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6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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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선에서 내려선 7백여명의 경기병들의 행색은 꽤나 너저분했지만 조금씩 여윈 얼굴 위에서 번득이고 있는 두 눈만은 하나같은 살기와 오기로 넘치고 있었다. 북부에서 전사단 수송선을 타고 탈라스의 초원에 막 도착한 이들은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휘관인 듯한 큰 키의 남자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중대별로 10열 종대로 집결한다! 실시!"
거의 정규군을 능가하는 빠른 발놀림으로 100명씩 7개의 단위부대를 이루어 집결을 끝내자 각 중대장들이 '집결완료'를 순서대로 외쳤다. 하지만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군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끌고온 말의 거의 절반은 비루먹은듯한 형편없는 꼴이었고, 들고있는 무기들 또한 조잡한데다가 제각각이어서 어떤 자는 보병이 쓰는 어마어마하게 긴 창을 들고있는가 하면 어떤 기병은 짤막한 단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갑주를 입고 있는 자는 절반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나마도 위아래 모두 풀셋으로 갖추고 있는 기병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옆에 착륙한 다른 수송선에서 내린 400여명의 기병들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빈약하나마 카파키 가 정규군 경기병대원이었던만큼 깔끔한 차림에 건장하고 잘 관리된 말을 이끌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제후군 기병대를 '사직'한 신분인만큼 그들 역시 갑주는 모두 반납하고 나온 덕에 맨몸 차림이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옆에 선 '거지꼴'의 기병들과는 외모에서 확실히 구분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극단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쪽 기병들은 만나기가 무섭게 서로 인사를 건네며 친밀감을 보이고 있었고, 일부는 오랫만에 만난 옛 전우의 가슴을 끌어안고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 모두는 291년까지 같은 카파키 가 기병대에서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이었다.
그들 앞에 새 단장이 선임될때까지 이들 경기병의 훈련을 위임받은 카이두 경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 입고있는 겉옷은 다 벗도록 한다! 게릴라부대에서 온 7백명에게는 이곳 탈라스 산 새 말이 지급될테니 지금 타고있는 말들은 모두 자리에 놔두고 개인 소지품만 챙겨서 반대편에 집결하도록! 카파키 가에서 온 4백명부터 새 갑주와 군복, 제식 무기를 지급한다! 장비는 부대별로 별도지급될것이며, 기타 개인별 지급품은 뒤의 숙영지에 마련되어있을 것이다."
드디어 '정규군 복귀'된다는 말에 7백여명의 게릴라 기병들이 큰 환호성으로 답하고 있었다. 천여명의 기병들이 각자의 장비를 지급받느라 한바탕 소란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장교용 갑주를 받아든 게릴라부대장 갈라크 도비치는 방패에 새겨진 문장에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경기병용 사이클롭스가 부착된 검은색의 신형 라멜라 갑옷은 급소를 가리는 견갑과 흉갑부분을 제외하면 경기병의 갑옷답게 날렵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고, 등에 지거나 왼쪽 어깨에 착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반투명한 원형 방패와 흉갑 한쪽에는 낯선 백마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북부 문장이나 카파키 가 문장은 어딨습니까! 이건 도대체 뭡니까!"
갈라크 도비치 부대장이 카이두 경에게 갑자기 큰 소리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게릴라 출신 기병들이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새 문장이 새겨진 방패를 떼어 바닥에 집어던지는 성질급한 자들까지 있었다.
"내가 설명해주지."
흰 비단포자락을 휘날리며 셔틀에서 내려서는 세네피스 황후의 모습에 도비치 중랑장이 자기도모르게 악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세네피스 레즐린 카파키 황후폐하시다! 모두 정열한다!"
그의 외침에 천여명의 기병들이 지급받은 창을 일제히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그 위용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세네피스 황후는 오랜시간 옛 북부의 영광만을 그리며 모진 저항을 해왔을 도비치 중랑장의 어깨를 힘있게 두드려주고 있었다.
"카파키 가 경기병단 제8연대장 중랑장 갈라크 도비치! 부하들과 함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며 원대 복귀하였음을 새 종장이신 세네피스 카파키 황후폐하께 신고드립니다! 사령관이신 오르마즈 카파키 경께서는 적장 베흔의 손에 전사하셨으며 부대장이신 바스토프 경께서는 탈출 후 저항군 활동중에 제롬 델루지와의 일기투중 전사하셨습니다!"
가슴이 터질듯한 큰 목소리로 무려 130여년만에 정식으로 종장에게 복귀신고를 올리는 도비치 중랑장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임달의 결전을 비롯한 북부의 크고작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 얼마 안되는 포로들은 원래는 남부 칼릴의 포로수용소에 갇혀있었지만 5차 혼란기 와중에 노예폭동세력의 도움으로 의해 수용소를 집단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나토에서 제롬이 이끌던 제후 연합군에 패전한 이후, 노예세력-북부 패잔병 세력의 선택은 크게 갈라져서 패잔병 중 옛 코메트 출신들과 노예세력이 주축이 된 3만여는 황제령 ㅤㅋㅞㄹ크에 숨어들었다가 페로의 손에 이미 진압당했고, 북부로 도주했던 나머지 세력들은 미약하나마 지금까지 저항활동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그들 중 보병대의 대부분은 전사단 보병대에 지원해 이미 실전배치 직전까지 가 있는 상태였고, 중장기병대 출신 3천여명도 라마단 직후 실전배치를 목표로 이미 ㅤㅋㅞㄹ크와 타르서스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고, 이제 이들 북부 경기병 출신들까지 가담하면서 전사단은 옛 북부 잔여병력들을 완전하게 조직 내로 흡수한 셈이었다.
세네피스 황후가 옛 전투의 광적인 열기로 또다시 휩싸이기 시작한 그들 하임달의 결전 마지막 생존자들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슈로 기사단은 재건되었다! 그 당당하던 북부 보병대도 이미 재건되어 5만을 헤아리고 있다! 이젠 너희들의 차례다! 이제 너희와 같은 북부의 피가 흐르는 새 제국의 지도자를 보게 될 것이며 그의 수족이 될 것이다!"
'북부 혈통의 새 지도자'라는 말에 그들이 갑자기 조금 놀란 듯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 지도자가 도대체 누구나며 서로 의아해하고 있었고, 섣부른 몇은 '세네피스 황제'일 것이라며 혼자 앞서가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일침을 놓듯 황후가 다시 소리쳤다.
"새 황제는 황실과 카파키 가의 피를 모두 물려받은 당당한 황손이며 너희도 조만간 누군지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세나우스 4세 황제의 곁에 설 것이니 이젠 더이상 북부의 문장은 필요 없다. 황실 경기병단 슬레이프니르는 오르마즈 경의 분신과도 같은 새 지도자를 맞아 하임달의 결전에 이어 또한번의 기적을 만들 것이다!"
황후의 말이 끝을 맺기가 무섭게 천여명의 함성이 귀가 얼얼할정도로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그들의 분위기에 카이두 경은 오싹함마저도 느끼고 있었다. 패전 이후 2등국민 취급을 받으며 갖은 수모를 감내해야 했던 북부민들의 그간의 분노가 되살아는 집단의식과 아울러 광적으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선대 황제의 제위중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이들 북부기병들은 이번에는 자신들 지역의 피가 섞인 황제가 나온다는 말에 그 광기어린 함성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었다.
두 팔을 번쩍 치켜든 황후는 그들 추종자들의 함성을 온몸으로 느끼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 문장을 보며 투덜거리던 갈라크 도비치 중랑장은 어느새 갑옷에 깃털 장식의 투구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백마 문장이 붙은 자신의 방패를 주먹으로 쾅쾅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울림은 천여명의 부하들 사이에 거친 북소리처
럼 번져가고 있었다.
"졸지 말라구, 졸다가 뒤로 자빠져."
카렐의 등에 업힌 베아트릭스는 장시간의 긴장감 때문인지 지쳐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올 때처럼 바얀 시 부근까지 고속으로 달려온 카렐은 도시가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와지자 그냥 천천히 발걸음을 딛고 있었다. 카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베아트릭스는 눈을 반 쯤 뜬 채 가까스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카렐은 그에게 밤날씨에 차가와진 물통을 내밀었다.
"한 모금 마셔. 정신이 한결 맑아질테니. 도착하면 침대에 편히 누워 자라구."
"전하......등이 따뜻해서 그런가봅니다."
생각없이 속에있던 말을 내뱉었던 베아트릭스는 내심 아차 싶어왔다. 자신의 속내를 행여 카렐이 '오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의 머릿속이 아찔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은 웃음까지 지으며 그의 걱정을 말끔히 날려주고 있었다.
"요즘 그런말 많이 듣네?"
"누가 또 그런 말을......"
"누군 누구겠어. 아메스지. 뭘 다 알면서."
키득거리며 웃음지은 카렐이 업고있는 베아트릭스를 바싹 추켜올렸다. 그의 장딴지를 붙들고있던 카렐이 말을 이었다.
"휴, 우베 녀석 말마따나 몸이 정말 장난 아니네. 허벅지가 딴딴한게......"
"제것에 비하면......전하 몸은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카렐의 탄탄한 어깨에 뺨을 기대며 베아트릭스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카렐은 뜻밖에 꽤 명랑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옷 밖에서 봤을때만 그래. 실물은 얼마나 징글맞게 생겼는줄 아남. 후훗. 내 끔찍한 체중은 이미 경험해봐서 알텐데?"
"좀......묵직하시더군요. 보이는 것하고는 영 딴판이시던데요."
"내 정확한 수치는 절대 못밝히지만 엔간한 중갑주 입은 덩치보다 더나갈거야. 후훗, 내 야한 얘기 한마디 해줄까?"
"예?"
카렐의 목을 돌려안고 있는 베아트릭스의 손이 갑작스런 긴장으로 조금 굳어지고 있었다. 카렐은 여전히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누구 몸 위에 내 체중 한번 실어서 품에 안아봤으면 좋겠어. 상대 압사시킬까봐 그 짓은 죽어도 못하고있지 뭐겠나."
베아트릭스가 자기도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묘한 상상'을 하고 만 베아트릭스의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잠 좀 깼나?"
카렐이 베아트릭스를 문득 돌아보며 물었다.
"예......"
"훗, 역시 야한 얘기만큼 잠 확실히 깨워놓는것도 없다니깐. 케스난이 좋은거 가르쳐줬지."
키득거리는 카렐의 경쾌한 발걸음은 어느새 바얀 시 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카렐의 기분이 꽤나 좋아보이자 베아트릭스가 용기를 내 말했다.
"지금까지......첫눈에 전하께 호감을 가진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고 그러셨죠?"
"훗, 뭘 민망한 걸 자꾸 들추긴."
"그런 사람이 한명쯤 있었을지도 모르죠......어쩌면......"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선 카렐이 업혀있던 베아트릭스를 휙 돌아보았다. 실언을 했다고 느낀 베아트릭스의 온몸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베아트릭스를 잠시 돌아보던 카렐의 입꼬리에 느닷없이 미소가 조금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면......정말 좋겠군."
카렐의 목을 갑자기 꽉 껴안은 베아트릭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렐은 그의 목젖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카렐의 두 눈에 도스트의 여관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셨군요,"
잠도 자지않고 기다리던 라손이 방에 돌아온 카렐에게 평소처럼 경례를 올렸다. 탈란 역시도 조금 피곤한 얼굴로 카렐의 침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렐의 뒤를 따라 들어온 베아트릭스는 오후까지만해도 카렐의 옆 잠자리에 놓여있던 자신의 짐들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엔 탈란의 물건들이 들은 큰 가죽부대가 대신 놓여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조카를 보고는 탈란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 놀랄 것 없어. 네 짐 옆방에 있어. 아버지가 나보고 대장 곁을 지키라고 하셨거든......."
"아, 예."
베아트릭스가 저 속보이는 이모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지가 잔뜩 앉은 옷을 털며 투박한 카펫 위에 털석 주저앉은 카렐은 짐 속에 있던 지도를 펼쳐 작동시켰다. 탈란이 작동시킨 할룩스에서 카이두 경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한 베아트릭스는 탈란을 카렐 쪽으로 조금 밀며 그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베아트릭스에게 밀려난 탈란은 자연스럽게 카렐과 바싹 붙어앉고 있었다. 여전히 도도한 표정의 탈란은 임무를 받고 떠나온 이래 가장 가까이 붙어앉은 카렐의 얼굴을 한 번 힐끗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예정대로 오늘 밤에 바얀 시를 기습해야겠소. 시내엔 다수의 민간인들이 있으니 강습용 셔틀을 이용해 오아시스 북쪽에 주둔한 서부연합군 천여명을 야간기습하도록 합니다. 낙타병 백여기에 보병 5백, 나머지는 3백의 사역병이니 궁기병 3백과 중기병 3백만 동원하면 충분히 섬멸가능할거요."
"알겠습니다. 제 딸 탈란에게 궁기병대 지휘를 맡기시면 훌륭히 해낼 겁니다."
"물론, 그럴 생각이요. 중기병대는 라손 바얀 부단장에게 맡기겠소. 그리고 적 낙타병부대 3개 중대 3천여기가 서쪽과 서남쪽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는 듯 하니 이놈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것 같소."
"그랬군요."
카렐이 지도에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카이두 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볍게 웃음지은 카렐이 카이두에게 말했다.
"내게.......투창을 잘 던지는 정예병 5백명만 빌려주시오."
카렐의 요구에 카이두 경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번엔 도시 내 분위기를 체크하고 돌아온 라손이 입을 열었다.
"아쉬드 하지즈 장군이 이곳에 하루에 한번꼴로 방문해서 분위기를 체크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녀석들이 이곳에 꽤 신경쓰고있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한두곳쯤 녀석들이 또 치겠지. 바툴 가가 이곳을 공격하도록 유인해야 할테니......"
라손의 보고에 카렐이 지도를 접어 짐 속에 챙겨넣으며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라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서부 녀석들이 물값도 내지 않고 방문 유목민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면서 이곳 주민들 형편이 꽤 많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근 부족들과의 대규모 거래는 아예 중단된 상태랍니다."
"그래도 그네들은 자기들이 여길 야만적인 유목민에게서 지켜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걸."
씁쓸하게 웃고있는 카렐에게 이번에는 탈란이 입을 열었다.
"장사꾼들 말이 2제후 세호 가 녀석들의 횡포가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검문중에 물건들을 빼앗긴 캐러반 대부분이 세호 가 녀석들에게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네들 구역을 지나던 캐러반 중에서 아예 행방불명된 것이 인근에서만 이미 5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망할 놈들, 줏대도없이 맨날 양다리만 걸치는 주제에 잇속에만 밝다니까."
코웃음친 카렐은 지난번에 세호 가에 깜박 속아 솔을 넘겨줄 뻔 했던 일을 또한번 떠올리고 있었다.
피곤한 듯 벽에 기대앉은 카렐은 창을 가리고 있는 플랩을 살짝 들쳐보았다.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새벽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 이곳을 떠나는 캐러반 무리들이 여관 마당에서 말과 짐을 챙기고 있었다. 너무도 평화로운 이 사막마을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카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지해 있는 물만이 자기를 비추어 거울로 할 수 있고 항상 고요하게 하고 있어야만 세상의 진상을 잡을 수가 있다 했지만......"
카렐의 엉뚱한 중얼거림에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 옆에 있던 탈란은 뜨거운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응대하고 있었다.
"도(道)를 알기는 쉬워도 말하기는 어려우니, 알고서 말하지 않는 것은 자연의 경지에 들어간 까닭이요, 안다고 하여 말하는 것은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문득 고개를 돌린 카렐이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탈란을 돌아보자 그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 장자를 잠시 공부한 일이 있지요."
"후훗, 제네르가 알면 꽤 좋아하겠군."
"개혁파 지도자이고 남극성당 교수인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 교수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손 이녀석 친구야. 지금 내 보좌관 겸 기사단장으로 있지. 그친구 남화진경 얘기만 하면 깜박 죽어."
카렐이 한쪽에 기대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있는 라손을 가리켰다. 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제네르에 관해서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탈란 역시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졸고있는 라손을 툭툭 두들겨 깨운 카렐은 비몽사몽간인 그를 억지로 일으켜세워 등을 떠밀었다.
"자자, 이제 가서 제대로 자. 베아트릭스도 힘들었을테니 좀 쉬고. 이따가 정오에 보자구."
라손과 베아트릭스를 내보낸 카렐은 자신의 침상에 기대 '사단분집'이라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자신의 잠자리에 누워 건너편의 카렐을 한 번 돌아본 탈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책이죠?"
"파예드 아카데미의 코리온 리쿠 학장이 원리주의와 다른 학파들의 견해차에 관해 정리한 책이지. 논리 자체는 정말 흠잡을데가 없거든. 놀라울정도로. 원리주의자가 변증법을 채용한 건 이게 처음이었을거야. 그 전까지는 원리주의자들은 대립논쟁에 관해서는 유난히 약하기로 유명했지. 난 조용히 책이나 볼 테니 자넨 편하게 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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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와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집안 최초의 큰 사건을 일으킨 솔은 카렐에게 채찍질당한 상처가 어느정도 낫자마자 곧바로 남쪽 안채 접대담당으로 배치되어지고 말았다. '페로의 엄명'으로 노리개감으로 전락해버린 솔에게 카렐의 수석 가디언으로서의 지위도 이젠 별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이 수석 가디언의 유난한 총애를 받는 솔이 남쪽 안채에 들어온 덕을 제일 크게 본 건 솔을 그곳에 쳐넣어놓고도 정작 거들떠보지도 않던 페로도, 솔이 그 신세로 전락했음을 가슴아파하는 카렐도 아닌, 인기좋은 수석 가디언의 얼굴을 평소보다 훨씬 자주 보게 된 남쪽 안채의 다른 미녀들 뿐이었다.
"종친 원로분들 5분이십니다."
남쪽 안채 한구석에 멍 하니 서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는 누각 위를 올려보고 있던 카렐에게 다가온 관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카렐이 항상 이곳을 찾을 때마다 던지는 똑같은 질문에 이젠 그도 카렐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 보고를 올릴 정도로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솔은.......황상의 숙부 되시는 광림대군 마마 술접대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관리인이 다시한번 카렐의 눈치를 보았다. 핏발이 선명하게 곤두선 카렐의 이맛살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은 아이에게 접대라니! 게다가......솔은 16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모르나!"
"하오나......각하의 명령이십니다."
페로의 명령이라는 말에 더 할 말이 없어진 카렐은 옆으로 휙 돌아서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설마......침소 접대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글쎄요, 그건 각하께서 결정하실 노릇이니....."
큰 연못에 기대 세워진 누각에 십여명의 황족들과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페로는 기분이 꽤나 좋아보였다. 잠시 후 종소리와 함께 정원의 한쪽 문이 열리면서 곱게 단장한 미남미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솔은 그 한중간에 있었다.
"솔......"
붉게 충혈된 카렐의 시선은 속이 반 쯤 비쳐보이는 화려한 포를 입고 누각으로 향하는 솔을 물끄러미 향하고 있었다. 머리를 틀어올린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검은 생머리 중간이 붉은 비단으로 질끈 묶여있는 것이 그가 아직 처녀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가벼운 화장조차도 필요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흠잡을곳 없는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옅은 입술화장과 볼화장이 되어있을 따름이었다. 카렐은 며칠 전 약을 발라주기 위해 찾아갔던 자신에게 제발 한번만 안아달라며 애타게 매달리던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후회'하고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또한번 놀라고 있었다. 누각으로 향하던 솔의 처절하기까지 한 시선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렐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오호, 세상에,"
자신에게 '배정'된 솔을 처음 바라본 광림대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 있었다. 솔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힌 대군은 아직 앳티가 흐르는 솔의 아름다운 얼굴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천하절색은 정말 난생 처음이구려, 총리께선 이런 미녀를 도대체 어디서......"
자신의 몸을 더듬는 낯선 남자의 손길에 몸서리치며 솔이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나이 어린 솔의 그런 숫기없는 태도가 더 마음에 드는지 대군은 그의 허리를 더 바싹 끌어당겨 붙이고 있었다.
옛날 자신의 '작은어머니'기도 했던 가비를 옆에 앉힌 채 대군에게 웃음짓던 페로의 음험한 시선은 누각 밑에서 망연한 얼굴로 이쪽으로 올려다보고 있던 카렐을 잠시 향하고 있었다.
"제가 특별히 엄선했사오니 대군마마께선 오늘 마음껏 데리고 노십시오.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 잠자리까지 들이기는 좀 그러하니......침소에는 이년에 비해 손색없는 다른 미녀를 넣어드리지요."
잠자리까지 데려가지는 못한다는 말에 대군이 입을 조금 씰룩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페로의 얼굴을 할퀴어놓은 솔의 '전적'을 생각해볼때 대군 정도나 되는 황실의 귀한 손님 침소에 솔을 넣는 것이 페로로서도 꽤나 부담스러울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대군은 잠자리까지 가지 못하는 것을 이곳에서 보상받으려는 듯 솔의 온몸을 철저하게 농락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풀어헤친 채 입을 맞추는 낯선 남자를 내려다보는 솔의 눈시울이 붉게 변해 있었다.
접대가 끝난 솔을 숙소로 도로 데려가던 하인에게 먼저 가라는 눈짓을 보낸 카렐은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있던 솔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자정이 넘어간 남쪽 안채 뒷뜰에는 인적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카렐이 이 뒷뜰의 불마저도 꺼버리자 이제 이곳은 가디언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암흑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하지만 솔은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렐의 모습을 충분히 분간할 수 있었다.
흐뜨러진 옷 매무새를 얼른 정돈한 솔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렐에게서 조금 비껴서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잘했다. 앞으로도 말 잘 들으면......최소한 지난번같이 맞는 일은 없을거야."
"이제 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솔이 그 맑은 눈동자를 카렐을 향해 휙 돌렸다. 그런 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러고 사느니......차라리......"
울먹이던 솔은 카렐의 따뜻한 손이 뺨에 와닿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런 생각하면 못써."
처음으로 자신을 '어른으로서' 매만져주는 카렐의 손길에 솔은 하던 말도 잊은 채 가까스로 고개만 끄덕거렸을 따름이었다.
"걱정 마라, 내 어떡해서든......널 자유롭게 해 줄테니."
꽤 한참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여전히 솔의 얼굴을 감싸쥐고 있던 카렐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딱 한번만......널 느껴보고 싶구나."
처음에는 절망에 빠져있는 솔에게 힘을 주려했던 카렐은 자기도모르게 '선'을 넘을 생각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에게 또한번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의 한마디에 고무받은 솔은 어느새 들고있던 긴 레이스까지 바닥에 떨군 채 카렐에게 바싹 다가서 있었다.
"딱 한번만이야......정말로."
카렐은 자신의 말이 솔에게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카렐에게 가슴을 바싹 붙인 솔은 그의 가슴과 어깨를 부둥켜안고 발돋움을 해 카렐의 입술을 스스로 파고들고 있었다. 대군의 품 안에서 그리도 바싹 얼어붙어있던 솔의 몸은 이젠 카렐의 가슴에 기댄 채 격한 흥분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16살의 어린 소녀와, 바로 며칠 전 이 소녀를 거칠게 채찍질하고 뼈까지 부러뜨렸던 156세의 '등급없는 가디언'은 서로를 단단히 품에 안은 채
뜨거운 자극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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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놀랐지?"
탈란보다 먼저 눈을 뜬 카렐은 할룩스로 솔을 불러냈다. 초췌해진 표정의 솔은 카렐에게 맥없이 고개를 끄덕거릴 따름이었다.
"미안하다. 나때문에......"
"아니예요. 제가 바보짓을 해서......"
"어머님이 그런 데 좀 과민하시니......내 나중에 가서 직접 설명해드리면 될 거다."
솔의 형상에 손을 뻗은 카렐은 그의 뺨과 머리카락, 목을 차례대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내가.......맘놓고 만질 수 있으니 차라리 이편이 낫구나. 돌아가면......내 절대 안 건드릴테니......하룻밤만 내 곁에서 자 주겠니?"
"예."
솔이 얼굴을 붉히며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탈란이 깨는 기척에 서둘러 통신을 끊은 카렐은 등을 돌린 채 옷을 다시 챙겨입었다.
"몸매가 아주 탄탄하시네요."
수트 버클을 채우던 카렐은 등뒤에서 들린 탈란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아침에 좀 추웠는데 생각보다 잘 자더군. 탈란 바툴 중랑장."
"이젠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튜닉을 걸쳐입던 카렐은 탈란의 갑자기 '이상해진' 반응에 행여 자신이 지난밤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닌가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제 계곡과 이곳 오아시스를 기습할 것이니 이제 슬슬 준비를 시작하셔야 하겠소. 탈란 바툴 중랑장,"
"예, 물론입니다."
씽긋 웃어보인 탈란이 세수를 하러 가는 척 침실을 살며시 빠져나왔다.
침실을 빠져나온 탈란은 베아트릭스가 있을 옆방으로 급히 달려갔다. 방 안에서 잠자리를 정돈하던 베아트릭스는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탈란에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탈란이 들어오자마자 베아트릭스의 옷자락을 붙들고 물었다.
"아니? 저사람 체취가 은근히 자극적인거?"
눈살을 조금 찌푸린 베아트릭스가 탈란을 가볍게 째려보았다.
"아까 옷 갈아입을 때 뒤에서 얼핏 봤는데 등에 근육이 장난이 아닌거야. 정말 손으로 한번 만져보고 싶더라니까. 팔다리는 어떻게 저렇게 잘 빠질 수 있는지."
바로 어제까지 카렐을 '천박한 가디언'이라며 구시렁거리던 탈란의 모습을 반사적으로 떠올린 베아트릭스의 입안에서 '쏘아붙일 말들' 수백개가 넘쳐나고 있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그런 조카의 눈치를 아직 못 보았는지 탈란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읽고있는 책이나 말하는거나 다 봐도 엄청 똑똑한 것 같애. 근데......저사람 황족이라면서 왜 귀밑에 아무 표시가 없어?"
탈란의 놀라운 관찰력, 아니 카렐이 황족이라고 말해줘버린 자기 자신의 멍청함에 베아트릭스는 또한번 할말이 막혀버렸다.
"일반황족이면 상급귀족처럼 역삼각형 표시가 있을테고, 군이라면 원형이 있어야 되고, 대군이면 마름모꼴이 있어야 하잖아. 물론 태자라면......귀 밑이 아니고 어깨에 황족문이 있겠지. 근데......내가 잘못 본게 아니라면......어젯밤 그사람......선대황제 첫번째 황후였던 세네피스 카파키지?"
"......"
"그사람 북부 상급귀족출신 아냐.......생각해보니 저사람하고 정말 닮았어......"
베아트릭스를 바라보는 탈란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배어 있었다.
"내 짐작이 틀린거니? 베아트릭스?"
꾹 다문 베아트릭스의 도톰한 입술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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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본문에 있던 일러스트, 삽화, 전황도는 유조아 개편으로 태그 사용이 불가능해져서 일단 지웠습니다.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으로 가시면 지워진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