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7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
.
.
"겨우 하룻밤 묵고 떠나는거냐?"
저녁만 먹고 떠나는 조카를 바라보며 도스트 바얀이 꽤나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 안팔린다고 고용주가 그냥 가겠다네요."
"하기사, 어떤 미친놈이 이런데 말을 사러 오겠냐. 너도 몸조심해라. 조짐이 영 이상한 게 한 번 일이 터지긴 할 것 같다."
안장끈을 매는 라손을 가볍게 껴안아준 도스트는 다시 길을 떠나는 조카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곳에 올 때처럼 탈란을 선두로 말장사꾼의 행색을 꾸민 일행은 캐러반들의 일상적인 길을 따라 북쪽으로 말머리를 향했다.
전형적인 와디 지형인 이곳은 옛날 비가 많이 왔을 시절 빗물이 모여들었을 서쪽의 깊고 우묵한 계곡을 지나면 동쪽 저지대로 이곳 바얀 시와 지금의 바얀 오아시스가 위치해 있었다. 비가 점점 적어지고 건조지대가 되어가면서 지금보다 훨씬 고지대에 있던 바얀 시도 오아시스의 축소를 따라 이 저지대로 따라 옮겨온 것이었다.
마을의 북쪽 경계를 벗어난 일행의 눈에 이곳에 주둔한 천여명의 서부제후군 보병대들의 숙영지와 그 조금 북쪽에 위치한 백여기의 낙타병 숙영지가 눈에 들어왔다. 밤이 찾아오는 숙영지에는 담장을 빙 둘러 몇개의 감시탑과 대마 장애물들이 꼼꼼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 형태와 배치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집어넣은 탈란이 카렐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제가 궁기병 3백을 이끌고 낙타병부대 서쪽으로 진입해 남쪽을 거쳐 북동쪽으로 빠져나오겠습니다. 동쪽은 장애물 밀도가 꽤 높아서 궁기병들로는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카렐은 이번엔 라손을 돌아보았다.
"자넨 중기병 3백을 이끌고 마을 남쪽으로 진입해서 북쪽 보병대를 돌파하도록 해. 낮에 파악한 녀석들 급수장비를 모조리 파괴하고 낙타병부대 북동쪽에서 탈란과 합류해서 명령을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라손이 정규군 지휘관답게 단호하게 대답했다. 카렐의 옆을 따르던 베아트릭스는 자신에게만 별다른 명령이 없자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물론 가문 최고의 궁기병 지휘관인 베아트릭스에게 적당할 궁기병 지휘 임무가 탈란의 손에 넘어갔다는 데 저으기 자존심이 상해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챈 탈란은 꽤나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렐이 그런 베아트릭스를 돌아보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베아트릭스 자넨 나와 함께 서쪽 계곡으로 가세."
"예?"
놀란 표정의 베아트릭스가 얼른 카렐과 탈란의 눈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좀 위험할거야.......또 한 번 내 등에 업혀서 절벽을 타야 될테니. 내키지 않으면 그만두게나. 명령은 아니니까."
아니나다를까 '업힌다'는 말에 탈란의 아연질색하는 표정이 곧바로 베아트릭스를 향하고 있었다. 카렐과 탈란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베아트릭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제가 궁기병대를 맡고 탈란 이모와 함께 계곡에 가시면....."
"후훗, 자넬 잡으려고 조직되었던 특수부대를 자네가 이끄는것도 꽤나 웃기지 않겠나. 자네 투창실력이 필요할테니 기왕이면 자네가 같이갔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한번은 사양'한 베아트릭스의 눈치가 조금은 덜어진 셈이었다. 베아트릭스가 마지못하는 척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탈란의 표정은 여전히 조금 굳어있었다.
군부대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탈란이 행렬을 정지시켰다. 카렐이 말에서 내려서며 입고있던 털옷과 털모자를 벗어 자신의 짐 속에 쑤셔넣었다. 베아트릭스 역시 거추장스러운 털옷을 벗어던지고 누런 라멜라갑옷과 투구, 스코프를 눌러쓰고 짤막한 창과 세이버로 무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무기인 다섯 개의 자리드가 든 퀴버를 등에 짊어지고 사이클롭스를 어깨에 감았다. 약간은 거칠어보이는 그 복장은 플라칼 가 경기병단장으로 있을 때만큼 위엄있고 세련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훨씬 '바툴 가 사람' 다운 모습이기는 했다. 카렐이 웃는 낯으로 물었다.
"이제야 자네다운 모습이군그래. 그런데 투창을 좀 더 가져가지 그러나?"
"중투창이라서 걸어갈때는 5개도 꽤 무겁습니다. 갑옷까지 입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럼 내가 들어다주지, 뭐."
카렐은 시알피에 달려있던 10개짜리 퀴버를 풀어 거리낌없이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베아트릭스의 등에 있던 5개 중 3개를 대뜸 뽑더니 자신의 퀴버에 꽂아넣었다. 베아트릭스를 유독 아끼는 그 모습에 탈란이 보일듯말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뭐라 참견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 2개는 비상용이니까 자네가 갖고있어."
"......예."
"자, 이쪽은 라손과 탈란 자네 둘에게 맡기겠네. 그럼 수고하게나. 종가에서 보세."
"예. 몸조심하십시오. 태......지도자 전하."
라손이 손바닥을 가슴에 가져가며 공손하게 경례를 올렸다. 라손의 말실수를 못들은 척 한 탈란의 입꼬리가 조금 치켜올라가고 있었다. 카렐과 베아트릭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몇초 지나지 않아 타타탁 하는 꽤나 빠른 땅을 딛는 소리가 서쪽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의 정체를 의아해하는 탈란에게 라손은 씨익 하고 웃음을 던져보였을 따름이었다.
서부제후군의 두번째 표적이 된 부족은 이 행성의 몇 안되는 수렵부족인 에키트 족이었다. 북국의 크지않은 해안과 툰드라 숲, 산악에서 곰과 들소, 바다사자 사냥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이런 시기에 부족 전체가 집결하는 것이 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지만 최소한의 비상식량이 될 가축 정도는 데리고 있는 다른 유목부족들과는 사정이 조금 틀렸다. 추운 눈벌판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이들에게 매년 봄가을 두차례씩 있는 생필품 거래는 그해의 '생존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어차피 이들에게는 적에게 기습당해죽나 굶어죽나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항복하면 따뜻한 서부에서 살 수 있을거다."
통역관을 대동하고 찾아온 하지즈 장군의 협박인지 놀림인지 알쏭달쏭한 말에 에키트 족장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이미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툰드라의 침엽수 숲에 모여 겨울을 위한 거래를 준비하던 5천여명의 에키트 부족민들은 이미 만여명에 달하는 서부연합군 보병들에게 포위당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다.
다른 여느 탈라스 주민들처럼 유난히 크고 다부진 그들의 체구를 바라보며 라바니 경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이정도 덩치 노예면 가격도 꽤 나가겠는걸."
"나도 공용어 정도는 알고있소. 내가 못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소?"
에키트 족장이 이를 악물며 자신을 쏘아보았지만 라바니 경은 태연한 얼굴로 씨익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하지즈 장군이 협상 분위기를 흐뜨러뜨리는 라바니 경에게 곱지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각 가구에서 젊은이 1명씩을 인질로 데려가겠다. 전사이거나 그런 경력이 있던 자가 1순위이고 그런 자가 없으면 장자를 데려가겠다. 그러고나면 나머지 부족민들은 지금까지처럼 살면 된다. 우리 지시에만 순종해주면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거다."
에키트 족장이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그로서도 부족의 전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들 에키트 부족은 유목민들처럼 말은 타지 않지만 거친 북극의 황무지에서 사냥으로 살아가는만큼 하나같이 거칠고 싸움을 잘하기로 이곳에서도 유명한 부족이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의 정규군 앞에서 어린아이와 노약자까지 뒤섞인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않았다.
"인질로 간 젊은이들은......"
"서부 상급제후가문에서 관노예로 부려지겠지. 질좋은 몇놈은 학장님께 선물로 바쳐지는 영광을 얻을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함부로 목숨을 빼앗지는 않을테니 걱정마라."
고개를 떨군 부족장은 아무 말도 없었다. 쌀쌀맞은 표정의 하지즈 장군이 뒤에 선 이곳 프락치에게 손짓을 보냈다.
"당장 나가서 인질로 갈 녀석들을 차출해라. 돌아가는 길에 함께 데려갈테니 작업을 빨리 진행시키도록 해."
지난번 쿠틀룩 부족을 전멸시켰을 때처럼 난처한 지경을 당하지 않게 된 데 나름대로 안도하며 하지즈 장군과 라바니 경이 '안전 서약서'에 서명을 해 부족장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약서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 족장을 바라보며 승리감에 도취되어있던 그들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르키스의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뭔가?"
족장의 눈치를 살핀 사르키스가 숙부인 라바니 경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순간 웃고있던 그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뭐라구!"
오아시스변에 기습적으로 착륙한 2대의 병력수송셔틀에서 쏟아져나온 3백여명의 전사들은 지난번 카이두 경이 베아트릭스를 잡기 위해 특별히 조직했던 바로 그 정예 궁기병대원들이었다. 이미 무장을 끝낸 채 2명의 가문 사람들과 기다리던 바툴 가 근위기병대장 탈란은 그들의 위용에 한껏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투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5스타디아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적 낙타병부대는 이미 울리기 시작한 경계경보로 꽤나 요란스러웠다.
"머뭇거릴것 없다! 돌격이다!"
자리드를 움켜쥐고 앞장서는 탈란을 선두로 3백여 정예 궁기병들은 아직 준비도 미처 갖추지 못한 적 낙타병 숙영지로 어둠 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바얀 시 남쪽에서 대기하던 라손은 다른 셔틀에서 내려선 3백여기의 바툴 가 중기병들에게 큰 고함을 지르며 손을 치켜들었다.
"너희 50명은 호안의 적군 급수시설을 파괴한다! 이곳 주민들이 사용하는 조합의 우물은 절대 건드려선 안된다! 파괴후엔 본대와 즉시 합류하도록! 본대 100명은 마을을 가로질러 통과해 북쪽의 적 보병과 사역병부대를 초토화시키고 150명은 마을을 공격하는 동안 외곽을 봉쇄하고 본대가 마을 북쪽으로 빠져나오면 그 선봉에 합류해 적 보병대 숙영지를 향해 돌격한다!"
"예!"
이미 서부제후군들과 몇번이나 되는 교전경험이 있는 베테랑 기병인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큰 소리로 대답을 올렸다.
라손은 그 작은 체구에 안어울릴정도로 큰 자신의 말에 박차를 가하며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앞으로 내달렸다. 이 조용하던 마을은 느닷없는 중기병들의 일제기습으로 일시에 벌집 쑤셔놓은 아수라장이 연출되고 있었다.
"서부놈들은 보이는대로 다 죽여버려라!"
기수와 함께 선두에서 달리는 라손이 도망치는 서부 경보병 두 명을 창으로 쓸어넘기며 쉰 목소리로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5명의 분대 단위로 도시 곳곳에 흩어져 돌격하는 이들 중기병들은 곳곳에 흩어저 도시 곳곳을 순찰하고있던 서부 보병들에게 채 집결할 시간여유를 주지 않고 폭풍처럼 빠른 속도로 북쪽을 향해 마을을 관통하며 몰아쳐갔다.
마을 곳곳에 흩어져 배치되어있던 서부 보병들 중 그나마 운이 좋은 놈들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고 있었지만 그보다 상황이 좋지못했던 대다수 병사들은 마을 곳곳을 헤집으며 쓸고지나가는 이들 중기병들의 말에 밟혀죽던가 창에 찔려죽는수밖에 없었다. 밤중의 소란에 놀라 깨어난 주민들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거나, 아예 문밖으로 나와 이곳의 주인인 바툴 가의 깃발을 앞세온 기병들이 서부제후군을 쓸어내는 광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피묻은 창을 움켜쥐고 선두에서 달리던 라손의 눈에 지난저녁 떠나온 도스트 숙부의 여관이 보이고 있었다.
"썅! 죽어!"
눈앞을 가로막는 세호 가 초급장교 한 명에게 거칠게 창을 내지른 라손의 투구가 순식간에 터져나온 적의 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문앞에 서 있던 도스트는 멍 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여기의 중기병들을 이끌고 적군을 베어넘기며 자신의 여관 앞을 무서운 기세로 달려지나가는 작은 체구의 동부 지휘관을 멍 하니 바라보던 도스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녀석......"
어젯밤의 그 절벽 위에 다시 기어오른 카렐은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적들의 비상경보에 별로 놀라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 했을 따름이었다. 꽤 가파른 절벽들 사이로 만들어진 이 가파르고 높은 바위계곡은 겉에서 얼핏 보기만 해서는 절대 매복 여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꽤 훌륭한 엄폐물이기도 했지만 또한 달아날 수 없는 무서운 함정일수도 있었다. 카렐과 베아트릭스는 이 계곡 사이의 절벽 위에서 밑의 상황을 태연하게 살피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무려 3천여기의 서부연합군 낙타병들이 각자의 낙타를 몰고 졸린눈을 비비며 계곡 입구 부근으로 급히 모여들고 있었다.
"정말 안됐군."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카렐의 눈가에서 살기가 뻗어나오고 있었다.
"녀석들 원래 계획대로라면 마을에 주둔한 병력을 미끼로 그쪽에서 시간을 끌어주는동안 이녀 석들이 뒤를 치는 것이었겠죠? 마을까지는 내리막인데다가 거리도 얼마 되지 않으니......"
베아트릭스가 그 보기드문 웃음을 또한번 지었다. 그런 베아트릭스의 얼굴을 한 번 빤히 쳐다본 카렐은 동쪽에서 다가오는 두 대의 셔틀을 감지하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저놈 뭐야!"
절벽 위의 몇 안되는 초소에서 나온 삼십여명의 보병들이 카렐과 베아트릭스를 향해 무기를 들고 몰려오고 있었다.
"셔틀이 올 때까지 적병들은 내가 막을테니까 자넨 녀석들이나 헤집어 놔."
카렐은 등에 메고있던 창을 움켜쥐며 그의 어깨를 한 번 가볍게 짚어주고는 적병들을 향해 단신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눈에 스코프를 단단히 낀 베아트릭스는 절벽 밑에 집결하고 있는 낙타병들의 선두에 있는, 고급지휘관인 듯한 한 녀석을 향해 그 힘이 실린 묵직한 자리드를 힘껏 내질렀다. 평소같은 그 묵직한 힘이 중력의 힘까지 더해지면서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내리꽂힌 그 검은 괴물은 계곡 밑에 영문도 모른 채 서 있던 적장의 뒷통수를 산산조각내며 뚫고들어갔다.
창을 쥐고 몰려오는 적병들을 향해 마주달려간 카렐은 제일 앞에서 달려오선 두 명의 서부 초병들을 단 한번에 두갈래로 갈라버렸다.
"더 가는 놈들은 갈갈이 찢겨죽을 줄 알아라!"
창을 한바퀴 돌린 카렐은 옆을 피해들어가 베아트릭스를 공격하려는 다른 보병의 다리를 미늘로 홱 걸어 자빠뜨리고는 그 얼굴에 힘껏 날을 박아넣었다.
"썅! 나한테 오란 말이다!"
최대한 잡아늘린 장창의 샤프트 끝을 움켜쥔 카렐은 주변을 휩쓸듯 바닥으로 약간 기울인 창을 사방으로 무섭게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움찔 하는 적병들에게 그대로 돌진한 그는 창을 힘껏 돌리며 발끝을 딛고 그들 앞을 순식간에 스치고지나갔다. 거친 기합소리와 동시에 마치 춤을 추듯 내딛으며 창을 사방으로 내휘두른 카렐이 발바닥으로 굳게 딛으며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의 거대한 창날이 스친 스파이럴같은 궤적을 따라 마른 모래땅에서 핏빛이 어린 뽀얀 먼지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일곱 명 정도의 보병들의 시체 혹은 다리가 잘린 부상병이 그 흔적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더 죽고싶냐!"
이번엔 창의 중단을 움켜쥔 카렐이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적 보병들을 향해 다시 돌진해들어갔다. 양쪽 어깨와 목을 축으로 창을 마치 곤봉처럼 앞과 뒤, 좌우 양쪽으로 자유자재로 내휘두르는 그 무서운 속도에 미처 피하지 못한 세 명의 병사들이 얼굴 혹은 가슴이 직격당한 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공포에 사로잡힌 병사들이 자기도모르게 뒷걸음치며 흩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절벽 아래 낙타병 지휘관들만을 겨냥한 베아트릭스의 무서운 저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카렐이 절벽 위의 보병들을 붙들어두고 있는 사이, 양쪽 입구방향 절벽 위에 착륙한 두 대의 병력수송셔틀이 5백명의 바툴 가 궁기병, 아니 말에서 내린 궁병들을 쏟아내놓고 있었다. 그 제일 선두에서 직접 달려나온 카이두가 대사를 휘둘러 자신에게 겁없이 달려드는 서부 보병 한 명을 눈깜짝할새 두토막을 내 버렸다. 그의 바로 뒤를 수십여명의 거한들이 거의 사람 키만한 큰 탱크 여러 개를 굴리며 서둘러 달려나왔다. 절벽 입구로 아직 준비를 덜 끝낸 적 낙타병들 백여기가 제일 먼저 바얀 시를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떨어뜨려!"
카이두의 명령에 그들 거한들이 어깨로 탱크를 힘껏 밀어 절벽 밑으로 떨어뜨려버렸다.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난 큰 탱크 안에서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순간 사방으로 터져올랐다.
"쿠틀룩에서 죽은 녀석들 복수다."
밑을 향해 침을 퉤 뱉은 카이두가 인화물질로 뒤범벅이 된 땅바닥을 향해 불이 붙은 투창을 힘껏 내던졌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거의 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붉은 불덩이는 땅바닥에 꽂히기가 무섭게 사방으로 불꽃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인화물질 역시 시커멓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쪽 절벽 모서리가 가로막힌 계곡의 낙타병들에게는 살육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굴려보낸 수십 개의 인화물질 탱크가 사방에서 터지면서 계곡 아래를 일거에 생지옥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너흰 왼쪽! 너희는 오른쪽을 맡아!"
카이두가 자신을 따라온 5백여명의 궁병들에게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각각 십여개씩의 투창을 짊어진 그들은 절벽의 양옆으로 나뉘어져 일렬로 도열해섰고, 힘센 장정들이 셔틀 안에서 예비투창을 짊어지고 계속 달려나왔다.
"각자 낙타를 책임져라! 폭주하는 낙타 주인녀석은 목을 베어버리겠다! 빨리! 사역병들은 모두 불을 꺼! 제기랄!"
서부 낙타병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지만 순식간에 계곡에 갇혀버린 서부 낙타병들은 놀라 날뛰는 낙타들을 불들고 쩔쩔 매고는 상황이었다. 사방에서 불꽃과 매캐한 연기가 치솟아오르면서 허둥지둥 계곡을 빠져나가려는 낙타병들 때문에 이미 불이 붙은 계곡 양쪽 입구는 사방에서 부딪혀 넘어지는 병사들과 먼저 빠져나가려는 녀석들로 몸싸움이 난무하고 있었다.
"썅! 낙타부터 잡으란 말이야! 낙타를 버리고 도망치는 놈들은 목을 벤다!"
악을 쓰며 외치는 지휘관들의 고함소리는 병사들의 아우성 속에 파묻혀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유난히 불을 무서워하기로 유명한 동물인데다가 야생성도 강한 동물인지라 불에 가까이 모여있던 낙타들은 사실상 통제불능의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우성치는 서부 낙타병들을 향해 절벽 위의 바툴 가 궁병들이 일제히 투창을 꺼내 손에 움켜쥐었다.
"발사!"
카이두의 명령과 함께 5백여 궁병들이 날린 투창이 절벽 밑에서 빠져나가려 몸부림치고있는 서부 낙타병들의 머리 위를 향해 거의 수직으로 쏟아져내였다. 중력을 그대로 받아 공중에서 '떨어지는' 만큼 그 속도와 위력은 보통의 투창공격과 비교가 될 바가 아니었다. 무려 0.5스타디아의 높이에서 한번에 5백발씩 마치 우박처럼 쏟아져내리는 집중사격에 궁지에 몰려있는 낙타들과, 그들을 쥐고 쩔쩔 매던 낙타병들이 미처 피할 여유도 없이 쓰러져가고 있었다.
"전하?"
가지고 온 15개의 투창을 모두 다 써버린 베아트릭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삼십여명의 적 보병들을 혼자 다 베어 쓰러뜨린 카렐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조금은 지친 듯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카렐에게 다가온 베아트릭스가 그의 등을 짚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렐에게 베아트릭스는 주머니에 미리 준비해온 반 쯤 마른 양고깃덩어리---비계가 꽤나 많이 붙은---을 카렐에게 얼른 내놓았다.
"고맙네."
베아트릭스의 '선물'을 그자리에서 입에 던져넣은 카렐은 여전히 한손에 창을 움켜쥔 채 절벽 조금 안쪽의 카이두 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카렐의 예상대로 5백여명의 정예 궁병들이 절벽에 갇힌 낙타병들을 향해 무서운 집중사격을 계속 쏟아붓고 있었다.
카이두 경은 베아트릭스와 함께 나타난 카렐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카렐이 아직 컴컴한 하늘을 올려보며 말했다.
"곧 녀석들 본대에서 지원군이 올 거요. 그때는......"
"걱정 마십시오. 그 전에 모조리 끝장을 보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카이두가 뒤의 셔틀에서 계속 내려지고 있는 큰 탱크들을 가리켰다. 적어도 장정 두세사람은 달려들어야 움직일 거대한 탱크를 절벽 모퉁이까지 끌고온 그들은 큰 기합소리와 이미 불바다가 된 계곡 밑을 향해 탱크를 계속 떨어뜨렸다.
"운도 없군. 하필 두 사람이 다 나가있는 때에....."
바얀 오아시스의 채수장은 물론이고 계곡에 매복중이던 낙타병부대까지 동시기습을 당했다는 소식에 셔틀을 타고 결국 직접 달려나온 서부연합군 사령관 샤드니는 투구를 깊이 눌러쓰며 자신의 말에 뛰어올랐다. 급한대로 무작정 데리고나온 백여기의 근위기병과 오백여명의 경보병들은 3대의 셔틀에 나누어 타고 바얀 오아시스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장에게는 오백여명의 장갑보병을 주어 계곡의 낙타병들을 절벽 위에서 기습한 적 궁병들을 강습하라며 보내놓은 차였다.
낙타병들이 그지경이 된 건 속터지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들어가 다만 십여분만이라도 시간을 끌수 있으면 본대에서 준비중인 2만여 주력부대와 전자전 셔틀을 투입해 이 일대를 완전포위하고 녀석들을 절단내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캐러반길 북쪽에 적 퇴각용으로 보이는 셔틀 4대가 포착되었습니다! 아군을 기습한 적 궁기병 3백은 낙타병 숙영지를 공격중이고 적 중기병 3백은 방금 마을을 돌파해 보병대와 사역병부대 숙영지를 공격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계곡에서 일찍 빠져나온 낙타병 백여기도 거의 시내에 도착해갑니다. 그리고 적의 퇴각용 셔틀은 캐러반길 북쪽에 이미 대기중입니다."
"그러시겠지."
투구의 비버에 가리워진 샤드니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사령관인 그가 만사 제껴두고 직접 서둘러 달려나온 덕에 바얀 시의 서부제후군 숙영지가 산산조각나기 전에 일찌감치
부근에 도착해 있었다.
"적 셔틀 바로 옆에 착륙한다. 자기네 퇴각셔틀이 먼저 달아나면 새끼들 꽤나 당황하겠군."
++++++++++++++++++++++++++++++++++++++++++++++++++++++++++++++++++++++++++++++++++++++++++++
<소설 본문에 있던 일러스트, 삽화, 전황도는 유조아 개편으로 태그 사용이 불가능해져서 일단 지웠습니다. 팬카페 http://cafe.daum.net/TheIronVein 으로 가시면 지워진 그림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