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3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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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셔틀에서 제가 했던 말은......그냥......못들은걸로 해 주십시오."
간단한 치료를 받고 겔에 누워있는 카렐의 옆을 지키던 베아트릭스가 꽤나 민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렐의 눈치를 힐끗 살핀 베아트릭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만......너무 놀라서 마음에도 없는 불손한 말을......"
베아트릭스의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카렐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오른쪽 얼굴 전부를 가린 드레싱은 이미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창에 찔린 몸은 엉망이 되어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지만 카렐은 지금까지 신음소리는 커녕 얼굴한번 찡그린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는 조금 넋이 나간듯한 풀린 눈으로 베아트릭스의 얼굴과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솔을 지켜주지 못한 건 모두 제 책임......"
"성치 않은 걸 알면서도 데리고나갔던 내 잘못이야......그자리에서 분별없이 굴었던 것도......명색이 태자라는 자가 여자 하나 때문에 그런 바보짓을 하다니......"
카렐이 지독한 후회를 참을 수 없는지 머리를 싸쥐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전하께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베아트릭스의 위로에도 카렐의 감긴 눈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더이상 자신의 위로가 힘이 되어줄 수 없는 것을 깨달은 베아트릭스는 힘없이 일어서서 카렐의 겔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 그의 등뒤로 카렐의 혼잣말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자네가 방금같은 말을 더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잠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베아트릭스는 입술을 깨물며 문을 열고 겔 밖으로 나섰다.
"앗,"
비단담요를 든 우베를 거느리고 카렐의 겔 앞에 서 있던 세네피스 황후는 하마터면 막 문을 나서던 베아트릭스와 부딪힐 뻔 하고 말았다. 북부 혈통 특유의 큰 키를 갖고 있는 세네피스 황후였지만 거구의 카이두 경 피를 물려받은 베아트릭스는 그보다도 손가락 하나 길이 정도는 더 큰 장신이었다.
베아트릭스를 똑바로 올려보던 세네피스 황후가 평소처럼 침착한 말투로 먼저 입을 열었다.
"40분쯤 전에 들어가더니......아직까지 이곳에 있던건가?"
황후의 놀라운 정확성과 기억력에 치를 떨며 베아트릭스가 머리를 급히 조아렸다.
"차후 슬레이프니르 운용방향에 관한 전하의 별도 지시사항이 있었사옵니다."
"훗......몸도 성치않으면서.....몸간수나 잘할 것이지....."
황후가 그 긴 속눈썹을 치켜뜨며 베아트릭스를 살짝 흘겨보았다.
"우베. 먼저 들어가있게. 담요는 태자 몸 위에 직접 덮어주게. 상처입은 데는 뭐니뭐니해도 부드러운 비단으로 감싸주는 게 최고니까......."
황후가 베아트릭스와 할 말이 있음을 눈치챈 우베가 얼른 겔 안으로 도망치듯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난생 처음으로 황후와 독대하게 된 베아트릭스의 등줄기로 순간 차가운 기운이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카렐과 놀랄정도로 닮은, 황후의 대단한 위엄과 미모, 그리고 그 밑에 보일듯말듯 흐르는 색기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내 자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태자는 정말로 매력적이지."
황후의 의도를 알 길이 없는 베아트릭스로서는 이순간 맞장구를 쳐야 되는 건지 아닌지를 잠시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걸 알아보지 못한 머저리같은 북부 귀족 계집들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그 예쁘고 잘나빠진 계집들 하는 짓거리을 보고나서 나도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되었거든."
베아트릭스는 아직도 뭐라 말해야 할지를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혼돈스런 표정을 짓는 베아트릭스를 바라보며 씽긋 미소를 지은 황후가 짧지만 놀랄만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가 원하면 내 도와주겠어."
"예?"
"태자의 은밀한 사랑을 받고싶다면."
순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은 베아트릭스는 황후에게 급히 인사를 올리고는 허둥지둥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두눈 멀쩡한 태자가 너같은 것을 퍽이나 좋아하겠군."
"의사가 왼팔은 가능하면 움직이지 말라하지 않았냐."
물컵을 집으려 생각없이 뻗던 카렐의 손목을 가볍게 내리누르며 황후가 말했다. 대신 컵을 집어든 황후는 카렐의 목을 껴안고 조심스럽게 물을 부어넣어주었다.
"2, 3일간 누워있으라 했으니......이제 내가 시간날때마다 네 곁을 지켜줘야겠구나. 내가 없을 때는 우베 자네가 태자 곁을 지키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겔 구석에 서 있던 우베가 고개를 납죽 숙이며 대답했다.
"남극성당은요? 내일은 돌아가셔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헤데론 그녀석은 지금쯤 내가 던져준 숙제 때문에 한참 속썩고있을게야."
카렐을 자리에 제대로 눕혀준 황후는 그의 몸을 감싸고있던 비단담요를 조심스레 여미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때 항상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솔의 부재를 새삼스레 절감한 카렐은 그 축축해진 회색빛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카렐의 이런 심정을 모를 턱이 없는 황후였지만 놀랄만큼 태연한 표정으로 말없이 딸의 손을 어루만져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젠 내가 네 빈자리를 모두 채워줘야겠구나."
황후가 카렐의 큰 손등에 말없이 뺨을 부비고 있었다. 하지만 중상을 입고 돌아온 카렐을 보며 졸도했던 황후가 눈엣가시같던 솔이 잡혀갔다는 말에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카렐은 잘 알고있었다. 아니, 내심 쾌재를 부르고 싶어하고 있음이 뻔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생각해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찾아와 자신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돌보아주고 있는 세네피스 황후의 손길 하나하나에는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있었다. 카렐은 자신의 손에 얼굴을 대고 있던 황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이 묘한 아이러니에 또한번 지독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황후가 자리를 비운 후에도 여전히 시무룩하게 누워있던 카렐은 한구석에서 책을 읽고있던 우베를 힐끔 돌아보았다.
"포로교환요구에 답변이 있었나?"
"대답이 없습니다."
"대답이 있건없건 계속 하도록 해......내 친전으로."
고개를 조금 갸웃거린 우베가 카렐에게 물었다.
"어차피 거절할것이 뻔하온대......차라리 상황이 조금 변한 후에....."
"솔이 내 안부를 걱정하고있을게야......"
카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카렐의 눈에 책보따리가 들어왔다. 이곳에 돌아온 이래 이것저것 챙기느라 책을 단 한번도 제대로 읽은 일이 없었다.
"책하고 독서대 좀 가져다주게. 내 등받이 조금만 올려주고."
카렐이 시킨대로 독서대를 눈앞에 놓아준 우베는 책보따리를 풀고 안에 들어있던 책들을 한권한권 끄집어냈다. 우베가 제일먼저 들어보인 책은 바로 얼마 전 황후가 읽으라며 선물었던 '암중어록' 제1권이었다.
"그래. 그거."
그 오래된 책에서는 220년이나 되는 시간의 간격을 말해주듯 눅은내가 풍기고 있었고 표지에 붉은색으로 찍힌 '절대금서-열람 금지' 라는 붉은 스탬프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독서대에서 한 장을 넘기자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由平大帝 第二太子 亂中言行錄' 이라는 문장과 함께 코리온을 선두로 공저자 4명의 이름이 순서대로 쓰여있었다.
몇 안되는 원본 중 하나였던 듯 저자들의 이름 밑에는 그들 각각의 친필 수결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것들 중에는 '대표저자 및 집필자'로 선두에 있는 코리온의 힘있는 수결이 단연 두드러지고 있었다. 드디어 책 본문을 펼쳐든 카렐은 코리온의 글씨체로 쓰여진 그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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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어머님!"
칼에 찔려 쓰러진 세나우스 2세에게 제일 먼저 달려든 건 다름아닌 주페 태자였다. 쓰러진 세나우스 2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오르마즈를 급히 옆으로 밀어낸 주페 태자는 자신의 손에 묻은 검붉은 피가 오르마즈의 것인지 황제의 것인지 잠시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이 망할 놈!"
뒤늦게 달려온 베흔이 플람베르쥬를 거칠게 휘둘러 암살범의 오른쪽 손목을 그자리에서 잘라내버렸다. 그리고 단검을 쥔 채 떨어져나간 손목은 왼쪽 팔꿈치를 베인 채 황제와 함께 쓰러져있던 오르마즈의 얼굴 위로 떨어져버렸다. 반사적으로 단검에 코를 가져간 오르마즈가 갑자기 비명 비슷하게 소리를 질렀다.
"독이다!"
그의 고함소리에 세나우스 2세를 껴안고있던 주페 태자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황제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누가보기에도 선명한 칼자국이 깊이 나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품에 안겨있던 황제의 얼굴에도 순간 극도의 공포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익!"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황제의 옆에 있던 세네피스 태자빈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베흔이 미처 보지 못했던 자객의 나머지 한 개의 칼에 왼쪽 갈비뼈 부근을 베이면서 그의 옆구리에도 조금씩 피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쓰러진 동생은 안중에도 없는 듯 다시 황제에게 달려들며 어머니를 멍 하니 안고만 있던 주페 태자를 옆으로 거칠게 떠밀어냈다.
"아무것도 안할거면 비키십시오!"
황제의 비단포를 즉시 이로 찢어낸 오르마즈는 쓰러져있는 황제를 끌어안고는 그 크지않은 상처에 거리낌없이 입을 가져갔다.
"위험해요! 누님!"
누나의 행동에 당황한 남동생 일라드가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오르마즈는 상처에 흐르는 그 검붉은 피를 거침없이 빨아들여 뱉어내고 있었다. 독이 번지면서 온몸을 엄습하기 시작한 고통에 황제의 신음소리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조금만 견디십시오! 폐하! 제발! 의사들이 곧 해독제를 가져올겁니다!"
오르마즈의 입은 황제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검에 함께 베였던 오르마즈도 왼팔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만하게, 제발......"
황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의 온몸이 심한 경련으로 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미 맹독이 신경계까지 번졌음이 확실했다. 황제의 옆구리에서는 더이상 검은 피가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이젠 이런 방법으로는 가망이 없음을 누구나 알고있었다.
"의사놈들 도대체 어딨는거야!"
어느새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오르마즈가 황제의 목을 끌어안은 채 사방을 둘러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런 오르마즈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황제가 이미 망가져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나를......널......배신......했는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황제의 죽어가는 얼굴을 망연하게 내려다보던 오르마즈가 오른팔에 힘을 주며 그 크지않은 몸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 황제의 어깨를 거칠게 껴안은 오르마즈의 입술은 황제의 귀 옆에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순간 고통에 겨워하던 황제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나마 빛을 뿜으며 갑자기 오르마즈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구급상자를 든 의사들이 뒤늦게 도착한 건 이때였다. 갑자기 눈자위가 뒤집어진 황제는 온몸을 비틀며 오르마즈의 오른손을 피가 날 만큼 꽉 움켜잡았다. 의사들이 황제의 온몸에 파이프를 꽂고 해독약을 주입하고 있었지만 황제가 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않았다.
"누님! 누님 팔이!"
반 쯤 굽은 채 이미 거의 마비되어버린 오르마즈의 왼팔을 그제서야 발견한 동생 일라드가 마치 비명처럼 소리를 꽥 질렀다. 꿇어앉은 자리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한 그의 눈도 어느새 핏발이 서면서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갈색빛 긴 눈썹에 눈물이 가득 맺힌 오르마즈가 짧게 중얼거렸다.
"그냥.....놔 둬....."
"안됩니다! 이대로는......"
카파키 가 남매들을 거칠게 헤치고 달려나온 토로 로버넬 경은 일라드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즉시 뽑아들고 오르마즈에게 달려들었다.
"필요없다니까!"
칼을 번쩍 치켜든 토로 경은 넋나간 사람처럼 악을 쓰는 오르마즈의 왼쪽 어깨를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힘껏 내리찍었다. 이미 독이 번져있는 오르마즈의 왼쪽 어깨 아래가 그의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통째로 잘려나가며 붉은 카펫바닥을 더 검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팔이 잘려나간 채로 잠시 온몸을 부르르 떨고있던 오르마즈가 결국 황제의 옆에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폐하! 폐하!"
암살범을 쓰러뜨린 베흔이 사람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달려든 건 그때였다. 뒤늦게 주입하고 있는 해독약은 황제의 고통의 시간을 연장시킨 것 뿐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호흡곤란이 찾아오기 시작한 황제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한 채 헐떡거리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더듬거리며 오르마즈의 목을 끌어안은 황제는 나머지 한손으로는 자신을 껴안은 베흔의 멱살을 꽉 움켜잡았다.
"오르마즈 경을.......반드시.....살려내고......자네가......주페를 지켜주게나......꼭.....약속해....."
검게 변한 황제의 입술은 무언가 더 알리려 하고 있음이 확실했지만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더이상 알아들을만한 말을 내놓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베흔은 황제의 마지막 유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한 6명의 태자들이 그 옆에 일제히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주페 태자와,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쓰러져있는 오르마즈를 마지막으로 돌아본 황제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황궁 대연회장 아스트라이아 홀은 순간 터져나온 탄식과 울음소리로 술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99년간 제국을 철권통치해온 이 위대한 황제가 오르마즈를 품에 안은 채 맞은 이 죽음의 순간에 품고있던 표정은 고통도, 후회도 아닌 묘한 편안함이 깃든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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