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05화 (205/1,132)

< -- 205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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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슈카른 계곡에 위치한 바툴 가의 종가에 회색 셔틀 한대가 사뿐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종가에 머무르던 카이두 경과 우베, 카토는 물론이었고 꽤나 불안한 표정의 솔까지 공손한 태도로 그 앞에 무릎꿇고 앉았다. 셔틀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건 검은 원피스와 흰 비단포, 카파키 가의 문장이 새겨진 머플러를 두른 당당한 자태의 세네피스 황후의 모습이었다. 카이두 경이 이 거물급 귀빈의 방문에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하지만 정작 황후의 의심어린 시선은 이 벌벌 떨고있는 종장보다 한쪽에 꿇어앉아있는 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후에 북부에서 경기병대가 도착한다기에 찾아왔소. 카이두 경. 태자 얼굴만 보거든 돌아갈 것이니 신경쓰지 마시구려,"

"실례라니, 천만의 말씀이시옵니다. 황태후 폐하."

세네피스 황후의 위엄에 잔뜩 주눅이 들은 카이두 경이 다시 머리를 숙였다. 황후는 '황태후'라는 표현에 또한번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전하께선 지금 키타이 사막에 정찰차 며칠간 나가계십니다."

"알고 있소......내가 이젠 위험한 곳에 제발 다니지 말라 했거늘......우베, 내 태자 숙소에 머물 것이니 안내하게."

우베를 따라 카렐이 묵던 조그만 겔에 들어선 황후는 그 누추함에 또한번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낡은 화로와 평소 쓰던 여우가죽 침구들, 몇권의 책과 갈아입은 옷가지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었다. 황후가 일행과 함께 자신을 따라온 솔을 또한번 째려보았다.

"이 꼴이 도대체 무어지? 솔? 태자에게 직접 방 청소라도 하라는 건가? 내 이곳에 오는 것을 허락한 건 태자 뒷바라지를 제대로 하라는 것이었거늘. 도대체 이게....."

겁에질린 솔의 표정을 살핀 우베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전하께선 원래 방 물건들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것을......"

"조용히 하게. 우베. 그건 ㅤㅋㅞㄹ크에 있었을 때 얘기네. 여긴 제후가 사람들도 많이 드나드는 곳인데 태자가 체통없이 방 정리나 하고있다니......"

황후의 억지에 가까운 꾸중을 듣게 된 솔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비는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잘못이옵니다. 황후폐하. 소녀의 미숙한 탓입니다."

"설마......내 명을 어기고 할일많은 태자에게 감히 요망스런 생각이 들도록 굴지는 아니했겠지?"

황후의 독기어린 눈빛에 솔이 고개를 허리까지 굽히며 대답했다.

"절대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솔이 식은땀까지 흘리며 황후의 매서운 눈초리를 감내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솔에게서 고개를 돌린 세네피스 황후는 방 안에 흩어져있는 카렐의 물건들과 빨래감들을 손수 챙기고 있었다. 깜짝 놀란 솔이 얼른 황후 곁에 다가가 섰다.

"소녀가 하겠사옵니다. 황후폐하께선......"

"됐다. 다음부터나 제대로 하도록 해."

빨래감을 한쪽으로 치워놓은 황후는 흐뜨러져있는 카렐의 여우털 담요와 베개를 끌어안고는 그곳에서 풍겨오는 딸의 체취를 가슴깊이 들이키며 미소짓고 있었다. 약간은 기가막힌 그 광경에 우베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입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엉?"

카렐의 베개를 더듬던 황후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이 핏자국은 도대체 뭐지?"

갑자기 언성이 높아진 황후가 우베에게 거의 따지듯 물어왔다. 우베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술을 드시고......넘어지셔서 뺨을 조금 다치셨습니다. 큰 상처는 아니니......"

"핏자국이 이렇게 크게 났는데 큰 상처가 아니라니!"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황후는 한구석의 쓰레기통에 삐죽이 나와있는, 피묻은 카렐의 손수건을 보고 말았다. 거의 이성을 잃은 채 쓰레기통을 뒤집은 황후는 그 안에서 쏟아져나온 피범벅이 된 손수건과 버려진 드레싱들을 보고는 반 쯤 넋이 나가 있었다.

"도대체 이게......넘어진걸로 이렇게 큰 상처가 나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우베? 감히 날 바보취급하는건가?"

솔의 얼굴은 이미 거의 사색으로 변해 있었다. 우베는 더듬거리면서도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할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그날 술을 두번이나 드셔서......많이 취해계셨습니다. 전하께서 갑자기 구급상자를 가져오라 하셔서.....제가 가져다드렸을때는 이미 많은 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평소처럼 직접 꿰매고 주무셨습니다."

우베의 말이 그럴듯했는지 황후가 잔뜩 격앙된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쥐고있던 카렐의 피묻은 손수건을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그 때 손수건에서 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응?"

고개를 갸웃거린 황후가 집어든 건 자그만 손톱조각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솔이 밴드를 감아놓은 자신의 오른손을 급히 등뒤로 감추고 있었지만 눈치빠른 황후가 그것을 놓쳤을 턱이 없었다. 그리고 황후의 소름끼칠만큼 낮은 목소리가 겔 안을 울렸다.

"네 손 당장 내놓지 못할까?"

"화......황후폐하......그건......"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버린 솔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후가 뒤로 감춘 솔의 오른손을 거칠게 확 나꿔챘다. 황후의 몸이 닿자 가뜩이나 겁에 질려있던 솔이 자기도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황후는 솔의 손가락에 감아놓은 밴드를 확 빼내버렸다. 손톱이 반 쯤 부러져나간 솔의 손끝이 황후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네 손톱이구나......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설마.....태자를 손톱이 부러질정도로 할퀴었다는 건 아니겠지?"

황후의 음험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솔은 여전히 대답을 못한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보다못한 우베가 얼른 끼어들었다.

"황후폐하, 그건......"

"넌 입다물어라. 우베. 말해봐라. 솔. 왜 태자의 피와 네 부러진 손톱이 같이 있는건지."

"그건......"

솔이 턱이 따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리고 있었다. 꽉 악문 황후의 턱에서 빠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전하께서......술을 드셔서......절......"

"태자가 널 강제로 범하려 했다? 그래서 태자 얼굴을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할퀴었다? 그래, 이제야 시나리오가 나오는군."

우베가 솔에게 아무 말 하지 말라며 눈짓을 보냈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카렐이 솔을 범하려 했다는 말에 더더욱 노기가 솟구친 황후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솔에 대한 카렐의 유난한 애정에 거의 히스테리를 보이는 세네피스 황후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이 죽일 년 같으니......"

황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솔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죽여주십시오, 황후폐하,"

벌벌 떨던 솔이 결국 바닥에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호, 죽여달라? 잘됐군. 카토!"

"예!"

겔 밖에 있던 카토가 황후의 부름에 바로 뛰쳐들어왔다. 황후가 바닥에 엎드린 솔을 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끌고나가 이년의 목을 쳐라."

"에.....예? 지금.......뭐라 하셨습니까?"

명령을 받은 카토는 물론이고 우베의 표정 역시 창백해지고 말았다. 당사자인 솔은 울음도 멎은 채 멍 해져 있었다.

"솔 이년을 참수하라 말했다. 감히 장태자에게 상해를 입혔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

"황후폐하, 제발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솔은......그럴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도 도리어 솔에게 미안하다 하셨습니다."

우베가 황후의 앞에 납죽 엎드리며 빌기 시작했다.

"네년 손에 얼굴이 그지경이 된 태자가 도리어 미안하다 했다고? 참으로 해괴한 소리구나? 태자가 술을 마셔 일시 이성을 잃어 그럴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같은 천것이 태자의 승은을 마다한 것만도 큰 죄일진대, 감히 상처를......"

자신의 태도가 카렐과 절대 '요망한 짓'을 말라며 솔에게 엄포를 놓은 자신의 말과 얼마나 큰 모순이 되고 있는지는 황후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카렐의 흥건한 핏자국을 본 황후의 머릿속에서 이미 이성 따위는 흥분에 묻혀버리고 난 후였다. 자신의 힘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우베는 가지고있던 할룩스의 비상호출키를 몰래 누르고 있었다.

"당장 이년의 목을 치라 하지 않았나!"

거의 악을 쓰는 세네피스 황후의 고함소리에 솔 뒤에 다가온 카토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잠시나마 겔 안에 흐르는 침묵 속에서 솔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들릴 뿐이었다.

"네놈이 못하면 내가 죽여주지."

황후가 우베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쿠크리를 거칠게 빼앗아들었다. 솔을 향해 막 칼을 치켜들려던 황후는 우베의 허리춤에서 울리기 시작한 할룩스의 호출신호에 움찔 하고 말았다. 우베는 황후가 무어라 참견하기 전에 재빨리 할룩스를 연결시켰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카렐과 그 일행들의 형상에 세네피스 황후가 움찔 하니 놀라고 있었다.

부하들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비상호출을 받은 카렐 역시 눈앞에 펼쳐진 황당한 광경에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하지만 황후의 손에 쥐여진 자신의 피묻은 손수건과 칼, 엎드려 울고있는 솔의 모습에서 곧바로 상황을 눈치챈 카렐은 얼굴가득 뻔뻔스럽기까지 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꿇어앉았다. 카렐이 일행과 함께 있음을 깨달은 황후는 손에 쥐고있던 칼을 급히 우베에게 돌려주며 바로 평소같은 '선한 황후'의 얼굴로 돌아가고 있었다.

"황후폐하께서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시다니......"

어디선가 본 듯한 미모의 귀부인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해있던 베아트릭스와 탈란 일행도 '황후'라는 말에 기겁을 하며 자리에 꿇어앉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유난히 약한 황후는 카렐과 함께있는 많은 낯선 얼굴들에 꽤나 당황하고 있었다.

"얼굴을.......다쳤구나."

최대한 감정을 누그러뜨린 황후가 카렐의 얼굴에 붙인 드레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절대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것을 또한번 절감했습니다."

카렐이 여전히 태연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루사에서 입었던 상처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니 아무려면 어떻겠사옵니까."

"다른곳도 아니고 그 고운 얼굴에 상처라니......"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황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회복력이 우수하니 괜찮사옵니다."

황후를 한 번 힐끗 올려본 카렐이 이번엔 갑자기 솔을 째려보았다.

"솔, 넌 지금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네......에?"

"내 열흘간 마구간 청소를 하며 근신하라 하였거늘! 지금 내가 자리를 비웠다고 그새 노닥거리고 있었던거냐! 당장 나가지 못할까!"

카렐의 호통에 조금 얼떨떨한 표정의 솔이 눈물을 닦으며 얼른 겔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카렐의 떨떠름한 시선은 이번엔 솔 뒤에 서 있던 카토를 향해 움직였다.

"카토! 네놈도 쿠틀룩 부족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보고서를 작성하라 했더니만, 아직도 출발하지 않은거냐! 내가 없으니 그새 기강이 엉망이 되었구나!"

"아......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카토마저 허둥지둥 자리를 비우자 황후의 얼굴이 잔뜩 붉으락푸르락해져 있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카렐의 '수작'에도 이 많은 눈들 앞에서 카렐을 힐난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띤 카렐이 황후에게 빙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남극성당엔 언제 돌아가실 것이옵니까?"

"남극성당 문제도 상의할 겸 가능하면 네 얼굴을 보고 돌아가고 싶구나. 신년학기도 끝났으니 이삼일정도는 기다릴수 있을거다."

'쉽사리 떠나주지는 않겠다'는 황후의 확실한 의사표시에 카렐이 여전한 미소로 화답하고 있었다.

"그럼 이쪽 일이 마무리되는대로 최대한 빨리 그곳에 돌아가 찾아뵙겠습니다. 지난번 코윈에서처럼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옵니다."

카렐의 말에 세네피스 황후의 두 뺨이 갑자기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카렐의 이 말이 성난 자신을 달래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턱이 없는 세네피스 황후였지만 이순간 카렐이 꺼내든 '비장의 카드'에는 무릎을 꿇을수밖에 없었다.

평소 어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냥 옆에 누워 '쿨쿨 자기만 했던' 카렐은 그날 황후의 옛 이야기는 물론이었고 갖은 넋두리들, 실없는 농담들과 심지어 황후의 지나간 애인들 이야기나 낯뜨거운 음담패설들까지 모든 것을 나누면서 처음으로 '모녀지간 다운' 정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해를 보며 밤이 모두 지나가버린 것을 너무나 아쉬워했던 황후는 오늘 역시도 전장에서 고생했을 자식과 그런 좋은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나름대로 이야기보따리에 자잘한 선물들까지 잔뜩 싸들고 찾아온 길이었다.

'어머니'로 돌아가고 만 세네피스 황후가 결국 낮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별볼일없는 주제로 꽤나 오래 질질 끈 카렐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정신을 차린 세네피스 황후 곁에는 머쓱한 표정의 우베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세네피스 황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솔은 어디갔느냐?"

"마구간에 있을 것이옵니다."

"행여 게으름 피지 않나 단단히 단속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안도한 우베는 무서운 세네피스 황후의 곁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카렐의 겔 에 결국 혼자 남은 황후는 여전히 어수선한 딸의 잠자리와 물건들을 직접 정돈해주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자존심때문에 차마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마술이라면 제국 최고를 자부하는 그였지만 말이 아닌, '사람 등'에 업혀 이정도 속도로 달려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말등에 올라있는 것보다 높이는 낮음에 틀림없었지만 그 어마어마한 속도 덕분에 베아트릭스는 벌써 몇번이나 눈을 감고싶은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팔에 너무 힘주지 말라구. 숨막힐 것 같다니까. 벨트로 묶어서 어차피 안떨어져."

"이럴거면 뭐하러 절 데리고오셨습니까? 짐만 되는데."

"원래 정찰은 2인 이상이 한 후에 그 결과를 비교분석하는 게 원칙이라고 남부제후군 교범에 나와있지 않나?"

숨을 조금 헐떡이며 대답한 카렐은 눈앞을 가로막는 큰 바위 꼭대기로 훌쩍 뛰어올라 다시 한번에 사뿐하게 내려서고 있었다. 달빛도 거의 없는 암흑 속에서 베아트릭스는 이러다가 발을 헛디디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카렐은 그런 베아트릭스를 놀리듯 또다시 바위 하나를 뛰어넘고 있었다.

"오랫만에 운동 확실히 하는군. 푸엘 숲에선 사람 4명 무게를 짊어지고 500스타디아를 뛰었어. 그거에 비하면야 없는거나 마찬가지지."

카렐의 입에서 입김이 꽤나 거칠게 뿜어나오고 있었다.

"출발한지 10분 됐습니다. 좀 쉬었다가 가시죠."

"거의 다 왔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베아트릭스는 카렐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자 하마터면 앞으로 밀려가 나동그라질 뻔 했다. 카렐이 묶어주고 있던 벨트를 풀어주자 베아트릭스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자리에 내려설 수 있었다. 다리에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허벅지 안쪽이 심하게 저려오고 있었다. 제법 장거리를 속력을 내 달려온 카렐도 조금 지쳤는지 주머니에서 비계가 잔뜩 붙은 마른 양고깃덩이를 꺼내 씹으며 바닥에 털석 주저앉아버렸다. 스코프를 고쳐쓴 베아트릭스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항상 무언가를 드시는군요."

"계속 먹지 않으면 버티지를 못해. 생물학적으로는 완벽한 실패작이지."

기름덩이를 꿀꺽 삼킨 카렐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자 베아트릭스가 그의 긴 다리를 위아래로 죽 훑어보았다.

"그래서 전장에서 말을 타시는 겁니까?"

"먹으면서 전투할수는 없잖나. 하긴, 못할 것도 없겠군."

베아트릭스가 자신의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황후폐하께서 그정도로 미인이셨는지 몰랐습니다. 어머님을 정말 많이 닮으셨군요."

가볍게 웃어보인 카렐은 눈앞을 가로막은 높은 절벽과 험한 바위계곡을 빙 둘러보았다.

"이제 슬슬 둘러볼까."

베아트릭스에게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내민 카렐은 그 날렵한 체형을 그대로 드러낸 검은 수트만을 입은 채 빠른 걸음으로 계곡 입구쪽으로 걷고 있었다. 풀한포기 없는 거친 바위산맥 사이에 만들어진 계곡은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깎아지른 양쪽의 절벽으로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스코프를 낀 베아트릭스도 탐지방지처리된 카렐의 망토를 몸에 덮고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이런곳을 지나가는 정신나간 유목민이 있긴 했군."

사막 한쪽에 버려져 있는 캐러반의 흔적에 다가간 카렐이 베아트릭스를 손짓해 불러들였다. 썩은내를 풍기기 시작한 이십여구의 유목민 시체들 사이에 두세구의 말 시체와 버려진 일상용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3일정도 됐을까?......아이들까지 깨끗하게 다 죽였군. 나머지 말들은 약탈해간 모양인데.....탈라스 말이 구하기 쉽지는 않지?"

카렐이 코를 움켜쥐며 시체 한 구에 바싹 다가갔다. 예리한 창에 급소를 제대로 찔린 듯 상처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유목민들이나 이쪽 도적이면 투창으로 1차 공격을 하지 않나? 엔간해선 맞붙어 싸우는 일은 피할텐데. 투창에 맞아 죽은 것 같은 시체는 없는걸."

"적들이 이 부근에 있긴 한 것 같군요."

베아트릭스가 망토자락을 여미며 중얼거렸다.

"불빛 하나 안보이는 걸 보니까 계곡 안쪽 깊숙히 숨어있나본데."

둘은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위압적인 계곡을 향해 조심스런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크,"

계곡 입구를 철통같이 지키고 선 이십여기의 낙타병들을 확인한 카렐이 뒤를 따르던 베아트릭스에게 '접근불가'라는 수화를 보내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로부터 '계곡 반대편도 같을 것 같다'는 대답을 확인한 카렐은 결국 베아트릭스와 함께 빈손으로 돌아나올수밖에 없었다.

"어쩌죠?"

"얼마정도 있는지 꼭 확인해야 돼. 한곳에만 매복했는지 여러군데 분산매복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말꼬리를 흐린 카렐은 갑자기 절벽 위를 올려보고 있었다. 불안한 기분에 휩싸인 베아트릭스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제가 그냥 밑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없이 밑을 내려보았던 베아트릭스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수직에 가까운 바위절벽을 어둠 속에서 짚고올라가는 카렐의 등에는 베아트릭스가 그의 목을 거의 부둥켜안은 채 매달려 있었다.

"짠맛이 느껴지는 바위는 안잡는게 좋아. 염류가 새나와 강도가 약한 경우가 많아. 쓴맛이 느껴지는 바위도 마찬가지고. 아무 맛 없는 바위가 제일 단단하지."

카렐의 계속된 엉뚱한 소리들에 베아트릭스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 있었다. 허리를 힘있게 튕긴 카렐이 절벽 꼭대기 모서리를 붙들고 마지막으로 힘을 가하고 있었다.

꼭대기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벨트를 풀고 카렐에게서 떨어진 베아트릭스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발밑의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다보고는 있는대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쪽이 아니라고. 빨리 따라와."

카렐의 재촉에 다시 망토를 쓰고 따라나선 베아트릭스는 계곡 안쪽 절벽에 조심스럽게 접근해들어가고 있었다. 절벽 꼭대기 군데군데에는 잘 위장된 작은 초소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이 '등급없는 가디언'과 남부 특임대 장교 출신의 이 검은 전사를 잡아내기는 쉬운일이 아니었다. 앞서가는 카렐의 뒤를 그대로 따라 계곡 안쪽으로 접근해들어간 베아트릭스는 그의 옆에 자리잡고 고개를 불쑥 디밀었다.

"휴우,"

카렐과 베아트릭스 모두 절벽 밑에 펼쳐진 광경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적어도 2,3천 정도의 규모는 족히 됨직한 낙타병들과 기병들이 그 좁은 계곡 안에서 빼꼭하게 막사를 세워둔 채 몰려있었다. 유난히 좁은 입구 부근에는 새나가는 소음을 막기 위함인지 많은 위장막들이 걸쳐져 있었고, 그 안쪽에 만들어진 이 비밀스런 숙영지는 일체의 '보통 조명'을 꺼 둔 채 철저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계곡이라고 미어터지겠군. 하기사......정체를 감추려면 이 수밖엔 없었겠지만....."

카렐이 혀를 살짝 깨물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무척이나 좁은 계곡의 양쪽 입구를 번갈아 쳐다보는 베아트릭스의 시선을 흘끔 바라본 카렐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자네도 나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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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핫, 오늘 이 못난 글쟁이가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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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분이 보내주신 선물덕에 한국에서 밤을 보내고 맞은 첫 아침 기분이 최고로군요~~

<기분좋은김에 연참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참하면 이유를 알게되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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