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2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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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송신장치는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니 너무 접근하지 마시오."
꽤 험한 바위산맥 중간의 깎아지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차 한대 크기만한, 은색의 '쇳덩어리'는 불이 탄 흔적이 선명했다. 이런 기계장치 따위에는 워낙 둔감한 이들 유목민인지라 정체도 제대로 파악 못한 채 곧바로 제후인 바툴 가에 연락을 취했지만 그쪽으로는 크게 나을 바 없는 바툴 가 역시 서부의 유명한 하이테크 기술로 만들어진 저 정체불명의 기계덩어리를 사진만으로 알아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바툴 가에서도 급한대로 엔지니어가 나오기는 했지만 자신들과는 기술수준부터가 완전히 틀린 '서부 물건'임을 잘 아는 그들 역시 함부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쪽에 관해서는 제일 잘 알 카렐과 베아트릭스가 울며 겨자먹기로 나온 것도 이때문이었다. 그리고 종가에서 내내 황후의 눈치만 보며 풀죽어 지내던 솔도 잠시 바람도 쐴 겸 함께 나와있었다. 난생처음 카렐과 함께 외출을 나온 솔은 마치 어린애마냥 기분이 잔뜩 들떠있었다.
방호 장갑과 마스크를 쓴 카렐은 앞으로 기울어있는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셔틀이 매달려있는 바위 위에 올라서 그 쇳덩어리를 처음으로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제에길, 내팔자야. 명색이 내가 이런것들까지 다 챙겨야 하는거야?"
껍데기를 뒤집어본 카렐이 혀를 끌끌 차며 내용물 중 몇개를 끄집어냈다. 군데군데를 살펴본 카렐이 목과 눈에 연결된 할룩스를 작동시키며 말했다.
"라딘 4형 광역 무인정찰셔틀이군. 근위대에도 납품한 일 있는 쓸만한 물건이지. 훗, 영상장치도 타버렸고......기록장치도 타버렸고......뭐하나 남은 게 없군. 송신장치는 아직 조금 남았는데....이정도로 작동하지는 않겠고......별것 없는데?"
별로 위험할것이 없다는 카렐의 말에 이곳 주인인 쿠쉬 부족에서 나온 전사들 십여명이 절벽 위를 올려보며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근 부족민들 천여명에게 즉각 소개령을 내렸습니다. 다시 돌아와도 된다고 할까요?"
"아니, 그건 곤란할거다. 자폭장치가 제대로 작동한걸로 봐서 최소한 추락 전까지는 정상작동했다는 거니까......서부놈들도 이곳 정보를 어느정도는 파악했을거다. 훗, 그건 그렇고 이놈을 가져가 분석해야 할텐데 어떻게 옮긴다?"
카렐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무 한그루 없는 이 험준한 바위산 부근에는 셔틀이 착륙할만한 공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그래도 이 일행도 20스타디아가 넘게 떨어진 곳에 셔틀을 세워놓고 말을 타고 이곳까지 올라와 있었다.
"셔틀을 공중에 띄워놓고 케이블로 당겨올리죠."
"그러기는 절벽이 너무 높은데? 게다가 경사때문에 안돼."
베아트릭스의 제안에 고개를 가로저은 카렐이 위아래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앞으로 기울어져있는 이 위협적인 절벽은 위로도 0.5스타디아가 넘었고 카렐이 기어올라온 아랫쪽으로도 0.5스타디아가 넘어보였다. 베아트릭스가 그답지않은 장난스러운 투로 다시 할룩스에 대고 말했다.
"힘 좋으시니 줄에 매서 밑에 내려주시던가."
"베아트릭스 경. 난 기중기가 아니라구. 난....."
웃으며 더 말하려던 카렐이 움찔 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속을 뒤집었던 셔틀 내부에 급히 머리를 집어넣었다. 셔틀 안에서 발신되기 시작한, 그 묘한 신호가 가디언의 예민한 감각기에 포착되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카렐이 절벽 아랫쪽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빨리 달아나! 함정이다!"
"예?"
"내가 손대면서 발신장치 작동시작했단 말이다!"
장갑과 마스크를 벗어던진 카렐이 급히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카렐을 올려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솔에게 절벽에 매달려있던 카렐이 다시 외쳤다.
"곧 따라갈테니까 베아트릭스 경 따라서 먼저 셔틀에 내려가라! 솔!"
"하지만, 하지만......"
"전하께 걸르적거릴 뿐이니까 빨리 따라와!"
베아트릭스가 솔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마지못해 말에 다시 올라타면서도 걱정이 가득한 솔의 눈은 줄곧 절벽을 내려오고있는 카렐을 향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 난 뛰어서 쫓아갈테니까 시알피도 끌고가! 솔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힘있게 대답한 베아트릭스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서 달려내려가기 시작했다. 절벽을 급히 내려가는 카렐의 팔꿈치와 무릎 몇군데가 이미 벗겨져 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30층 높이에 맞먹는 0.5스타디아나 되는, 그것도 반대로 기운 절벽은 아무리 카렐에게도 금방 내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셔틀을 직감한 카렐은 서두르다가 하마터면 미끄러져 떨어질 뻔 하고 말았다. 베아트릭스가 이끄는 십여명의 일행들은 이 험한 바위계곡을 서둘러 말을 타고 빠져나가고 있었다.
십여기의 기병들과 2백여명의 정예 장갑보병들을 데리고 주변에 매복하고있던 라바니 경의 부장 사르키스 세호 장군은 바툴 가 녀석들이 '미끼'를 건드렸다는 신호를 받자마자 재빨리 셔틀을 이륙시켜 달려오던 길이었다.
"녀석들 되게 빠르군, 벌써 눈치챘다니."
그가 계곡 밖을 향해 달아나고 있는 십여기의 기마행렬을 바라보며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1소대는 녀석들이 나올 계곡 입구를 차단해라. 2소대와 기병들은 나와 함께 녀석들 뒤를 막겠다."
달아나는 적들을 앞서 치고나간 한 대의 셔틀이 계곡 입구에 백여명의 보병들을 풀어놓자 바로 그곳에서 베아트릭스 일행을 기다리던 바툴 가 셔틀이 깜짝 놀라 공중으로 이륙하고 있었다.
"젠장! 3스타디아 후방에 공중대기해라! 보병들을 돌파하겠다!"
베아트릭스가 투창을 치켜들며 할룩스에 대고 셔틀 조종사에게 악을 쓰며 외쳤다. 아직 말타기가 서툰 솔은 가까스로 그의 옆을 따라붙어 달리고 있었다.
"저, 전하께선 어떡해요!"
"네가 신경 안쓰는 게 그분을 돕는거다!"
베아트릭스가 눈을 부릅뜨며 외친 매정하기까지 한 말에 솔이 기겁을 하며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베아트릭스의 수신호를 받은 열 명의 쿠쉬 부족 전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그를 선두로 솔의 사방을 감싸며 돌격진형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바툴 가에서 나온 두 명의 엔지니어들이 그 뒤에 안전하게 자리잡았다. 셔틀에서 내려선 백여명의 장갑보병들과 5기의 기병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이쪽을 향해 미늘창을 치켜들고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수신호을 받은 쿠쉬 족 전사들이 손에 투창을 뽑아들었다.
"발사!"
열 한개의 투창이 창을 들고 앞을 가로막은 서부 보병들을 향해 엄청난 파괴력과 함께 일직선으로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예상대로 베아트릭스가 던진 한 발은 2열에 웅크리고 있던 보병대 소대장의 머리를 그대로 꿰뚫었고 나머지도 다섯 명 정도의 보병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적병들은 지휘관의 죽음과 이쪽의 매서운 투창공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일제히 중앙으로 다시 집결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저놈들!"
중앙의 보병들이 잠시나마 혼란에 빠질 것을 예상했던 베아트릭스는 적들이 전혀 흔들리지 않자 순간 당황하고 있었다. 그 날랜 움직임으로 보아 특별히 훈련받은 정예병들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의 투창이 다시 날아가 방금전과 비슷한 숫자의 적병들을 쓰러뜨렸지만 적병들의 저항은 생각외로 견고했다.
"제기랄!"
창을 쥐고 돌진하려던 베아트릭스가 하는 수 없이 말을 멈춰세웠다. 이대로 적들의 미늘창을 향해 돌격해봤자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후방에도 적입니다!"
쿠쉬 족 전사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뒷쪽의 상공에 멈춰선 적 셔틀에서 중무장한 보병 백여명과 기병 몇기가 케이블을 타고 우루루 몰려내리고 있었다. 계곡에서 양쪽이 막힌 채 고립된 베아트릭스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항복해라! 목숨은 살려주겠다!"
사르키스가 베아트릭스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굴 놀리나. 두번 항복하라니."
허탈하게 웃음지은 베아트릭스가 쥐고있던 창의 길이를 최대한 늘리며 측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는 쿠쉬 족 전사들도 창을 최대한 길게 뽑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솔! 쳐지지 말고 따라와!"
"예."
솔이 말 갈기에 몸을 최대한 붙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측면으로 돌아가는 길은 큰 바위들이 널린데다가 경사까지 가파른, 말로 달리기는 쉽지않은 길이었다. 적들이 이쪽까지 도망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서부 병사들이 황급히 이쪽으로 몰려오자 베아트릭스가 창을 쥐고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기병 선두 두 명이 베아트릭스가 휘두른 창에 얻어맞으며 제대로된 저항도 못해본 채 말에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내가 지킬테니까 달아나!"
계속해 몰려드는 기병, 보병들과 백병전을 벌이는 베아트릭스의 등뒤를 지나 솔과 쿠쉬 부족 전사들이 사막 쪽을 향해 결사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귀찮은 새끼들!"
창을 한 번 크게 휘두른 베아트릭스가 급히 말을 돌려 달아나려 했지만 어느새 다른 기병 두 명이 그의 옆까지 가로막고 있었다. 십여명의 보병들이 일제히 창을 겨누며 베아트릭스를 한쪽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바툴 가 녀석이다! 반드시 생포해라!"
베아트릭스의 말에 달린 늑대문양 방패를 본 사르키스가 멀리서 말을 몰아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궁지에 몰린 베아트릭스가 계속 말을 뒷걸음치게 했지만 어느새 그의 옆까지 쳐온 적 장갑보병의 창에 돋은 미늘이 그의 갑옷 한구석을 얽어들고 있었다.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한 베아트릭스가 온몸의 근육에 최대한의 힘을 가하며 처절한 마지막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으악!"
갑자기 베아트릭스의 한쪽을 막고있던 기병 한 명의 목이 공중으로 붕 치솟았다. 그리고 뒤이어 내리친 칼에 베아트릭스를 얽고 있던 미늘창까지 두동강나며 한쪽으로 날아가버렸다.
"빨리요! 나오세요!"
말머리를 돌려 베아트릭스를 구하러 달려온 솔이 피묻은 짧은 검을 쥔 채 베아트릭스에게 악을 쓰고 소리쳤다. 솔이 보여준 뜻밖의 모습에 베아트릭스가 약간 얼떨떨했지만 당장은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창을 휘둘러 기병 한 명을 더 쓰러뜨린 베아트릭스가 솔과 함께 서둘러 적의 방어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세이버나 장검도 아닌, 두세 뼘 남짓한 짧은 숏소드로 기병의 뒷덜미를 기습해 갑주로 가려진 목을 단번에 자른 솔의 힘과 순발력은 절대 보통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바보녀석들! 저런 계집애한테!"
사르키스가 분통을 터뜨리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빨리! 빨리 따라오란 말이야!"
베아트릭스가 자꾸 뒤처지는 솔을 보며 큰 소리로 재촉했다. 하지만 아직 기마술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는 솔에게 이렇게 경사진 길을 넘어지지 않고 달려 내려가고 있는 정도로도 충분히 벅찬 일이었다. 사르키스가 이끄는 6명의 서부기병들이 어느새 뒷덜미를 잡을 듯 가까이 따라붙어 있었다.
그 때, 뒷쪽에서 들려온 째지는 비명소리에 베아트릭스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기병들을 쫓아내려오던 서부 보병들 한쪽에서 큰 흙먼지와 함께 피바람이 솟구치고 있었다. 절벽을 내려온 카렐이 달아나는 부하들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건 또 뭐야!"
크게 놀란 사르키스가 잠시 뒤쪽에 신경쓰느라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기회를 잡은 베아트릭스가 솔의 말에 자신의 말을 바싹 붙이며 손을 뻗었다.
"이대로 가면 잡혀! 지금 기회니까 내 말로 옮겨타! 빨리!"
"하.....하지만....."
겁먹은 솔이 우물거리고 있었다.
"넌 가디언 혈통이잖아! 이정도는 가능해! 빨리! 내가 안아줄 테니까!"
베아트릭스가 솔의 어깨죽지를 꽉 움켜잡자 소스라치게 놀란 솔이 몸을 잔뜩 움츠리고 말았다.
"그, 그게 아니고....."
"빨리! 놈들이 따라오잖아! 옮겨타고 내 허리만 꽉 붙들고있어!"
"그 말이 아니고......저, 전......"
"빨리 오라니까!"
보다못한 베아트릭스가 말고삐를 놓고 두팔로 솔의 허리를 나꿔채 거칠게 잡아당겼다. 순간, 베아트릭스의 팔에 강제로 안긴 솔이 째지는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그래! 솔!"
솔의 몸부림에 기겁을 한 베아트릭스가 순간 비명을 질렀다. 거칠게 휘두르는 솔의 팔꿈치에 얼굴을 강타당한 베아트릭스는 솔의 벨트를 쥐고있던 손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이, 이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베아트릭스가 급히 말을 돌렸을 때 흙바닥에 나딩군 솔은 이미 뒤쫓아오던 서부 기병들의 발말굽 아래에서 딩굴고 있었다. 적에게 잡히는 건 접어두고라도 어쩌면 말굽에 채여 크게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길할!"
베아트릭스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변해버렸다. 기병들과 함께 달려온 사르키스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쓰러져있던 솔의 뒷덜미를 힘껏 밟고 칼을 겨누었다.
서부 보병들을 돌파해 빠져나온 카렐이 모래먼지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건 그때였다. 발밑에 깔아뭉갠 적의 '위험한 계집아이'의 발목 인대를 칼로 치고 생포하려던 사르키스는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카렐---바로 얼마 전 솔을 맡아달라며 자신과 어머니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왔던---의 모습에 자기도모르게 경악하고 있었다.
"솔!"
언덕 아래, 서부 기병들의 말굽 밑에 쓰러져있는 솔을 눈앞에서 본 카렐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피묻은 칼을 치켜든 그는 즉시 방향을 틀며 미친 듯 솔에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솔?"
사르키스가 발목을 자르려던 칼을 급히 거두었다.
"저놈 막아!"
사르키스의 명령에 서부 기병들이 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채 자신들에게 돌진해오는 저 무서운 검은 가디언에게 반사적으로 창을 내밀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적들의 발치에 쓰러져있는 솔을 본 카렐은 이미 반 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카렐을 쫓아온 2백여명의 서부 보병들이 등뒤에서 그를 향해 우루루 몰려들어오고 있었지만 카렐은 거의 아랑곳없이 기병들의 정면을 향해 무작정 돌진해들어갔다.
"전하! 안됩니다! 도망치십시오!"
베아트릭스가 카렐을 향해 말을 몰아들어갔다. 하지만 카렐은 앞을 가로막는 3명의 기병들을 그대로 박차고 뛰어넘으며 솔을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그새 사르키스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있던 솔을 결박해 말에 서둘러 싣고 있었다.
"이, 이런,"
사르키스에게 달려들려던 카렐의 앞을 2기의 기병이 또다시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을 거의 들이받듯 말에서 떨어뜨린 카렐은 솔을 실은 채 보병들 쪽으로 달아나고 있는 사르키스의 뒤를 다시 쫓아 달려갔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전하! 제발!"
수십개의 창이 달려오는 카렐을 향해 일제히 겨누어졌다. 하지만 창도 아닌 칼 하나만을 든 채 미친듯이 그들에게 돌진한 카렐은 창의 벽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거칠게 칼을 휘둘렀다. 그 충격에 족히 열 개가 넘는 창이 부러져 사방으로 흩어져버리고 있었다. 그 틈새로 미친 듯 돌진해들어가던 카렐의 옆구리에 긴 창 하나가 푹 내리꽂혔다.
"치워!"
카렐이 주먹으로 내리쳐 창을 부수어버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지만 뒤이어 두번째, 세번째의 창이 계속 카렐의 근육을 피로 물들이며 파고들어왔다. 보병들 뒤로 몸을 피하며 잠시 안심했던 사르키스는 눈에 광기를 품은 채 돌진해오는 카렐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썅! 비키란 말이야!"
온몸에서 피를 흩뿌리며 돌진한 카렐이 보병들을 무자비하게 도살하며 앞으로 계속 달려나갔다. 몸에 무려 네 개의 창촉이 박힌 채로 거칠게 휘두른 카렐의 카타나에 순식간에 세 명의 보병들이 토막나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마, 맙소사,"
카렐의 광기어린 돌격을 뒤에서 지켜보던 베아트릭스도 잠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1선에서 카렐을 막고 있는 100여명의 보병들 뒤에서 다시 100여명의 적 장갑보병들이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카렐을 저대로 놔둔다면 제아무리 잘난 '등급없는 가디언'이라도 고슴도치가 되어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길할!"
달아났던 열 명의 쿠쉬 부족 전사들에게 다시 돌아오라 손짓을 보낸 베아트릭스는 카렐을 쫓아 돌진해들어가기 시작했다. 기껏 여자 하나 때문에 카렐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스스로 빠져들게 놔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저 200여명이나 되는 보병들을 상대할 도리가 없었다. 한손에 투창을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베아트릭스는 함께 달리는 카렐의 말, 시알피의 등에 얹혀있는 가는 와이어 한 꾸러미---암벽을 타기 위해 가져왔던---를 발견했다. 다행이도 적 기병들은 사르키스 하나만을 제외하면 카렐의 손에 이미 죽었던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완전히 미친놈이야!"
마치 악귀같은 모습으로 돌격해들어오는 카렐의 모습에 경악한 서부 보병들이 뒤로 조금씩 물러나며 달려오는 카렐을 향해 들고있던 창을 마구 집어던졌다. 그 창들을 일부는 막아내며, 일부는 '몸으로' 받아내며 계속 나아가던 카렐의 등에 또하나의 창이 깊이 박히자 카렐도 결국 휘청 하고 있었다.
"허, 헉......"
온몸에 상처를 입은 카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결국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힘껏 던진 또하나의 창이 또다시 다시 카렐의 몸에 박히고 있었다. 손발이 묶인 채 말 위에 실려있던 솔이 가까스로 눈을 뜬 건 그때였다. 그는 온몸에 4개나 되는 창이 고슴도치처럼 박힌 채 피투성이가 되어 서부 보병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카렐의 모습에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가세요, 제발, 가세요!"
"목을 쳐! 이놈 목을 치란 말이다! 안죽잖아!"
지휘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멈춰버린 카렐을 막아서고 있는 보병들 중 그 누구도 섣불리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칼을 쥔 채 멍 하니 서 있던 카렐의 눈빛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그의 핏발선 눈동자가 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하다.....솔......더이상은......"
갑자기 다리가 꺾여버린 카렐이 앞으로 맥없이 휘청거리는 모습에 묶여있던 솔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저 미친 가디언이 혹시 찔러도 찔러도 죽지않는 악귀가 아닐까 하는 말도안되는 걱정까지 했던 사르키스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발사!"
서부 보병들의 관심이 온통 카렐에게 쏠려있는 사이, 말을 몰아 바싹 접근해온 베아트릭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크게 외치자 열 한 발의, 아니 열 발의 투창이 카렐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는 서부 보병들을 향해 직사로 날아갔다. 자신들을 향해 투창이 날아오는 모습에 이들 정예 보병들이 훈련받은대로 즉시 사방으로 흩어지며 방패를 치켜들고 몸을 최대한 낮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 대오 사이로 날아온 또다른 한 발이 '전혀 엉뚱한 표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사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악!"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묵직한 한 발의 투창은 보병들 사이에서 휘청거리고 있던 카렐의 허벅지 중앙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말머리를 휙 돌린 베아트릭스가 옆에 쥐고있던 카렐의 시알피 고삐를 최대한 힘을 주어 움켜잡았다.
"빨리!!"
육중한 저항감을 느낀 시알피가 잠시 움찔 하고 있었지만 평소에도 카렐을 싣고다니던 이 건장한 검은 말은 그 다리에 최대한의 폭발적인 힘을 주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악!"
공중을 한 바퀴 빙 돌며 바닥에 나동그라진 카렐이 다리에 투창이 박힌 채 무서운 속도로 말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가늘고 질긴 강선으로 시알피와 연결된, 베아트릭스의 투창은 땅에 질질 끌려가며 버둥거리는 카렐의 허벅지 근육을 단단하게 물고 놔주지 않았다. 이를 악문 베아트릭스가 눈물이 조금 맺힌 눈꼬리를 급히 닦아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앞쪽에 온통 신경을 쏟고있던 서부 보병들은 무언가 끌려가는 소리에 옆을 휙 돌아보았다. 베아트릭스가 던진 투창에 허벅지가 꿰인 카렐의 몸이 딴곳에 정신이 팔린 서부 보병들의 눈앞을 스쳐 무서운 속도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뭐야! 잡아! "
당황한 보병들이 흙바닥을 질질 끌려가는 카렐을 붙들려 쫓아나갔지만 '짐덩이'를 매달았어도 말은 말인지라 그들이 뛰어서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가 결코 아니었다. 모래바닥을 끌려가는 카렐의 한쪽 얼굴과 어깨가 온통 생채기가 나면서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투창이 박힌 허벅지도 상처가 벌어지면서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베아트릭스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전하! 전하!"
가까스로 셔틀에 도착한 베아트릭스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카렐을 꽉 껴안았다. 피가 흐르는 크고작은 상처만 족히 7개는 넘었고 무려 3개나 되는 창촉이 부러진 채 그의 몸에 박혀 있었다. 말에 끌려오느라 갈갈이 찢긴 뺨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 역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쓰러질 때 쥐고있던 칼만은 고집스럽게 그의 손에 남아있었다.
흐느적거리는 카렐이 말에 끌려온 충격에 의식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베아트릭스도 잠시 분간을 할 수가 없었지만 온통 피범벅이 되어있는 그 모습은 베아트릭스를 반 쯤 미쳐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맙소사, 제가, 제가......"
카렐을 무릎 위에 눕힌 베아트릭스가 피로 물든 그의 뺨에 미친 듯 얼굴을 부비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 하나 바라보고 여기에 왔는데......제 마음도 한번 표현 못해봤는데......저때문에....."
카렐의 가슴을 부둥켜안은 베아트릭스가 거칠게 울부짖었다. 순간 미친 듯 흐느끼던 베아트릭스의 어깨를 피에 젖은 큰 손이 갑자기 더듬었다.
"알고있네."
귀에 익은 쉰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버린 베아트릭스는 차마 고개를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그랬는지도.....다 알아......고맙네......."
힘겹게 말한 카렐이 천천히 고개를 뒤로 떨구었다. 그제서야 고개를 든 베아트릭스는 반쯤 뜨고있는 카렐의 흐려진 눈동자를 보고는 자기도모르게 그 목을 꽉 껴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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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떤 분의 부탁으로, 저녁에 한편 더 올립니다. 그래도 추천이나 코멘트 잊지않고 넘어가는거 아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