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7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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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북쪽에 위치한 황실 묘지에는 리 리쿠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 2백여명---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리 리쿠 자신은 프라임 지역 북서부 2번 도시에 있는 '13선지자의 묘'에 묻혀있었다.---과 그 배우자들이 묻혀있었다.
그런 황실 묘지에서도 가장 상위자리라고 할 수 있는 이 북쪽 언덕 안쪽에는 S 돌연변이와의 정략혼인을 통해 황족에 S유전자를 심게 만들었던 리 리쿠의 딸 파냐드 리쿠와, 성전을 개시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TSG에 무참하게 피살당했던 '혁명의 아버지' 에르네스토 리쿠 모자의 웅장한 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앞쪽의, 사람들 눈에 잘 띄는 언덕 모퉁이에는 에르네스토의 장남으로 최초의 황족 발현자이며 성전을 개시해 사실상 제국을 창업했던 '피빛 비수' 샤미르 리쿠, 그리고 그 동생이었던 세나우스 1세 황제의 거대한 봉분 2개가 나란히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옆에 5번째의 봉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샤미르 리쿠 님 봉분 앞이 웬지 좀 쓸쓸하죠?"
세나우스 2세 황제의 하관식에 함께 참석한 남동생 일라드의 한마디에 오르마즈는 아무 대답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함께 합장된 수많은 사람들의 비석이 함께 서 있는 다른 봉분들과는 달리 샤미르 리쿠의 봉분 앞에는 그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단 한 개 뿐이었다. 반면 3명의 남편을 두었던 파냐드 리쿠는 물론이었고, 네 명의 부인을 두었던 에르네스토나, 정실 테나스 이그나토 황후 외에 십여명이 넘는 비빈을 거느렸던 세나우스 1세의 무덤은 거의 비석으로 '포위'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이변이 없다면 지금까지 거의 살아있어야 정상일 그들 비빈들이 모두 저곳에 묻혀있는 건 대부분 오늘 묻힐 세나우스 2세의 '덕'이었다.
만약 영혼이란 게 있어서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들 대부분은 오늘의 새 이웃과 나란히 묻혀있을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의 운명을 어지간히 저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쓸쓸하지."
오르마즈가 잘려나간 자신의 왼팔을 힐끗 돌아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샤미르 리쿠의 무덤이 쓸쓸한 이유는 간단했다. 젊은 나이로 요절한 그는 결혼은 고사하고 제대로된 연인 한 번 두어본 일이 없었다. '피빛 비수'라는 별명에 걸맞게 잔혹하고 차가운 성격에 병적인 결벽성향으로 유명했던 그는 여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교성은 제로에 가까운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게다가 그 지독할 정도로 똑똑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그 독단적이고 불같은 성격에 극단적인 대인기피증은 몇몇 소수의 충복을 제외하면 그를 멀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또한가지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그는 오르마즈나 베흔같은 소수의 충복들 외에는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정도로 일평생을 철저한 고독 속에 살아갔던 인물이었고, 심지어 사후에도 저 거대한 묘실 안에 백 년이 넘는 기간동안 홀로 누워있었다.
황궁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국장도 끝나고 황제령의 각 도시와 제후지역 수도들을 순회하는 행사도 끝난 황제의 보존처리된 시신은 서거 후 12일만에 투명한 관에 담겨 봉분 안쪽에 만들어진 작은 석조 밀실에 안치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밀실 안에서 걸어나오는 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오르마즈의 시선에는 오늘따라 묘하게 힘이 없었다.
그리고 봉분 입구 앞에는 이 행사를 찾아온 5백여명의 중앙귀족들과 7백여명의 지방제후가문 사람들이 각 지역과 가문, 신분에 맞춰 도열해 서 있었다.
"오늘 나오지 말라 했더니만."
아버지 투르케스크 공의 핀잔에도 오르마즈는 별 말이 없었다. 워낙 자유분망한 성격 탓에 격식을 따지는 행사 따위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성격인데다가 아직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몸이 많이 좋지 않은 그였지만 오늘은 희한하게도 고집을 부려 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세네피스는 좀 어떻습니까?"
"퍽이나 일찍 묻는구나."
딸의 질문에 투르케스크 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한 뼘 정도 베인 모양이다. 오죽하면 여기에도 못나왔겠냐."
입술을 굳게 다문 오르마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19살 아래인 막내동생 세네피스는 그 사근사근한 성격과 놀랄만큼 비상한 머리, 빼어난 미모로 아버지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그렇게 다정하고 사교적인 동생의 아름다운 얼굴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묘한 야심과 잔혹함을 잘 알고있었다. 그러다보니 카파키 가문의 적장자 신분으로서 이 두렵기까지 한 동생이 은근히 걱정도 들고 있었다.
게다가 오르마즈가 보기에 꽤나 답답하고 꽉 막혀보이는 유학자 아버지는 대를 이을 적장자가 '무장'이라는 데 지금은 은근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오르마즈가 아직 어렸을 기원 무렵에는 한참 세상이 시끌시끌하던 때였고, 골아픈 글귀나 따지는 유학자보다는 싸움 잘 하는 무장이 절실히 필요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리 리쿠의 처형 무렵에 태어난 이 특별한 자식이 '대단한 유학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어릴 때부터 골아픈 글공부를 강제로 시키면서 이 놀기 좋아하고 바람기로 가득한 맏딸을 '학대'해오던 터였다.
하지만 리 리쿠의 사후 제니안의 간부로 활동했던 아버지가 군사집단이던 TSG와의 전략적 제휴 이후 장자인 그를 게릴라부대의 일원으로 등떠밀어 보냈던 건 그동안 유학자 딸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있던 아버지의 행동으로는 조금 의아함을 들게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학구적인 막내 세네피스는 유학자 자식을 원하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놀랄만큼 완벽하게 만족시켜준 아이였다.
"네가 황실에 충성을 보인 건 좋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런 짓은 절대 하지 말거라."
아버지의 핀잔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오르마즈는 여전히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있었다.
"도대체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녀석이......네 남편들하고 어린 자식들 얼굴도 떠오르지 않던? 너도 네 집에서는 가장이라는 걸 알아야지?"
오르마즈는 '골수 유학자'로 알고있던 아버지가 범부들 입에서나 나옴직한 저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꽤나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버님도 별수없는 지방제후시군요."
딸의 가시돋힌 한마디에 투르케스크 공이 성난 얼굴로 그를 휙 돌아보았다.
이자리에 참석한 각 지역 제후들은 최소한 겉보기에는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르마즈는 잘 알고있었다. 지방제후들을 철저하게 짓누르며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제국을 한손에 휘어잡았던 독재자 세나우스 2세 황제는 이들 입장에서는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황제의 죽음에 '진짜 눈물'을 흘린 지방제후가 사람은 아마도 오르마즈 한 사람 뿐일 터였다.
오르마즈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각지역 최고제후들의 얼굴을 한번씩 돌아보았다. 특히나 곧이어 황제가 될 로노 장태자의 부계가 속한 동부를 대표하는 샤자한 공은 표정관리에 제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북부 최고제후인 아버지나 남부 최고제후인 테번 공은 그럭저럭 속내를 잘 감추고 있었지만 서부 최고제후인 네페티 부인은 어딘지 안절부절하며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네페티 부인이 기분이 많이 안좋아보이는군요."
"아직 순진한 꼬맹이라 정말로 슬퍼 죽고싶은가보지."
아버지의 묘하게 험악스런 말에 얼굴을 살짝 찡그린 오르마즈는 의자를 움직여 네페티 부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네페티 발 플레렌 부인."
말을 건 오르마즈가 민망할 정도로 깜짝 놀란 네페티 부인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주었다.
"에......예. 오르마즈 님."
자신의 잘려나간 팔과 창백한 얼굴 때문에 놀란 것이라 지레짐작한 오르마즈는 왼팔에 너덜거리고 있는 소매를 급히 안쪽으로 접어넣었다.
"그럼......"
사실 평소의 오르마즈 같았다면 팔이 잘려나간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쓸 소심한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았겠지만 큰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 낯빛까지 창백해져있는 네페티 부인 앞에서 그도 무슨 이유엔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할 말이 막혀버린 오르마즈는 의자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그 때, 네페티 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오르마즈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저어......."
"예?"
"다른 일 없으시면......끝나고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저한테 말씀이십니까?"
"예.......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마땅히 물을곳도 없고.......오르마즈 님께서 제발 도움을 주셨으면......"
네페티 부인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이 가득히 맺히고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오르마즈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며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비밀스런 얘기이신 듯 하니......끝나는대로 제 병실로 오십시오. 문병오시는 것으로 하면 자연스러울 겁니다."
네페티 부인에게서 돌아오는 딸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던 투르케스크 공이 쌀쌀맞게 물었다.
"무슨 얘기했냐?"
"아버님 말씀대로더군요. 아직 어려서 순진하군요."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린 오르마즈는 조문을 읽고있는 대제학 란조 경의 뒤에 도열해 서 있는 상복 차림의 여섯 태자들과 그 식솔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4명의 '정식' 부인을 거느리고 있는 로노 장태자는 80대의 많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식만도 7명에 달했다. 황제가 될 그는 말할것도 없고 이제 대군에서 태자의 신분으로 상승할 자식들 역시 그 표정에는 묘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그에 비하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제 황궁을 떠나 완전히 독립해야 할 나머지 태자들은 약간씩은 근심어린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파예드 아카데미의 촉망받는 유학자인 둘째 주페 태자는 물론이었고, 슈로 기사단 장교로 있는 네째 모디아크 공주, 남극성당 수찬으로 있는 다섯째 타니토 공주, 외계 개척지 탐험가로 종종 어머니 속을 썩였던 괴짜막내 레곤 공주 모두 황궁을 떠나도 나름대로 존경받는 태자로서 살아갈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도리어 문제는 태자의 지위만을 믿고 그동안 빈둥빈둥 노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온 오르마즈의 제부 오넬론 태자였다. 물론 황실이 그 생계를 책임지는 이상 먹고 살 걱정을 할 리야 없겠지만 명색이 태자로서 제대로된 간판 하나없이 놀고먹는 꼴이 보기 좋을 턱이 없었다.
"제부에겐 황제령에서 작은 사업이라도 하게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르마즈의 말에 투르케스크 공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세네피스도 빈둥거리는 남편 보고 살기는 괴로울테니......"
"네 동생은 그정도로 만족하지는 않을거다."
오르마즈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고있는 아버지의 평소같지않은 표정이 잠시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무언가 물으려던 오르마즈는 뒤에서 다가온 발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오늘 저녁 7시에 근위대에서 담화문 발표가 있다고 합니다. 최고제후님."
토로 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알리고 있었다.
"새 황제 지지선언이겠군요."
오르마즈가 태연하게 중얼거렸지만 투르케스크 공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렸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오르마즈는 오늘따라 아버지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내일이면 세나우스 3세 로노 황제가 공식 집무를 시작할테고 제국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돌아갈테니까.
하지만 세나우스 2세, 아니 그에게는 유평 이그나토 리쿠로 더 친숙한 그의 어두운 묘실을 바라보던 오르마즈는 그의 죽음에도 여전히 별 문제없이 돌아갈 이 세상이 묘하게 야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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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뤼렌 네가 카렐 그놈한테 고자질한 탓이야."
감방에 쓰러져있던 솔을 바라보고 있는 뤼렌 세호 부인에게 라바니 경이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때 데려다가 시집보내버렸으면 일이 좀 쉽냐고. 저 기생오래비같은 샤드니 새끼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일도 없고."
'시집'보낸다는 말에 솔이 눈을 번쩍 뜨고 있었다. 하지만 손녀딸이 이곳 탈라스에서 '구출'되었다는 말에 서부에서 허둥지둥 달려온 뤼렌 세호 부인은 비참하게 죽어간 딸 마리안을 다시 만난 듯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솔의 위아래를 돌아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나도 그때는 그놈이 그렇게 못된 놈인지 몰랐어요."
뤼렌 부인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잔인한 괴물놈이 마리안 아이를 진심으로 돌봐줬다는 말을 그대로 믿은 게 잘못이었죠......설마 제 여자로 거느리고 살았을 줄이야......"
"다행히 잠자리는 한번도 한 적 없답니다. 어머님."
사르키스가 끼어들었지만 뤼렌 부인은 쌀쌀맞은 표정을 지으며 아들에게 바로 쏘아붙였다.
"그말을 어떻게 믿어. 그리고 잠자리 안했어도 얼마나 농락해먹었을 줄 알아? 천한 가디언 주제에.......천하에 그 죽일 놈 같으니.......그러면서 뻔뻔스럽게 날 찾아와서 얘를 맡아달래? 오죽하면 애가 이렇게 이상해졌겠냐고."
"그런 분이 아니예요......그분은......"
솔이 뭐라 변호하려 했지만 자신의 외손녀인 솔이 일개 가디언의 '노리개감'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뤼렌 부인은 그에게 입을 다물라며 손을 내저어보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카렐이 솔을 구하려 돌진하던 그 처절한 모습을 눈앞에서 본 바 있던 사르키스는 모든 것을 카렐 탓으로 몰아붙이는 어머니의 쌀쌀맞은 태도가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있었다.
"카렐 그놈이 솔을 꽤 좋아했던 것 같긴 합니다."
"좋아하면 뭐해. 지깟 천한 것이......어디 감히."
솔의 어깨를 껴안으려 손을 뻗었던 뤼렌 부인은 솔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자 깜짝 놀라며 얼른 뒤로 물러섰다.
"이런, 깜박 잊었구나.......돌아가는대로 주치의 붙여주고 각별히 신경써줘야겠구나. 이 할머니는 가문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단다. 집도 크고 말이다. 정원 바로 옆에 너 쓰라고 좋은 방 마련해뒀다. 옛날 네 엄마 어릴 때 쓰던 별채란다. 수발을 들 여자 노예들하고 몸종도 구해놨으니 이제 너만 가면 돼."
뤼렌 부인이 솔에게 보여준 카드에는 정말로 그림에나 나올듯한 크고 화려한 서부 스타일의 귀족저택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솔은 카드에는 관심도 없는 듯 바닥에 이마를 기댄 채 멍 하니 있을 따름이었다.
"병만 나아지면 가정교사를 붙여주마. 글도 읽을 줄 알고 아직 나이도 어리니까......몇년만 신경써서 공부하면 파예드 아카데미나 남극성당 입학시험도 치를 수 있을거다. 그럼 너도......"
"벨리크 누님한테 말 못들었냐?"
라바니 경이 갑자기 끼어들며 묻자 뤼렌 부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벨리크 언니가 뭘요?"
"제롬 공이 여기 오기로 했어."
'제롬'이라는 말에 안색이 파랗게 변한 솔이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그남자는......"
벌벌 떠는 솔을 보다못한 사르키스가 라바니 경에게 쏘아붙였다.
"숙부님,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하시면......"
"뭘, 어차피 내일이면 보게 될 텐데."
태연하게 대꾸한 라바니 경은 다시 여동생 뤼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에 합의한 지참금 그대로 다 주겠다더군. 휴우~ 1억 골드라니, 대단하지?"
"아직 결혼시키기는 너무 어린데......"
뤼렌 세호 부인은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며 솔의 고운 얼굴을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솔이 울음을 터뜨리며 호소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절 보내지 마세요. 그 남자가 절 어떻게 했는데......돈도 필요없고 좋은 집도 필요없어요, 그냥 돌려보내주세요, 제발."
"불쌍한 것. 그 망할 놈한테 단단히 길들었구나."
뤼렌 부인이 가엾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독한 놈이 살았다니 언제 다시 빼앗으려들지 모른다구. 최대한 빨리 제롬 공한테 시집보내버리는 게 나아. 그러면 지도 포기하겠지."
오빠 라바니 경의 말에 고개를 조금 끄덕인 뤼렌 부인은 솔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제롬 공은 제후들중에 제일 막강한 사람이야. 너도 알지만 생긴것도 크고 잘생겼잖니. 그 거금을 주고 데려갈 정도로 널 좋아한다니 결혼한 후에도 정말 잘해줄거다."
"그놈은 절......"
"제롬 공은 아직 첩이 없어. 네가 가면 첫번째 소실이 되는 거란다. 그럼......정실 오르테 부인한테만 잘 보이면 나머지 소실들은 모두 네 밑이야. 너한테 정말 그만한 혼처가 없단다. 내 제롬 공을 설득해서 널 남극성당이나 파예드까지 공부시켜달라고 약속을 받아내마. 카렐 그놈은 반란세력이 진압되는대로 황궁에서 처형당할거다. 아니, 그게 아니어도 그런 망할 놈은 우리가 잡아죽일거다. 괜히 같이있다간 너도 말려들어갈지 몰라."
쌀쌀맞게 대꾸한 뤼렌 부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제롬 공이 올때까지 기다려야겠군요. 남부 최고제후를 손녀사위로 맞게 될 줄이야......어차피 식까지 올리려면 몇달 걸릴테니 그때까진 제가 데리고있어도 되는 거겠죠?"
"물론. 여기서 풀려나기만 한다면."
라바니 경이 어깨를 으쓱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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