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194화 (194/1,132)

< -- 194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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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북부와 서부, 동부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탈라스 행성계는 그 묘한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많은 질곡을 거쳐온 곳이었다. 겨우 4개의 행성으로 이루어진 이 조그만 행성계에서도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2번과 3번 행성 단 두개 뿐이었지만 그 일대 20여개의 무인 행성계의 소유자를 결정하는 중요한 허브상에 위치해 있었고, 황제령, 북부 센지, 서부 수베르까지 무려 3지역과의 지역간 워프루트가 개통되어있는 교통의 최고 요지이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이곳 거주민들의 문화 역시 독특해서 서부의 독특한 집단주의적 문화와 동부의 유목민 문화, 그리고 북부의 자유분망함이 혼잡스럽게 뒤섞인, 꽤나 독특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인구밀도가 극히 낮기로 유명한 이곳에서도 더더욱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탈라스 3번 행성은 북부수도 코윈 만큼이나 춥고 황량한 눈과 황무지벌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네르의 고향인 그곳은 로노 장태자의 부계이기도 한 9제후 클라투스 가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가난한 동부에서도 최악의 저개발지역으로 많지않은 극빈자들이 거의 무정부상태로 살아가는 한심한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약육강식에 가까운 무질서한 곳에서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란 제네르가 독재자적인 강력한 황제를 갈구하는 급진 개혁주의 유학자가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그나마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는 탈라스 2번 행성은 7제후 바툴 가의 통치권 하에 있었다. 이웃에 위치한 3번 행성과는 대조적으로 반사막과 험준한 바위계곡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서부의 수베르 행성계와 더불어 제국 최고의 명마의 산지였고, 호전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4백만 탈라스 유목민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이들은 정주문화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아들인 동부 나머지 지역들과는 대조적으로 아직까지 유목민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고집스레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유난히 억센 이곳 사람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종종 '야만족'이라며 멸시당해온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손가락질당하는 이들의 삶도 이곳의 척박한 환경과 상황에 다른 지역과는 다른 방식으로 적응해 낸 나름대로의 지혜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자유분망함과 자부심, 평등한 동지애로 상징되는 이들의 독특한 전사적 문화는 지금까지 이곳을 무수하게 침략했던 서부제후군들---종교적 열광과 서열적 집단의식으로 똘똘 뭉친---로 하여금 치를 떨며 물러날수밖에 없도록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다.

카렐 일행이 탄 아르다가 셔틀은 이곳의 적도 부근에 위치한 슈카른 계곡에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이곳의 깎아지른 절벽을 등지고 있는 그다지 넓지않은 분지에는 2백여개가 넘는 크고작은 겔들이 마치 병영과도 같은 배치로 늘어져 있었다. 제대로 고정된 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은 바로 이 행성의 주인인 바툴 가의 종가였다. 부조종석에 앉은 카렐의 옆에 말없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베아트릭스는 참으로 오랫만에 돌아온 정든 고향의 모습에 말없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저도 여긴 처음이네요,"

아메스가 카렐의 목을 돌려안으며 속삭였다.

안된다며 펄쩍 뛰는 아버지에게 거의 생떼를 부려 '딱 하루'만 함께있겠다는 허락을 받아낸 아메스는 카렐과 함께 오른 셔틀에서 내내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아메스가 그런데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그 전날에 이어 어제도 카렐과의 '뜨거운 밤'을 보낼 기대에 잔뜩 부풀어있던 아메스는 카렐이 자신의 숙소에 밤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애꿎은 베아트릭스에게 괜한 의심이라도 품었는지 새벽에 그의 겔을 몰래 찾아가는, 꽤나 우스꽝스런 짓을 저질러 새벽부터 카렐을 황당하게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겔 안에서는 비수에 찔린 옆구리를 스스로 꿰맨 채 이부자리에 누워있던 카렐과, 자신의 이부자리를 카렐에게 내주고 밤새 그 곁을 말없이 지킨 베아트릭스가 적진에라도 쳐들어가는 양 겔 안에 들이닥친 아메스를 어리둥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 상황에 무안해진 건 물론이었고 몸을 다친 카렐에게 '요구'도 할 수가 없었던 아메스는 카렐의 간호를 핑게로 이곳까지 어영부영 따라온 것이었다.

"어쩌다가 옆구리는 다치셔가지고."

아메스가 두터운 드레싱을 한 카렐의 허리께를 더듬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카렐의 '정식 약혼자'임을 상기시키려는 듯 꽤나 적극적으로 카렐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아, 거 참, 눈뜨고 못봐주겠네요. 저기 밀실 있으니까 들어가서 아예 한따까리 하고 나오시던가."

둘의 동침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우베가 키득거리며 그 특유의 악의없는 핀잔을 던지고 있었다.

"푸헷, ㅤㅋㅞㄹ크에 사탕수수밭에서 맨날 약혼자하고 사고치고다닌 게 누구였죠?"

"전 그래도 사람들 눈은 피한 거라구요."

아메스와 우베가 장난스럽게 투닥거리는 소리에 카렐이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렐과, 그를 껴안고있는 아메스를 잠시 번갈아 쳐다본 베아트릭스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렸을 따름이었다. 그는 카렐 외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었다. 물론 카렐과도 변변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옆구리의 부상을 '발각'당한 카렐은 자신의 부상사실과 그 범인은 베아트릭스라는, 뭐가뭔지 모를 황당한 소리를 플라칼 가에 역으로 흘리라는 지시를 아침부터 우베에게 내려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터였다. 하지만 모두가 의아해하는 그 와중에서도 정작 '의혹'의 당사자인 베아트릭스는 전날보다는 한결 풀죽은 얼굴로 카렐의 뒤에 말없이 서 있었을 따름이었다.

"착륙합니다."

베네루스의 목소리와 함께 셔틀에 약간의 진동이 전해져왔다. 착륙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카렐을 아메스가 부축하려다가 그 체중을 받쳐내지 못하고 잠시 휘청거리고 있었다.

"익,"

우베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렐의 겨드랑이를 베아트릭스의 넓고 강건한 어깨가 대신 받치고 서 있었다.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 아메스가 입을 삐죽거렸다.

"쳇."

"후훗, 등급없는 가디언 카렐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시군."

쓴웃음을 지은 카렐이 쿡쿡 쑤셔오는 옆구리를 붙들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내일 아침이면 괜찮을거라니까 조금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카토가 카렐의 짐들을 대신 챙겨들며 셔틀 문을 열고 앞장서 내렸다. 반사막 특유의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일행을 제일먼저 맞아주었다.

"어서오십시오."

미리 와 있던 카이두 경이 셔틀에서 내리는 카렐과 그 일행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21명이나 되는 그의 부인들과 60여명의 자녀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따라 최대한의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밤이 찾아오기 시작한 종가 주변엔 사방에 환하게 켜진 많은 조명들이 이 사막까지 직접 찾아온 큰 손님을 영접하고 있었다.

"흐메, 부러워라."

우베가 그 많은 부인들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중얼거리자 아메스가 그의 옆구리를 확 꼬집었다.

"어휴, 동부여자들을 떼로 실어다줘도 싫다면서요?"

카이두의 안내를 받은 카렐은 수하들과 함께 중앙의 가장 큰 겔로 향했다. 그런 카렐의 뒤를 말없이 따르는 베아트릭스에게 외할머니들과 외삼촌들, 사촌들이 보내는 눈길은 반가움과는 거리가 먼, 거의 경멸과 살의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한때는 가문 최고의 전사였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가문을 통째로 멸문의 길로 끌어들일 뻔 했던 원수나 다름없어진 베아트릭스였다.

"저 망할 년,"

몇 사람들이 풀죽은 그의 모습에 대놓고 침을 뱉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베아트릭스에게 반갑게 두팔을 벌려보이는 단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할머니......"

베아트릭스가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카이두의 부인들 중 4번째에 서 있던 그 여인은 매질로 엉망이 되어버린 손녀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할머니를 껴안은 베아트릭스는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여주고 있었다.

"에.....엘룬이?"

순간 반 쯤 까무라쳐버린 카이두의 네째 부인을 그의 자녀들이 급히 업어 옮길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등에 업혀가던 부인은 거의 미친듯이 큰 소리로 무어라 울부짖고 있었다. 딸의 죽음을 접한 할머니의 처절한 모습을 바라보며 거친 흙바닥에 넋나간 듯 서 있던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카렐이 가볍게 짚었다.

"자. 나하고 같이 가지."

카이두로부터 아이락 한 대접을 받아든 카렐은 꽤나 난감한 얼굴로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곳의 양젖으로 만든 아이락은 술이라기보다는 음료수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지만 이정도를 다 마시면 카렐이 그자리에 뻗어버릴 건 뻔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저 세숫대야만한 큰 대접을 단 한모금에 비우지 못하면 한잔을 또 받아야 한다는, 가문 원로들의 요구에 카렐은 이래저래 경악하고 있었다. 상처 핑게를 대며 술대접을 대신 받으려던 아메스와 라손, 카토가 기겁을 하며 머뭇거리는 것도 그때문이었다.

"이럴땐 모렌 박사가 정말로 원망스럽군."

한숨을 내쉬는 카렐의 손에서 아이락 대접을 냉큼 대신 받아든 건 다름아닌 베아트릭스였다.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카렐의 뒤에 꿇어앉아있던 베아트릭스가 이곳의 전통에 따라 잔, 아니 대접의 술을 손가락으로 몇 번 튕기고는 거리낌없이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전사단에서 온 나머지 사람들의 황당한 눈길 속에서 그 믿기지않을만큼 큰 대접을 한번에 들이키고 있었다. 아메스나 우베나 카토 모두 '제대로 말을 하는' 베아트릭스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은 셈이었다. 대접을 모두 비운 베아트릭스는 빈 대접바닥을 사람들에게 확인시키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덕택에 가까스로 궁지를 모면한 카렐은 겔 안에 모여앉은 가문 원로들을 죽 둘러보았다. 카이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 가진 병력은 제가 이끌고갔던 정예 궁기병 2천이 있고, 제 가문 직속 경기병 4천과 중기병 2천, 각 부족에서 차출해온 5천여 경기병이 있습니다. 샤레이에 가 있는 궁기병 6천 때문에 평소보다 병력자원이 많이 적어졌습니다."

"결국.....중기병 2천에 일반 경기병 9천에 정예 궁기병 2천이 전부로군......보병도 없고......."

"지금 식량이나 투창과 말의 재고가 충분하니 장기간 항전에도 아무 지장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전사들 절반 이상은 이미 서부제후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최고의 베테랑들입니다."

카이두가 카렐의 뒤에 무릎꿇고 앉아있는 베아트릭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베아트릭스는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렐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호 가의 침략 때 40세의 베아트릭스 경이 백 명의 경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기습해서 적장 라바니 세호 경을 옷도 못입고 알몸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들었소."

"그때 저희 사령관이 베아트릭스 아버지였지요. 꽤 쓸만한 친구였는데......"

카이두가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딸과 사위를 떠올리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문득 고개를 치켜든 카렐은 겔 꼭대기에 뚫린 둥근 굴뚝같은 터너 사이로 보이는 꽤나 아름다운 별빛과 은하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주무십시오."

원로들과 무언가 상의를 하고 온 카이두가 카렐의 등뒤에 미리 준비되어있는 침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렐을 가리키며 무언가 속닥거리던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려 꽤나 애썼지만 워낙 요란스런 술판이 벌어져버린 이곳에서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수도 없었다.

"고맙소이다."

상례적으로 고맙다고 말은 했지만 카렐은 내심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거의 운동장만큼이나 큰 이 겔은 종장인 카이두가 21명의 부인들,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십여명의 자녀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유일한 '공간구분'은 출입구 왼쪽이 카이두와 아들들의 잠자리라는 것과, 오른쪽은 부인들과 딸들이 자는 곳이라는 것 뿐이었다.

양쪽의 중간, 출입구 바로 맞은편의 이 자리가 '극히 귀한 손님'에게 잠자리로 제공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카렐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양쪽에서 각자의 침구를 챙기는 카이두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하룻밤' 생각으로 몸이 잔뜩 달아있던 아메스의 경악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는 엄청난 실례를 저지를수도 없는 일이었다.

"손님분들은 이 옆의 겔을 비워두었으니 거기서 주무십시오. 안내해드릴테니 따라오십시오."

카이두의 어린 아들이 아메스와 우베, 라손, 카토에게 바깥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베가 대뜸 폭소를 터뜨리며 아메스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어럽쇼? 어렵게 왔는데 이거 우짠대요?"

"시끄러워요."

입을 삐죽거린 아메스가 카렐을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탈라스의 종장인 카이두가 외부사람에게 자신들의 전통이 꽤나 어색할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턱이 없었지만 일부러 카렐에게 이것을 '체험'하게 하는 의도는 확실했다. 전통을 지키며 사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미래에 황제가 될 카렐에게 각인시키려 하는, 자존심의 발로임을 카렐이나 아메스나 잘 알고있었다. 입고있던 튜닉을 벗어놓은 카렐은 꽤나 어색한 폼으로 잠자리에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같은 겔의 제일 하석에 역시 불편하게 누워있던 베아트릭스도 옆으로 돌아누운 카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급히 문을 향해 돌아눕고 있었다.

"후와,"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절벽 밑의 ‘훈련장’에 내려와 혼자 투창연습을 하는 베아트릭스를 구경하던 우베와 아메스, 라손이 입을 쩍 벌린 채 탄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오십 보 정도 떨어진 두꺼운 널빤지를 향해 날아간 자리드는 표적 중심을 아예 쓰러뜨려버린것으로도 부족해 끝을 파르르 떨면서 남은 힘을 소진하고 있었다. 아직 한쪽 발목이 불편한 상태에서 스코프나 사이클롭스도 없이 맨몸으로 던진 것이 저정도라면 제대로 장비를 갖추었다면 어느정도의 정확도와 힘을 낼 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지난번에 내가 안죽은게 정말 천운이네요."

아메스가 머리의 상처를 가리키며 라손에게 속닥거렸다.

"나도 나름대로 몸 하나는 탄탄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힘만으로 던지는 게 아니죠."

뒤에서 들린 카렐의 목소리에 아메스와 라손은 물론이고 연습할 자리드의 날을 살피던 베아트릭스도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연성도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전하도 투창 던질 줄 아세요?"

라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카렐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니."

"쳇, 그러시면서 뭐 아시는척은."

아메스가 입을 삐죽거리자 카렐은 대뜸 허리에 있던 단검을 뽑아 베아트릭스가 세워놓은 표적을 향해 내던졌다. 그리고 쩍 소리와 함께 표적인 널빤지 중간이 도끼라도 맞은 듯 갈라지고 말았다. 그 광경에 다시 얼떨떨해하는 아메스에게 카렐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그 필요성을 못느꼈을 뿐입니다."

단검을 다시 뽑아들고는 사대로 돌아오며 카렐은 베아트릭스의 탄탄한 어깨와 허리, 날렵한 하체를 감탄어린 시선으로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거의 페로와 비슷할 정도의 큰 키에 흠잡을곳없이 단단하게 다져진 날씬한 근육질 몸매는 근력은 물론이고 흑인종 특유의 탄력과 유연성까지 겸비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보다는 전하의 몸이 더 놀라우십니다."

베아트릭스가 바로 옆에 선 카렐에게만 들릴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뜻밖의 말에 조금 놀란 카렐이 베아트릭스를 문득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또 한발의 자리드를 표적을 향해 던지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던진 자리드는 이번에도 예외없이 표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렐의 시선에 여전히 무표정함으로 일관하며 짧게 말했다.

"제게 단검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시면 전 투창던지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나쁘지 않군."

피식 웃음지은 카렐은 옆에 놓은 중투창 하나를 집어들었다.

"탈라스의 2개 거주행성엔 모두 행성 에너지장벽이 없습니다. 지상 에너지장벽도 3번 행성의 클라투스 가 관청에만 단 한군데 있을 뿐이고 목표지인 2번 행성엔 아예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상륙 자체에는 아무 장애요인이 없습니다."

"그래, 그래, 항상 그 뒤가 문제지."

사령실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누런빛의 탈라스를 바라보며 라바니 경이 빈정거렸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파란색 눈동자를 천천히 치켜뜬 서부 원정군 사령관 샤드니는 스크린에 나타난 데이터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아무 말도 없었다.

"이대로 진행하면 1시간 후에 경계에 진입합니다. 사령관님."

"계획대로 수행한다."

샤드니의 짤막한 지시에 사령실 장교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상륙지 키타이 사막. 좌표 확인합니다."

초록빛 광택을 뿜는 탄탄한 갑주와 스캐너 기능을 겸한 신형 스코프를 눈에 끼고 침착한 표정으로 서 있는 샤드니의 모습은 그동안 보여온 유학자 서생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그것이었다. 하지만 라바니 경은 이런 '어린애'에게 지시를 받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지 꽤나 심통난 표정이었다.

"낙타병 9천은 1번과 2번 수송선에, 기병 2천과 장갑보병 만 오천은 3과 4번 수송선에, 일반보병 3만 8천은 4번부터 6번 수송선에 집결 끝났습니다. 사역부대는 7번 수송선에 대기중입니다. 군종 노예들은 후발대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도 낙타병 부대를 맡은 하지즈 장군의 목소리였다. 보병부대를 담당한 라바니 경도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고는 도크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역병과 지원부대까지 합치면 총 7만에 가까운 이정도의 대규모 원정은 250년만에 처음으로 있는 것이었다. 스크린의 작은 화면들에는 도크에서 정열을 끝내고 최종점검에 바쁜 각 수송선 내부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었다.

샤드니는 허리에 차고있던 긴 시미터를 집어들며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신성한 왕도의 뜻을 따르는 우리 서부연합군에 제니안과 리쿠 학장님의 영광이 함께할 것이다."

코리온의 친필 문장이 칼집에 섬세하게 새겨져있는 시미터를 모두에게 보이듯 가슴에 품어안으며 샤드니가 각 수송선 도크에 모인 병사들에게 말했다. 종교적 열정에 충만한 서부제후군 병사들이 그 크지않은 한마디에 일제히 환호성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원수같은 '리쿠 학장'이라는 말에 라바니 경이 보일듯말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지금 이순간 그의 이름을 파는것만큼 확실하게 분위기를 끌어올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있었다. 서부연합군의 대군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숱한 쓴잔을 마시게 해 온, 한맺힌 탈라스를 향해 그 어떤 때보다도 강력한 또한번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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