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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202화 (202/1,132)

< -- 202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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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 도대체 누구야? 정상적인 가디언이라면 유전자 스캐너에서 가디언이라고 제일먼저 반응해야 돼. 그런데 그걸 통과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야. 저놈 정체가 도대체 뭐야? 넌 알고있지?"

"할아버지께서......비밀로 하라 하셨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베아트릭스는 결국 꽤나 궁색한 대답을 할수밖에는 없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탈란이 다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기 스스로의 말마따나 탈란은 절대 바보는 아니었다. 동북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법학 박사까지 공부한 탈란은 유학을 '쓰잘데기없는 글나부랭이'라고 폄하하는 아버지 카이두 경만 아니었다면 남극성당에도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았음직한 꽤 명석한 여자였다.

탈란이 여전히 곱지않은 시선으로 베아트릭스를 바라보았다.

"난 아버지 곁에서 근위기병대장까지 맡고있는 가문의 핵심이야. 가문의 기밀사항중에 내손을 거치지 않는 건 거의 없어. 그런 나한테도 비밀이 있다고?"

할아버지가 비밀로 하라고 말했다는 건 사실 베아트릭스의 거짓말이었다. 카이두 경은 탈란이 카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때는 '살짝 귀띔'이라도 해 주라고 지시한 바 있었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무슨 이유엔지 이 이모에게 카렐의 정체를 사실대로 알려주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요. 가디언은 아닙니다."

베아트릭스가 결국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이정도로도 탈란은 이미 충분히 충격을 받고 있었다.

"뭐야......그......그럼......설마 진짜 귀족?"

베아트릭스의 입술에서는 차마 그 이상의 말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탈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속 따져물었다.

"맞지? 귀족이지? 모계가 상급귀족이라며?"

"화, 황족......"

베아트릭스는 최대한 두리뭉실하게 대답하기로 맘먹었다. 탈란이 이렇게 따지고든다면 돌아간 후에 카이두에게도 사실을 확인할것이 뻔했다. 이미 가문에 씻을수없는 죄를 지은 입장에서 또한번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를수는 없었다.

"뭐?"

탈란은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는 듯 귀를 한 번 후비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로서는 탈란이 더이상 따지고들지 않기를 바랄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법'을 공부한 이 똑똑한 이모는 여느때처럼 조카의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황족? 지금 황족이랬어? 맙소사, 이걸 어째. 황족 어느 신분이야? 보자아, 위에서부터 태자, 대군, 군, 일반황족......그럼 성이 리쿠겠네? 그래서 아버지를 '불명'으로 한거였어? 황족 어느 신분이냐니까? 진짜 이름은 뭔데?"

탈란의 놀라울정도로 빠른 추론 덕택에 잔뜩 궁지에 몰린 베아트릭스가 또다시 어물거리고 있었다. 이런 베아트릭스를 살려준 건 문 밖에서 들린 라손의 목소리였다.

"저녁 다 식는다고 빨리 오시랍니다."

재빨리 탈란의 방을 빠져나온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방 안에서 쿠션에 반 쯤 기대앉은 편한 자세로 자신을 맞아주는 카렐을 새삼스럽게 다시 쳐다보았다.

"양고기는 식으면 느글거린다고 궁시렁거린 게 누구였더라?"

"죄송합니다."

"죄송할게 뭐있남. 어차피 자네들이 먹을건데."

바싹 말린 양의 생간을 씹으며 카렐이 건성 대답했다. 꽤 신중한 자세로 들어온 탈란은 지금까지처럼 베아트릭스 옆에 자리잡고 앉아 카렐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티를 내며 호들갑을 떨어댈 정도로 서툰 그는 결코 아니었다.

"방금전에 화냈던 것 사과드리겠습니다."

탈란이 침착한 말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양고기를 먹던 베아트릭스가 이 속보이게 구는 이모를 슬쩍 흘겨보았다. 마른 양고기를 씹던 카렐이나, 요구르트를 퍼먹던 라손이나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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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임무를 받고 떠났던 수에니에서 뜻밖의 매복으로 궁지에 빠졌던 카렐은 킵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세 대나 되는 차에 연달아 받히면서 온몸의 7군데나 골절되는 심각한 중상을 입은 후였다. 고속셔틀로 급히 페로 관에 후송된 카렐은 두 번의 큰 수술을 받으면서 한달이 넘도록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수술을 마친 카렐의 병실을 찾아왔던 페로는 병상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카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시간여 동안을 카렐의 손만을 꼭 붙든 채 머리맡에 조용히 앉아있기만 했던 페로는 몇번이나 낮은 한숨을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페로에게 누워있던 카렐 또한 한마디도 표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둘 모두는 그 침묵속에 묻혀있는 서로의 감정과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이런 침묵의 시간은 카렐이 누워있는 50여일동안 매일 한시간씩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페로 가디언부대의 최고핵심인 이 '등급없는 가디언'의 부상소식은 정적의 준동을 걱정한 페로의 결정으로 한달이 넘게 철저한 베일속에 가려져 있었다.

몸이 어느정도 나아지면서 의무실이 있는 남쪽 안채 정원에 산책을 나온 카렐은 여느때처럼 풀숲에 숨어서 히히덕거리는 안채 '미인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못본 척 하며 연못가 조그만 정자 카우치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얘 좀 봐, 감히 뭐하는 짓이야? 우리도 못들어가는 데를?"

여자들의 투닥거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던 카렐은 정원 입구 부근의 풀숲에서 들려오는 귀에익은 목소리에 잠시 긴장하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전 그냥......여기 카렐 님이 계시다기에....."

"썩 꺼지지 못해! 젠장, 이젠 별 구더기같은 년들이 다 꼬이고 있네."

"솔? 너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카렐이 큰 소리로 물었다.

"저, 저예요! 거기 계세요?"

"제길할....."

카렐이 이를 악물었다. 기쁜 얼굴의 솔이 앞을 가로막던 여자들을 뿌리치고 카렐에게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카렐은 그런 밝은 표정의 솔이 무안해질 정도로 대뜸 무서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네가 여기 종가에 왜 있는거냐!"

카렐의 싸늘한 목소리에 움찔 한 솔이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죄송해요......"

솔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16살이 된 솔은 어느새 어머니 마리안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거의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소녀를 성난 눈길로 노려보던 카렐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버렸다.

"카렐 님이 아무 말씀도 없이 너무 오래 안보이셔서.......죄송해요, 너무 걱정이 되어서......"

"설마......남쪽 안채로 온 건 아니겠지?"

카렐의 여전히 곱지않은 시선이 솔을 다시한번 쏘아보았다.

"아뇨, 아니예요. 남쪽 사랑채 청소를 하고 있어요. 이제 열흘 됐는데.....괜찮아요."

솔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솔의 그 곱던 손은 힘든 청소일 때문인지 군데군데 눈에띄게 거칠어져 있었다.

"내 집사 로카에게 말할테니 당장 과수원으로 돌아가라."

다시 시선을 거두어버린 카렐이 사뭇 쌀쌀맞게 말했다. 풀이 죽어버린 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 여기요,"

솔이 품에 숨기고 온 사과 두 개를 끄집어냈다.

"과수원에서 제일 좋은 거 골라서 따왔어요. 이거 드세요."

사과를 내미는 솔 앞에서 카렐은 차마 방금전같은 무서운 표정을 계속 하고 있을수가 없었다. 결국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만 카렐은 솔의 발그스레해진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집사 로카를 불러 솔을 5일 내에 다시 과수원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던 카렐은 그로부터 4일 후, 운없이 페로의 눈에 띄어버린 솔이 그 어머니처럼 페로의 잠자리에 강제로 불려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에 아연질색할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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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사 평원에 자리잡은 동부 연합군 숙영지는 마랄루 공격을 앞두고 조금은 수선스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수선스러움에 더해 사령부 부근에서는 잠시 작은 소동이 또한번 벌어지고 있었다. 총사령관인 샤자한 공을 비롯한 최고지휘부 사람들이 모두 의복을 정제하고 사령관 막사 앞의 임시주기장에 사뭇 긴장한 얼굴로 모여서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나 샤자한 공의 묘하게 어두운 표정은 페로에게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이들 긴장한 동부제후들의 눈길은 북쪽 하늘에서 보이기 시작한 회색 셔틀에 일제히 모아지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세네피스 황후폐하."

셔틀 문이 열리자 그 옆에 기다리던 토로 경이 바닥에 얼른 엎드리며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문에서 내려선 세네피스 황후는 오랜 충신의 여전한 모습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늘거리는 흰 비단포에 검은빛 카파키 가 머플러를 두른 화려한 모습의 그는 제국 '황후'로서의 당당하고도 완벽한 자태를 품고 있었다.

"이런 험한 전장을 직접 찾아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대표로 나선 샤자한 공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세네피스 황후는 무슨 이유엔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샤자한 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있을 따름이었다.

잠시동안의 이유없는 침묵이 흐른 뒤에야 세네피스 황후가 표정을 돌변하며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오랫만입니다. 샤자한 공.......정확히 127년만이구려."

"예."

샤자한 공의 목줄기로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나마 황후의 뻣뻣한 태도에 긴장했던 동부제후들이 웃음을 지으며 다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샤자한 공의 안내를 받으며 막사로 향하던 황후가 말했다.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 태자가 있는 탈라스로 갈 예정이요. 잠시 신세를 지고 싶소만."

"황태후폐하를 모실 수 있다니 정말 무한한 영광입니다."

"황태후라는 호칭은 이상하게 거북하구려. 그냥 황후로 불러주시겠소?"

샤자한 공의 호칭에 황후가 자연스럽게 제동을 걸자 샤자한 공이 또한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황제'의 호칭은 즉위식이 지난 후에만 가능한 반면 '황태후'는 황제의 사망과 동시에 제위 장태자의 모후인 황후에게 부여되는 것이었고, 황제의 사망 후, 새 황제의 즉위식 전까지의 과도시기에 '황후'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재의 그에게는 장태자의 모후에게 부여되는 '황태후'의 호칭이 사실상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명목상이나마 황제와 동격인 황태후 호칭을 거부하고 아랫서열인 황후를 고집하는 그의 태도에 제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 전사단 내에서도 이미 한바탕 논의가 오갔던 사실을 잘 알고있는 제네르는 고개를 조금 떨군 채 굳은 표정을 하고있을 따름이었다. 그때도 세네피스 황후는 자신을 '황후'로 불러줄것을 끝끝내 고집해서 전사단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한 바 있었다.

"내 샤자한 공과 단둘이 할 말이 있소만."

황후의 한마디에 샤자한 공이 움찔 하고 있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동부제후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나자 샤자한 공을 동반한 세네피스 황후는 태연스럽게 사령관 막사에 들어서고 있었다. 황후를 따르는 샤자한 공의 발걸음이 묘하게 무겁다는 것은 페로는 물론이고 제네르 역시도 눈치채고 있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막사에 들어선 이후로 내내 침묵을 지키는 황후의 태도에 줄곧 위압감에 짓눌려있던 샤자한 공이 결국 바닥에 털석 꿇어앉고 말았다. 그런 샤자한 공을 본척만척 하며 황후는 한구석에 놓여있는 술을 잔에 담아 무표정하게 들이키고 있었다.

"베흔이 그리도 무서우셨소?"

눈을 가늘게 뜬 세네피스 황후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건......"

"공이 나와의 약속을 엎지만 않았어도 내 언니이신 오르마즈 경이 결국 근위대를 물리쳤을 것이요. 오르마즈 경의 능력을 그리도 못믿으셨단 말이요? 막강한 근위대를 3달이나 상대하며 고분군투했던 오르마즈 경을 보면서도?"

세네피스 황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이 약속했던 기병 5만기는 고사하고.......단 2만기만 더 있었어도......하임달의 결전은 북부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요."

이마를 땅에 붙인 샤자한 공은 단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을 가다듬은 세네피스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지나간 옛일이니 이제 더이상 문제삼지 않겠소이다. 나도 잊을 것이니 공도 이 일은 더 이상 괘념치 마시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황후는 마지막 말에 더욱 힘을 주어 강조했다.

.....그런데......내 넘겨주었던 건......잘 가지고 계시오?"

"물론이옵니다. 말씀하신대로......여기 준비해 두었습니다."

궁지를 벗어난 샤자한 공이 다시한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사령관석 옆으로 다가간 샤자한 공은 그 한구석에 잘 감춰두었던 가로세로 두 뼘 정도 길이의 칠보상자를 황후에게 두 손으로 바쳤다.

상자를 받아든 황후는 샤자한 공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 눈짓을 보냈다. 막사 안에 혼자 남은 황후는 마치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녹슨 상자를 열어보는 황후의 입가에 어느새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이제야 다시......."

눈을 지그시 감은 황후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그 매화무늬 은목걸이에 입을 맞추며 눈가 가득 웃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원래 들어있었던 푸른빛 편지 3통과 두루마리, 서류꾸러미도 그대로 들어있었다. 목걸이에 붙어있는 먼지를 대강 털어낸 세네피스 황후는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그 자그만 은목걸이를 가늘고 아름다운 목에 걸며 또한번 미소를 지었다.

막사 밖에서 마랄루를 되찾기 위한 총 출동을 알리는 낮고 힘찬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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