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9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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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 뒷조사라도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마랄루에서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샤레이의 동부연합군 병영에 샤자한 공과 마주앉은 페로가 이 종조부에게 조금은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따져물었다.
"뒷조사라기보다는......그냥 사람들에게 물어본 것 뿐이었죠."
입가에 미소를 띤 샤자한 공이 페로에게 차 한 잔을 권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와 사우드 발 부인과의 사이도요?"
"어쨌든 총리각하도 저희 가문의 일원 아니십니까. 종장으로서의 자연스런 호기심일 뿐이었죠."
페로의 추궁을 슬쩍 넘겨버리며 샤자한 공이 차 한 모금을 다시 들이켰다.
"뭐, 그 여자와 어느정도 가까이 지내시는 것이야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겠으나.....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총리께서 제 막내딸 구르베스를 정실로 맞아주시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페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샤자한 공의 유별난 욕심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이제 처음으로 그것과 맞서야 할 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것이었다. 30분쯤 전, 이곳 병영에 '특별한 손님'이 온다는 연락을 받은 샤자한 공은 이렇게 페로와 마주앉아 잠시동안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나가봐야겠군요."
페로가 뒤에 서 있던 근위병의 손에서 망토를 빼앗듯이 나꿔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페로를 올려보며 샤자한 공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조만간 구르베스를 이곳으로 불러올 생각입니다. 평소 각하를 잘 따르던 아이였으니 다정히 돌보아주십시오."
낮은 한숨을 내쉰 페로는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사령관 막사 밖으로 나섰다.
막사를 나선 페로는 옷 속을 파고들어오는 초원의 차가운 바람에 몸을 조금 움츠렸다. 문득 고개를 치켜든 그는 멀리 언덕 위에 희미하게 보이는 저 원수같은 마랄루 요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매일 계속되는 공성에도 불구하고 적 보병대는 여전히 굳건하게 요새를 지키고 있었고 보병들의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다. 주기장을 향해 걸어가는 페로의 양옆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누추한 사병 막사의 반투명한 플렙 안으로는 지친 병사들이 뒤엉켜 시체처럼 잠든 모습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저 상태로 내일 일어나 다시 싸워줄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지만 조여드는 기세를 멈출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극한의 피로상태로 몰아붙이다보면 어느순간 그 균형이 깨지면서 승부가 갈리는 것이 늘상 반복되어온 이 지긋지긋한 공성전의 법칙이었다.
"휴우,"
두 명의 가디언과 함께 어두운 주기장 앞에 선 페로는 그 넓고 단단한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툼한 망토를 한번 추스렸다. 그의 예상대로, 동부제후가 쪽에서는 지금 올 손님을 맞을 사람은 아직 단 한명도 나와있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 나타난 인기척에 문득 뒤를 돌아본 그는 조금은 쭈삣거리며 걸어오는 2제후 제르베 경과 4제후 나람 눌레딘 부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둠 속에서 옛 약혼자와 마주한 페로는 줄곧 싸늘한 표정으로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망토 핀이 필요하시겠군요."
한손으로 연신 망토를 추스리는 페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머쓱한 웃음을 지은 나람 부인이 입고있던 망토에 달린 2개의 핀 중 한 개를 떼어내 페로의 가슴을 직접 조여주었다.
"고맙소, 나람 부인."
냉담하게 옆으로 돌아선 페로는 멀리 다가오는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희미한 불빛은 서부 3제후 발 가의 전갈 문장을 단 고급 승용 셔틀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지금의 동부연합군 분위기와는 어딘지 불협화음을 일으킬 듯 해 보이는 그 번쩍이는 셔틀은 말없이 서 있던 페로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사우드 사예브 발 부인."
하급자인 나람 부인이 셔틀에서 내려서는 서부 3제후 사우드 부인에게 먼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이 매서운 인상의 매혹적인 서부 여인은 자신을 기다리던 페로에게 바싹 다가서며 그 거칠어진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정말 오랫만입니다. 총리 각하. 이런, 얼굴이 이렇게 많이 상하시다니,"
마치 옆에 선 나람 부인 보라는 듯 사우드 부인이 페로의 굳어진 뺨을 한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시죠, 제가 고생하시는 총리 각하를 위해 선물을 제대로 챙겨왔군요."
자연스럽게 페로와 팔짱을 낀 사우드 부인은 이 거칠고 지저분한 숙영지 안으로 거리낌없이 발을 들여놓았다.
"전장에서 뵈니 더더욱 야성적인 모습이시군요,"
페로의 막사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가슴을 바싹 붙여온 사우드 부인이 페로의 귀에 입술을 대고 낮게 속삭였다.
"갑자기 이곳에 오신 목적이 뭡니까?"
페로가 사우드 부인에게서 자연스럽게 한 발 물러나며 물었다.
"지난번 대답을 안 주신 문제를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막사 한쪽의 침대에 허락도 없이 걸터앉으며 사우드 부인이 갑자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침대맡의 테이블에서 멋대로 술병을 집어든 부인은 그대로 잔에 조금 붓고는 그 붉은 입술에 가져갔다.
"아시다시피 우리 발 가의 영지는 아켐에 수도가 있지만 인구의 절반 이상은 남부와 서부의 유일한 경계인 테나토에 거주하고 있죠. 이스마엘 가 놈들이 그 한구석 약간을 쥐고있기는 하지만......어쨌든 테나토는 우리 발 가의 사실상 영향권이고 이스마엘 가 놈들 정도야 맘먹으면 쫓아내는 건 일도 아니죠."
"그래서요?"
페로가 의자를 당겨 부인의 앞에 마주앉으며 물었다.
"플레렌 가 놈들 요즘 압박이 보통이 아닙니다. 테나토를 경유해 남부 칼릴과 연결되는 워프루트를 확보하려고 거의 발악을 하고 있죠. 제가보긴....."
"남부와 제대로 손잡을 속셈이군요."
페로가 놀란 가슴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며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플레렌 가가 남-서부 연결로인 테나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지금의 '남-서부 동시공격'이 조만간 남-서 연합군'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불길한 조짐이었다. 이곳 샤레이의 남부제후군의 전황이 안좋아지고 탈라스의 상황 또한 지지부진해지면서 그들이 다른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페로로서는 어떡해서든 남부와 서부의 원활한 교류만은 막아야 할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 가문이 그 목구멍인 테나토를 쥐고 있으니......그들로서도 우리를 전향시키는것이 지상과제겠죠."
사우드 부인이 들고있던 체리를 잔 안에 떨구며 마주앉은 페로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그의 음험한 목소리가 페로의 귓전을 가볍게 울렸다.
"오늘은 어디서 잘까요?"
어느새 불을 끈 사우드 부인이 페로의 무릎 위에 걸터앉으며 그의 머플러와 비단포를 자연스럽게 벗겨내렸다. 어둠 속에 드러난 페로의 넓고 단단한 가슴을 손등으로 어루만지던 사우드 부인은 그 불룩한 어깨에 술기운이 어린 입술을 천천히 가져갔다. 어느새 아랫도리 속으로 들어온 이 여인의 농염하고도 부드러운 손끝의 감촉을 느끼며 페로가 눈을 꽉 감았다. 머플러를 벗어던진 사우드 부인의 그 매끄러운 몸이 의자에 반쯤 드러누운 페로의 가슴 위에 살며시 얹혀졌다.
"어차피 곧 부부인이 될 터이니.....하룻밤 함께하는 것 정도야.....지난번처럼요."
바툴 가 종가의 누추한 겔에 카렐과 마주앉은 황후는 짐에 들어있던 몇 권의 책들을 내놓았다.
"이번에 너를 위해 고른 책들이다. 몇권은 네가 이미 읽어본건지 모르겠구나."
"어머님이 권하시는 책중에는 꼭 금서가 섞여있군요."
웃음지은 카렐의 손에는 '암중어록(暗中語錄)'이라는 제목이 붙은 두꺼운 책이 들려있었다. 표지를 슬쩍 들쳐본 카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공저자 네 명중에......살아있는 건 리쿠 학장 한 명 뿐이군요."
"절대금서로 지정되어서 모두 폐기되었다고 알고있었다만......규장각 비밀서적보관소에 전질 3권 모두가 있더구나. 4차 혼란기중에 주페 태자의 행적과 서부의 정치상황들을 수하들이 세세하게 정리한 책이다. 당시 상황이 지금과 비슷한 면이 많으니 네게도 도움이 될 거다. 오르마즈 언니 이야기도 나오고....태자가 그렇게 몰락한 이유가 세세하게 정리되어 있더구나. 밖에서는 구하기 불가능한 것이니 한번 읽어보려무나."
"알겠습니다."
카렐은 어머니가 내민 다섯권의 책들을 잠자리 옆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세네피스 황후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지 카렐의 얼굴을 올려보며 내내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며칠만이죠?"
카렐은 자신의 자리 옆에 어머니의 잠자리를 직접 펼쳐주며 중얼거렸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황제 침실 중에 한 개는 침대를 빼버리고 동부식 온돌로 꾸밀까 합니다."
자리에 먼저 드러누운 황후는 수트를 벗고 셔츠차림으로 옆에 들어온 카렐의 품을 깊이 파고들며 말했다.
"네 아버지가 너만큼만 내게 잘해줬더라면......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더 행복했을것을......"
잠시 옛 생각에 잠긴듯했던 황후는 바로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모레쯤 경기병 훈련장에 가보려무나. 아니, 함께 가보는게 낫겠구나."
"예?"
"동부 경기병 천 명이 널 기다리고 있을거다. 샤자한 공이 동부 연합군에서 정예 경기병 천 명을 선발해서 네게 넘겼다."
"그 인간이 그냥 넘겨주지는 않았겠죠?"
"내가 좀 '설득'했지."
세네피스 황후가 아무렇지않게 대답했다.
"역시 어머니다우시군요."
"낙타병 606명 전사. 낙타손실 750마리, 기병 117명 전사, 경보병 359명 전사, 장갑보병 61명 전사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진 샤드니는 큰 한숨을 내쉬며 사령실 천장을 올려보고 있었다. 바툴 가와의 첫번째 직접충돌에서 서부연합군이 처참하게 뭉개진 셈이었다. 바툴 가의 신용을 떨어뜨려 복속부족들을 이반하게 만든다는 계획도 일단 난관에 봉착할 것이 분명했다. 바툴 가는 이 행성의 주인으로서 침입자인 자신들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나름대로 이름값을 한 셈이었으니 부족들 역시 자신들에게 저항을 계속할 것이 뻔했다.
"또다른 문제는......."
부장 옆에 있던 사역부대 엔지니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제는?"
샤드니가 그를 째려보며 물었다.
"바얀 오아시스의 채수장비가 완파되었습니다. 수리용 부품은 확보하고 있었지만 구조물까지 완파되는 경우는 상정하지 못해서......구조물을 다시 짓고 본가에서 다시 제작해 가져오려면 7, 8일은 걸릴 듯 합니다."
"뭔가.......그럼......."
"물 비축분은 이틀치에 불과합니다."
뜻밖의 상황에 황당해진 샤드니가 머리를 싸쥐었다.
"일단 화물선을 동원해 수송을 지시했지만 7만이나 되는 대군이 사용하기에는 턱도 없습니다. 마실 물은 물론이고 각종 장비의 유지관리에 들어가는 물들까지 고려하면......전군에 절수령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던 샤드니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급수장비가 복구될때까지 사병의 목욕을 금지시키겠다. 말과 낙타, 차량세척, 청소시에도 물론이다. 식수와 장비의 성능에 필수적인 용도를 제외하면 일체의 물 사용을 금한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엔지니어와 부장이 밖으로 사라지자 북극에서 막 도착한 하지즈 장군과 라바니 경이 굳은 얼굴로 불쑥 들어섰다.
"뭐, 이정도는 그냥 잊어버리시구려. 앞으로도 숱하게 당할 일일테니."
라바니 경의 놀리는듯한 말투에 샤드니가 얼굴을 다시 찡그리고 있었다.
"오아시스 주둔병력을 3천으로 증강하고 중랑장급을 상주시키도록 해. 고감도 스캐너하고 전자전 셔틀도 마찬가지고. 물 공급에 문제가 생기니 타격이 크군."
소 잃고 외양간 지키는 격이었지만 지금까지는 필요성을 알면서도 적의 기습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조금 '부족한듯한' 상황을 유지해온 것이었다. 샤드니의 명령에 하지즈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에키트 족인가, 녀석들은 잡아왔나?"
"예. 나가서 보시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하지즈 장군이 사령실 테라스 창을 가리켰다. 자리에서 일어선 샤드니는 선선한 사막바람이 불어오는 테라스에 하지즈 장군과 함께 나섰다.
키타이 사막 중앙에 위치한 서부연합군의 대규모 기지 중앙에 10여층 높이로 신축된 이 거대한 탑 옥상의 사령실에서는 기지 전체는 물론이고 사방의 지평선 너머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스코프를 작동시켜 주기장쪽을 바라본 샤드니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완전히 야만족들이군."
북극에서 하지즈 장군과 함께 도착한 수송선에서 온몸이 포박당한 건장한 체구의 젊은이들이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있었다. 그들만으로 이미 주기장 한쪽이 꽉 찰 정도인 것으로 보아 그 숫자도 보통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에키트 족 1500명입니다. 대부분 부족 전사였던 놈들입니다. 저항의 여지를 없애려면 저놈들을 잡아들이는만큼 좋은 게 없겠죠."
"잘했네. 일단은 우리 기지에서 험한 일에 쓰도록 해. 이곳이 정리되면 그때가서 가문들끼리 나눠갖도록 하고."
"용모가 빼어나고 말 잘듣는 놈들을 몇 골라서 지난번에 탈취했던 말들처럼 학장님께 선물로 바칠까요?"
갑자기 얼굴이 조금 붉어진 샤드니가 쌀쌀맞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됐네. 학장님께선 노예 따위에는 관심 없으시니......"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부리실텐데......"
"됐다니까!"
샤드니가 그답지않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있었다. 사령관의 뜻밖의 태도에 조금 놀란 하지즈 장군은 그대로 입을 다무는수밖에 없었다. 조금 안정을 찾은 샤드니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바툴 가 종가를 찾으려고 하릴없이 행성을 뒤지는 것도 의미없는 짓이니......우리 쪽에서 다른 덫을 치도록 하는 게 좋겠네."
무어라 더 말하려던 샤드니는 사령실에 들어와 고개를 숙이는 장교를 휙 돌아보았다.
"리쿠 학장님의 연락이십니다."
"예상했던 일 아닌가."
탈라스에 카렐이 직접 와 있다는 샤드니의 보고에 코리온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극성당의 카파키 부제학도 학기가 끝나 얼마간 학교를 비우고 있다 하니 어쩌면 함께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샤드니가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대답했다.
평소처럼 학장실에 앉아있던 코리온은 읽고있던 책을 덮으며 눈을 반 쯤 뜬 채 샤드니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요즘 남극성당 동향이 꽤 재밌더구나."
"남극성당이요?"
"5일 전에 신년학기를 마감하면서 현직교수들이 학기중 연구결과를 일제히 학보로 발간했다고 하는데......세네피스 카파키 그년이 자이센 대제학에게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에 관한 공개질의를 던졌다고 한다. 정주이학(程朱理學)에서도 우왕좌왕하는 그 우둔한 헤데론 자이센이 그 변증적 반론에 어떻게 답변할 수 있었겠나. 지금 남극성당의 보수 중도학자들이 그 답변을 만들어내느라 쩔쩔 매고있다는 소문이다."
"조만간 남극성당 중도파 학자들간에 내분사태가 벌어지겠군요."
미소지은 샤드니가 연인의 얼굴을 올려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코리온은 조금 굳은 얼굴로 샤드니에게 경고하듯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130년을 갇혀있던 세네피스 카파키 그년의 학문 역량이 전혀 녹슬지 않았다는 점이다. 녀석은 억지논리로 유명한 대제학과의 직접토론을 최대한 피하고 공개지면만으로 그 권위를 위협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수완 아닌가."
"그......그렇군요."
샤드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쌀쌀맞은 투로 이야기하던 코리온은 긴 머리칼이 반쯤 드리운 그 아름다운 얼굴에 갑자기 엷은 미소를 띠었다.
"이번 작은 일로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남부가 우리에게 연합군을 결성해 함께 싸우자고 먼저 손을 벌릴 것이니......우리는 그때만 기다리면서 탈라스에서 영향력을 최대한 확보해두면 되느니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샤드니의 어두운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코리온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힘들어보이는구나."
"잠을 못자서......피곤할 따름이옵니다."
"몸관리에도 각별히 힘쓰거라. 네 얼굴도 볼 겸 내 조만간 그곳을 찾아가보아야 겠구나."
코리온이 전장까지 직접 찾아온다는 말에 샤드니의 얼굴이 일순간 밝아지고 있었다.
78.
"마음에 드는군요."
슈카른 계곡 부근의 사막에 도열해 선 2천여 경기병들을 내려다보며 카렐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검은 라멜라갑옷을 맞추어입고 건장한 탈라스 말에 올라탄 이들의 기세는 당장이라도 실전에 투입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전사단 휘하에서 슈로 기사단과 기병 전력의 양대 축을 이룰 새로운 경기병단 '슬레이프니르'의 첫번째 공식 열병행사였다.
동부연합군에서 뽑혀온 천여명의 경기병들이 새 갑주와 장비에 조금 낯설어하고있었지만 그까짓것은 약간의 적응훈련만 거치면 별 문제가 아니었다. 황후로부터 이미 귀띔을 들은 갈라크 도비치 중랑장이 대표로 나와 자신들의 제위 후계자인 카렐에게 경계를 올렸다.
그들 경기병들에게 가벼운 손짓으로 답례해 준 카렐이 카이두 경에게 말을 건넸다.
"조만간 여기에......전문 궁기병 천 기 정도를 추가편성했으면 좋겠군."
"일단은 여기있는 제 휘하의 정예 궁기병대 천 기를 이들과 함께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카렐 덕분에 탈라스를 지켜줄 2천 기의 경기병을 더 얻게 된 카이두 경이 뜻밖의 호의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이 카이두 경의 일종의 '뇌물'이라는 것을 모를 턱이 없는 카렐이었지만 당장은 사양할 입장도 아니었다. 카렐과 나란히 서 있던 세네피스 황후가 중얼거렸다.
"자아, 그러면 북부경기병 천 백 명과 동부경기병 천 명, 탈라스 궁기병 천 명까지, 총 3천 백여기의 이 부대를 누가 이끌지가 문제되는데......"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도비치 중랑장은 물론이고 아버지와 함께 나와있는 탈란 바툴 중랑장과 동부 근위경기병대 소속 중랑장이 이 '요직'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카렐은 신중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었다.
이번에는 슈로 기사단의 초창기때처럼 확실한 지도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의 대등한 세 지역이 뒤섞여있는만큼 섣불리 결정하면 항명사태나 내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특히나 도비치 중랑장은 토로 경처럼 황후를 따르는 골수분자이니만큼 그가 찍소리도 못할 방법으로 단장을 선임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세네피스 황후의 웃음띤 시선은 줄곧 도비치 중랑장을 향하고 있었다. 카렐은 자신의 뒤에서 말없이 서 있는 베아트릭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 자네들 모두가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으니......내 4명을 지명할테니 일대일 대결을 벌여보세. 마지막 남는 한 명이 근위경기병단장 슬레이프니르 단장이 될 것이야. 자네들 셋과......여기있는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경까지, 4명을 지명하겠네."
세네피스 황후는 카렐의 결정에 그를 한 번 돌아보았을 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제국 최고의 창술을 자랑하는 북부기병이 근접전에 유난히 강하다는 사실을 황후도 모를 턱이 없었다. 도비치 중랑장은 자신만만하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황후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주 합리적인 방법이군."
탈란은 4명중에 다른사람도 아닌 조카인 베아트릭스가 들어갔다는 데 어지간히 경악하고 있었지만 카렐이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시키겠다는 데 감히 뭐라 덧붙일수가 없었다.
카토가 단장의 갑주와 망토를 사람들 앞에 번쩍 들어보였다. 가슴에 황실의 금빛 용 문장이 선명한 화려한 검은빛 갑주의 어깨에는 백마가 화려하게 수놓인 검은 비단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저건 이제 제껍니다!"
도비치 중랑장의 큰 고함소리에 북부출신 기병들이 떠나갈듯한 환호성으로 답하고 있었다.
카렐이 탈라스 궁기병들까지 합쳐진 그들 3천여 기병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경기병끼리의 대결이니만큼 별도의 룰은 없다! 낙마하거나 유효한 가격을 당하면 패한다! 무기로는 날을 무디게 한 기창과 촉을 제거한 투창 3개, 날없는 가검이 지급된다! 30보 떨어진 거리에서 싸움을 개시하며 2명씩 대결해 각각의 승자가 최종결승을 치를 것이다! 1등은 단장이 될 것이며 2등은 부단장이다! 이의 있나!"
3천명의 기병들이 지르는 함성으로 카렐의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우베가 그자리에서 임시변통으로 만든 제비를 네 사람 앞에 내놓았다. 나머지 세 사람이 모두 자신의 제비를 집어들 때까지 베아트릭스는 줄곧 굳은 표정으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 역시도 '단장 후보' 4명 중 자신에게만 특별한 지지세력이 없음을 잘 알고있었다. 카렐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넬 고른 게 그때문이야......자넬 믿네."
특정 세력이 아닌,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중립지휘관'을 원하는 카렐의 의도를 깨달은 베아트릭
스가 굳은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제비를 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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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이제 파트 10도 2회정도 연재할 분량밖에 남지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