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15화 (215/1,132)

< -- 215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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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제야 제대로 만나뵙는군요! 샤자한 슈트란 각하!"

근위기병들과 보병들을 돌파해온 히르직스가 샤자한 공에게 창을 내지르며 달려들어왔다. 샤자한 공의 관도와 히르직스의 날렵한 창이 미끄러지듯 부딪히면서 소름끼치는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맹렬한 불꽃이 튕겨나오고 있었다.

"이 무엄한 놈!"

샤자한 공의 관도에 붙은 거대한 반월형 날이 어두운 밤하늘에 큰 궤적을 그리며 날았다. 저 무서운 창에 얻어맞으면 부상이건 뭐건 없이 그대로 죽음이라는 것을 히르직스는 잘 알고있었다. 관도를 가까스로 미끄러뜨려낸 히르직스가 특유의 순발력으로 즉시 창을 내질렀지만 노련한 샤자한 공 역시 즉시 말을 조금 움직여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히르직스가 놀리듯 소리쳤다.

"중늙은이 주제에 제법이시구려!"

현존하는 기병지휘관 중 최고의 관록을 자랑하는 샤자한 공은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에서 수명개조된 샤자한 공의 힘과 체력이 젊고 강건한 히르직스에게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는 건 뻔한 노릇이었다. 히르직스는 앞뒤를 잽싸게 오가면서 공격을 퍼부으며 저 '중늙은이'가 지치기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망할!"

히르직스의 기대대로, 몇 번의 공격으로 힘이 빠지면서 당황하기 시작한 샤자한 공은 주변에서 자신을 대신해 히르직스를 맡아줄 근위기병이 없는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 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샤자한 공의 견갑이 토막난 채 뒤로 멀리 날아가버렸다.

"아악!"

어깨를 찔린 샤자한 공이 급히 몸을 숙이면서 얼굴을 노리고 내지른 히르직스의 회심의 일격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하지만 비껴맞은 창에 그의 투구 사이트와 치크피스가 떨어져나가버리고 있었다. 저항불능이 되어버린 샤자한 공이 말 목을 껴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네 이놈!"

처음 들어보는 여자 목소리에 히르직스가 옆을 휙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이끄는 보병대 선봉에서 달려온 아메스가 그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또한번 '정신나간 짓'을 하고 있었다. 창 길이를 최대한 늘린 채 맹렬히 달려온 아메스는 샤자한 공의 옆구리를 찌르려던 히르직스의 겨드랑이를 표적으로 삼아 힘껏 창을 내질렀다.

"엇!"

불의의 기습을 당한 히르직스가 샤자한 공에 대한 공격을 급히 거두며 몸을 돌려 피했지만 귀에 거슬리는 끔찍한 마찰음과 동시에 그의 견갑에 깊은 홈이 그어져버렸다.

"썅! 제기랄!"

비록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갑옷에 제대로 난 흠집에 자존심이 상한 히르직스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는 샤자한 공에게 휘두르려던 창을 즉시 아메스에게로 향하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뭐하는 놈이냐!"

옆에서 휘둘러오는 아메스의 사모창을 어렵지않게 옆으로 쳐내버린 히르직스는 또한번 돌격해들어오는 이 무모한 녀석의 뒤통수를 창 손잡이 끝부분의 조그만 날로 후려쳤다. 지난번 다친 적 있던 바로 그곳에 또한번의 타격을 입은 아메스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말 옆으로 떨어지며 물이 고여있던 진창에 얼굴부터 처박히며 볼쌍사납게 나딩굴고 말았다.

"제길! 저 썩을 놈, 끝장을 보자!"

진흙투성이의 엉망이 된 몰골로 비틀거리며 일어난 아메스는 어질어질해오는 머리를 흔들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자신의 말과 어딘가 떨어뜨린 창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메스는 부근에 멈춰 서 있던 자기 백마에 기어오르려던 적 기병---자신과 마찬가지로 혼전중에 낙마한듯한---을 발견하고는 무작정 달려들었다.

"썅! 야, 이 씨발 말도둑놈아!"

아메스가 시미터를 뽑아들자 상대 역시 장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적 기병에게 달려든 아메스는 당황하고 있는 그에게 미친 듯 시미터를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숲 속으로 돌격하는 건 바보짓이야."

휘하 기병들을 풀어 숲 주변에 길게 장사진을 친 제네르는 적을 선제공격하자는 휘하 연대장들의 제안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희들이 답답하면 기어나올수밖에 없겠지. 그때도 경보병들을 숲에 깔아놓고 우리를 숲속으로 끌어들이려 할걸."

신중하다못해 소심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말투에 제네르의 원래 스타일을 잘 모르는 동부 기병장교들이 잔뜩 불만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숲속에서 붙어 싸우는데는 덩치크고 힘좋고 단병기 잘 쓰는 탈라스 툰드라 수렵족 경보병들이 뭐니뭐니해도 최고지. 암, 그렇고말고."

제네르는 아예 싸움 따위는 할 생각도 없는 듯 창만 만지작거리며 희희낙낙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숲 속에서는 적들이 한참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듯 불빛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지만 제네르는 짐짓 관심도 없는 듯 옆에 서있는 발리와 농담따먹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2차 혼란기때 그놈들 8백명이 코라산 산악에서 저 잘난 남부보병 9천을 때려잡았다는 거 혹시 아나? 하여간 무서운 놈들이라니까. 덩치들은 죄다 이따만해가지고 도끼를 무슨 단검같이 휘둘러대는데......"

"하지만 그놈들은 지금 없지않습니까. 저희로서 어떻게든 저녀석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저희들이 먼저 기어나올거라니까 그러네. 불리할때 굳이 싸울 이유가 없지않나?"

동부 기병중대장의 참견을 넌즈시 무시하며 제네르는 종자가 내민 과일주스병에 입을 가져가고 있었다.

"저 망할 겁장이새끼들!"

제네르가 이끄는 동부 기병들의 선제공격만 기다리고 있던 2기사단장 릴라크 예리노프는 분통을 터뜨리며 숲 남쪽을 에워싼 채 이쪽을 바라만보고 있는 적군들을 째려보았다. 숲 남쪽에 산개한 5천여 경보병들과 5천여 중장보병들은 나무 위에서, 혹은 미리 파 놓은 함정이나 나무 뒤의 풀숲에 몸을 감추고 적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저 빌어먹을 적 기병들은 말 위에 우두커니 선 채 이쪽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우리 쪽에서 먼저 나가서 적을 끌어들일까요?"

"안돼."

부장의 제안에 릴라크가 딱 잘라 대답했다.

"녀석들 우리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어. 나갔다가는 괜히 목숨만 잃는다. 녀석들은 낮에 저희네 중군 공성전할때 측면경계하느라 우리보다 지쳐있는 상황일테니.....우린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자구. 기다리다가 지쳐서 먼저 쳐오던가 제풀에 나가떨어질테니......그때 공격해도 늦지 않지."

크게 하품을 한 제네르는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을 올려보며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이봐, 우리 기사단 4중대하고 동부 중장기병하고 경기병들 절반은 말에서 내려서 잠깐들 자라고 그래. 날이 추우니까 갑주는 그대로 입고 말 옆에 누워서 그냥 자."

"예에?"

휘하 병력의 무려 절반에게 잘 것을 명령하는 대장의 기가막힌 말에 장교들이 일제히 경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 앞에서 제네르가 놀랄만큼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말 위에서 어중간하게 조느니 아예 제대로 푹 자는 게 낫지. 당직병들만 남겨두고 다 자. 안자는 놈들은 이마빡 한대씩 까줘."

이런 희한한 스타일의 지휘관을 단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동부 기병장교들은 그런 제네르에게 반신반의하면서 마지못해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다시 숲 쪽으로 태연하게 시선을 돌린 제네르가 입가에서 낮게 중얼거리고 있는 소리를 들은 건 바로 옆에 서 있던 발리 한 명 뿐이었다.

"누가 이기나......두고보자."

철저하게 '현실적인' 양측 지휘관 사이의 신경전은 서로간의 인내심대결로 변해가고 있었다.

"정말 귀찮은 놈이구나!"

딸이 낙마하는 모습에 기겁을 하고 달려온 페로가 결국 또다시 히르직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지난번 루사에서 매운맛을 본 이후로 절대 이놈과는 싸우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던 페로였지만 위험에 처한 딸의 모습을 본 페로에게 그런 다짐 정도는 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부상을 입은 샤자한 공이 후방으로 실려가면서 이제 전군을 그가 지휘해야 할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괴물같은 녀석에 비하면 자신이 창술에서 한수 아래임을 잘 아는 페로는 머릿속에서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 풋나기새끼!"

히르직스 특유의 그 빠르게 내지르는 찌르기 공격에 잽싸게 뒤로 물러난 그는 짐짓 밀리는 척 계속 뒷걸음치며 그를 계속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히르직스는 기병들의 난전 사이를 가로질러 그의 측면으로 빠르게 접근해들어오는 '더럽게 빠른' 보병 한 명을 한 발 앞서 눈치챌 정도로 충분히 눈치빠른 사람이었다.

'가디언이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히르직스가 궁지에 몰린 페로를 놔둔 채 급히 말을 돌렸다. 등뒤에서 뛰어올라 히르직스를 기습하려던 다룬은 적이 먼저 달아나버리자 허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젠장할,"

다룬이 칼을 떨구며 중얼거렸다. 사방을 둘러보며 딸의 모습을 애타게 찾던 페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메스는 어디있지? 아메스! 아메스!"

혼전중에 동부연합군 좌군 최후미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온 이 5천의 보병대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않았다. 정연한 행군대형을 이룬 이들 보병들은 저정도의 갑주와 무장을 입고도 오르막길에 이런 기동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엄청난 체력을 자랑하며 본진 서쪽을 빙 돌아 속보로 나아하고 있었다.

최대한 길이를 줄여 등에 짊어진 장창은 물론이었고 행군시에 당연히 앞장세워야 할 검은색 군기까지도 허리 아래로 떨군 채 그들의 소속과는 하등 관계없는 하크로딘 가 깃발을 들고 접근하던 이들의 눈에 드디어 마랄루 요새 서쪽의 언덕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곳에 있던 히르직스의 기병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으니 얼마 안되는 보병들과 약간의 경창기병이 남아있는 지금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도 동부제후군 좌군과 사령부, 그리고 그곳을 행해 돌격해들어간 히르직스의 1만 기병들과의 숨막히는 대결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길, 이렇게 힘들 줄이야."

보병들과 함께 걸어서 행군해온 동부 제4제후 나람 칼리 눌레딘 부인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를 둘러싸고있는 우람한 체구의 병사들의 입에서도 거친 숨소리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그 특유의 크고 건장한 체구와 뾰죽한 턱과 코를 한 이들 용사들은 모두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거칠기 짝이없는 북부 용병들이었다. 이들의 등에는 북부인들의 주특기로 손꼽히는 창이, 허리에는 이들 북부인들의 성년의 상징인 화려한 무늬의 타바진 손도끼가 하나같이 매여져 있었다.

"3부 능선까지 이동하고 방진형성한다."

"예."

나람의 명령에 용병대장이 힘있게 대답했다. 비밀리에 움직이는 이들은 발소리 외에는 단 한마디의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적들 역시 이정도 보병대의 이동은 간파하고 있을것이 확실했지만 중요한 건 스캐너는 보병대의 '수준'까지는 잡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용병대장이 나람에게 낮게 속삭였다.

"언덕 위의 보루에 적 중장보병 3천여명과 경장 창기병 2백 정도가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잘난 중장보병 믿고 천하태평이시군."

얼굴가득 비웃음을 품어보인 나람이 용병들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5백명씩으로 짜여진 정연한 대형을 유지한 채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 이들의 앞에 보루에서 이미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는 남부 중장보병들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이쪽의 정체를 모르는 듯, 아니, 보통의 동부 중장보병으로 생각했는지 그다지 긴장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전혀 엉뚱한 군기를 든 채 무기도 감추고 행군한 건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언덕을 걸어올라가는 북부보병들의 방진이 천천히 그 모습을 마름모꼴로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견고한 방진을 이룬 남부 중장보병들은 느린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오는 '동부 보병'들을 아직까지는 비웃음섞인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 뒤에서 함께있던 2백여 남부 경창기병들이 우회해 측면을 치려는 듯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구 착용한다."

5부 능선을 넘자 나람이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행군 도중에는 답답한 장애물에 불과한 투구를 지금까지 등에 달고 온 이들은 낮은 톤의 나팔소리에 일제히 보병용의 튼튼한 투구를 머리에 눌러썼다. 이쪽의 임전태세에 남부 보병들이 방패를 앞세우며 언덕 아랫쪽을 향해 속보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적 기병들 역시 측면을 향해 말을 달려오기 시작했다.

"거창!"

검은색 깃발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치켜오르며 함께 울린 나팔의 날카로운 울림에 그 긴 장창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속보로 달려내려오던 남부 중장보병들과의 거리는 채 1스타디아도 되지 않았다. 돌격해오던 적 보병들이 순간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뒤이어 울린 긴 나팔소리에 선두 5열의 창이 동시에 앞으로 기울어지자 사방으로 빽빽한 창을 내민 그 유명한 돌격진형 10개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돌격!"

그간 숨죽이고 왔던 나람의 큰 고함소리에 이들 오천명의 북부용병들은 언덕이 날아갈듯한 어머어마한 함성을 올리며 불과 3천명으로 이루어진 남부 중장보병대를 향해 짓쳐올라가기 시작했다.

"우와, 거 참 볼거리네."

숨어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이납이 몸을 비틀어 풀며 적진 쪽으로 서둘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절벽 밑에서 튀어나온 존재에 놀란 보루 경비병들과 낮은 철망, 대마 장애물들으로 이루어진 보루 장벽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담을 밟고 가볍게 훌쩍 뛰어넘어 안에 들어선 자이납은 한쪽에 세워져있던 빈 말들 중 한마리에 잽싸게 올라타고 보루의 서쪽 철문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놈 잡아!"

아직 보루에 남아있던 적 경비병들이 자이납에게 일제히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일단 여기까지 교전이 벌어진 이상 들키건 말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등에 메고있던 화극을 움켜쥔 뽑아든 자이납은 덤비는 경비병들을 모조리 베어버리며 보루 정문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1열을 무너뜨려!"

용병대장의 거친 고함소리가 쩌렁 하고 울리면서 5천의 북부용병대는 비교적 얇은 방진을 치고 내려오던 남부보병진 곳곳을 찢어발기듯 파고들어갔다. 장창을 앞세우며 마치 악귀같이 그 거구에서 뿜어나오는 힘으로 거칠게 밀고들어오는 기세에 눌린 남부 보병들이 미처 진형을 추스릴 새도 없이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휩쓸려 쓰러진 남부 병사들에게는 악을 쓰며 밀어붙이는 북부 용병들의 무자비한 발길질 그리고 그 후위 보병들이 휘두르는 잔혹한 도끼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1, 2, 3대대는 적 보병을! 우측면 4 대대는 기병을 붙들어두고! 5대대는 나와 함께 적 보루로 무조건 돌격한다!"

보병들과 함께 선 나람이 직접 깃발을 휘두르며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2백여 경장 창기병들이 우측면을 돌아 기습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정연한 대형을 이루고 있는 4대대 천여명의 장창병들의 기세에 섣불리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창기병 선두에서 달려오던 백여기의 기병 중대에게 짐짓 물러나는 척 길을 열어준 이들 보병들이 그 즉시 퇴로를 막아버리고 사방에서 창으로 이들을 몰아붙이는 노련함까지 발휘하자 전우들이 포위당한 채 하나하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공포에 휩싸이고 있었다.

"5대대 돌진!"

제일 후위에서 전세만을 살피던 천여명의 용병들이 직접 창을 움켜쥐고 앞장서는 나람을 선두로 흔들리고 있는 남부 보병들의 팔랑크스 사이를 꿰뚫으며 비어있는 보루를 향해 무섭게 달려올라가기 시작했다. 본대에서 떨어진 천여명의 병력이 자신들을 뚫고 보루로 쳐올라가자 남부 중장보병들의 혼란은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에이씨! 귀찮은 놈들!"

북부 용병들이 보루까지 쳐오는 모습에 서둘러 문을 잠그던 남부 병사들은 북쪽에서 화극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달려온 웬 여자가 휘두른 화극에 혼비백산해 달아나고 있었다. 문을 잠그던 병사들을 쫓아낸 자이납은 돌격해올라오는 천여명의 북부 용병들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주려 했지만 잠기지도 않은 이 철문을 친절하게 열어줄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엑,"

굉음에 깜짝 놀란 자이납이 얼른 말을 뒤로 돌렸다. 그다지 크지 않은 요새문을 아예 산산조각내고 짓밟으며 폭발적인 기세로 몰려들어오는 용병들의 기세에 자이납도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1중대는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입구를 지켜라!"

대대장의 명령에 6백여 용병들이 즉시 창을 앞세우고 적들을 차단하기 위해 뒤로 돌아섰고, 창을 다시 등에 돌려메고 손에손에 도끼와 방패로 바꾸어쥔 나머지 용병들은 이십여명 단위씩 사방으로 흩어지며 보루 안에 남아있는 얼마 안되는 남부 보병들을 닥치는대로 참살하기 시작했다.

남부 기병들이 자리를 비운 이 서쪽 언덕의 요새는 나람 휘하 북부 용병대들의 믿기지않을 돌격에 눈깜짝할새 동부연합군의 손에 넘어가버리고 있었다.

서쪽에서 달려온 남부 경창기병 2천 5백명과 동쪽에서 달려온 동부 유목민 중기병 3천이 차례대로 합류하면서 동부연합군 좌익과 사령부에서의 싸움은 더 커져가고 있었다.

"서쪽 보루를 빼앗겼습니다! 적 북부 용병대입니다!"

뜻밖의 보고에 동부연합군 사령부를 맹렬히 몰아붙이던 히르직스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바로 자신들이 있던 그곳이 적에게 빼앗긴 것이었다.

"이런, 걸려들었다......"

결국 동부연합군 좌군은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 확실했다. 스코프 배율을 최대한 높여 바라본 서쪽 언덕의 보루는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져있었고 7, 8부 능선에서 교전을 벌이던 아군 중장보병대와 몇 안되는 기병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채 허둥지둥 마랄루의 요새로 도망치고 있었다. 적들이 남부 기병을 이렇게 깊숙히까지 끌어들인 속셈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히르직스가 큰 소리로 물었다.

"숲 쪽에 릴라크 경의 2기사단 상황은?"

"적 우군과 여전히 대치중입니다. 적들이 함정에 말려들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퇴각할 곳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적 좌군 공격을 계속해야할지 물러나야할지 총사령관인 헤즈의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그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오늘밤의 기습을 명령한 그 뚱땡이녀석도 지금의 상황에 꽤나 당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적 좌군을 거의 무너뜨릴 뻔 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적 우익에서 건너온 유목민 중기병 3천이 적군에 추가로 합류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어려워져가고 있었다. 헤즈 녀석의 명령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히르직스 경은 적 좌군을 계속 몰아붙여 붕괴시켜라. 릴라크 경은 2기사단과 중장보병 5천을 이끌고 숲에서 빠져나가 전진해서 적 우군을 치도록."

"썅! 미쳤군! 2기사단은 움직이면 안되는데!"

'계속 몰아붙이라'는 헤즈의 무리한 명령에 히르직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말에 능수능란한 동부기병들이었지만 땅바닥도 아닌 말등에 누운 채 저렇게 편하게 자고 있는 사람을 본 건 난생 처음이었다. 등에 달린 망토를 돌돌 말아 머리 뒤에 고인 제네르는 안장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투구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전장의 상황 따위는 딴세상 일인 듯 한쪽 다리까지 축 늘어뜨린 채 세상모르고 쿨쿨 잠들어 있었다. 발리가 제네르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단장님. 적들이 움직입니다. 시로 대장님의 연락입니다."

순간 눈을 번쩍 뜬 제네르는 얼른 안장 위에 자리를 잡고는 물 몇모금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적 제2기사단. 추정병력 3천5백. 단장은 릴라크 예리노프. 플라칼 가 종장의 6번째 며느리라고 합니다. 중장보병 병력은 5천정도. 경보병들은 숲 안쪽에 계속 매복해있는 모양입니다."

"알았다."

침착하게 대답한 제네르가 창을 움켜잡았다. 그는 휘하 중대장들과의 통신을 열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숲에 진입하지 마라. 알겠나? 명을 어기는 녀석은 즉결처분하겠다."

"알겠습니다."

중장기병대 선두에 서 있던 제네르는 점점 가까와오는 말발굽소리를 느끼며 투구를 꾹 눌러썼다. 그리고 단장을 따라 그의 뒤에 도열해 선 2천여 슈로 기사단원들 역시 투구를 눌러쓰며 전의를 다지는 뜻에서 박자를 맞춰 가슴을 탕탕 두들기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 오는 말발굽소리 특유의 진동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보병은?"

제네르가 발리에게 나즈막히 물었다.

"전면에 중장기병, 후열 중장보병입니다."

"경기병 1연대 좌익! 2연대 우익!"

제네르의 명령과 동시에 잠자리 정리를 마친 경기병들이 일제히 천 명씩 중장기병대의 양익으로 흩어졌다. 짧으나마 돌아가며 한숨씩 자고 난 기병들의 눈에는 총기가 되살아나 있었다.

"나옵니다!"

발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숲의 나무들이 요란스럽게 떨리자 중장기병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잔뜩 상기되어가고 있었다. 기수의 창이 높이 올라가자 기병들이 일제히 가지고있던 긴 창을 겨드랑이에 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돌격!"

숲에서 뛰쳐나온 릴라크의 날카로운 고함소리는 3천 5백여 플라칼 가 중장기병들이 몰려나오는 말발굽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양익에서 대기중이던 경기병들이 선두의 남부 중장기병들을 향해 일제히 투창을 쏟아냈다. 제네르 역시 상대의 기세에 뒤질세라 팔을 앞으로 기울이며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뒤이어 남부 중장보병 5천여명이 그 특유의 견고한 대형을 이루어 발을 맞춰 몰려나왔다. 3천의 중장기병, 2천의 경기병으로 이루어진 동부와, 3천5백의 중장기병, 5천의 중장보병으로 이루어진 남부와의 대결은 숫자만으로는 어느쪽의 승리도 예상할 수 없는 팽팽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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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거나 손볼 때 항상 옆에 적당한 음악을 틀어놓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 씬들에는 '테마곡(?)' 비슷한 게 있어서 해당 부분 편집할 때 옆에 틀어놓곤 합니다. 저도 코리온하고 비슷해서(?) 글 쓸 때는 거의 머릿속의 상상에 휩쓸려 거의 본능적으로 마구 써내려가고 나중에 다시 세부사항을 손보는 스타일이다보니 항상 비슷한 감정상태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기 때문에......^^;;;

오늘 연재분의 테마곡(?)은 핀란드의 메탈그룹 Nightwish의 Bless the Child입니다. (가사나 분위기나 제 글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제가 멋대로 정해놓은 주인공 카렐과 오르마즈의 테마곡(?) 중 하나입니다.) 순전히 제 글쓰는 취향이니 독자분들까지 들으시라는 건 아니고......^^;;;

아참, 내일은 개인사정상 연재가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오후 아니면 저녁에 다음 회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연참이라고 추천 코멘트 한쪽에 안몰아주는거 아시죠?? 부비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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