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1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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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딱 네 스타일이라는 전하 말씀이 왜이리 가슴에 와닿냐."
자신의 밑에 배속되게 된 3천명의 에키트 족 경보병들을 바라보며 멍 해져있는 네피에게 시로가 깔깔대며 농담을 던졌다. 수송선에서 막 내려선 이들은 라멜라갑옷에 원형방패, 못이니 칼날을 잔뜩 박아놓은 위협적인 건틀렛을 낀 손에 섬뜩한 도끼 한개씩을 쥐고 그 흉악스러울 정도의 인상을 품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있었다.
워낙 급하게 이곳에 와서인지 제대로된 제식 갑주 대신 그들 부족에서 입던 제멋대로의 갑주를 입고있었지만 덩치나 계급, 성별불문하고 온몸과 얼굴에 가득한 흉터들과 손에 들린 도끼, 6척을 넘지 못하면 난장이로 보일 정도의 그 엄청난 덩치들만 보아서도 엔간한 사람이라면 시선을 피하고 싶어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바로 이들이 2차 혼란기, 코라산의 산악에서 8백대 9천이라는, 경이적인 승전기록을 남긴 탈라스 극지 수렵족들이었다.
그들 선두에 선 기수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누런 빛의 꽤나 멋대가리없는 밋밋한 군기를 치켜들며 선두에 우뚝 섰다. 아무 문장도 없는 그 군기를 보고 저 '야만족'들의 미적 감각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남이 느낄 쓰잘데기없는 심미감보다는 2백여년 전 그들, 혹은 그들 조상들이 잡아죽인 남부병사들의 껍질로 만들었다는 그 사실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똑같은 도끼잡이여도 너하고 나하고는 스타일이 틀리다니까. 이제 알겠냐?"
시로의 계속된 악의없는 농담에 네피가 입을 삐죽거렸다. 탈라스에서 새로 도착했다는 이 '무서운 보병'들을 구경하러 나온 제네르가 혀를 내두르며 옆에 선 페로에게 귀엣말을 보냈다.
"이거......완전히 적재적소에 딱맞춰 도착했군요."
이들을 보자마자 '용도'를 생각해낸 제네르의 순발력에 페로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저새끼들......이제야 임자 만났군."
살기어린 미소를 지은 페로는 멀리 요새 동쪽으로 보이는 숲---적 기사단과 경보병들이 숨어있는---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악이나 숲에 유난히 약한 동부연합군의 약점을 믿고 두다리 뻗고 지내고있을 저녀석들도 이제 좋은날 다 지난 셈이었다. 웃음띤 얼굴의 제네르가 한마디 덧붙였다.
"탈라스 북극의 숲과 툰드라에서 수렵과 나무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녀석들입니다. 말은 못타지만 숲과 산악에서의 백병전 능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난전이라면 당장 실전에 투입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우리가 싸울 적들이 도대체 누굽니까!"
선두에 서 있던 전사들이 갑자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냥 '남부'라며 생각없이 대답하려던 네피를 가로막은 제네르가 대신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2차 혼란기 때 탈라스의 씨를 말리겠다며 노인과 어린아이 5천 명을 학살했던 바로 그 남부놈들이다!"
자신도 탈라스 출신임을 나타내듯 오른팔의 큰 흉터를 내보이는 제네르의 모습에 순간 흥분한 그들이 일제히 웅성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네피가 제네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남부놈들이 탈라스에서도 그렇게 못된짓을 했었어?"
"마을 하나 습격해서 백 명쯤 죽인 건 사실이죠."
제네르가 아무렇지않게 대답했다. 제네르답지않은 그 '뻥튀기'에 네피는 차마 웃지도 못한 채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고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제네르의 그 말이 약발이 통했는지 그들의 웅성대는 소리는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시선을 똑바로 고정시킨 페로는 한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그들 보병들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탈라스에서 이들 보병들을 데리고 온 우베가 페로에게 슬그머니 다가서며 물었다.
"저어, 아메스 아씨는......"
"왜?"
페로가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전하께서 중상이시온데 아메스 아씨께서 전하께 아무 연락도 없으셔서......네피 님도 따님 일을 모르시는 것 같고......"
"말 안했다. 분위기 흐뜨러뜨릴 필요는 없잖나."
페로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왜? 카렐이 아메스를 애타게 찾기라도 하나?"
페로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들어 있었다. 주눅이 들어버린 우베가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뇨, 그게 아니고 황후폐하께서......"
"전장에서 정신상태가 흐뜨러질까봐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고 말씀드려라. 네피 녀석도 마찬가지고. 이곳 전투가 끝나면 알려줄테니."
"그런데 황후폐하께선......"
"왜이리 잔말이 많지?"
페로가 버럭 화를 내자 기겁을 한 우베가 머리를 조아리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오랫만이네요! 그분께선 잘 계시죠? 요즘 통 연락이 없으시네요."
지난번 자신이 포로로 잡은 달리 플라칼과 함께 모습을 나타낸 아메스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는 인삿말을 던지고 있었다. 허벅지의 관통상으로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걷고있는 달리는 우베와 함께 탈라스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휴, 전 짬밥이 안돼서 밖에 개인연락 못한다구요. 먼저 연락 좀 달라고 해 주세요."
지난번 큰 전공을 세운 아메스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보였다. 페로의 눈치를 얼른 살핀 우베가 마지못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리죠."
셔틀에서 내려선 코리온의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아보였다. 바얀 오아시스의 패전과 에키트 족 인질들의 집단탈출사건으로 잔뜩 풀이 죽어있던 샤드니는 탈라스까지 찾아온 코리온이 그것에 관해 별다른 말이 없자 도리어 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긴 머리를 치켜올리며 키타이 사막의 맑은 하늘을 꽤나 기분좋게 올려보던 코리온은 자신의 앞에 엎드린 샤드니에게 가벼운 눈웃음까지 지어보이고 있었다.
"날씨는 좋구나. 저녁이라 그런 것인지 아켐보다는 조금 선선한 것 같구나."
"그러하옵니다."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코리온을 사령실로 인도하던 샤드니는 결국 먼저 입을 열기로 맘을 먹었다.
"그동안 안좋은 일이 있었으나......"
"후훗, 현상유지만 하고 있으면 된게야."
"예?"
코리온의 뜻밖의 한마디에 샤드니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내가 이곳으로 출발한 직후에 베흔 녀석이 날 방문하겠다고 그랬다더구나."
"......"
"근위대장 그자는 지금쯤 날 만나고싶어 몸이 잔뜩 달아있겠지."
빙긋이 웃음지은 코리온은 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사령실 엘리베이터에서 말없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들을 조금만 더 궁지에 몰은 다음에 만나줘야겠다."
그제서야 코리온의 말귀를 이해한 샤드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남부제후군이 최대한 몰릴데까지 몰린 후에 협상을 시작해서 '받아낼 것'을 받아내자는 심사임이 확실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도착한 사령실에는 십여명의 내로라하는 주요 지휘관들이 이 '서부의 우상'에게 서둘러 절을 올리고 있었다. 다만 뭣 씹은 표정의 라바니 경은 마지못해 그에게 고개를 까딱 하니 숙였을 따름이었다. 그의 얼굴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상석에 자리잡고 앉은 코리온은 사뭇 당당한 자태로 이들 지휘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손에 칼을 쥐고 그런 코리온의 바로 옆에 자리잡고 선 샤드니는 오랫만에 연인을 만난 기쁨을 애써 감추며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가져갔다.
누가보아도 흠잡을데 없는 이 수려한 외모의 학장에게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현명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샤드니는 이런 그의 옆에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있다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먼 옛날,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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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이십니까? 누님, 남부에 혼자 다 오시고......"
네페티 부인에게서 갑작스럽게 부름을 받은 두겐과 샤드니는 굳은 얼굴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촌누이이며 서부 최고제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오빠의 죽음으로 21살의 어린 나이에 플레렌 가의 종장이며 서부 최고제후에 오른 네페티 부인의 가문내의 위치는 사실상 껍데기뿐인 그것에 불과했다. 가문의 거의 모든 중대사는 속칭 가문 원로로 불리는 네페티 부인의 숙부와 다른 친척들의 손에 의해 처리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남부 최고제후 테번 공과 네페티 부인의 정략혼 역시 전임 최고제후의 사후 잠시 권력을 움켜쥔 그들 원로들이 아직 나이어린 새 최고제후가 내정을 장악하기 전에 남부로 '돈받고 팔아치운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학자들의 권위 밑에서 제후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서부였지만, 플레렌 가는 한술 더 떠서 종장이며 최고제후가 그 이름값도 못하고 있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자기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의 네페티 부인이 그나마 기대를 걸고 있는 건 비슷한 나이대의 이 두 사촌동생 뿐이었다.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경학과정 박사생도로 있는 두겐은 네페티 부인보다 겨우 두 살 어린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남극성당에서 경세지학을 공부하며 미래를 기약하고 있던 샤드니는 두겐보다 3살 어렸지만 몇년 내로 박사과정 졸업이 가능할 정도로 훌륭한 생도로 손꼽히고 있었다.
물론 이 둘 역시 아직은 젊은 청년들에 불과했지만 네페티 부인이 가문의 실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앞으로 반드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소중한 동생들이었다.
"테번 공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샤드니가 네페티 부인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독한 의처증으로 평소 부인이 친정에 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던 테번 공이 감시할 수하 한 명 붙이지 않은 채 부인을 이곳에 보내준 건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페티 부인은 남편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주제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황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잘 알거다."
"물론입니다."
"어제 북부에서 연합군 결성안을 발표했어."
샤드니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겐을 돌아보았다. 지금껏 가문에서 '서명하는 인형'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누이가 '정세'를 들먹거리며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넬론 태자가 적장자라면서 결국 일을 벌리고 말았지. 그네들이 일을 터뜨렸으니 동부와 남부도 경쟁적으로 군비경쟁에 들어갈거다."
"지금.......서부에서도 연합군을 결성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두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주페 태자께선 제위엔 관심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히셨습니다. 서부 피가 섞인 분은 그분 한분 뿐이시니......저런 진흙탕싸움에 저희가 끼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시다면 생기시게라도 해야죠."
두겐의 '태평한 소리'에 흥분한 듯한 큰 목소리로 끼어든 건 다름아닌 샤드니였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네페티 부인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정해라. 샤드니. 나도 두겐 의견에 동감이다. 내 너희들을 불러들인 건 연합군을 조직하자는 게 아니고 서부가 어떻게하면 이 와중에 중립을 지키면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는지를 결정하려는거야. 그게 정말로 주페 태자저하와 서부를 지키는 길이다."
누나의 설득에 샤드니가 두 눈을 부릅뜨며 반박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서부에서 제국의 실권을 잡은 일이 한번이나 있었습니까? 세나우스 1세 폐하는 황후의 출신지역인 남부를 그리도 총애하셨고, 선대폐하는 제후들을 짓밟는데 여념이 없으셨죠. 기껏 황실을 대신해서 우리 서부가 2차 혼란기 승전을 거둔 이후에도 남부에 더 신경을 쓰셨지 언제 서부에 관심을 두신 일이 있으셨냐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태자가 후계권이 부인되었으니 제2태자가 계시는 우리 지역이 이분을 황제로 밀어드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는 샤드니에게 네페티 부인이 급히 입을 다물라 손짓하고 있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던 샤드니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나무는 가만히있으려 하되 바람이 놔두지 않는다 하더니....."
검은 무명포 차림의 주페 태자가 눈살을 조금 찌푸리며 이 응접실에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당혹한 샤드니의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
"그래도 일단 제인들의 의견을 경청하심은 당연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숙부의 뒤를 따라온 코리온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에 샤드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앳되어보이는 얼굴로 보아서는 샤드니 자신과 크게 나이 차가 나지는 않는 듯 싶었지만 이 큰 키의 수려한 용모의 청년 어깨에는 수찬을 뜻하는 금줄 2개가 새겨진 파예드 아카데미 머플러가 걸려 있었다. 잡티하나 없는 그 고운 얼굴에서 빛나고 있는 갈색 눈동자에 내비치는 특유의 총명함과 매력, 그리고 너무나도 맑은 목소리에 샤드니는 솟구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주페는 꽤 어른스럽게 말하고 있는 조카를 힐끗 돌아보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둘만 있을때면 항상 밝고 티없이 구는 조카였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는 이녀석의 모습은 위엄있는 대군이며 촉망받는 원리주의 유학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상석으로 인도된 주페는 네페티 부인과 나란히 자리잡고 앉았다. 키는 크지 않지만 마치 무사처럼 다부진 체구의 주페와 큰 키의 날씬한 코리온의 모습이 특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주페가 네페티 부인에게 먼저 인삿말을 던졌다.
"갑작스레 청한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고제후님."
"태자저하께서 이곳까지 몸소 찾아주시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쪽은 제 사촌동생들입니다."
네페티 부인이 주페와 코리온에게 둘을 소개하자 태자 역시 바로 옆에 당당히 서 있던 코리온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 조카이고 레곤 공주의 장남인 코리온 세닉 리쿠 대군이라네. 지금 우리 학교 사장지학 수찬으로 있지."
두겐과 샤드니의 인사를 받고 난 코리온은 샤드니의 바로 옆자리에 침착하게 자리잡고 앉았다. 주페가 네페티 부인을 바라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수치스런 일이나 이번 사건으로 제 동생들이 준동할 것입니다. 처가인 북부와 남부 일부를 등에 업은 오넬론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할 것이나 동부 특유의 결집성과 명분이 있으니 형님이신 로노 장태자전하 역시 작금의 사태에 순순히 물러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부는 비록 가장 강력하나 오넬론과 모디아크, 타니토가 지지세력을 나누어 가질 것이니 크게 부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레곤은 푸아킨이라는 걸출한 모사가 곁에 있으니 함부로 이 싸움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부가 총집결한다면 동부 정도는 충분히 꺾을 수 있을겁니다."
샤드니가 다시 말을 꺼내자 네페티 부인이 그에게 조용히하라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젊은 혈기가 넘치는 샤드니는 그런 누나의 눈짓도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북부제후군이 강력하다지만 우리에겐 제국의 많은 유학자들의 지지가 있습니다. 태자저하께서 지금까지 주창하시던 왕도정치를 구현하시겠다 선언만 하신다면 제국의 50만 유학자들 모두는 기꺼이 태자저하를 지지할 겁니다."
"자네 아직 순진하군."
샤드니의 고집에 주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이상은 절대 칼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용할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주페의 말을 가로막은 건 다름아닌 코리온이었다.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다는듯한 조카의 행동에 주페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무력이라는 것은 그 근본이 천박하여 절대 우리의 학문과 함께 움직일수는 없을 것이오나 제니안이 TSG와 손잡아 이 제국을 이루었듯 수단으로서는 충분히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옆에 앉은 코리온이 자신의 의견을 유창한 논조로 지지하자 샤드니의 입가에 미소가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참으로 많은 피를 보았지. 인정하고싶지 않지만 제국의 성립은 왕도를 따르는 바른 길이 절대 아니었네."
주페가 코리온을 가볍게 째려보았다.
"성전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피를 흘렸을 것입니다."
코리온이 또다시 단호하게 대답했다. 서부의 중립방안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마음먹고 데리고들어온 조카가 계속 자신의 의견에 반기를 들자 주페 태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50만, 아니 그 중 35만을 차지하는 원리주의 유학자들 모두에게 칼을 들려 전장에 세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에 제국을 교리를 따르는 엄한 국가로 만들어야 할 것이옵니다. 믿음이 뒷받침되는 제2의 성전에 천박한 북부의 창칼 따위가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대군마마 말씀이 극히 지당하십니다."
샤드니까지 조금 흥분한 어조로 즉시 맞장구를 치고 나서자 주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명의 목숨과 만 명의 목숨은 그 무게에서 차이가 없다 했다. 귀천을 불문하고 사람의 목숨은 그 어느것보다 소중한 것이니 작금의 일들을 유혈사태로 몰고가는 바보짓을 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나와 서부가 나선다면 일을 평화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니......"
"숙부님, 하오나......"
코리온의 말을 그대로 무시해버린 주페 태자는 옆에 앉아있는 네페티 부인을 돌아보았다.
"부인께서 앞장서서 서부의 준동을 막아주십시오. 서부가 굳건하게 중립을 유지해주기만 하신다면 제가 나서서 근위대 손에 놀아나고 있는 태자들을 설득할 근거가 될 것입니다. 서부는 지금은 나서는 것보다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진정한 힘을 보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네페티 부인 역시도 자신을 능욕했던 장태자를 황제로 만들겠다는 주페의 의견이 못내 내키지는 않는지 조금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견이 묵살당한 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감추고 있는 코리온이 앉아있ㅤㄷㅓㅆ다. 그 옆에 앉아 연신 이 대군을 훔쳐보던 샤드니는 자신과 '뜻이 통하는' 이 매력적인 인물에게 더더욱 묘한 친근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주페 태자와의 만남을 마치고 지친 표정으로 자신의 침소로 돌아오던 네페티 부인은 사자조각의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서며 주변을 한 번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플레렌 가 종가 정원인 헤네랄리페 바로 옆에 자리잡은 이곳 부인의 침소는 종가에서도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침소 앞의 작은 안뜰에 들어서며 부인은 입구를 지키던 경호원에게 짧게 물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최고제후님."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그 경호원은 누가보기에도 보통의 서부 사람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크지않은 단단한 체구에 사나운 인상을 하고 있는 이들은 타르서스 출신 경호원들이었다. 멀쩡한 종가 경비병들을 놔두고 이들을 고용한 건 가문 원로들의 영향력을 잘 아는 부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화려한 침실에 들어선 네페티 부인은 제일 안쪽의 침대에 쳐진 화려한 실크 베일을 조심스럽게 들추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두툼한 비단담요에 몸을 파묻고 편히 누워있던 오르마즈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네페티 부인에게 가벼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마즈의 앞에 걸린 스크린에서는 방금전 모임을 가졌던 접견실의 모습이 그대로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네페티 부인이 오르마즈에게 마치 보고라도 올리듯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대로 주페 태자저하의 뜻은 확고해보이시는군요. 이대로만 나간다면 그분 뜻대로 이번 사태가 잘 수습될수도......"
자신의 말에 오르마즈가 갑자기 고개를 가로젓자 네페티 부인이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코리온 대군이 저대로 물러날 인물이 절대 아닌 듯 합니다. 어떤 식으로건 일을 벌릴 듯 하오니 각별히 신경쓰셔야 할 겁니다. 문제는 부인의 사촌동생인 샤드니가 그에 동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빨리 학교로 돌려보내고 둘을 떼어놓으십시오. 강경한 주장을 펼치는 자들이 동지를 찾았다는 건 머릿수가 둘로 늘어났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겁에 질린 네페티 부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 쯤 미쳐버린' 베흔도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얻은 이 믿음직한 조언자의 존재에 네페티 부인은 내심 하늘에 감사하고 있었다. 오르마즈 또한 지금의 이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서부와 주페 태자밖에 없음을 잘 알고있었다.
네페티 부인이 오르마즈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런 때 제 곁에 있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가문을 벗어나 숨어있을 곳을 제공해주셨으니......제가 더 감사합니다."
아직 창백한 얼굴의 오르마즈는 자신의 하나밖에 남지않은 손을 꼭 붙들어주는 네페티 부인의 선한 얼굴을 바라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생에게 철저하게 유린되고 이용당한 이 나이어린 여인에 대한 묘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슴속에 상기하며 오르마즈는 그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꼭 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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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부터 일찍 일어나 모레 전투씬에 올릴 그림 손봤더니 그새 아침이 다되었군요. 쩝. 오늘은 그래서 평소보다 일찍 올립니다. ^^
마지막으로... <코멘트와 추천은 작가의 양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