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9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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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급히 뛰어들어온 카이두 경의 뒤에는 탈란과 베아트릭스가 함께 서 있었다. 네페티 부인과 함께 있던 카렐에게 카이두가 조금은 다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키타이 사막 유목민인 카란 족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얼마 전 서부연합군에 인질로 잡혀간 툰드라의 에키트 족 전사 천 5백명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적 기지에서 천 스타디아정도 떨어진 소금광산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어있는 모양입니다."
카렐이 갑자기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카렐이 무얼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를 곧바로 깨달은 베아트릭스가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녀석이 저희의 매복을 걱정해 키타이 사막에 기지를 세웠듯이 저희 역시 그곳에서는 적 매복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소금광산지역은 제가 잘 알고있습니다. 옛 대양저 평원이었던 곳이어서 사방으로 훤히 뚫린 곳입니다. 저희가 맘놓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베아트릭스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카렐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지리와 분위기에 익숙한 베아트릭스가 저렇게 자신있게 말할 정도라면 카렐로서도 굳이 문제를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
"좋아. 자네들 실력을 보지."
카렐로부터 '첫 공식 명령'을 받은 베아트릭스는 힘있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겔 밖으로 달려나갔다.
얼굴에 덩어리피를 뒤집어쓴 이 작은 체구의 에키트 족 청년의 손에는 무기도 아닌, 짤막한 정비용 공구와 빼앗은 할룩스가 쥐여있을 따름이었다.
하역실의 소음에 놀라 달려왔던 거구의 조종사는 이 반 쯤 벌거벗은 청년 발밑에 딩굴고 있는 두 구의 동료 시체---하나는 목이 뒤로 비틀려 있고 하나는 안면이 완전히 뭉개져 누군지 알아볼수조차 없는---에 순간 경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소금덩이를 쌓고 있던 다른 에키트 족 청년들은 그 광경을 못본 척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이, 이게......,"
조심스레 뒷걸음질치며 할룩스를 작동시키려던 조종사는 소리하나 없이 맨발로 번개처럼 달려든 이 무서운 적의 팔꿈치에 어느새 자신의 손목이 끼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올렸다.
"도와......"
입을 벌리던 조종사의 마지막 외침은 채 두 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목젖과 턱을 비틀어쥔 상대의 손에 숨구멍부터 틀어막혀버리고 말았다. 흉터가 가득한 상대의 어깨에서 물결치듯 꿈틀대는 우람한 근육을 본 조종사의 표정에 무서운 공포가 번지고 있었다. 숨이 막힌 조종사는 변변한 저항도 못해본 채 굵은 파이프에 기대 의미없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를 향해 소름끼칠정도로 웃어보인 청년은 팔꿈치에 힘을 주어 그의 손목을 아드득 소리가 나도록 비틀었다. 하지만 팔목이 으스러진 조종사가 처절하게 내지른 비명소리, 아니 마지막 숨소리는 그 순간 청년들이 '실수로' 소금덩이를 무너뜨리는 소음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불운한 조종사의 두 눈 사이에 정확히 작렬한 금속제의 짤막한 공구는 또하나의 두개골을 박살내버리고 있었다. '때맞춰' 에키트 족 청년 중 두 명이 비명과 함께 서로 부딪혀 나동그라지며 육중한 소금덩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3명의 승무원들을 너무도 손쉽게 저세상으로 보내준 에키트 족 청년은 그 날랜 몸을 바닥에 바싹 붙인 채 화물선 해치 밖으로 다시 살금살금 기어나가 몸을 숨겼다. 몇분이나 지났을까, 서부제후군 병사들이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대들의 팀웍과 그동안의 훈련성과를 테스트하기 위한 첫 임무다. 상대는 창과 시미터로 무장한 적 경보병 5백과 사역병 2백이다."
부단장이며 1연대장인 갈라크와 나란히 선 슬레이프니르 경기병단장 베아트릭스가 이미 말에 올라 명령만을 대기중인 검은 갑주 차림의 이 정예 경기병들에게 힘있게 말했다.
"궁기병 3연대 천 기는 적 차량을 막기 위한 전차와 장비들을 이끌고 주변을 차단한다. 창기병 2개 연대는 북, 동, 서 3방향에서 기습한다."
"예!"
첫 임무에 동원되는 이 기병들, 특히 너무도 오랫만에 '주군'의 명을 받아 전장에 나온 북부 출신 1연대 병사들은 가히 열광적인 분위기로 경쟁적으로 함성을 올리며 다른 연대 병사들을 황당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 북부기병들의 기세에 질세라 바툴 가 궁기병대인 3연대 병사들이 유목민 특유의 리듬섞인 거친 함성으로 수송선을 떠들썩하게 수놓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베아트릭스는 거대한 소금광산에 모여있던 7백여 서부 병사들이 벌써부터 우왕좌왕거리는 모습이 드러난 스캐너를 바라보며 양쪽 관자놀이에 2개의 긴 깃털이 박힌 단장의 투구를 꾹 눌러썼다. 궁기병용 스코프를 초기화하고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신 베아트릭스는 수송선이 바닥에 착륙하는 그 익숙한 느낌에 투창을 쥔 오른손에 힘을 꽉 주었다.
"돌격!"
광산 사방에 먼저 내려선 4대의 수송셔틀에서 천여기의 궁기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가 소금광산을 동그랗게 포위하자 그 안쪽에 착륙한 중형 수송선에서 베아트릭스와 갈라크를 선두로 2천여 창기병들이 우루루 쏟아져나와 적병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망할! 달아나! 빨리!"
느닷없는 기병들의 일제기습에 순간 궁지에 몰린 세호 가 병사들은 에키트 족 청년들을 그대로 놔둔 채 서둘러 허둥지둥 병력수송차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비병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병력수송차에 일제히 달려든 에키트 족 청년들은 그들이 순순히 차를 타고 도망가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탈라스 동지들이다! 못달아나게 막아!"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차 한대당 족히 2, 30여명씩의 거구의 에키트 족 전사들이 달라붙어 차의 한쪽을 밀어붙이자 서부 병사들의 혼란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손에 무기랄것도 없는 돌덩이나 소금 찍는 형틀 같은 것들을 하나씩 치켜들고 1초라도 빨리 차로 도망치려는 이 서부 병사들을 무작정 몸으로 막아섰다.
"썅! 저새끼들! 족쇄 잠가! 빨리!"
방금전까지도 상인과의 흥정에 바빴던 세호 가 장교는 상황이 다급함을 깨닫고는 손에 쥐고있던 '비상장치' 리모컨을 꺼내들고 비상키로 그 뚜껑을 열었다.
"썅, 저 야만족놈들, 엿먹어봐라."
이를 악문 장교가 리모컨을 작동시키자 사방에서 병사들의 퇴로를 가로막던 에키트 족 청년들의 발에 채워진 족쇄가 작동하면서 천 오백여명의 전사들이 발목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제 도망가!"
리모컨을 쥐고 급히 방향을 돌리던 그 장교는 자신의 눈앞에 무언가 시커먼 것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채 깨닫기도 전에, 직사로 날아온 그 위력적인 자리드는 미처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한 장교의 스코프를 가루처럼 조각조각내어버리며 뚫고들어와 두 눈 사이를 관통해버렸다. 지진이라도 일으키는듯 한 진동이 조용하던 사막의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서부녀석들을 한놈도 돌려보내지 마라!"
갈라크의 고함소리와 동시에 무려 2천기가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경창기병들이 검은 파도처럼 소금광산을 덮쳐들고 있었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베아트릭스는 자신의 자리드에 맞아 즉사한 적 장교가 떨어뜨린 리모컨을 급히 집어들었다. 어지간히 급히 도망가려 했었던지 뚜껑도 그대로 열려있었다.
"쳇, 재수없는 물건이군, 그런데......어떻게 쓰는거야?"
기계를 살피던 베아트릭스의 조금은 섣부른 손놀림과 동시에 천 오백여명의, 거칠기 짝이없는 에키트 족 청년들의 발에 채워져있던 족쇄가 일제히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 있는 7백여 서부 병사들에게는 최악의 순간이 개시되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발목을 쥐고 비명을 내지르던 그들 천 오백여 전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비틀거리고 일어섰다.
"이제 우리 손에 놔두시오!"
속박에서 풀려난 에키트 족 청년들, 아니 풀려난 전사들은 기병들에 쫓겨 사방으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서부 병사들을 무기하나 들지않은 맨몸으로 쫓기 시작했다.
"저게 도대체 뭐야,"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던 갈라크의 비명소리에 베아트릭스가 얼른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아무러한 베아트릭스의 얼굴에서도 소름이 쫙 끼쳐오고 있었다. 에키트 족 전사 한 명이 도망치다가 넘어진 서부 경보병의 양팔을 붙들어 비틀고 있었다. 그 광경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 또 한 명이 소금을 퍼내던 큰 삽으로 갑주로 가려지지 않은 얼굴을 힘껏 내리찍었다. 단 두 번의 공격만에 죽은 서부 병사의 얼굴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지만 그들은 거의 미친 듯 이미 죽은 시체까지 마구 두들기며 산산조각내버리고 있었다.
"저새끼들, 미쳤잖아?"
무언가 잘못되어감을 느낀 베아트릭스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무기를 쥐고 갑주까지 입은 채 사방에 흩어져있던 서부 정규군 병사들은 거의 알몸뚱이에 가까운 거구의 야만족 전사들이 칼을 휘두르건, 창을 던지건 거의 아랑곳없이 맨몸으로 무작정 덤벼드는, 제정신이라고는 믿기지조차 않는 기세에 놀라 제대로 저항도 못한 채 도망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운없이 잡힌 서부 병사들은 사지를 붙들린 채 삽, 돌멩이, 기계장비 등등은 물론이고 사지나 목을 잡아비트는 갖은 끔찍한 수단에 죽어기고 있었다. 무기 대신, 철저한 잔혹함으로 무장한 그들 에키트 족 전사들에게 정규군들의 갑옷이나 무기는 피의 유희를 더 잔혹하게 만드는 수단에 지나지않았다.
"제기랄! 2연대는 서부 병사들 구해! 1연대는 에키트 족 녀석들 몰아서 수송선에 태워! 더 사고치기 전에! 빨리!"
보다못한 베아트릭스가 황당한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 서부 병사들이 정규군 복장의 슬레이프니르 기병들에게 앞다투어 달려와 제발 살려달라 무릎꿇는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저 미친 전사들에게서 서부 포로들을 격리시키는 것이 시급했다.
한놈만 더 죽이겠다며 흥분해 날뛰는 에키트 족 전사들을 여우몰이하듯 가까스로 한쪽으로 몰아붙인 갈라크의 1연대는 그들을 거의 협박하듯 달래 병력수송선 안에 마구 몰아넣었다.
"퇴각한다! 빨리 오란 말이야!"
적 지원병을 실은 셔틀이 오고있다는 보고를 받은 베아트릭스가 뒤늦게 달려오는 에키트 족 전사들을 재촉하며 외쳤다. 소금광산은 사방에 널린 이백여구의 끔찍한 시체들과 산산조각난 기자재들로 이미 폐허로 변해있었다. 운좋게 빠져나와 돌아다니고 있는 서부 병사들이 간간히 눈에 보였지만 어차피 한가롭게 다 잡으며 돌아다닐 시간도 없었다. 베아트릭스가 큰 소리로 조종사에게 명령했다.
"출발! 출발해!"
플라칼 가의 고전소식을 들은 베흔은 이래저래 좌불안석이었다. 서부제후군이 탈라스에서 바툴 가와 치고받으며 어정쩡한 입장에 처해있는 건 어차피 그가 바라던 바대로였지만 그의 계획표대로라면 이미 샤레이를 돌파해 요동을 위협하고 있어야 할 플라칼 가 군대는 샤레이 한구석에서 동부 연합군과 공방전만 계속하고 있으니 그의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기랄, 맘만 같아서는......"
한바탕 신경질을 부린 베흔은 죄없는 집무실 의자를 걷어차고 있었다.
정말로 그의 맘만 같아서는 근위대 정규군을 당장 동원해 동부를 확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문제는 페로 녀석이었다. 동부 6제후 자격으로 동부연합군에 참여하고 있는 페로는 지금껏 플라칼 가와 싸우면서 정작 자신의 가디언부대를 동원한바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주변에 알짱거리는 것이 발견된적은 있었지만 실제 교전을 벌인 일은 없었다. 말하자면 근위대가 제후지역 일에 관여한다면 자신도 밑의 직할병력들을 동원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번에 제파가 들고 온 정보는 그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잡아뭉개는 그것이었다.
"이제 놈들이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병행하겠다 이거지? 이제 자신감이 붙었다는 건가?"
입가를 일그러뜨린 베흔이 황제령 지도를 새삼스럽게 다시한번 살펴보았다.
프라임 지역과 ㅤㅋㅞㄹ크, 타르서스의 3지역이 만나는 속칭 '트라이앵글'지역은 성전의 해 시절에는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이후 세나우스 2세 시절, 황제령에 소위 '권역별 방어체계'가 완성되면서 근위대에서 일부 지역을 제외한 황제령 모든 곳의 수송선과 셔틀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근위대 병력이 곳곳에 최대한 분산되면서 그 전략적 가치가 크게 줄어들어버린 그런 곳이었다.
적도가 가로지르는 고원 사바나지대과 해발 50스타디아급의 거대한 산악이 자리잡은 이곳은 남쪽으로는 타르서스 사막, 북쪽으로는 프라임 대사막, 동쪽으로는 수에니 반도와 서쪽으로는 ㅤㅋㅞㄹ크를 끼고 있었고, 성전의 해에 철저하게 파괴된 이후로는 400여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사람이라곤 거의 살지 않는, 야생동물의 낙원으로 남아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던 이 지역을, 한낱 게릴라 집단이라 여겼던 ㅤㅋㅞㄹ크의 코아 전사단 정규군 보병대 무려 3만이 툭 튀어나와 이곳 산악에서 감시업무를 수행하던 1천여명의 산악대대를 눈 깜짝할새 쫓아내버린 것이었다.
코아 전사단이 제후지역 평정때까지는 밀림에서 숨죽이고 있으리라 믿고있던 베흔으로서는 한마디로 '뒤통수맞은' 꼴이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무려 '3만'의 대병력을 그곳에 가져갔다는 건 녀석들의 총 병력이 못되어도 5, 6만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배후에 있는 페로 가디언부대와 3만 5천여 타르서스 직할군을 따져보면 베흔으로서도 '나잡아잡수시오'하고 배짱좋게 정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저 망할 놈들을 함부로 공격할수도 없는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도리어 제파가 이끌고있는 2만여 ㅤㅋㅞㄹ크 토벌군이 잘못하면 '토벌당하지 않을까'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요는 자존심이건 뭐건 다 집어치우고 동부를 어떻게해서든 빨리 무릎꿇게 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베흔이 큰 결심을 한 듯 부하들을 향해 돌아섰다.
"파예드 아카데미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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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149층의 태자 처소에서 자신의 짐을 정리하던 주페 태자는 이젠 휑 해진 널찍한 방 안을 빙 둘러보았다. 남극성당에 입학하면서 황궁을 사실상 떠난 이후로 기껏해야 큰 행사가 있을 때나 이곳에 오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어린시절을 외롭게 보냈던 이곳을 '정말로' 떠나면서 드는 감회는 남다를수밖에 없었다.
정력적으로 국정에만 열중했던 어머니 세나우스 2세는 자식들에게 그다지 다정다감하게 대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공적으로는 '황제'인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어느정도 제한적일수밖에 없었지만 그 빈자리를 채워주었어야 할 아버지 라바니 경 역시 하나뿐인 아들을 소 닭보듯 하는 꽤나 무관심한 아버지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숙부님. 도와드릴까요?"
문이 열리고 불쑥 나타난 건 아직 얼굴에 앳티가 남아있는 조카 코리온의 모습이었다. 그의 반가운 모습에 주페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참으로 오랫만에 품어본 웃음이었다.
"레곤은?"
"어머닌 기분 푼다고 묘지에서 오시자마자 일찌감치 동부에 가셨어요. 짐은 이미 어제 다 빼셨구요."
"아마 푸아킨 그친구 권고였겠지?"
"어떻게 아셨죠?"
코리온이 여전히 해맑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원리주의 유학자인 자신의 영향으로 이 길을 걷게 된 코리온 녀석은 사실 주페 스스로가 보기에는 개혁파 쪽으로 갔다면 훨씬 더 적당했을 성격이었다. 그는 수도승처럼 살아가야 할 원리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자유분망했고, 학문 외의 것에 대한 집착도 광적으로 강했다. 게다가 제국을 떠돌며 힘겹게 보낸 10년간의 청소년기 때문인지 공격적인 성격에 지나칠이만큼 강한 승부근성과 생존본능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주페 자신이 녀석의 그 광기 혹은 집착을 억누르고 있지만 자신이 없어지면 언제든 그 뛰어난 머리를 악용하는 광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학자로 돌변해버릴 수도 있는 녀석임을 주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아직은 세상의 때가 그다지 묻지 않은---물론 이것이 연인을 바라보는 그다지 객관적이지 못한 자신만의 착각일수도 있다는 건 주페 스스로도 가끔식은 깨닫고 있었다.--- 이 '순수한' 조카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주페는 새삼스러운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주페가 진정 믿고 기댈 버팀목이 되어줄 소중한 존재는 이제 코리온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이 행복감 역시 어쩌면 지금 한순간일 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형 로노가 과연 조용히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그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괜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빨리 이곳을 뜨는 게 제격이지......"
텅 빈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는 주페의 표정엔 묘한 불길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가 짐 싸드릴께요."
직접 팔을 걷어붙힌 코리온은 벽장 속에 들어있던 주페의 옛 옷가지들과 책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죠?"
조카가 열어보인 큰 벽장 안에는 칼과 방패, 갑주와 이런저런 무기들, 더미까지 들어있었다. 이젠 꽤 오래된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본 주페가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두고가야겠구나."
"우와, 무겁네."
코리온이 낑낑대며 집어든 건 꽤 긴 바스타드 소드였다. 한손검과 양손검의 중간치쯤 되는 이 칼은 꽤 강한 힘과 체력이 필요한, 다루기 힘든 무기중의 하나였다.
"30년 전에 여기 넣고 들쳐본일이 없었는데......"
힘들어하는 조카의 손에서 칼을 받아든 주페는 그 큰 검을 한손에 뽑아쥐고 능숙하게 품세 하나를 취해보았다. 비교적 가벼운 한손검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올려치기 품새였지만 그는 이 큰 검을 쥐고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날카롭고 놀랍도록 빠른 검의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유학자답지않은 굵고 다부진 주페의 팔이 검은 무명포 밑에서 간간히 드러나고 있었다.
다른 여느 태자들처럼 체계적으로 무술수업을 받았던 주페는 황실 교사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무예에 훌륭한 재능을 보이면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주변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일도 있었다. 문무에 고루 능한 이런 둘째아들의 모습에 무척이나 흡족해하던 세나우스 2세는 한번은 아들에게 학자의 길을 그만두고 군인이 되는 것을 권하기까지 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2차 혼란기, 35만 남-서부 연합군 사령관으로 승전을 이끌어내면서 무장으로서 절정의 순간에 올랐던 그는, 종전 직후 갑자기 '학문적 이상을 위해 검을 놓겠다'고 선언해버린 이후 40여년간 당시의 약속을 충실히 지켜오고 있었다.
"실력은 별로 녹슬지 않았구나. 그래도 여기 남겨두고 가야겠다. 여기 올 새 태자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지."
칼을 도로 안에 집어넣은 주페는 옛날 자신이 입던 갑주와 투구를 손으로 한번씩 쓰다듬어보고는 다시 벽장문을 닫았다.
"그럼 짐은 다 싼 것 같은데요?"
코리온이 가방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그럼 가자. 학교에서 보낸 셔틀이 기다리고 있을거다."
주페의 손짓에 밖에서 기다리던 십여명의 황궁 시종들이 들어와 그의 많지않은 짐들을 챙겨들었다.
"으, 음......"
시종들을 거느린 채 방을 나서던 주페는 건너편 오넬론 태자 숙소 쪽에서 막 나오던 세네피스 태자빈과 순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주페 조금 뒤를 따르던 코리온이 갑자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학교로 돌아가시는군요."
입가에 웃음을 지은 세네피스가 꽤 다정한 어조로 이젠 아주버님이 된 주페에게 먼저 말을 건넸지만 주페는 그에게 사뭇 무표정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예. 셔틀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럼 이만....."
세네피스에게서 바로 신경을 끊어버린 주페는 망연자실한 표정의 세네피스에에게 바로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제수인 제게.......조금만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시면 안됩니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세네피스가 주페의 등에 대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세네피스를 돌아보았던 주페는 여전히 쌀쌀맞은 투로 물었다.
"묘지에도 안나오셔서......식장에서 크게 다치셨는 줄 알았더니......그럭저럭 괜찮으시군요."
순간 움찔 한 세네피스의 회색빛 눈시울이 갑자기 조금 떨리고 있었다. 사실 세네피스의 옆구리 상처는 지금까지의 열흘은 고사하고 이삼일 정도만에 엔간히 움직이는 데는 큰 지장없을 정도로 아물었던 터였다.
"중상을 입으신 오르마즈 경께서 그몸을 하고도 나오셔서 놀랐습니다. 감사하다 전해주십시오."
세네피스는 주페의 말이 무얼 뜻하는 것인지를 일찌감치 눈치챌 정도로 충분히 영리한 여자였다. 세네피스의 창백해진 표정을 뒤로하고 주페는 주기장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주페는 이미 세네피스가, 아니 카파키 가문이 영원히 미제로 남게 될 이번 황제 암살사건에 어쩌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름대로의 심증을 갖고있었다.
코리온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셔틀 주기장을 향해 걷는 숙부의 뒤를 말없이 따를 뿐이었다. 꽤 한참을 걸을동안 그들 사이에는 묘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주페! 주페!"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자리에서 멈춰선 주페가 뒤를 돌아보았다. 격앙된 얼굴의 덩치큰 남자가 팔을 뻗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에 주페가 뒤로 돌아서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벨리크 고모님과 함께 계신다더니....."
꽤 서둘러 달려왔는지 아들을 쫓아온 라바니 경의 숨이 목에까지 올라 있었다.
"방금 101층 근위대에서 오는 길이다!"
"그런데요?"
주페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근위대가 로노 녀석을 지지하지 않기로 했어! 그녀석 아버지였던 가잔 클라투스 그새끼를 정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코리온이 주페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주페는 여전한 표정으로 눈만 멀뚱하니 뜨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들이 너무 좋아서 넋이 나간 것이라 믿었는지 라바니 경은 주페의 양 어깨를 힘있게 잡으며 목소리를 더 높였다.
"가잔 클라투스 그놈 형이 역모로 부관참시당했다는 건 다 알잖니! 베흔 그 똑똑한 놈이 제대로 찍어냈지 뭐냐! 이제야 나라가 포고령대로 제대로 돌아가려나보다!"
주페는 눈에서 빛을 번쩍이며 언성을 높이고 있는 아버지가 무안할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식의 적서구별은 상급귀족계급 이상의 무분별한 증가와 유산배분 문제를 막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이오니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자손에까지 그 구별을 적용함은 합리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의 뜻밖의 대답에 기겁을 하고 놀란 라바니 경은 잠시 멍 해져 있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라바니 경은 아들의 어깨를 앞뒤로 흔들며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선대폐하께서 5년 전 날 정실이라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던 걸 모른단 말이냐! 그러니 네가 진짜 제위 후계자가 된단 말이다!"
"그러시기로 말하면 8년 전엔 오넬론과 레곤의 아버지인 데오도스 호지 님께도 같은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망할놈! 너 도대체 제정신이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라바니 경이 아들의 어깨를 확 떠밀었다.
"로노 새끼가 제위후계권이 없다면 둘째인 네가 후계자라는 것이 논의할 여지가 없는것인데! 네가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다니!"
"로노 형님이 제위에 오르셔야 한다는 제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황실의 수족에 불과한 근위대에서 무어라 말했던 지금껏 장태자로 인정되어온 그분의 위치가 흔들려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도 빨리 서부로 돌아가심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아들이 답답함에 발을 동동 구르는 라바니 경을 뒤에 남겨둔 채 주페는 태연하게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과 함께 한마디 낮은 탄식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걱정어린 표정의 코리온은 근심으로 가득한 숙부의 얼굴을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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