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3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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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포를 챙겨입은 자이납은 빠른 걸음으로 마랄루 요새의 동쪽 숲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적진에 제일먼저 접근하는 이 달갑지않고 위험한 임무를 그가 맡은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자이납은 비교적 경계가 덜한 여자---그것도 상당한 미모를 갖춘----였고 가디언팔찌도 끼고있지 않은, 누가보기에도 확실한 서부의 시민이었다.
“남부남자들은 어쩜 이리 하나같이 우락부락하게 못생겼을까? 캬아, 도대체 그 멋진 학장님이 남부 피가 많이 섞였다는 게 도무지 안믿긴다니깐.”
혼잣말로라도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수다장이 아가씨의 허리에는 카렐에게서 하사받은 시미터와, 자신을 어지간히도 쫓아다니던 슈트란 가 중장기병대의 중랑 한명을 살살 꼬셔 새로 구한 값 꽤나 나가는 단검이 굳게 채워져 있었다. 오늘밤 한참 몸이 달아있을 그 하급귀족은 자이납과의 ‘하룻밤’ 약속이 펑크났는지도 모른 채 막사에서 몸단장에 열을 올리고있을 것이 뻔했다.
하기사, 자이납의 ‘약속불이행’이 굳이 아니더라도 오늘밤 어차피 동부제후군들이 속편하게 막사에서 보낼 수 있을 팔자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서부에서 기껏해야 ‘속 안썩이는 평범한 평민 남자’ 정도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던 자이납 입장에서는 카렐을 만난 덕에 상대하는 남자들의 수준이 한단계 올라간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때, 무언가를 느낀 자이납이 급히 몸을 낮추었다.
“경보병단 녀석들이구만.”
허리에 찬 비밀송신기를 가볍게 두들겨 신호를 보낸 자이납은 시로와 다룬이 뒤따라오고 있을 뒷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둥근 방패와 칼, 혹은 도끼를 쥔 경보병들 십여명은 행여 이곳을 지나가는 동부 정찰병이 없는지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경계가 철통같은 마랄루 요새 부근으로 접근하는 건 생각같이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번 전투가 벌어졌던 남쪽의 널찍한 초원으로 ‘날 좀 보슈’하며 접근하는 것도 말도 안되는 노릇이었고 북쪽도 매한가지였다. 서쪽의 언덕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몸을 숨길 곳이 없는 황무지인 것을 생각해보면 동쪽 숲만큼 만만한 곳도 없었다. 물론 문제라면 적들 스스로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는 사실이겠지만.
“제기랄, 저새끼들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었나. 생긴것들도 못생긴 주제에.”
도무지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는 플라칼 가 경보병들을 바라보며 자이납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곳까지 들어온 것만으로도 가디언들은 할 일의 절반을 마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숲의 서쪽 경계쪽으로 사람 키의 서너배는 됨직한 위압적인 에너지장벽 포스트가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있는 것이 이곳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적 경보병들이 자리를 움직이기가 무섭게 에너지장벽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한 자이납은 에너지장벽 포스트 앞에 닿기가 무섭게 얼른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약 0.5스타디아 간격으로 늘어서있는 포스트들에는 각각 십여명씩의 보병들이 초소를 세워두고 사방으로 감시의 눈길을 놓지 않고 있었다.
“새끼들, 퍼질러 잠 좀 자지.”
투덜거리는 자이납의 옆에 배낭을 진 시로와 다룬이 조심스럽게 기어들어왔다. 마랄루 요새를 되찾기 위한 공격의 첫단추를 끼우는 오늘의 공격에 앞서 이곳에 들어온 이 3명의 가디언들의 목표는 적병들이 아닌, 바로 저 포스트였다.
“적에게서 아직은 아무 반응이 없다고 합니다.”
장교의 보고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페로가 옆에 서 있는 샤자한 공을 한 번 힐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샤자한 공은 근심에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요새 동쪽 숲에 경보병과 기사단, 서쪽 언덕에도 기사단과 경기병단. 후우~ 이번엔 앞장설 전하도 안계시고.....”
생각없이 말을 내뱉었던 샤자한 공은 한쪽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세네피스 황후를 의식하고는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요새를 공격할 때 틈만나면 틀림없이 우리 배후를 칠 테지만 숲하고 언덕에 웅크리고 있으니 함부로 덤빌수도 없고......우기니 숲을 태워버릴수도 없고.....“
“일단 에너지장벽만 뚫리면 남쪽 초원지역을 봉쇄하고 궁기병과 경기병들을 활용해 장기전을 벌이는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측 궁기병이 숫자에서 녀석들보다 압도적이고 보병들도 다른건 몰라도 투창능력만은 녀석들보다 우수하니......”
플로브 경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집중적인 투창공격을 빼면 동부제후군 입장에서 변변한 공성방법이 없는것도 사실이었다.
“서쪽에 있는 적 기병들의 보루를 먼저 치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보병들이 있는 요새를 먼저 치는 것이 좋겠소?“
샤자한 공의 질문에 페로가 냉큼 대답했다.
“보루와 요새와의 거리가 너무 짧고 지형도 불리합니다. 요새의 적 중장보병들이 가만히 있을 턱도 없고 동쪽 숲에 있는 적 2기사단도 있고......차라리 지구전으로 이끌어 저 기병들이 제발로 밖으로 기어나오기만 기다리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전하만 계신다면 공성때 선두에서 거점을 잡아주실 수 있으셨을텐데......”
생각없이 중얼거리던 제르베 경의 옆구리를 페로가 얼른 꼬집고 있었다. 공성전에서 선두에 서는 건 누가 뭐래도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물론 살아남는다면야 그곳을 거점으로 급격히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그자리에 다른사람도 아니고 태자인 자신의 자식을 세우고 싶다는 말에 세네피스 황후의 표정이 순식간에 검붉게 변해버린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세네피스 황후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겉으로는 별 티를 내지 않으며 웃음까지 짓는, 뜻밖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펄쩍 뛰실 줄 알았더니 생각외군요.”
제네르가 어깨를 으쓱 하며 페로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황후가 친히 작전회의에 참석한다 했을 때 제후들 모두가 ‘어지간히 참견하겠군’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치를 떨었지만 막상 이곳에 들어온 황후는 한구석에 조용히 앉은 채 ‘군 지휘관’들의 회의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심지어 토로 경이 먼저 나서서 황후의 의견을 물었을 때에도 ‘군문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바가 없으니 세부적인 것은 무장인 그대들이 결정하시오.’라는 예상외의 답변을 들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세네피스 황후는 1, 2차 혼란기 당시 공동사령관이던 할아버지와 보병사령관 오르마즈 경의 뒤에서 드러나지 않는 참모 역할을 했던, 숨은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알고있었다.
내내 무심한 듯 하던 황후기 갑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다만......문외한인 내 대신......태자에게 모든 것을 승인받고 개시하시면 좋겠구려.”
황후의 한마디에 동부제후들이 순간적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황후는 아직까지 카렐을 태자로서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동부제후들의 속내를 귀신같이 꿰고 있었다. 황후를 잠시 뒤돌아본 제네르가 갑자기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최소한 이런 면에서는 개혁파 유학자인 제네르와 딸을 생각하는 황후가 의견이 맞아떨어지는 셈이었다.
“아......알겠습니다.”
제후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문을 두들기고 들어온 장교 한 명이 침착하게 말을 전했다.
“가디언 팀이 잠입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루사 평원의 동부연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마랄루의 헤즈 사령관 귀에도 들어왔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죠.”
영상 속의 히르직스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지난번 루사에서 다쳤던 어깨에서 붕대를 풀어낸 그는 그럭저럭 건재한 모습이었다. 사방에 목책을 잔뜩 두른 보루 한쪽 경치좋은 곳에 안락의자를 가져다놓고 마치 구경꾼처럼 팔자좋게 앉아있던 그는 전투를 앞둔 지휘관같지않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 역시 마찬가지로 그다지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일단 에너지장벽이나 치고......시간이나 질질 끌면서 녀석들 무슨 준비를 갖추고 왔는지나 살펴야겠군요.”
“좌익에 릴라크 경은 준비 다 끝났나? 아직 온지 얼마 안됐는데 괜찮겠어?”
“릴라크 동서야 우리가 참견 안해도 알아서 잘 하고도 남을 여자죠.”
히르직스가 창을 만지작거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루코프 경.”
헤즈 사령관이 신임 경기병단장 루코프 플라칼 중랑장을 불렀다. 지난 전투까지 베아트릭스의 부장이었던 그는 단장 신분으로 처음 맞는 전투에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영 미덥지않은지 헤즈 사령관이 표정을 가볍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창기병 백 정도만 보내서 녀석들 에너지장벽 해체할 때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적 보병들 기어들어오거든 신나게 때려잡아 봐. 약 좀 올려줘야지?”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루코프의 모습이 사라지자 히르직스가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베아트릭스 그것이 있었다면 족히 하루는 놀려줄 수 있었을텐데. 저 풋나기 녀석한테 그정도는 무리겠죠?”
“은근히 그년 총애하시는구려. 히르직스 경. 그년하고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으셨소? 둘이서만 놀지 마시고 나도 좀 불러주시지.”
또한번 무례함을 드러내는 케세크의 언사에 히르직스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파악한 헤즈 사령관이 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빨리 전투준비들 안하고 뭐하는건가? 적군이 코앞에 오면 그때가서 갑주들 차려입을건가보지?”
헤즈의 잔소리에 두 사람이 마지못해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고 있었다. 요새 중앙의 큰 탑에 자리잡은 헤즈 사령관과 플라칼 가 지휘부는 동부연합군이 몰려올 먼 하늘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리 방어계획에 잡힌대로 요새 내의 보병들은 적의 유일한 장기인 투창공격을 막기 위한 대형 파비스방패를 곳곳에 서둘러 설치하고 있었고 공성장비들을 막기 위한 각종 장애물, 긴 창과 케이블, 특수 인화물질 등등을 서둘러 점검하는 것도 중요했다, 요새 밖에서는 사역병들이 미리 준비된 대마 장애물들과 함정 등을 방어안에 따라 정교하게 깔고있었다. 아군의 반격시 장애가 되지 않도록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안전지역’과 ‘위험지역’을 구분해 설치하는 것이 그 핵심이었고, 공, 수성전에 특히 능숙한 남부제후군에게는 거의 일상과도 같은 작업이었다.
미리 잡힌 방어계획대로라면 에너지장벽이 지켜줄 적어도 1시간동안 이 모든 방어준비는 완결될것이 확실했다. 한두시간이면 설치가 끝날 이런 방어장비들을 미리부터 설치해놓고 녹슬게 하는 건 적 정찰병에게 미리 ‘안전지역’에 대한 정보를 주던가 요새를 드나드는 데 불편함만 줄 뿐이었다. 에너지장벽은 이 모든 시간을 벌기 위한 꽤 훌륭한 수단이었다.
“이정도를 뚫으려면 동부놈들 족히 이삼십만은 죽어나가야 될거야.”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씹으며 헤즈 사령관이 평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3대의 장벽 해체기를 가지고 동부 연합군과 함께 마랄루의 요새 남쪽 초원지대에 도착한 페로의 기분은 꽤나 착찹했다. 지난번 요격전에서 적 3기사단장 웰시 경까지 쓰러뜨리며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결국 요새를 내주고 물러날수밖에 없었던 그에게는 그것이 정규전에서 당한 첫번째의 뼈아픈 패배였다. 휴식기간동안 보강된 이만여의 유목민 기병들과 함께 수송선에서 내려선 페로는 눈앞에 보이는 붉은빛의 3500급 에너지장벽을 바라보며 자기도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반대편의 토로 경은 후방에서 샤자한 공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세네피스 황후의 존재에 어느새 괴력이라도 얻은 듯 말을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큰 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역시 휴식기간동안 나름대로 보강된 정규군 기병대는 루사 회전에 처음 투입되었을때 정도는 아니지만 아직 동부기병의 그 위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다얀이 이끄는 4천여 탈라스 유목민 궁기병들과 만 이천여명의 유목민 경기병, 4천여 정규군 경기병들까지 합치면 적 요새에 투창공격을 퍼부을 이쪽 중군 기병은 무려 2만여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열에는 공성전을 전개해야 할 ‘도무지 미덥지않은’ 3만여 동부보병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새벽 여명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적 요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익에는 토로 경과 제네르가 이끄는 정규군 중장기병대 5천여기와 슈로 기사단, 경기병 4천여기가 산개해 적 기병들의 측면기습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나람의 북부 용병대 5천여명과 셀림의 중기병 3천여명은 보병대 측면에 예비대로 대기중이었다. 그리고 ‘특별한 명령’을 받은 가말라 카잔 장군의 트라티누스 가 혼성기병대 천여명은 요새 동쪽 숲 외곽에서 대기중이었다.
3대의 장벽 해체기를 이끌고 장벽에 접근하던 동부의 사역병들은 그다지 멀지않은 장벽 너머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있는 남부 창기병들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있었다. 해체기 뒤에서 이곳이 뚫리는대로 진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결사조’ 보병 이백여명 또한 그들의 여유만만한 태도에 처음부터 주눅이 들어가고 있었다. 기병들이 주축이 되어 일구어낸 루사 평원에서의 승전도 동부 보병들의 보잘것없는 사기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선두에 서 있던 샤자한 공 역시 동부 보병들의 자신없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이런 동부 보병들의 모습은 그들 좌익에 위치한 북부 용병대 보병 5천여명이 벌써부터 북과 고함소리로 사방을 떠들썩하게 울려대며 전의를 다지고 있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예비대 주제에 처음부터 소리지르다가 진 다 빼겠군.”
플로브 경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페로 역시 짧게나마 웃음지을 수 있었다. 3500급 장벽이니만큼 뚫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다. 마랄루 요새 앞쪽에서는 적 사역병들이 느긋하게 대마 장애물을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그쪽을 향해 돌진해들어가야 할 동부 경기병들의 얼굴에 조금씩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지금 설치되고있는 장애물들을 넘어 첫번째 공격을 퍼부어야 할 그들이었다.
“아주 보라는 듯 느긋하군요.”
페로가 중얼거리자 샤자한 공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우리측 궁기병들과 경기병들에게 일부러 보여주는 것이겠죠. 어차피 장벽 뚫고 포스트 부수는 데 걸릴 시간이면 설치가 다 끝날테니.......저네들 기대대로라면요.”
샤자한 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앙의 해체기 쪽에서 큰 함성소리가 올랐다.
“뚫렸습니다!”
거의 동시에 나머지 두 군데에서도 ‘작업완료’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입술을 살짝 깨문 샤자한 공이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진입시키게.”
해체기 뒤에서 대기하던 ‘결사조’ 보병들이 일제히 장벽 안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장벽 안에서 대기하던 플라칼 가 창기병들 역시 괴성을 지르며 그들 보병에게 달려들어 차례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3개의 구멍 앞을 지키고 있는 적 창기병은 적게잡아도 백명이 족히 넘어보였다. 놀이라도 하듯 구멍을 넘어 뛰쳐들어오는 보병들을 족족들이 잡아죽이는 그들 앞에서 속수무책일수밖에 없는 동부제후군 지휘관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이런 추운데서 계속있다간 관절염 걸리겠다.”
자이납이 뼛소리가 나는 어깨를 풀어주며 얼굴을 찡그렸다. 시로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결사조’ 보병들과 적 창기병들과의 혈전이 벌이지고 있는 남쪽 초원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자이납은 시미터를 뽑아들고는 엉금엉금 기어 적 초소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에너지장벽이 작동되기 이전부터 이곳에 잠입해있던 이들은 사실상 적진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십여명의 포스트 경비병들은 남쪽 초원쪽에 이미 거의 정신이 팔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침입자들에게 신경을 쓸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그런 그들이 숲 쪽에서 들려온 괴성에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3명의 가디언들이 그들의 코앞에 들이닥친 후였다.
“으악!”
그들이 변변히 무기를 집어들어볼 틈새도 없었다. 초소 앞을 지키던 병사의 이마에 어디선가 날아온 2개의 도끼가 명중하면서 초소 벽에 피칠을 하며 나동그라진 병사들 사이로 달려든 시로의 검고 날렵한 몸이 사람 가슴높이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눈앞을 가로막는 병사의 눈 사이에 도끼날을 꽂아넣었다.
“에이, 썅!”
뒤이어 뛰쳐든 다룬의 거대한 양손검날이 2명의 병사들 허리와 가슴을 두동강내는 새 시로는 또다시 한 명의 병사의 목을 비틀고 한 명의 목을 짓밟아버렸다.
“끝났어요?”
도망가던 병사의 등을 베어버린 자이납 역시 시미터날에 묻은 피를 태연하게 닦아내고 있었다. 병사들을 ‘처리’한 시로와 다룬이 급히 달려가 숲의 포스트를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이 괴물을 차근차근 분해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남쪽에서 장벽을 뚫고 기어들어가고 있는 결사조 보병들은 결국 이들 가디언들이 포스트를 때려부술 동안 적의 주의를 끌어줄 희생물에 지나지 않았다.
0.5스타디아 떨어진 다른 포스트에서 대여섯명의 병사들이 이쪽의 사태에 놀라 서둘러 달려오고 있었지만 특급가디언들은 그들에게는 애시당초 별 관심도 없었다. 대신 칼을 꼰아잡은 자이납이 포스트를 부수는 데 바쁜 시로와 다룬의 등뒤를 막아섰다.
“아이씨! 빨랑 좀 부수라니까요!”
“썅, 네가 해봐!”
얼굴이 빨개질정도로 이를 악물고 휘두른 시로의 도끼에 밖으로 비죽 드러난 포스트 동력 케이블이 결국 절단되면서 붉은 빛을 뿜던 포스트 한 개에서 빛이 사그러들고 있었다. 포스트 1개를 무력화시킨 세 명은 옆의 포스트를 향해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상보관계에 있는 포스트는 최소한 2개 이상을 때려부수어야 밖에서 진입할 공간이 좁으나마 생기는 셈이었으니 1개를 부순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보병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빨리 1개를 더 부수는 것이 관건이었다.
20스타디아 정도 떨어진 남쪽 초원에서는 ‘결사조’ 보병들이 적 창기병들과 관심을 붙들어둔 채 ‘목숨값으로’ 시간을 끌어주고 있었다.
겁없이 달려들던 보병들을 그대로 저세상으로 보내준 세 명은 다음번 포스트를 서둘러 부수기 시작했다. 장벽 너머 숲 동쪽에서 꽤나 요란스러운 말발굽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특명을 받은 가말라 카잔 장군의 천 기의 혼성기병대가 동쪽 숲의 경계를 스쳐 숲에 주둔중인 적 경보병들을 따돌리고 이곳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빨리! 빨리!”
자이납과 다룬이 결사적으로 보병들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시로가 있는힘을 다해 도끼를 내질렀다. 남쪽에서 결사조를 저지하던 경창기병들 중 십여명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으엑!”
자이납이 놀라 자빠질 뻔 했다. 포스트 측면의 긴 장방형 램프가 폭발하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날리고 있었다. 그 충격에 포스트를 부수던 시로와 다룬 모두 몇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요새 동쪽 숲에 걸쳐져있던 에너지장벽에 0.3스타디아 정도의 폭의 빈 공간이 생기고 있었다.
“돌격!”
남쪽에서 요란스런 말발굽소리와 함께 달려온 가말라 카잔 장군의 천여기의 동부 혼성기병대가 땅이 떠나가는 괴성을 지르며 그 틈새로 돌진해들어왔다. 에너지장벽은 남쪽, 동부 주력군이 있는 곳이 아닌, 동쪽 숲 옆의 조그만 구멍부터 먼저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장애물을 설치하려던 헤즈의 계획은 시작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경기병 7백은 적 사역병들을 때려잡고! 중장기병 3백은 나를 따른다! 남부놈들에게 동부기병의 맛을 다시한번 보여주자!”
가말라 카잔 장군이 그 우람한 팔과 손에 움켜쥔 화극을 번쩍 치켜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동쪽 숲의 에너지장벽 안쪽에 적병이 이미 매복중이었다는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란 케세크 경은 요새 밖에 장애물들을 설치중이던 사역병들에게 빨리 작업을 마무리지으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적 기병 천여기가 숲을 통해 진입했습니다! 중장기병이 3백여기정도 포함된 것 같습니다. 경기병 7백은 사역병쪽으로 접근중이고 중장기병은 초원에서 에너지장벽을 지키고 있는 우리 경기병 백여기에게 접근중입니다! 이대로 가면 위험합니다! 퇴각령을 내려주십시오!”
경기병단장 루코프가 헤즈 사령관에게 애타게 보고를 올렸다. 동부 기병들의 전력을 생각해보면 적 보병들을 때려잡고 있던 경창기병 백여기 정도는 심심풀이 사냥감이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헤즈 사령관은 케세크와 히르직스의 형상을 바라보며 뜻밖의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2기사단 오백만 보내서 녀석들 빌어먹을 중장기병들 막도록 해. 보병단에서 팔랑크스 하나만 내보내서 경기병들을 저지하고! 어떡해서든 사역병들이 요새 주변에 장애물을 설치할 시간은 벌어야 한다.”
초원 쪽에서 아군 ‘결사조’들을 도륙하던 적 경기병들을 향해 3백여의 중장기병을 이끌고 내달리던 가말라 카잔 중랑장은 후방에서 따라붙어오는 오백여기의 적 중장기병대의 존재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페로와 샤자한 공의 예상은 이정도 상황에 처하면 적군이 당연히 경기병들을 퇴각시키고 에너지장벽을 순순히 포기하리라는 것이었지만 적들은 생각외로 끈질겼다. 어떡해서든 대마장애물 설치를 완료시킨 후 마당을 내주겠다는 수작이 확실했다.
“제기랄! 일단 녀석들 경기병부터 잡아!”
부하들을 앞질러 보낸 가말라는 뒤로 조금 처지며 자신들을 쫓는 녀석들의 정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적 2기사단 같습니다! 단장이 직접 나온 모양입니다!”
부장의 고함소리에 돌아본 후방에는 흰색의 망토를 펄럭이는 녀석을 선두로 꽤 많은 적 기사단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단장이 누군가!”
“릴라크 예리노프 장군입니다! 이번에 새로 단장에 오른 녀석이고 플라칼 가에서 두번째로 손꼽히는 맹장입니다!”
자신과 같은 직급이라는 말에 가말라가 구미가 당기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새 3백여명의 중장기병들은 아군 결사조 보병들을 도륙하던 적 경기병들을 노도같이 덮치고 있었다. 헤즈로부터 ‘퇴각불가’ 명령을 받은 이들 100여기의 남부 경창기병들은 이곳에서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아직 살아있는 에너지장벽 너머 아군 본대가 멋진 ‘복수극’에 큰 소리로 환호성을 올리고 있었다. 백여명의 플라칼 가 경기병들은 3백여명의 동부 중장기병들에게 무참히 짓밟혀 흩어지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그여자가 알면 피눈물 흘리겠군. 그렇게 아껴서 키운 녀석들인데.”
남부 경기병대가 개전 이래 처음으로 ‘도륙’당하는 모습을 아버지와 함께 지켜보던 아메스가 어깨를 으쓱 했다. 용기를 얻은 결사조 보병들이 도끼를 메고 다시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지만 아군 중장기병대 뒤로 다시 몰려오는 5백여명의 적 기사단이 또 있었다. 경기병들이 없는, 중장기병들끼리의 싸움인만큼 충돌과 동시에 바로 기병들간의 난전으로 번지고 있었다. 포스트를 부수려는 동부 보병들과 그들을 지키려는 동부기병들, 남부 기사단들 모두가 또한번의 혼전에 빠져들고 있었다.
“동부연합군 근위기병대장 장군 가말라 카잔이다! 정정당당하게 붙어보자!”
화극을 치켜든 가말라가 적 선두에서 달려온 흰 망토의 기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자 상대방도 가말라 앞에 말을 멈춰세웠다.
“네놈이 세베토 경을 죽였다는 그 풋나기놈이로군.”
가말라가 흠칫 놀라고 있었다. 냉소섞인 그 말투는 굵고 힘있는 무장의 목소리가 아닌, 전혀 무장답지 않은 여자의 유난히 가는 목소리였다.
“플라칼 가 제2기사단장이며 황제령 출신 상급귀족이고 종가 6번째 며느리인 장군 릴라크 라자루스 예리노프다. 기꺼이 도전을 받아주지.”
떨림이나 흥분의 기색은 고사하고 억양조차 전혀 없는 소름끼칠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한 상대방은 그다지 길지않은 기창을 어깨 위로 꼰아잡으며 가말라에게 다가오라 손짓해보이고 있었다.
상대의 건방진 태도에 순간 격분한 가말라는 즉시 말에 박차를 가하며 자신의 육중한 화극을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똑바로 겨누었다. 육중한 붉은 말과 한몸이 된 가말라의 거구가 그에 비하면 왜소해보이기까지 하는 릴라크를 향해 매섭게 돌진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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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 회의 본문에 있던 일러스트, 삽화, 전황도는 유조아 개편으로 태그 사용이 불가능해져서 일단 지웠습니다.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으로 가시면 지워진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개편이 끝나는대로 그림은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