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10화 (210/1,132)

< -- 210 회: Part 10. 시들은 드라세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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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결은 탈란 바툴 중랑장과 갈라크 도비치 중랑장입니다!"

탈라스 궁기병들과 북부기병들 사이에서 큰 함성이 터져나왔다. 각각의 출신지휘관을 지지하는 거의 광적인 응원에 탈란과 갈라크 모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세네피스 황후에게서 직접 창을 건네받은 갈라크는 격앙된 표정으로 그에게 힘있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각자의 말에 오른 두 사람이 창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개시!"

카렐의 고함소리와 함께 동시에 투창을 뽑아든 둘은 재빨리 서로를 향해 한발씩을 날렸다. 투창을 던지는 그 순발력은 전문가인 탈란 쪽이 한수 위였다. 힘을 실어 날아온 투창의 위력에 하마터면 낙마할 뻔한 갈라크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말았다. 반면 상대방의 빠른 대응에 놀란 상태에서 갈라크가 던진 투창은 그다지 정확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귀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상대방의 투창을 느끼며 탈란이 중심을 잃은 갈라크를 향해 창을 들고 즉시 돌진해들어갔다.

"어딜!"

허리의 탄력만으로 몸을 순식간에 곳추세운 갈라크는 돌진해오는 탈란을 향해 창을 거칠게 올려쳤다. 상대가 중심을 잃은 모습에 얕보고 달려들었던 탈란은 눈 깜짝할새 휘두른 상대의 반격에 그대로 턱을 얻어맞고 말았다.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휘두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북부인다운 놀라운 창솜씨였다.

"도비치 중랑장 승리!"

북부기병들이 창을 치켜들며 일제히 휘파람을 불었다. 탈란을 응원했던 탈라스 궁기병들은 탈란이 단 한합만에 상대에게 당하는 뜻밖의 결과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탈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아버지에게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갈라크의 놀라운 선전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세네피스 황후가 박수를 짝짝 쳤다.

"제길!"

이를 악문 탈란이 다음번 대결을 위해 나서는 베아트릭스를 힐끔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동부기병들 쪽에서 요란스런 괴성으로 자신들의 중랑장의 전의를 북돋워주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와 같은 탈라스 출신인 탈란이 패하는 모습에 힘을 얻은 그 슈트란 가 장교는 이미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베아트릭스의 등장에 환호하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탈라스 궁기병대 쪽에서 그를 아는 몇몇 오래된 기병들이 눈치를 보며 휘파람을 조금 불어주었을 따름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카렐을 힐끔 바라본 베아트릭스는 무슨 생각엔지 어깨에 달고있던 사이클롭스를 확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뭐야?"

베아트릭스의 주특기가 투창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사이클롭스가 투창 던지는 속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몇몇 사람들은 이미 베아트릭스의 이번 작전을 어느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개시!"

근위중랑장이 자신의 투창을 뽑아 어깨위로 치켜들었을 때, 베아트릭스가 던진 투창은 이미 그를 향해 매섭게 날아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어깨 위로 들어 던지는 투창을 그대로 옆에서 팔을 휘둘러 던지는,---마랄루에서 민간인 청년을 죽일 때 쓰기도 했던--- 베아트릭스 특유의 놀라운 기술이었다.

"악!"

쾅 하는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자신의 투창을 미처 던져보지도 못한 근위중랑장은 그 위력적인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사이클롭스가 있었다면 방패를 산산조각내기에도 충분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지근거리에서는 사이클롭스를 차고 던진 것과, 아닌 것과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잘 아는 베아트릭스의 순간적인 꼼수였다.

그대로 자리에 멈춰선 베아트릭스는 그에게 돌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한손에 투창을 던질 자세로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계속 싸우시겠소?"

베아트릭스가 쌀쌀맞게 물었다. 베아트릭스의 질문에 의아해하던 사람들의 궁금증은 이미 새빨갛게 변해 있는 상대의 얼굴에서 조금이나마 풀리고 있었다.

"제길,"

창을 뽑아들고 베아트릭스에게 다가가려던 그는 으윽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를 움켜쥐고 말았다. 중랑장의 부장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어깨관절 탈구입니다! 더이상 말을 탈 수 없습니다!"

만면에 웃음을 띤 카렐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박수를 짝짝 쳤다. 동부기병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이 투창도 던져보지 못한 채 너무나 허무하게 당하는 모습에 탄식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카렐이 베아트릭스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네피스 황후가 말 위에 올라있는 그 검은 전사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갈라크 도비치 중랑장과 베아트릭스 플라칼 경의 대결입니다!"

마지막 대결은 어쨌거나 북부와 동부의 대결이 되고 말았다. 탈라스 궁기병대 쪽에서 조금 전보다는 조금 많은 사람들이 베아트릭스에게 함성을 질러주고 있었고 '동부기병이 북부에게 질 수는 없다'며 동부기병들 중 몇몇도 베아트릭스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제국에서 그다지 알아주지는 않는 '남부기병 출신'이라는 사실에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갈라크도 그 위력적인 투창공격을 눈앞에서 목격한 후로는 이 막강한 상대에 조금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망할 남부 배신자 잡종년,"

갈라크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던 건 귀가 밝은 카렐 뿐이었다. 말을 몰고나온 갈라크는 여전한 모습으로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베아트릭스와 그다지 멀지않은 거리에 마주섰다.

"시작!"

카렐의 개시명령과 동시에 방금전처럼 투창을 뽑아든 둘은 서로를 향해 첫 공격을 날렸다.

"엇,"

깜짝 놀란 우베가 얼른 카렐을 돌아보았다. 베아트릭스가 던진 투창은 허무할정도로 맥없이 날아가 갈라크의 발밑에 떨어지고 말았다. 갈라크가 던진 투창을 힘껏 옆으로 쳐낸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창을 뽑아들고 앞으로 돌진해들어가기 시작했다.

"미쳤군,"

베아트릭스의 투창공격에 카이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베아트릭스의 투창실력을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말도안될 첫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렐은 입가에 웃음까지 띤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창으로 제대로 대결해보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방금전처럼 이겨봤자 창을 중시하는 북부기병 녀석들이 나중에 투창에만 목숨거는 반쪽기병이라고 씹어댈 게 뻔하니까."

그제서야 눈을 휘둥그레 뜬 카이두 경이 외손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원거리 공격을 중시하는 탈라스 유목민들은 상대적으로 근접전에 약점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상대가 근접전의 제왕이라는 북부기병이라면 베아트릭스의 선택은 자칫 꽤 위험할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두 역시도 깜박 놓치고 있는 것은 베아트릭스에게 검술과 창술을 가르친 그의 아버지 조지프 플라칼 경이 남부에서도 손꼽히는 기사였다는 사실이었다.

둘은 씩씩대는 말 위에서 서로의 날카로운 찌르기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옆구리를 거의 찌를뻔했던 갈라크는 능숙하게 돌려서 털어내는 상대의 빠른 창술에 밀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다시한번 반격을 시도해 얼굴을 찌르려던 그의 창이 뒤로 훌쩍 물러나는 말 덕분에 또한번 표적을 놓치자 상대의 놀라운 기마술에 갈라크 역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 썅!"

어떡해서든 결판을 내려는 갈라크가 베아트릭스의 창과 X자로 얽힌 채로 상대에게 최대한 근접해들어갔다. 거리를 두어봤자 기마술에 더 능숙한 상대방에게 빠른 움직임을 줄 뿐이었다.

"히야!"

갈라크의 접근에 베아트릭스가 괴성과 함께 말의 배를 뒷꿈치로 툭 치자 놀란 말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앞발을 치켜들고 벌떡 일어섰다.

"으, 악,"

말발굽이 눈앞을 스치자 순간 기겁을 하며 놀란 갈라크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고 말았다. 베아트릭스의 말이 폭주한다고 판단한 갈라크는 저 말 위에서 뒤로 굴러떨어질 베아트릭스의 모습을 통쾌하게 머리에 떠올리며 급히 창을 거두었다. 하지만 뒷발로 벌떡 일어선 말의 동작이 폭주가 아닌, 베아트릭스의 능숙한 '馬術'의 일종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채 1초로 걸리지 않았다.

"걸렸다!"

엔간한 기마병이라면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질, 벌떡 일어선 말 위에서 말 갈기와 고삐를 쥔 채 등자를 딛고 그대로 몸을 일으킨 베아트릭스는 말에 놀라 당황하고 있는 갈라크의 정수리를 뭉툭한 창끝으로 사정없이 내리찍어버렸다.

"아악!"

머리를 얻어맞고 뒤로 나동그라지는 갈라크의 비명소리와 함께 카렐이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베아트릭스 경 승리!"

동부기병들과 탈라스 궁기병 쪽에서 방금전보다는 훨씬 큰 소리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채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멍 하니 있던 갈라크는 패배를 인정한다는 듯 창을 내던지고 두 팔을 옆으로 벌려보였다.

"제길, 할 말이 없군."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인 갈라크는 말에서 내려선 베아트릭스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카렐이 입가에서 번지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카토의 손에 들려있던 갑주와 망토를 헐떡이고 있는 베아트릭스에게 힘있게 내밀었다.

"지금부터 근위경기병단 슬레이프니르의 단장은 여기있는 베아트릭스 바툴 플라칼 경이다! 이제 너희들의 명령권자다! 알겠는가!"

카렐의 고함소리에 3천여 기병들이 새 지휘관을 환영한다는 듯 일단 함성을 올렸지만 그다지 열렬한 것이 못된다는 건 카렐도, 그리고 새 지휘관인 베아트릭스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훗, 결국 또 당했군,"

세네피스 황후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흙먼지투성이가 되어있는 갈라크에게 다가가 수고했다는 듯 어깨를 두들겨주고는 부단장의 갑주와 망토를 친히 내려주었다. 당연히 화를 낼 줄로 알았던 황후의 다정한 태도에 감격한 갈라크가 황후의 앞에 무릎꿇으며 또한번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비록 이번에는 졌지만, 그는 베아트릭스에 이어 슬레이프니르를 이끌 제 2인자였고, 저 '남부 배신자 잡종년'이 언제든 약점을 드러낸다면 그 자리를 노릴 수 있는 위치임을 황후는 물론이고 갈라크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우와, 정말 멋있었어요, 그렇게 번쩍 일어선 말 위에서 창을 내려찍다니,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할수가,"

또다시 베아트릭스의 말을 얻어타게 된 우베가 입에 침을 튀기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베아트릭스가 갑주를 입고있는 덕에 그리 '광분하던' 배와 옆구리 근육을 못만지게 되었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잘 어울리는군."

베아트릭스의 옆에서 말을 몰아가던 카렐이 그의 새 갑주와 망토를 위아래로 살피며 웃으며 말을 건넸다.

"플라칼 가에 있을때보다 더 멋진걸."

"감사합니다."

고개를 조금 떨군 베아트릭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조금 앞에서는 또한번의 패배로 시무룩해진 탈란을 아버지 카이두 경이 위로해주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조금은 난처한 듯 연신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들이 저를 잘 따라줄지 의문입니다. 북부기병들은 지금까지처럼 갈라크 도비치 부단장을 대장처럼 따를테고, 동부기병들은 남부 피가 섞인 절 원수취급할텐데....."

베아트릭스의 탄식섞인 한마디에 카렐이 그의 등을 탁탁 두들겨주며 대답했다.

"내 그래서 자네를 샤레이가 아니고 이곳 탈라스에 데려오지 않았나. 서부제후군들을 상대로 팀웍도 다지고 부하들에게서 자네 능력과 충성도 인정받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질테니 염려말게나."

말의 속도를 조금 늦춘 카렐은 뒤에 조금 처져서 오고있던 어머니 세네피스 황후에게 다가갔다.

"말을 잘 타시는군요."

"고맙구나."

어느새 평소같은 표정으로 돌아온 세네피스 황후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키큰 백마에 올라앉은 황후는 제국 최고의 무장이었던 오르마즈 경의 친동생답게 꽤 능숙한 몸놀림으로 말을 제어하고 있었다.

"네가 고른 저 여자.....대단하더구나."

"제게 큰 힘이 될 인물입니다."

"내가 저 여자의 눈빛을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그 이상도 되겠더구나."

황후의 놀랄만큼의 눈썰미에 카렐이 순간 긴장하고 있었다. 사악한 미소를 지은 황후가 빈정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쩌냐. 아메스처럼 대단한 가문과 학벌을 갖춘것도 아니고......네페티 그년처럼 깜짝놀랄 미모나 세력을 가진것도 아니니.....후훗, 보잘것없는 출신에 거칠고 무뚝뚝하고 생긴것도 형편없는 여자가.....정말 웃겨 기절할 노릇이군."

"다시말씀드리지만 제게 힘이 될 사람입니다."

카렐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말했지만 앞서가는 베아트릭스를 바라보는 황후의 시선은 지독한 경멸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 잘 안다. 어찌보면.....쓸만도 하겠구나."

행렬은 어느새 슈카른 계곡 한중간의 바툴 가 종가에 들어서고 있었다. 말을 세운 세네피스 황후가 카렐과 카이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새 단장이 뽑힌 걸 축하하는 뜻에서......오늘밤 술자리를 한번 가졌으면 하오. 카이두 경."

베아트릭스의 선임을 축하한다는, 어머니의 뜻밖의 태도에 카렐이 또한번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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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우스 3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새 후계자 선임'을 위해 계속해서 황제를 압박해오던 페로에게는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80년 전 행방불명된 수우는 그가 한때 제위 후계자였다는 사실조차도 사람들 머릿속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었고 문제있는 다섯 태자의 탄생 후 제대로된 태자도 결국 태어나지 않으면서 후계문제를 놓고 제국의 혼란은 이미 극에 달해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후계자' 선임의 필요성을 황제에게 계속 강조해오던 페로는 이미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는 솔깃한 답변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페로가 고집하는대로 '후계자 지명 후 부마책봉'인지, 황제가 원하는대로 '부마책봉 후 후계자지명'이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었다.

황제나 황후가 그다지 신용있는 인물이 못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던 페로는 부마만 되어주면 후계자 지명을 해주겠다는 황제의 말을 털끝만큼도 믿지 않았다. 부마책봉 문제에 관해 지금까지 70여년을 꿋꿋이 버티어온 페로는 후계자지명 후에야 태자와 결혼해주겠다는 주장에서 단 한 발도 물러나지 않고 있었고, 이제 그 성사가 코앞에 와 있었다.

기원 416년, 신년행사의 일환으로 서부제후지역을 방문하려던 황제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바로 이 '대체후계자' 선임을 바로 코앞에 둔 예민한 시점에서였다. 그리고 그의 일생일대의 꿈을 눈앞에서 놓치게 된 페로의 절망은 말하나마나한 노릇이었다. 물론 페로 스스로는 '저 인간도 죽긴 죽었으니 이제 새 황제에 오를 기회로군'하며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혼란사태에 직면한 페로는 일단 '비상시 특례조항'을 내세워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베흔이 이끄는 근위대는 페로가 예상했던대로 수우를 다시 찾아다가 제위에 앉혀야 한다는, 옛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자 노릇을 해야 할 실리페 황후마저 남부의 자신의 별장에 은신해버리면서 양측의 대립은 팽팽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다 좋은데 넌 항상 왼쪽방어에 약하구나."

동기 가디언과 대련을 하던 포프를 줄곧 지켜보고있던 카렐이 조금 걱정스런 투로 말하고 있었다.

"아직 실전경험도 한번도 없는 널 데리고 재산전에 나가시겠다니......"

"잘 할수 있을겁니다. 주인님이 제 실력을 높게 인정하신 모양이예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포프를 바라보며 카렐은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파악된바로 녀석 가디언은 12등급까지 있다. 섣불리 덤벼서는 안된다."

"누님이 제 실력은 최고라고 하셨잖아요."

아직 어려서인지, 아니면 넉살좋은 네피를 그대로 닮아서인지 곧 있을 재산전 출진을 앞두고도 포프는 별로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귀여워보이는 얼굴에 날씬한 체형의 포프는 절세미모를 자랑하는 쌍둥이 누이 솔과 마찬가지로 우람한 거구의 친아버지 네피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었다.

포프 녀석이 감금상태나 다름없는 수련장을 벗어나 정식 가디언으로 배치되는대로 네피가 있는 대사막으로 쌍둥이 남매를 함께 탈출시키려 했던 카렐은 포프의 데뷔전이 하필이면 같은 가디언들과 싸워야 하는 '재산전'이라는 말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인 페로가 50등급의 풋나기 포프를 수석가디언인 자신과 함께 데려간다는 말에 카렐도 하루종일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카렐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포프는 여전히 명랑하게 물었다.

"누님도 함께 가신다면서요?"

"그래."

짧게 대답한 카렐은 유난히 흐린 하늘을 올려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위험해지거든 누님이 지켜주세요."

"그러마......이제 슬슬 가야겠다. 따라와라."

선물받은 검은색 시미터로 열심히 몸을 풀고있던 포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준 카렐은 옆에 세워져있던 자신의 전용차에 올라탔다. 포프까지 태운 카렐의 차는 수련장을 벗어나 북쪽의 페로 관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어.....누님."

"왜?"

"동기들이요.......저하고 누님하고 이상한 사이 아니냐고 놀려요."

내내 무게를 잡고있던 카렐도 결국 피익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뭐라그랬냐?"

"'그러니까 나한테 개기면 죽어'하고 반격했죠."

"후훗,"

카렐이 웃음을 짓는, 참으로 보기어려운 모습에 포프 녀석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카렐에게 바싹 다가앉고 있었다.

"이건 누님한테만 드리는 얘기인데요, 동기들이 총리각하보다 누님이 더 믿음직스럽대요. 뭐, 누님 곁에만 있으면 절대 질 일이 없으니까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총리각하가 얼마나 뛰어난 분이신지 아직들 모르는구나."

카렐이 멀리 보이는 떡갈나무 언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수련장을 출발한 차는 몇분 지나지 않아 그다지 멀지않은 페로 관에 도착하고 있었다. 차를 서쪽 사랑채 앞에 세워놓은 카렐은 곧 이곳으로 올 주인 페로를 기다리며 잠시 조용히 앉아있었다.

"저어, 카렐 님 안에 계세요?"

서쪽 행랑채 쪽에서 나오던 솔이 카렐의 차를 보고는 달려와 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솔은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뺨까지 발갛게 상기된 너무도 밝은 모습이었다. 포프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한 카렐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섰다. 포프와 솔은 난생 처음으로---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나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훌쩍 커진 21살의 솔은 남쪽 안채에서도 최고로 꼽힐만큼의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단순하지만 세련된 흰 원피스를 입고있던 솔의 매력적인 모습에 카렐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볼 지경이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솔에게 카렐이 최대한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

"관리인 아저씨한테 오늘밤 접대 지시받고 오는 길이예요. 지금 몸단장하러가요."

솔이 또다시 '접대'를 하게 되었다는 말에 카렐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들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저녁에는 재산전을 끝내고 돌아오는대로 ---카렐이 함께 나가는 재산전이니만큼 페로도 결과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페로의 남극성당 동기들과의 모임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접대'를 지시받은 솔이 자신 앞에서 이렇게 밝은, 아니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보인 건 카렐로서도 처음 본 희한한 광경이었다.

"오늘 저보고 '특별한 분' 접대를 하래요."

솔이 두손을 꼭 모아쥔 채 명랑하게 말했다.

"누군......데?"

솔에게 행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렐의 마음속에 안도감과 함께 묘한 아쉬움이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 그분 잠자리 시중까지 들게 될 것 같아요. 누군지는 비밀이예요."

카렐을 올려보는 솔의 파란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머릿속이 아찔해진 카렐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이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것을 보아서 오늘밤 시중을 들게 될 사람은 솔이 어지간히 좋아하던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첫 관계를 카렐 자신과 하고 싶다며 그렇게 울며불며 매달리던 솔도 결국 이런 식으로 '첫 남자'를 맞게되려는 모양이었다. 카렐로서도 이렇게 좋아하는 솔에게 '잠자리 시중은 안된다'며 꾸짖을수도 없었다.

"그......그래......너도......이제 진짜 어른이 되겠구나......좋은 밤 보내거라......"

카렐에게 해맑은 미소와 함께 꾸벅 인사를 올린 솔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남쪽 안채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멍 하니 서서 허탈한 마음을 달래던 카렐은 북쪽 사랑채에서 다가오는 페로의 전용차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카렐 앞에서 멈춰선 페로의 허큘리스 승용차의 상석 문이 열렸다.

"타라."

먼저 앉아있던 페로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페로 가디언부대 내에서, 아니 제국 내에서 가디언이 주인과 함께 차의 상석에 나란히 타는 건 카렐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카렐을 옆에 앉힌 페로는 차를 옮겨타고 있는 포프의 얼굴도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사사한 녀석이라지?"

"예."

"실력을 한 번 보지."

카렐이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페로는 재산전에서 자신보다 포프를 먼저 내보내려 함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포프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에게는 사실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저녁에 다른 할일도 있으시니 그냥 제가 나가서 빨리 끝을......"

"또 참견인가?"

페로의 쌀쌀맞은 한마디에 카렐은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카렐은 페로가 자신과의 사이를 내심 회복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정작 페로는 그런 의사를 단 한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페로가 그 망할 자존심을 접지 않는 이상은 자신과의 관계는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카렐은 페로가 자신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다시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리며 이미 수십년을 보내온 차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엔지 열흘 쯤 전부터 카렐을 대하는 페로의 태도가 묘하게 차가와진것이 사실이었다. 아니, 굳이 카렐을 대하는 태도 뿐만이 아니고 그의 태도 전반이 꽤 이상했다. 사람들은 세나우스 3세의 서거로 신경이 곤두선 탓이라고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페로를 잘 아는 카렐은 '자신과 관련된 페로 스스로의 심경에'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근 며칠간 페로는 카렐과 눈도 맞추려 하지 않았고, 엔간해서는 말조차 걸지 않고 있었다. 페로가 뜬금없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 있었고, 어제인가는 다룬 녀석이 페로가 방에 웅그려앉아 혼자 우는 모습을 보았다는, 말도안되는 소리를 하다가 다른 특급 가디언들의 비웃음을 산 일도 있었다.

"네 어깨에 이상한 검은 점이 있었지?"

페로가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예."

페로가 또한번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페로 관에서 빠르게 멀어진 차는 3번 도시 남쪽의 황무지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해가 져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은 이제 곧 재산전을 벌이기 가장 좋은 시간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이 네 161번째 생일이지?"

"......예."

입술을 굳게 다문 페로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카렐의 생일 아침마다 사소하나마 선물을 챙겨주었던 페로는 이번 생일에는 무슨 이유엔지 선물은 고사하고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카렐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카렐은 그때까지도 솔이 오늘밤 접대할 '특별한 분'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페로의 제위등극을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자신에게 주어지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아니 저 귀찮은 네피의 핏줄인 솔을 함께 제거해버리기 위한 수작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멀리 황무지 중간에 오늘의 재산전을 기다리고 있는 테오라는 녀석의 차와 가디언들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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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프렐류드와 연결되는 이 이야기로 '근과거' 부분의 이야기는 끝이군요. 모레부터 이어질 파트 11에서는 오르마즈와 주페 태자가 다시 돌아오는 4차 혼란기의 상당히 옛날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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