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00화 (200/1,132)

< -- 200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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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바얀 오아시스를 차지하면서 일단 물 걱정을 덜은 서부연합군의 다음번 목표는 큰 부족 중 하나를 '본보기'로 때려잡는 일이었다. 이곳을 통틀어 인구라고는 350만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그중 대부분인 3백만은 어느구석에 처박혀사는지도 모를 유목민들이거나 수렵 산악부족들이었다. 어차피 유목민들을 하나하나 때려잡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 바툴 가를 따르는 4, 5개의 이곳 대부족들을 끌어들이던가, 안되면 격파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쿠틀룩 부족의 총 복속민은 20만 정도 되니까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닙니다. 이곳의 지도자인 노얀은 누만이라는 자입니다."

참모의 보고에 샤드니가 스코프를 고쳐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5천의 중장 낙타병과 기병, 보병 1만을 이끌고나온 샤드니는 이미 난리법석이 벌어져있는 언덕 아래의 큰 부락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 쿠틀룩 부족이 첫번째 희생물로 '낙점'된 이유는 어처구니없이도 2백여마리의 말 때문이었다. 서부제후군의 침입 직전, 바툴 가는 모든 부족들에게 대규모 거래를 중단하고 부족을 최대한 분산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를 따르지 않은 유일한 부족이 이들이었다. 노얀이 직접 주도한 2백여마리의 말 거래가 예정되어있던 그들은 '눈보라가 쳐도, 폭풍우가 쳐도 약속만은 어기지 않는다'는 유목민의 격언 그대로 상인에게 '찾아올 시간과 장소'를 너무도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그 '시간과 장소'에 나타난 건 이미 체포당한 말 상인이 아닌, 이들 1만 5천의 서부제후군들이었다.

노얀이 직접 거주하는 부락 인근에 말 200마리를 모아놓고 평화롭게 밤을 난 이들은 떠오르는 아침햇살 속에서 이미 자신들을 새카맣게 에워싸고 있는 소름끼치는 정규군들을 발견하고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쓸데없이 너무 많이 데리고 나왔군요."

하지즈 장군이 창을 치켜들며 말했다. 2백여개쯤 되어보이는 겔에서 허둥지둥 뛰쳐나오고 있는 유목민들은 어린아이들까지 합쳐도 채 1000명이 되어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정도 규모의 유목민부락을 찾아낸 것도 '목표물 부족'에 허덕이던 서부연합군에게는 그나마 가장 큰 수확이었다.

"탈라스산 말 정도면 학장님께 훌륭한 첫 전투 기념 선물이 되겠지. 저정도면 노예가 몇놈이나 나올까?"

농담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샤드니의 앞으로 20여분 전 보냈던 사자가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말등에 앉아있는 모습이 아닌, 말 안장에 꽁꽁 묶인 채 짧은 투창에 머리를 관통당한 시체라는 것이 갔을 때와의 유일한 차이였다.

죽은 사자의 목에 묶여있던 낡은 양가죽조각을 풀어낸 장교가 말에 올라있던 샤드니에게 두 손으로 바쳤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다지 길지않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유목민에게는 노예라는 단어가 없다.'

가죽조각을 내던진 샤드니가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저들이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보낸 사자도 아니었으니 그가 결과 따위에 신경쓸 이유는 없었다.

이후의 협상이나 전투를 쉽게 이끌어가려면 이번에 이곳 유목민들에게 확실한 '공포'를 심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자비를 따지고있을 시간이 결코 아니었다.

"노예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걸 알려줘야겠군. 안그런가? 하지즈 장군?"

평소처럼 차분하게 말하는 샤드니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하지즈 장군이 창을 번쩍 들어올리자 1열을 이루고 있던 5천여 낙타병과 기병들의 손에 들린 무거운 장창이 일제히 아침햇빛을 반사시키며 공중으로 치켜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호 가가 지난번에 실패한 이유는 저 무도한 야만족들을 너무 유하게 다루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소이다."

샤드니의 자신만만한 한마디에 라바니 경이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빈정거리고 있었다.

"글쎄, 그럴까요?"

"돌격!"

하지즈 장군의 목소리와 함께 울려퍼진 돌격 나팔소리에 몸이 잔뜩 달아있던 낙타병들이 저마다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바싹 말라붙은 건조한 초원은 순식간에 눈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흙먼지에 뒤덮히고 있었다. 부락에 모여있던 천여명의 유목민들은 저마다 무기를 꼰아잡고 말에 올라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압도적인 수의 낙타병들을 향해 자살에 가까운 반격을 해오고 있었다.

"쯧쯧,"

뒤에서 지켜보던 샤드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기껏 열 살을 조금 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부터 수명개조 당대가 틀림없는 쭈글쭈글한 노인네까지, 거의 무장도 갖추지 못한 유목민들은 말에 달린 몇 개의 투박한 무기에 모든것을 맡긴 채 괴성을 지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 중 제대로 무장한 '기병'은 채 백 명도 되지 않아보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고함소리와 함께 수백개의 투창이 공중으로 솟구쳐올랐다.

"쳇, 겨우 이정도였어?"

잠시 긴장했던 하지즈 장군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조잡한 투창을 어렵지않게 방패로 쳐내며 투덜거렸다. 중장갑을 차려입은 이들 낙타병들에게 제대로된 장비도 갖추지 못한 유목민들이 날리는 사격은 별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개중에 드문드문 장비를 갖춘 녀석의 사격에 이십여명의 낙타병이 떨어지는 모습도 보이기는 했다. 하지즈 장군은 샤레이의 남부제후군들에게 곤욕을 겪게 한 무서운 투창공격이 지금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그것이라는, 꽤나 심각한 착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조우 직전, 그들이 날린 또한번의 일제사격에 다시 이십여명의 낙타병이 흙바닥에 나뒹굴렀지만 5천이나 되는 낙타병 무리 속에서 그들은 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하지즈 장군이 잊고 있는 건, 지금까지 낙마한 40여명의 낙타병은 겨우 50명에 불과한 저 부족의 '진짜 궁기병' 손에 당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뒤로 물러난 천여명의 유목민들에겐 이젠 더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서로 등을 맞댄 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투창만을 마구 던져대는 그들에게 5천여 낙타병들의 거센 돌격이 파도처럼 머리위를 덮치고 있었다.

"푸,"

라바니 경이 얼굴을 찡그렸다. 무서운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을 부락 부근은 흙먼지 때문에 거의 아무것도 분간이 되고있지 않았다. 뿌연 먼지 속에서 찢어지는 함성과 비명소리, 악을 쓰며 외치는 무어라 알아듣지못할 고함소리가 주변에 둘러선 보병들의 귓청을 요란스레 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방적인 학살극'은 생각보다 오래 계속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먼지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는 것을 발견한 샤드니는 오십여 근위기병들과 오백여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천천히 부락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부락에 거의 다가간 샤드니는 느닷없이 들려온 하지즈 장군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잦아든 흙먼지 속에서 드러난, 생각보다 많은 낙타병 사상자들의 모습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샤드니의 순간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뭔가!"

샤드니의 성난 고함소리에 먼지와 피를 잔뜩 뒤집어쓴 하지즈 장군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거의 미친놈들 같았습니다. 팔다리를 잘라도 애어른 가릴 것 없이 계속 발악을 해대는 통에....."

어느새 흙먼지가 거의 가신 부락에서는 엔간한 전투 후에 잔뜩 보여야 할 적 부상자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린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천여구의 유목민 시체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중간중간 낙타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거나 이미 죽은 낙타병은 어림잡아도 2백명은 넘어보였다.

"이런......"

어떤 낙타병은 이미 몸에서 잘려나간 유목민 소녀의 턱에 팔목을 꽉 물린 채 반 쯤 정신이 나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을 혼비백산 뛰어다니고 있었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낙타들의 다리에 묶인 올가미들의 끝에는 돌진하는 낙타의 옆을 몸 하나에 의지해 달려들었을 꼬마들과 노인들의 산산조각난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이 뜻밖의 모습에 나름대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샤드니조차 할 말을 잊은 채 멍 하니 있을 따름이었다.

"이상할것도 없구만."

샤드니의 뒤에서 말을 몰아온 라바니 경이 별것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 왜 우리 가문이 '유해질'수밖에 없었는지 아시겠소?"

당혹스런 표정으로 유목민들 시체 사이를 걷던 샤드니는 그 한쪽에 있던, 팔다리가 모두 잘려나간 채 산산조각나 있는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던 듯한 그 거구의 남자 목에는 부족장인 노얀을 상징하는 늑대 이빨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앞으로 이들의 '제대로된 군대'와 싸워야 할 것을 머릿속에 떠올린 샤드니의 온몸이 오싹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이해할수가 없어."

베아트릭스에게 내내 시큰둥하던 탈란 바툴 중랑장이 몇시간만에 이 밉살머리스러운 조카에게 입을 열었다.

세 시간쯤 전 키타이 사막 한귀퉁이에 내려진 일행은 누가보기에도 유목민 말 장사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행의 선두에 선 베아트릭스와 탈란을 비롯한 4명의 바툴 가 사람들은 거칠게 무두질한 가죽옷 차림에 투창이 들은 퀴버와 투박한 짧은 창, 문장도 없는 볼품없는 방패로 '유목민답게'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십여마리의 말 등에는 꽤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음직한 양의 식량과 야영장비가 실려있었다.

꽤나 어색한 표정으로 탈란의 뒤를 말없이 따르던 베아트릭스는 붉게 노을이 져가는 저녁 하늘을 잠시 올려보았다. 탈란은 베아트릭스가 자신의 말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짜증스런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길지않은 검은 머리칼에 유목민답지않은 하얗고 고운 피부, 검은빛의 큰 눈이 돋보이는 이 여인은 카이두 경 말마따나 유목민 중에는 보기드문 잘 다듬어진 미모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바툴 가 혈통 특유의 큰 키와 날씬하고 단단한 근육질 체구는 이 여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듣고 있어요."

베아트릭스가 탈란에게 마지못해 대답했다. 탈란은 이런 문제를 남자인 다른 두 명에게 말하기는 뭣했던지 지금껏 그리도 꼴보기싫어하던 베아트릭스에게 괜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저놈이 도대체 뭐길래 날보고 꼬시라는거야? 듣자하니까 가디언이라던데......명색이 7제후 적생자인 내가 천하에 결혼할 인간이 없어서 저런 괴물하고 엮여야 돼? 참, 나, 기가막혀서. 정말, 내 이런말하긴 그렇지만 이번 전투에 저놈 서부새끼들한테나 걸려서 콱 뒈져버렸으면 좋겠네."

이모의 악담에 가까운 불평을 말없이 듣고있던 베아트릭스는 행렬의 맨 끝에서 말없이 따라오고 있는 카렐과 라손을 얼른 돌아보았다. 아직 카렐에 대해서 모르는것이 많은 베아트릭스는 귀가 밝은 카렐이 이모의 이런 원색적인 불평을 다 듣고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가죽 주머니로 날을 감싼 자신의 창과 카타나를 비스듬하게 등에 멘 카렐 역시 다른 일행들처럼 유목민의 두툼한 가죽옷과 모자로 온몸을 감싼 채 시알피의 등에 올라 있었다. 그 옆을 함께가는 라손은 명마의 고향인 이곳 탈라스에서 자란 사람답게 말 위에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신통하게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솔직히 말해 봐. 니가 내입장이면 황당하지 않겠냐고? 너 저새끼 목소리 들어봤지? 저게 어디 사람 목소리야? 무슨 짐승새끼 우는소리같은게 소름이 쫙쫙 돋더라. 그래, 저 꺽다리같은 키야 아버지 생각하면 뭐 할말 없지만......저놈 몸에서 피냄새 나는 거 알아? 세상에,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으면......정말 다가가기도 끔찍스럽더구만, 저런 괴물하고 평생을 같이하라고? 어휴, 정말 내팔자야."

베아트릭스는 카렐에게 경악하고 있는 이모를 달래는것이 그에게 이모를 접근시키는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사실에 내심 꽤나 황당해하고 있었다. 카렐이 북부에서도 이미 5명에게서나 '딱지를 맞았다'는 사실이 이제 베아트릭스에게도 충분히 이해되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죠......저분도 나름대로 매력이....."

"저분? 너 지금 저분이라고 했니? 정신차려, 저새끼는 가디언이야. 매력? 저딴 새끼가 개뿔 매력이냐? 얼굴은 반반하긴 하다만 난 솔직히 성별도 없는 가디언 따위는 취미없어. 난 집안좋고 돈많고 잘생긴 '남자'가 좋다구. 젠장, 지난번에 혼담 진행한다던 눌레딘 가 남자는 어디다가 팔아치우시고 말이야......"

"눈이......특이한 게 매력적이지 않아요?"

어쨌든 베아트릭스로서는 이모와 카렐을 어떻게해서든 엮어줘야 할 '책임'이 있는 이상 자신이 생각한 카렐의 장점들을 다 늘어놓는수밖에는 없었다.

"그래, 살기등등해갖고 저 기름뜬것같은 괴상망측한 눈깔이 퍽이나 매력적이겠다."

베아트릭스는 투덜거리고 있는 이모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카이두의 29번째 딸인 탈란은 사실 182살인 조카 베아트릭스보다 15살이나 어린 여자였다. 지금껏 가문의 최고 재원으로 손꼽히며 쟁쟁한 제후가들과 혼담이 오가기도 했던 그가 저 '무시무시한 가디언'과 자신을 엮으려는 아버지 카이두의 판단에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속도 무척 깊으신 것 같고......"

생각없이 말하던 베아트릭스는 지금 자신이 '임무'를 위해 이모를 달래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감정을 그대로 털어놓고 있는 것인지 꽤나 헛갈리고 있었다. 탈란이 그런 베아트릭스를 돌아보며 잠시 기가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예 네가 가지지 그러냐? 그래, 제발 부탁이니까 네가 좀 가져가라. 제에발."

카렐이 실은 태자라는 사실이 베아트릭스의 입가에서 빙빙 맴돌고 있었지만 차마 그것까지는 말할수가 없었다. 아니, 말하고싶지가 않았다.

"더 추워지기 전에 야영해야겠다."

탈란이 일행을 정지시켰다. 시알피에서 내려선 카렐은 아직까지 졸고있는 라손을 두들겨 깨워 말에서 내리게 했다. 베아트릭스를 비롯한 4명의 바툴 가 사람들은 꽤나 능숙한 손놀림으로 자그만 천막을 눈깜짝할새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공기 매트리스와 가죽을 깔자 단 10여분만에 꽤 아늑한 잠자리가 완성되어 있었다.

"누구부터 불침번을 서지?"

"내가 있으니 필요없을거요. 무엇이든 다가오면 깰 테니."

카렐의 한마디에 탈란이 그다지 미덥지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워낙 유명한 가디언'의 공언인지라 별다르게 반박하기도 뭣한지 별 대꾸도 없이 자신의 담요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드러누웠다. 카렐은 쌀쌀맞은 탈란의 태도를 못본 척 중간에 놓인 화로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누워있는 탈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할아버지께서 저분 옆에서 자라고 말씀하신 거 잊었어요?"

"싫어. 잠 설치고싶지 않아."

고집을 피우는 이모를 바라보며 베아트릭스가 들릴듯말듯 한숨을 내쉬었다. 천막 입구 왼쪽에 나머지 2명의 남자 친척들과 함께 드러누운 탈란은 어느새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있었다. 화로를 피운 카렐은 천막 오른쪽에 라손과 나란히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솔의 손톱에 찢긴 뺨에는 여전히 큼직한 드레싱을 그대로 대놓은 상태였다.

"캬아, 총리 각하 품에 안겨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나."

라손이 손목에 매고있는 손수건에 입을 맞추며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부하의 그런 모습에 잠시 웃음짓던 카렐은 자신의 잠자리에 누우려다 말고 아직까지 탈란 옆에 멍 하니 앉아있던 베아트릭스를 문득 바라보았다.

"뭐하나, 여기 와서 자. 그쪽은 꽉 찼으니."

카렐이 자기 옆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베아트릭스는 무슨 이유엔지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잠도 안오는데 여기 와서 말상대나 해주게나."

담요를 덮고 누우며 카렐이 다시한번 재촉하자 베아트릭스가 마지못해 카렐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어느새 이 좁은 천막 안은 6명의 전사들로 꽉 들어차 발디딜틈도 없었다.

카렐의 반대편 옆에 누운 라손은 어느새 코까지 요란스럽게 골고 있었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카렐이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깔끔쟁이 페로 녀석이 코고는 여자 퍽이나 좋아하겠네."

꽤나 시끄러운 라손을 옆으로 돌려누이고 다시 자리에 편하게 누운 카렐은 반대편 옆에 있는 베아트릭스에게 가벼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내가 어른이 된 후에 만난 사람중에 날 처음부터 좋게 본 사람은 한명도 없었지. 정말......단 한명도 없었어."

움찔 하고 놀란 베아트릭스는 혹시 방금전의 탈란과의 대화를 카렐이 듣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아메스도 어릴땐 '꺽다리 괴물' 이라면서 재수없다고 돌을 던지곤 했었고......뺨도 꽤 여러번 맞았지......솔도 12살인가 될때까지는 나만보면 놀라 울던가 도망쳤고. 이젠......다른사람이 뭐라그러든 한귀로 흘릴만큼 충분히 뻔뻔스러졌어. 그러니 이모를 설득하려고 그렇게 애쓸필요는 없네. 물론......카이두 경이 그렇게 지시했겠지만."

카렐을 문득 돌아본 베아트릭스는 반 쯤 풀린듯한 힘없는 시선으로 공중을 올려보는 그 회색빛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탈란 이모는 좋은 사람입니다. 성격이 직설적이만 한번 마음만 먹으면 정말 잘해줄 사람입니다."

"자네 얘기를 하는 건가?"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한 베아트릭스는 담요를 얼른 눈밑까지 뒤집어썼다.

"지금껏 약혼자 얘기는 한번도 안하더군."

"......쿤제라고.....중장보병대 중랑으로 있는 녀석이죠."

"어떻게 만났지?"

카렐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묻고 있었다.

"다른 플라칼 가 사람들처럼......종장님에게서 어느날 갑자기 소개받았죠. 하룻밤 같이 지내고......그걸로 약혼절차는 끝났죠. 서부에서 큰 공훈을 세운 댓가로 녀석에게 주어진 훈장이었습니다."

"그랬군......그래서 약혼자 얘기를 안한거였군."

카렐이 베아트릭스를 다시 돌아보았다.

"5차 혼란기에 남편하고 외아들이 죽고......70년 가까이 혼자 살아왔어서 저도 별다르게 거부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야인 신분이 되고나니.....경기병단장 시절이 그립지?"

카렐의 질문에 베아트릭스가 약점을 들킨 듯 또한번 놀라고 있었다. 아무 대답이 없는 베아트릭스에게 카렐이 두 팔을 머리 뒤에 고이며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전사단에 경기병대를 창설할 예정이야......옛 북부 경기병 출신들은 이미 집결에 들어갔고......동부에서 궁기병들을 모아 합류시켜서 슈로 기사단 중장기병과 함께 기병전력의 축을 이루게 할 생각일세. 규모는 당장은 3천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시간이 지나면 늘려가야겠지."

카렐의 말뜻을 해석한 베아트릭스의 도톰한 입술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지금껏 자신을 집요하게 끌고다니며 곁에 두려 한 카렐의 의사가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베아트릭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동부기병들을 그대로 활용하셔도 될텐데요....."

"이번 장태자는 자기 힘이 없이 제후들에게 끌려다녔던 로노 장태자의 길을 되밟지는 않을테니."

카렐이 어느새 베아트릭스의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비치는 그 특이한 회색빛 시선에 베아트릭스가 미친 듯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지금......적장이었던 절 믿으시는 겁니까?"

"믿지 않으려거든 쓰지를 마라. 쓰고 나서는 의심하지 말라, 이런 말이 있지 않았던가? 자넨 황실 경기병단 슬레이프니르 사령관이 될게야.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주게."

카렐이 베아트릭스의 얼굴을 그 큰 손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잘자게나. 피곤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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