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6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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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 꼴에 안어울리게 제법이네!"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아메스와 적 기병 모두 온몸이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상대의 생각외로 날렵한 몸놀림에 아메스도 잔뜩 짜증이 올라 있었고 상대 역시 거의 미친 듯 달려드는 아메스의 끈질김과, 화려하고 고상해보이는 갑주에 어울리지 않게 쉴새없이 쏟아내고 있는 욕지거리들에 어지간히 황당해하고 있었다.
"썅! 비켜!"
아메스의 신경질섞인 발길질에 밀려난 상대가 어깨에 감고있던 무언가를 풀어 내던졌다. 아메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또한번 악을 썼다.
"아하! 궁기병새끼였구나! 왜? 사이클롭스 풀면 나하고 상대가 될 것 같냐? 이 덜떨어진 말도둑 새끼야!"
아메스가 시미터를 거칠게 휘두르자 상대 역시 맞받아치며 소리쳤다.
"이 욕쟁이년아! 어떤 놈인지 니 아비가 네 떠드는거 들으면 놀라 까무라치시겠다!"
"오호? 놀라? 네놈이 아직 우리 아버지 욕지거리를 못들었구나!"
아메스가 내리친 시미터를 방패로 막아내며 상대가 힘있게 칼을 찔러왔다. 몸을 비틀어 상대의 칼을 비껴낸 아메스는 적의 등에 붙어있는 망토 찌꺼기를 발견하고 있었다. 갑주에 망토를 달고 있던 것으로 보아 최소한 중랑급 이상의 지휘관임에 틀림없었다. 나름대로 검술에는 자신있던 아메스를 이정도로 곤혹스럽게 할 실력이라면 어쨌든 보통의 기병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갑자기 '욕심'이 생긴 아메스가 더 힘을 내 상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네놈 이름이나 알자!"
아메스가 상대를 밀어붙이며 째지는 소리로 외쳤다.
"이년아! 상대 이름을 물을 땐 네이름을 먼저 밝히는것도 모르냐!"
"썅! 이년저년하지 말란 말이다! 이 썩을 놈의 새끼!"
또한번 격렬하게 맞붙은 둘은 별다른 성과 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유목민 중기병들 수십여기가 이쪽으로 몰려들면서 상대는 점점 궁지에 몰려가고 있었다.
"아가씨! 여기계셨군요! 각하께서 애타게 찾으십니다!"
말에서도 내려선 채 혼자 싸우던 아메스를 발견한 셀림이 그를 도우려는 듯 창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아메스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젠장! 내 먹이니까 감히 달려들지 말란 말이야! 이건 적 지휘관하고 하는 일기투라구!"
아메스의 고함에 기겁을 한 셀림이 급히 뒤로 물러서며 둘 사이의 싸움에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틈새를 발견한 상대가 갑자기 한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자 아메스가 째지는 소리로 악을 썼다.
"비겁한 놈! 썅! 도망치냐!"
"미쳤냐! 이년아!"
땅바닥에 떨어져 딩굴던 투창을 집어든 상대는 쫓아오는 아메스를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적의 투창공격에 깜짝 놀란 셀림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메스 아씨! 조심하십시오!"
투창을 던진 상대는 상대가 다름아닌 '아메스'라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능숙하게 방패를 치켜든 아메스는 사이클롭스도 없는 상대가 던진 투창을 그다지 어렵지않게 왼쪽으로 쳐내버렸다.
"이 병신새끼야, 네 옛날 대장 따라갈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썅! 네년이 그분을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며칠전까지 탈라스에서 같이있었는데! 썅! 어차피 도망갈길 없으니 빨리 항복하란 말이다!"
다시 칼을 치켜들고 아메스에게 달려들려던 상대가 흠칫 놀라고 있었다. 그는 조금 흥분한 듯 쉰 목소리로 고함을 버럭 지르며 아메스에게 맹렬히 칼을 휘둘러왔다.
"그런 분을 거열해 죽이다니! 이 잔인한 놈들! 너희같은 놈들한테 미쳤다고 항복하냐!"
"이새끼가 미쳤나? 거열? 외가에서 잘먹고 잘살고있는 여자를 누가 찢어죽여?"
아메스가 힘을 실어 휘두른 칼을 가까스로 쳐낸 상대가 큰 소리로 되물었다.
"그분이 살아계시다고?"
"네가 말하는 사람이 베아트릭슨가 그여자가 맞다면."
"젠장!"
녀석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며 이미 적군들에게 포위당해있는 자신의 신세를 또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상대가 다름아닌 페로 자이센 총리의 딸이라면 이녀석을 꺾어도 자신을 둘러싼 중기병들 손에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바로 그 밖으로는 꽤 많은 플라칼 가 기병들이 동부 병사들과 혼전을 벌이고 있었고, 일부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칼을 들고 돌진한 그 녀석은 아메스에게 바싹 달라붙으며 갑자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조, 조건부로 항복하겠다."
아메스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둘은 짐짓 힘겨루기를 하듯 가슴을 맞댄 채 서로를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상대방의 의사는 이미 확실하게 꿰뚫고 있었다. 상대는 들릴듯말듯한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여기서 네게 밀려 넘어질테니까.......최대한 자연스럽게 내 허벅지를 찔러라. 그러면.......넌......날 정당하게 이기는거고......난 부상포로가 되는거다.."
"네놈이 누군지부터 말해. 서로 알아야 일기투했다는 게 말이 되지."
진흙과 풀로 범벅이 된 상대의 투구 사이트를 노려보며 아메스가 낮게 물었다.
"궁기병대장.......중랑장 달리 플라칼."
그제서야 상대가 누군지를 깨달은 아메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지껏 전장에서 제대로된 전공이라고는 전무한 아메스에게 일기투 승리와 적 궁기병대장 생포 정도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그것이었다. 달리 역시 이기든 지든 죽을것이 뻔한 상황에서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플라칼 가의 일원으로서 '투항'을 한다면 남는 가족들이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는 불을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다만 조건이 있다......날......베아트릭스 경께 보내다오. 그분과 함께있고 싶다. 유배보내는 형식으로 하면 될거다. 그러면 종전될때까지는 가문에 돌아가지 않아도 될테니.....명색이 총리 딸이라면.....그정도는 힘써줄 수 있겠지? 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해라."
아메스가 잠시 긴장한 듯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지난번 탈라스에서 베아트릭스에게 얼핏 들은 말 중에는 아직 역사가 짧은 플라칼 가 궁기병대에는 베아트릭스 자신과 달리를 제외하면 변변하게 부대를 맡길만한 쓸만한 놈이 없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이녀석을 생포하는 건 단순히 적 중랑장 한 명을 생포하는 것 그 이상일수도 있는 일이었다.
"좋아. 맹세하지."
잠시 머뭇거리던 아메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우스꽝스런 공모를 하면서 가문의 명예를 건다는 것 자체가 꽤나 웃긴 일이었지만 '현실주의자' 아메스에게는 명예를 걸건 말건 사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에익!"
어깨로 달리를 거칠게 밀어낸 아메스가 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발길질에 제대로 차인 달리가 뒤로 나동그라지자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 아메스는 약속대로 그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으아악!"
달리가 큰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렸다. 눈에서 살기를 뿜으며 달려든 아메스가 달리의 목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이제 이놈의 목을 찔러버린다면 그까짓 약속 따위는 이제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셈이었다.
'죽여? 말어?'
잠시 머뭇거리던 아메스는 발에 걸린 이녀석의 장검을 멀리 차내버렸다. 잠시나마 불안에 떨었던 달리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메스가 칼을 치켜들며 셀림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생포해! 적 궁기병대장 달리 플라칼 중랑장이다! 내가 일기투로 잡았다!"
순간 아메스를 둘러싼 유목민 중기병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올랐다. 셀림이 창을 치켜들며 휘파람을 불자 이십여명의 중기병들이 그에 맞춰 유목민 특유의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소리에 놀라 달려온 페로가 딸의 발밑에 쓰러져있는 적장을 내려다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잔혹하기로 유명한 유명한 페로 자이센 총리를 드디어 눈앞에 마주한 달리가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아메스 아씨께서 적 궁기병대장을 일기투로 잡으셨습니다!"
셀림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은 페로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에서 뛰어내려 아메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으쓱 해진 아메스는 가슴을 곧게 펴며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아메스는 생애 최초로 일기투 승리와 큰 전공을 거두며 이번 전투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동부 좌군과의 혼전에 휩싸여있던 히르직스는 후방의 마랄루 요새의 서문이 열리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부장 말마따나 활짝 열린 서문으로 중장보병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서쪽 언덕의 보루로 향하고 있었다.
"저새끼 미쳤군! 뭐하자는 수작이야!"
히르직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헤즈 녀석은 5천여 북부 용병들에게 이미 빼앗긴 서쪽 언덕의 보루를 중장보병들을 동원해 탈환하려는 모양이었다. 양익의 공격을 강화하라는 것도 적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두려는 수작인 모양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만 명은 되어보이는 중장보병들이 레기온 대형을 이루고 적 북부 용병대 5천이 버티고있는 언덕을 향해 숨가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제기랄! 이럴거면 2기사단을 왜 움직이게 했냐고! 보일 패를 다 보이고 나서 보병들을 움직이면 적들 반격을 어떻게 막으려고!"
히르직스가 신경질적으로 악을 쓰듯 외쳤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동부연합군 중군 선두에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4천여 탈라스 궁기병대가 보루를 치러가는 중장보병들의 후미를 향해 맹렬히 돌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만 명의 중장보병들 측면을 기습한 무려 4천여 궁기병의 일제 투창공격은 매서움 그 자체였다. 문제는 이제와서 그들 궁기병을 막을 수단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보루를 향해 움직이는 만여명의 중장보병들은 별다른 엄호부대도 없이 적 궁기병들에게 노출된 채 방패 하나에 기대 언덕의 보루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마치 사신같이 수천발의 투창이 덮쳐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히르직스는 갑자기 릴라크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설마......저녀석이......"
자정이 넘어 시작된 전투가 4시간을 넘어가면서 동쪽 하늘에서부터 조금씩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깨에 드레싱을 감은 채 다시 전장에 나타난 샤자한 공은 자신을 대신해 전장을 지휘한 페로 옆에 서며에서 혀를 내둘러보였다. 마랄루 요새에서 빠져나온 적 중장보병들이 궁기병들의 측면공격을 꿋꿋이 버티며 서쪽 요새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놈들이 저런 패착을 두다니, 굴러들어온 떡이군요."
"글쎄요, 반드시 그런것이랄수도......"
페로가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샤자한 공에게 페로는 제네르가 지휘하고 있을 동쪽의 우군을 가리켰다.
"녀석들 우리 우군을 공격하고 있는 2기사단과 중장보병단에 모험을 건 것 같습니다. 유목민 중기병 3천이 좌익으로 이동하고 우리 중군 2열 병력 중 4천까지 이곳 사령부 방어에 동원되면서 우리 중군엔 후방 예비병력이 고갈되었습니다. 지금 제네르 경의 우군이 뚫리고, 요새에서 적 중장보병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우리 중군은 끝장이라는 겁니다."
페로의 설명에 아연질색한 샤자한 공이 이미 달려나가 적군과 교전중인 4천여 탈라스 궁기병들을 바라보았다.
"저 만 명의 중장보병들은 말하자면 우리 중군 기병들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겠죠. 녀석들은 우군 제네르 경이 무너질때를 대비해서 요새 안에서 나머지 중장보병들을 내보낼 준비를 하고있을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궁기병들을 내보내시다뇨!"
샤자한 공의 흥분한 고함소리에 페로가 태연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제네르 하크로딘 경이 뚫리지 않을 걸 믿으니까요."
숲에서 돌격해나온 플라칼 가 제2기사단장 릴라크는 1차 돌격에서 적 기병들을 뚫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다지 개의치는 않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적들을 분산시키고 틈새를 잡아 적 중군 보병대 우측면으로 무조건 돌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후방에 대기중인 중장보병대와 숲속에 대기중인 경보병대까지 합친 무려 만 명의 보병대가 더 있으니 녀석들이 자신들의 뒤를 쫓는 건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적 중군 경기병들도 헤즈가 미끼로 내보낸 만 명의 보병대를 잡으러 몰려나가있으니 이제 자신이 마치 맛난 먹이처럼 남아있는 적 보병대 우측면만 친다면 적들은 이제 끝장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혼전에 빠져든 이 상황에서도 저 망할 적들이 도무지 꿈쩍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상대하고 있는 동부 기병들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훨씬 명민하다는 데 놀라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교전중인 히르직스의 말에 따르자면 피로에 절어 흐느적거려야 정상일 적 기병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전투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히르직스가 상대하고 있는 동부기병과,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동부기병과 혹시 다른 군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지금같아서는 도리어 적이 숲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샌 이쪽 병사들의 지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게다가 가슴에 용 문양을 지닌 낯선 중장기병들은 자존심 강하고 개별행동이 특히나 심해서 약간의 유인에도 쉽사리 넘어오는 보통의 중장기병들과는 달리 마치 보병들같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여 그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었다. 이미 몇번이나 숲속으로 그들을 끌어들이려 했던 릴라크였지만 그들은 숲 앞에서는 마치 투명한 장벽에라도 부딪힌 듯 휙 돌아서버리면서 릴라크의 약을 바싹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릴라크는 이것이 지금은 사라진, 귀족성이 거세되었던 오르마즈 휘하 북부 창기병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지금같아서는 적 경기병들을 상대로 양익의 견제역할을 그럭저럭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보병들 보기가 민망해졌을 지경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숲에서 빠져나온 자신들이 더 불리해지리라는 건 뻔한 노릇이었지만 적들은 변변한 대결도 피한 채 약이오를만큼 교묘하게 앞뒤를 오가며 시간만 끌고 있었다. 섣불리 숲에 부대를 들여보내지 않던 그 신중함에서 이미 어느정도는 눈치챘던 일이었지만 적장이 이정도로 용의주도한 놈이라는 사실은 그로서도 뜻밖이었다.
"적장이 누구랬지?"
릴라크가 부장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제네르 하크로딘! 코아 전사단 휘하 슈로 기사단장입니다! 얼마 전 서부 플레렌 가 하지즈 장군을 꺾은 만만치않은 놈입니다!"
"아하, 그년이었군. 지금 어딨지?"
검색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릴라크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놀라운 지휘능력과 드러나지는 않지만 효율적인 전투운영으로 기사단에서 주목받던 그가 '전공의 댓가'로 종장의 6번째 아들과 혼인할 수 있었던 건 나름대로 꽤 명예스런 일이었지만 아직 외부에 제대로 이름을 날릴만한 전공을 세운 일은 단 한번도 없는 것이---물론 그가 지휘관으로 있는 동안 '큰 전쟁'이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 큰 이유겠지만--- 사실이었다.
이번 전쟁도 하필 그가 출산 후 몸을 풀고 있을 때 개시된 덕에 개전 초 한참 승승장구할 때는 손가락만 빨며 애타하다가 이제와서 손윗동서이며 기사단 사령관인 히르직스의 특별한 부름으로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적 중장기병대 중앙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알았다."
창을 꼰아잡은 릴라크가 백여명의 호위기병들과 함께 한참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가로질러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플라칼 가 제2기사단장 릴라크 예리노프다! 너희 대장에게 대결을 신청한다!"
나즈막한 언덕 꼭대기에서 호위기병들에게 둘러싸여 말에 올라있는 제네르의 눈앞까지 다다른 릴라크가 기수의 깃발을 빼앗아 번쩍 치켜들며 사뭇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네르가 그 파란색 맑은 눈동자를 조금 움직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똥줄이 타나보군."
가슴에 금빛 용 무늬가 새겨진 화려한 은회색 갑주와 붉은 망토를 차려입고 말없이 전황을 지켜보고있던 제네르는 그와 그의 부대를 향해 흘끔 하니 비웃음섞인 짧은 시선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제네르의 '원래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 턱이 없는 릴라크는 속에서 발끈 하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신중하고 냉소적이기로 유명한 릴라크가 이정도에 흥분해 입을 험하게 놀릴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듣던대로 정말 쌀쌀맞은 년이구나. 뭐, 굳이 제대로된 일기투일 필요는 없지."
창을 꼰아잡은 릴라크는 백여기의 근위기병들과 함께 곧바로 제네르를 향해 돌진해갔다. 그의 예상대로 제네르 옆에 있던 부장 발리와 호위기병들이 큰 창을 치켜들며 나서고 있었다. 릴라크는 놈의 엄청난 거구에 내심 꽤 놀라고 있었지만 놈을 싸움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발리의 큰 창을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한 릴라크는 거칠게 몰아붙여오는 발리와 십여합을 주고받으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아익!"
발리의 창에 팔을 베인 릴라크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의 팔에서 피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썅! 나중에 보자!"
발리의 창을 쳐낸 릴라크가 허둥지둥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적 기사단장이 제네르의 부장인 발리에 패해 달아난다는 사실에 고무받은 동부 기병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함성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슈로 기사단의 기병들은 그 사실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 자신들의 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발리 역시도 별 감흥없는 모습으로 추격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을 돌려 돌아오고 있었다.
"적 대장이 달아납니다! 안 쫓습니까?"
전투로 한참 흥분상태에 있던 동부 기병중대장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네르에게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기회입니다! 쫓아야 합니다!"
"크게 다친것도 아닌데 왜 쫓나?"
제네르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달아나는 릴라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뭐야! 저새끼들!"
숲 경계까지 딴에는 열심히 도망쳐온 릴라크는 적들이 다친 자신을 보고서도 전혀 움직이지 않자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장인 자신이 쓸데없이 적의 창에 팔을 대주고 꽤 많은 피까지 흘렸음에도 적들은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시간만 끌 뿐 제대로된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주변은 모두 훤해져 있었다.
릴라크는 저 고집스런 적장을 상대로 지금처럼 적을 '휩쓸어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병력이 아닌 상황에서는 저 망할 적들이 천둥번개가 몰아쳐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제네르와의 '인내심 대결'에서는 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더이상 인내할 수 없이 만든 뚱땡이 헤즈 녀석이 문제였다.
"총사령관님!"
답답해진 릴라크는 결국 헤즈를 직접 찾을수밖에 없었다. 밤새 머리를 쓰느라 시달린 듯 꽤 피곤한 표정의 헤즈는 제수씨인 릴라크의 모습에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아직 못 뚫고 있나?"
"중장보병 5천만 더 보내주시면 꺾어보이겠습니다! 녀석들이 철저하게 시간끌기에 나서고 있어서......힘으로 몰아붙이면 될 것 같습니다! 숲을 등지고 싸우니 그다지 위험할일도 없습니다! 보병 5천만......"
"됐네. 그만 포기해. 보병들부터 숲으로 퇴각시키고 모두 물러나도록 해."
"예?"
"그만두라니까. 서쪽 언덕은 포기한다. 제기랄, 놈들 우군이 안움직인다면 페로 그새끼가 우리 속셈을 다 꿰고있는거야. 1, 3기사단과 경기병단도 모두 숲에 주둔하게 될게야. 한군데 집중시키는 게 차라리 나을수도 있으니......포기하고 숲으로 퇴각해."
"하지만......"
"명령이라니까!"
헤즈의 고함소리에 릴라크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할룩스를 끊은 릴라크는 이미 훤해진 하늘을 올려보며 울분을 삼킬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쟁들어 그의 사실상 첫 전투는 이렇게 맥없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적 중장보병은 여전하군요."
나팔소리와 함께 일제히 물러나는 남부 기병들을 바라보며 페로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적들의 퇴각은 역시 잘 훈련된 플라칼 군대답게 정연한 순서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차로 퇴각한 루코프의 남부 경기병들이 동부 중군 궁기병들을 쫓아내자 서쪽 언덕 탈환을 기도하기 위해 움직이는 듯 싶던 만 명의 보병들이 경기병들의 엄호하에 요새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병들의 안전이 확보되자 동부 좌군과 사령부를 맹공하던 히르직스의 중장기병대도 마랄루 요새를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적 기병들과의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편 좌군쪽에는 아군과 적군이 뒤섞인 꽤 많은 시체들이 나딩굴고 있었다. 적의 초반 돌격을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좌군이 너무나 빨리 무너진 것이 전투 초반을 어렵게 만들고 사상자를 양산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목표했던 서쪽 언덕을 차지했으니 마랄루 공성전의 큰 고비 하나는 넘긴 셈이었다.
"녀석들의 새 기병 돌격진형에 대응할 방안을 찾아야겠습니다."
샤자한 공이 히르직스에게 다친 어깨를 어루만지며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숲속에 숨어버린 저놈들을 잡는 건 이제 훨씬 더 어려운 일이겠군요."
다음번 전투를 구상하느라 벌써부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샤자한 공과 페로 부근에서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한 젊은 무장이 있었다. 입고있는 갑옷은 이미 진흙과 피로 엉망이 되어있는 몰골이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전공'을 세운 아메스의 머릿속에서는 벌써부터 킬마크를 새긴 근사한 방패를 들고 있는 자신의 번쩍거리는 모습이 맴돌고 있었다.
"아메스."
"예?"
아버지의 부름에야 정신을 차린 아메스가 멍 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실은 말이다......"
행복감에 취해있는 딸의 얼굴을 돌아본 페로는 탈라스에 있던 카렐이 7대의 창에 찔리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떨군 페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그답지않은 '싱거운' 태도에 아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한참 즐거움에 취해있는 그에게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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