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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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좀 어떤가? 샤드니 경?"
샤드니의 연락을 받은 코리온은 3척 정도 길이의 현악기인 6현금을 쥐고 학장실에 혼자 앉아있었다. 하던 일을 방해받는 데 유난히 예민한 코리온이었지만 할룩스에 나타난 반가운 샤드니의 모습에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며 오른손에 쥐고있던 활과 악보를 기꺼이 옆으로 치워버리고 있었다.
싸움만 빼면 못하는 것이 없다해도 될 정도로 유난히 다재다능한 코리온이었지만 특히나 틈날 때마다 즐기는 승마는 물론이고 학교 생도나 교수들 앞에서도 종종 선보이곤 하는 6현금 연주는 전문 연주가를 무안하게 할 정도의 수준이라는 정도는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연주하던 악기를 무릎 위에 조심스레 얹어놓은 코리온은 꿇어앉은 샤드니를 향해 천천히 돌아앉았다.
그런 코리온에게 씽긋 웃음을 지어 보인 샤드니가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생각같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인근 오아시스도 손쉽게 차지했고 숙영지 공사도 마무리했으니 이제 내일부터는 주요 부족들에 대한 공략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자신에게 고개숙인 샤드니를 바라보던 코리온의 시선은 언제부터인가 그 뒤에 서 있던 보병사령관 라바니 경 쪽을 향하고 있었다. 살을 파먹는 듯한 그 매서운 시선에 라바니 경도 저으기 놀랐는지 괜한 딴청을 피우며 옆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이번엔 하지즈 장군 쪽을 향한 코리온이 웃는 낯으로 물었다.
"제후를 대하는 그곳 주민들의 태도가 그리 놀랍던가? 아쉬드 하지즈 장군?"
"아......그건......"
하지즈 장군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상하도 제대로 가릴 줄 모르는 그 무도한 유목민들이나 그 한패거리들은 원래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네. 장군. 그들 스스로는 그런 방종을 자유라는 말도 안되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 그런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볼 테니 놀랄 건 없네.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이 그런 막되어먹은 자들에게 '도리'를 가르치는 것 아니겠나?"
"물론이옵니다."
코리온의 표현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하지즈 장군이 얼굴 가득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코리온이 다시 샤드니 쪽을 돌아보았다.
"유목민들이란 제대로 뭉치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하지만 방금 말한 듯이 주도세력의 지배력이 조금만 흔들려도 언제든 이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라네. 샤드니 경. 우리 입장에서는 바툴 가가 도망만 다니며 소모전을 펴는 것이 가장 까다로운 상황이지만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나머지 부족 노얀들이 틀림없이 이반하려 들 테니 그게 녀석들에겐 딜레마지. 알아두게."
"명심하겠습니다."
샤드니에게 몇 가지를 당부한 코리온은 다시 악기를 어깨에 걸며 옆으로 돌아앉고 있었다. 코리온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잠시나마 그의 귀에 흘러들어온 현의 울림에 넋을 놓은 듯 그 자리에 잠시 멍 하니 꿇어앉아있던 샤드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 하지즈 장군을 돌아보았다.
"바얀 시 시장녀석은 어찌했나?"
"일단 풀어줬습니다."
"그래......잘했다. 내 말한대로 녀석들이 내부단속을 위해 조만간 바얀 시를 급습할 가능성이 높으니.......아니, 곧 기습할테니 준비를 하고 있도록 해라."
"녀석들이 접근한다면 모두 몰살을 면치 못할 겁니다."
하지즈 장군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지금 그곳 주둔군은 물론이고 낙타병과 기병 3천이 인근에 매복해 있습니다. 감히 기습을 감행한다면 녀석들의 무덤이 될 겁니다."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샤드니는 다시 한번 굳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바툴 가 종가의 위치는 파악했나?"
"녀석들이 워낙에 주기적으로 옮겨다니는 녀석들이어서......적도 부근 어딘가에 있다는 정도밖에는 아직 정보가 없습니다. 지금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색중이니 조만간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망할, 차라리 최고제후 슈트란 가 녀석들이 상대하기 낫지. 지랄같이 맨날 옮겨 댕기는 녀석들은 이제 상종하기도 싫어."
라바니 경이 또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무장치고는 희한할 정도로 잔말이 많은 그의 태도에 샤드니나 하지즈 장군 둘 다 못들은 척 하는 선에서 불쾌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라바니 경의 입장에서도 꽤나 '재수 없게' 생긴 풋나기 사령관 샤드니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 역시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기생오래비같은 샌님새끼,"
조회를 끝내고 사령관 막사를 나서자마자 라바니 경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령관 막사 옆에는 앞으로 계속 사령부로 쓰일 10층 높이의 탑이 세워지고 있었다.
막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바니 경의 부장 사르키스 세호가 여느 때처럼 불쾌한 얼굴로 막사를 나서는 라바니 경을 웃는 낯으로 맞아주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좋게좋게 대해주시면 좋지 않습니까."
말많은 그 숙부만큼이나 무장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꽤나 밝은 인상을 한 사르키스는 라바니 경의 손에 말고삐를 쥐여주며 또한번 웃음을 지었다. 조카의 웃음을 못 본 척 하며 말에 오른 라바니 경은 자신의 숙소가 있는 남쪽 보병대 막사 쪽으로 향하면서도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그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아가던 사르키스는 큰 숨을 한 번 들이키며 사방으로 뻥 뚫린 사막 전경을 빙 둘러보았다.
"뭐 무지하게 끔찍한 곳으로 상상했었는데 그런 것도 아니네요. 날씨도 사람 말려죽이는 아켐 보다는 차라리 나은 것 같고."
"그래, 사는 인간들이 끔찍해서 탈이지."
라바니 경의 가시 돋힌 말에 사르키스 경이 다시 웃음을 지었다.
"듣자하니까 아메스도 여기 와있다면서요?"
"지 애비하고 샤레이에 있겠지."
라바니 경이 꽤나 무성의하게 대꾸했지만 사르키스는 여전한 표정으로 휘파람까지 불며 중얼거렸다.
"이러다가 설마 전장에서 만나는 건 아니겠죠? 후훗,"
"너희 어머니는 뭐라 그러던?"
라바니 경의 질문에 사르키스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시겠어요? 가문의 결정이라는데......마리안 생각하면 좀 그렇긴 하지만.....어쨌든 많이 난처하시겠죠."
"훗, 너도 그러냐?"
라바니 경의 거의 따지는 듯한 물음에 결국 얼굴이 굳어지고 만 사르키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죽은 마리안의 오빠였고, 아메스와 솔에게는 외삼촌이었다.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이고 원리주의 유학자였던 사르키스의 아버지는 4차 혼란기 당시 주페 태자의 열렬한 지지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지만 처자식을 생각해 중립을 지켜달라는 처가의 요구를 무시하고 주페 태자의 진영에 가담했던 그는 결국 세호 가로부터 파문을 당하면서 아내와 나이 어린 아들을 처가에 다시 빼앗기고 만 꽤나 불행한 남자였다. 물론 가문의 선택이 '결국 옳았음'은 그의 고집스런 아버지가 주페 태자의 몰락과 함께 근위대에 처형당하면서 증명되었고, 연좌제에 의해 함께 처형당할 뻔했던 그의 어머니 뤼렌 세호와 사르키스 스스로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황제령의 로퍼크 가문 남자와 재혼한 이후로 가문에서 오랜동안 혼자 지내온 사르키스에게 어머니가 몇십년만에 얻은 여동생 마리안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던 여동생 역시 딸 하나만 남긴 채 잔혹한 남편 페로의 손에 살해당하면서 그는 또다시 외동아들 신세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어머니도 페로 녀석은 찢어 죽이고 싶어할 만큼 싫어하십니다. 다만.....아메스 그애 때문에......"
"아메스 그것도 동부사람이나 마찬가지야. 지 애비가 동부사람으로 키웠으니까. 너도 그애는 이제 잊는 게 낫다."
라바니 경이 여전히 쌀쌀맞게 말했다.
"그래도 어머니께는 유일한 손녀딸이죠. 아니......유일.....은 아니군요......"
갑자기 말을 세운 라바니 경은 뒤따라오는 사르키스를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아직도 지난번 일 때문에 삐져 있냐?"
"......아닙니다."
사르키스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솔인가 그것을 우리 쪽으로 보내지 않은 건 카렐 그 망할 년이야. 우린 틀림없이 가문 일원으로 받아주겠다고 했다구. 사생아한테 그만큼 관대한 처분이 어딨냐? 서부에서, 그것도 가디언하고 불륜으로 낳은 놈을 받아주는 너그러운 가문이 어디있냐?"
"하지만....."
"하지만 뭐?"
라바니 경의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르키스가 결국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제롬 공에게 강간당해서 많이 힘들어한다는 애를 다시 제롬 공에게 첩으로 팔아 넘기려 하셨던 건 절대 제대로 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흥분한 사르키스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사생아 주제에 최고제후 정식 소실이면 과해도 한참 과한 거지."
젊은 조카와 낯을 붉히며 싸우는 것이 별 의미없다고 생각했는지 라바니 경은 다시 자신의 막사 쪽으로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좀 솔직하시죠. 제롬 공이 꽤 거액을 약속했다는 걸 알고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웃고있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사르키스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라바니 경에게 그간 쌓아두었던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라바니 경은 그런 조카의 분노 어린 시선을 넌즈시 무시하며 대꾸했다.
"우리가 요구한 건 아냐. 가문에선 제롬 녀석한테 강간당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비밀리에 알아본 것 뿐이었어. 카렐 그놈이 가문에 스파이라도 심으려고 거짓말한건지도 모르잖아. 그랬더니 제롬 그놈이 지참금 1억 골드를 내고 정식 소실로 삼겠다고 지가 먼저 그러더군. 1억 골드면 최고제후가 정실혼보다도 큰 금액이야. 솔인지 머시긴지 얼마나 예쁜지는 모르지만 제롬 그놈이 눈이 돌아가기는 완전히 돌아갔나 보더라. 세상에, 계집 하나에 1억 골드라니,"
"1억 골드가 아니라 10억 골드여도 가문 피가 섞인 사람을 그렇게 대하신 건 틀림없이 잘못된 겁니다. 어머니께서......솔이란 애를 얼마나 보고싶어하고 계시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되고나서 집에서 계속 울고만 계신데......"
"네가 조카가 보고싶은 거겠지."
라바니 경이 비꼬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솔을 의사에게 보였던 카렐은 안전한 곳에서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에 마리안 쪽 친척들에게 보내는 방법을 네피와 함께 상의한 일이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아가야 하는 게릴라생활에서 솔을 빠져나가게 해줄 방법을 찾던 둘은 로퍼크 가와 세호 가를 놓고 저울질한 끝에 먼 친척 노인네들만 득시글거리는 로퍼크 가문보다는 외할머니 뤼렌 부인과 외삼촌 사르키스가 있고, 근위대의 감시가 비교적 느슨한 지방제후가문인 세호 가가 그래도 낫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카렐이 솔의 외할머니이며 종장의 여동생인 뤼렌 세호 부인에게 뒤늦게나마 직접 찾아가 지난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외손녀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던 것은 벌써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뤼렌 부인이 다행히도 그 사실에 뛸 듯 기뻐하면서 처음에는 일이 잘 풀릴 듯 했던 터였다. 하지만 이 눈치 없는 부인이 주변에 알리지 말아달라는 카렐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종장이며 언니인 벨리크 세호 부인에게 사실을 말하면서 일이 꼬여버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솔을 되찾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제롬은 '솔과의 안 좋은 일 여부'를 개인적으로 슬쩍 물어온 종장 벨리크 부인에게 솔을 깜짝 놀랄 거액으로 사겠다며 즉시 화답했고, 굴러 들어온 떡을 놓치는 법이 없는 이 계산적인 가문에 카렐도 하마터면 깜박 속을 뻔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거래' 사실을 안 뤼렌 세호 부인과 사르키스가 카렐에게 솔을 데려오지 말라며 비밀리에 연락해오면서 이 황당한 해프닝은 그대로 유야무야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제롬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아나?"
"뭘 말씀이십니까?"
사르키스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솔인가 그년 말이야. 카렐 그 녀석 여자라는군."
갑자기 멍해진 표정의 사르키스가 급히 말을 자리에 세우고 말았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가디언 카렐 그 망할 놈 잠자리 노리개감이었다구."
"무슨......말씀이신지......녀석은 가디언......"
"가디언 새끼들 알게모르게 그 짓거리 다 하는 건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지 않나? 하기사, 솔 그년도 그렇게 태어난 거였지? 지금 보니 죽은 지 엄마하고 하는 짓거리까지 똑같군."
라바니 경은 이미 죽은 그 아들 주페의 고결함이 무색해질 정도로 분별없는 말을 쉴새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발끈 한 사르키스가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마리안은 착한 아이였습니다!"
"누가 뭐랬나? 너무 착해서 이놈저놈 다 다리 벌려준 게 탈이었지. 지 엄마 닮았다니 솔인가 그것도 마찬가지겠지. 혹시 알아? 한몫 잡아보려고 먼저 제롬 녀석 유혹한 건지? 지 엄마처럼 천한 가디언한테나 대주고 있느니 최고제후 첫번째 소실로 가는 게 백배 나은거지. 암."
죽은 여동생을 모욕하는 라바니 경의 말투에 잔뜩 흥분한 사르키스의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천한 가디언의 곁에 그런 식으로 남아있다면 '차라리' 제롬의 소실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 자체에는 출신과 계급에 유난히 예민한 서부 무장인 사르키스 역시 동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거래' 사실을 카렐에게 알려준 자신과 어머니의 행동에 대한 지독한 후회가 갑자기 솟구치기 시작했다.
"샤드니 녀석 말이 카렐 그놈이 지금 여기 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군. 후훗, 혹시 만나거든 사실인지 물어봐. 흠, 하긴 그 전에 녀석이 먼저 칼을 휘둘러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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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의 외거노예 이십여 가구가 모여 살고있는 농장에 도착한 카렐은 올해 수확한 사과를 포장하는 작업이 한창인 작은 작업장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수원의 어른 노예들은 무시무시한 가문 '수석 가디언'의 출현에 바싹 긴장해 있었지만 어른들보다 두세 배는 많은 어린 노예들은 작업장 한구석에 인형처럼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커먼 옷차림의 이 키 큰 사람이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어린 노예들은 종가에 들이지 않는 관례에 따라, 아직 16살이 되지 않은 노예들은 이렇게 농장이나 집밖의 영지들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었다.
검은 망토 속에 가려진 카렐의 평화로운 시선은 작업장 한쪽에서 상자에 사과를 담고있는 검은머리의 예쁘장한 노예 소녀를 몇십분째 향하고 있었다.
"솔, 저분께서 찾으신다."
작업반장의 고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어린 솔의 선하고 맑은 눈동자가 카렐 쪽으로 휙 돌았다. 옷을 털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솔이 얼굴 가득 미소를 품은 채 큰 사과 한 개를 두 손에 꼭 쥐고는 카렐에게 급히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어린 솔이 얼굴을 조금 붉히며 품에 안고 온 큰 사과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드세요."
솔이 내민 사과를 받아든 카렐은 한 번 피익 웃음을 지었다.
"고맙구나."
이제 겨우 12살에 불과한 어린 솔은 그 나이에 안 어울리게 꽤 조숙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카렐의 명치 정도 오는, 또래치고는 제법 큰 키에 일찌감치 성징이 나타나면서 여성스런 볼륨이 드러나기 시작한 날씬한 몸매는 어느새 조금씩 어른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여긴 어떠니? 지난번에 있던 곳보다는 훨씬 안전할거다. 누구 들볶는 사람은 없고?"
"아뇨, 사람들 다 너무 잘해주세요. 친구들도 좋구요. 짖ㅤㄱㅜㅊ은 오빠들 세 명 있는데요, 카렐 님하고 안다니까 아무도 안 들볶아요."
솔 말마따나 '그 무서운' 카렐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가리키며 솔 또래 아이들이나 조금 큰 녀석들이 저희들끼리 쑥덕대며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네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뭐든지 어려운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도록 해."
"예."
고개를 떨군 솔이 다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처음 솔을 맡겼던 외거노예집이 도적떼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되면서 하마터면 솔을 잃을 뻔했던 카렐은 양부모를 잃고 또다시 혼자된 솔을 가까스로 구해내 페로 관에 꽤 가까운 이곳 과수원에 맡겨두고 이삼일에 한번정도 안부를 물으러 찾아오고 있었다.
"언제 도적떼가 덮칠지 몰라서 겁나요."
어린 솔이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며 중얼거리자 카렐이 다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여긴 종가가 가까워서 도적떼가 없단다. 걱정 마라. 접근하는 녀석들은 내가 다 잡아 낼테니. 자. 이거."
카렐은 손에 들고 온 작지 않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솔이 반짝거리는 눈을 빛내며 마주선 이 키 큰 무사를 올려보았다. 이 소녀는 이 '소름끼치는' 가디언의 얼굴을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아이였다.
"뭐예요?"
"열어봐."
미소짓는 카렐에게서 보따리를 받아든 솔은 안에 들어있는 몇 권의 책과 깨끗한 옷가지들, 피부에 바르는 유약들을 보고는 활짝 웃음을 지었다. 죽은 마리안 부인의 얼굴을 그대로 빼닮은 이 어린 소녀의 모습에 카렐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카렐 님이......항상 곁에 있어주시면 훨씬 든든할텐데....."
"미안하다. 바빠서 매번 이 정도가 고작이구나."
카렐의 말에 조금은 침울한 표정을 짓던 솔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도 16살 되면 종가에 들어갈 수 있다면서요?"
"들어와도 좋을 것 없어. 외거노예로 있는 게 간섭도 적고 훨씬 낫다."
"작업반장님이 그러시는데 저 정도면 조금만 더 크면 남쪽 안채에 충분히 들어갈 거라고 그러시던데요? 거기 가면 숙소하고 식사도 좋고, 힘든 일도 안 해도 되고 정말 좋다고......"
"뭐라고!"
갑자기 커진 카렐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솔이 어느새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카렐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으며 솔의 두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내 말 명심해라. 누가 뭐라고 해도 거긴 절대 와선 안 된다. 알았냐? 거긴 절대 안돼."
카렐의 무시무시한 눈길에 겁먹은 솔이 갑자기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저.....전......그냥......카렐 님이 종가에 계시니까.....그래서......"
순간적으로 흥분했던 자신을 가까스로 가라앉힌 카렐은 솔을 가볍게 품어안아주며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거긴 네가 올 데가 절대 아냐. 내 최대한 자주 와서 너하고 있어주마. 그럴 테니까 거기는 올 생각 말고 여기서 과수원 일 잘 배우고 있어. 알았지?"
"예."
솔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의 아직 작은 몸을 꼭 안아주던 카렐은 그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물컹한 느낌에 움찔 하고 말았다.
'녀석......많이 컸구나......"
솔의 덜 자란 가슴에서 느껴지는 묘한 자극과 살내음에 잠시나마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품었던 카렐은 그것에 반응하는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욕구를 탓하며 잠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늘도 글 가르쳐주고 가실거죠?"
어느새 얼굴이 붉어진 솔이 카렐의 목을 껴안으며 물었다. 카렐은 잠시나마 딴생각을 품었던 자신의 속내를 미소 속에 감추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마......오래는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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