 97년~기원 196년 : 제국 확립기. 세나우스 2세의 치세 <1부~2부>

3. 기원 60년~기원 97년 : 제국 건국기. 세나우스 1세의 치세, 1차 혼란기. <2부>

4. 기원 31년~기원 60년 : 샤미르 리쿠, 오르마즈의 對 사교(邪敎) 무장투쟁. 성전의 시대 <3부>

5. 기원전 31년~기원 31년 : ? <3부>

6. 기원전 101년~기원전 31년 : ? <3부>

순서로 전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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