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4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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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로 기사단을 이끌고 서둘러 퇴각해 아군 우군에 합류한 제네르는 동부 중장기병들과 함께 대오를 정비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평소 우군의 총 지휘권을 갖던 제네르였지만 이번에는 기병사령관 토로 경이 합류하면서 지휘권을 내주고 원래의 슈로 기사단장의 지위로 되돌아와 있었다.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려 1만 8천의 적 기병들과, 후미를 따라오는 5천의 보병들 모습이 저녁의 어슴푸레함 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직 에키트 족이 손대지 않은 숲 측면에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들은 중군 쪽의 남부 중장보병들의 남진과 함께 이곳 동부기병대를 향해 전진해오고 있었다.
"별것도 아니군."
토로 경이 투구의 사이트를 내리며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제네르는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는 저 대담하다못해 멍청한것이 아닐까 싶은 기병지휘관이 자신보다는 차라리 더 적당하겠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람만 갑주를 입은 중기병까지 굳이 끼워넣어도 총 8천 5백 정도밖에 되지 않는 중무장기병에 6천 5백의 경기병을 거느린 입장에서 무려 1만4천의 중장기병과 4천의 경기병, 5천의 창보병으로 이루어진 저들이 결코 '별것 아닌' 존재는 아니었다.
게다가 네피가 이끄는 3천의 보병이 숲에 있을 나머지 보병들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언제든 합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난 여러 전투들에서 기껏 줄여놓았던 적 기병 전력이 다시 초기 개전시 수준으로 회복되면서 남부의 치솟는 사기외 동부 기병대의 허탈함이 희비 쌍곡선을 그리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군도 마찬가지겠지만 누가보기에도 명백하게 이쪽이 불리한 상황임을, 전력의 차원이 아닌 동원력의 차원에서 확실히 밀리고 있는 동부 입장에서 이곳 샤레이에서의 더이상의 장기전은 무리임을 제네르는 잘 알고있었다. 이번에 어떡해서든 마랄루의 요새를 되찾고, 전투를 확실히 끝내지 못한다면 곧 찾아올 라마단이 지난 후, 이후의 황제령 장악을 위해 전력을 비축하고 있던 남부가 이곳에 전면적으로 개입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군 기병들의 임무가 승전이 아닌, 이번 전투의 '키'인 서쪽 언덕의 좌군이 움직일 수 있도록 적 기병을 묶어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제네르는 멀리, 마랄루 요새 너머 보이는 서쪽의 언덕을 다시한번 올려보았다.
"선두에 히르직스 같군요."
스캐너를 보고 생각없이 말했던 제네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말고삐를 쥔 토로 경의 왼손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히르직스는 기사단에 맡겨주십시오. 아직 몸이 성치않으시니 발리와 제가 대신 맡겠습니다."
토로 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성격상 쉽사리 '그래라'라는 말을 내놓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제네르는 그가 무어라 참견하기 전에 재빨리 자신의 긴 창을 꼰아쥐고 발리와 함께 기사단 선두에 섰다.
"망할, 히르직스 저녀석하고는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네르가 얼굴을 찡그렸다. 엔간해서는 위험한 싸움을 하지 않는 그의 스타일에 적장과 직접 맞붙어야 할 이런 싸움이 달가울 턱이 없었다. 히르직스 그녀석이 자신만 보면 반 쯤 미쳐버리는 것을 잘 아는 제네르는 이번에도 녀석을 보면 사방으로 도망이나 다니며 시간이나 끌다가 혹시 운좋으면 사지로 유인해볼 궁리도 하고 있었다.
"적 궁기병들 모습이 예전같지 않군요."
방패를 쥔 왼손에 힘을 주며 발리가 중얼거리자 제네르가 건성 대꾸했다.
"지휘관 둘을 연달아서 모두 잃었으니......."
발리 말마따나 적 기병의 선두에서 달려오는 궁기병들의 대오는 지난번 루사에서 제네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 비해서 현저하게 흐뜨러져 있었다. 베아트릭스의 지휘하에 자로 맞춘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그들의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늘어져 있었고 자신감을 상실한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지난번의 기습전에서 보았듯이 이제 그들은 전처럼 독립된 부대로서 활동하지도 못하고 기사단과 함께 진형을 이루어 움직여야 할 보조공격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진격!"
적 궁기병들의 사정거리가 가까와짐을 깨달은 동부 경기병들이 일제히 방패를 힘있게 움켜쥐며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1스타디아 거리에서 그들이 일제히 제1발을 날렸다.
"계속 전진한다!"
우군사령관 토로 경이 악을 쓰며 내지른 외침에 적 궁기병들의 1차 사격을 받아낸 이쪽 경기병 7천이 하늘을 새카맣게 덮을 정도로 밀도높은 투창공격을 날렸다. 그 위세에 천 3백여명의 적 궁기병들은 채 2발공격도 펼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전에는 한번도 보이지 않던, 꽤나 황당한 모습이었다.
"경기병 2선!"
토로 경의 명령에 7천의 경기병들이 평소처럼 중장기병들의 뒤로 썰물처럼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전처럼 투창공격을 위해 먼 후방으로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었고, 중장기병들만으로 이루어진 쐐기꼴의 돌격진형 후미에 바싹 달라붙어 함께 돌진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플라칼 가의 혼성군 돌격에 대응하기 위해 제네르가 생각해낸 새로운 방안이었다.
"돌격!"
토로 경의 외침은 양쪽의 선두를 이룬 기사단과 동부 중장기병들이 충돌하며 내는 째지는 굉음에 파묻혀버렸다. 그리고 수백의 기병들이 이 첫 충돌에서 낙마하거나 목숨을 잃고 있었다.
"남부기병놈들 별것 아니다! 녀석들은 백병전에서는 쉽게 당황하니 중장기병들이 놈들을 묶으면 경기병이 합세해 마무리한다! 기사단에 섞여있는 적 궁기병은 경기병이 잡는다!"
토로 경의 지시에 첫 충돌로 속도를 잃은 적 중장기병들에게 후미에 대기중이던 경기병들이 벌떼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특히나 이번에 처음으로 합류한 오천여명의 남부 중장기병들은 이들 동부기병 스타일의 강력한 근접전 창술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경보병대는 서쪽으로! 동부놈들 중군과의 사이를 틀어막고 밀어붙여라! 적들에겐 예비부대가 없으니 뚫리면 끝을 낼 수 있다!"
남부 좌군의 사령관을 맡은 히르직스가 후미에서 따라오는 5천의 남부 경보병들에게 악을 쓰며 외쳤다.
델루지 가에서 지원군으로 막 도착한 그들 5천여 경보병들은 그간의 패전과 소모품 역할로 기죽어있던 플라칼 가의 경보병들과는 달리 힘과 사기가 최고조로 뻗어 있었다. 긴 창을 쥐고 5백여명씩 10개의 삼각형 예진을 이룬 그들은 동부의 우군과 중군 사이의, 동부기병대의 서쪽을 압박해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전열의 피아가 충돌하면서 숲 남쪽 평원은 어느새 거대한 기마 백병전장으로 변해버린 후였다. 양측 합쳐 3만이 넘는 중장기병과 경기병이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초원의 전장에 흩어진 채 사방팔방 뒤엉켜 지금까지 벌어진 중 최대의 기병 난전이 펼쳐지는 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적 기병들을 좀 더 철저히 묶어두기 위한 대응책을 고심하던 제네르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최소한 개인 기량에서는 남부기병들이 동부기병들의 상대가 아닌 이상, 난전에서는 동부기병들이 유리할수밖에 없었다. 대신 문제라면 이제 전장의 어느 한구석도 '안전한 곳'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장창을 쥐고 거대한 밀집대형을 이루어 서측에서 공격해오던 남부 경보병대 역시 피아의 기병이 온통 뒤엉켜버리자 제대로된 표적을 잃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뿌려지는 동부의 첫 도착선물은 경기병들이 하늘을 메울듯이 던져대는 무시무시한 투창의 소나기였다.
엔간해서는 적과의 백병전을 피하던 제네르는 자신까지도 어느새 적 중장기병들과 어울려 힘겨운 접근전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에 잔뜩 짜증이 올라 있었다. 그리고 난전이 계속되면서 그의 주변에도 주인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말들이나 자신의 말을 어딘가에 흘려놓고는 창이나 칼을 들고 뛰어다니는 '걷는 기병'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저 사이비 슈로 기사단놈!"
째지는 고함소리에 고개를 휙 돌린 제네르의 눈에 오십여명의 직할 기병들을 이끌고 제네르의 오른쪽으로 쳐오는 히르직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당혹한 제네르가 달아나기 위해 왼쪽을 돌아보았을 때, 이번에는 흰색 망토를 두른 역시 낯익은 녀석이 이십여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왼쪽에서 돌진해오고 있었다.
"이 망할 년아! 이번엔 결판을 지어보자!"
"이게 도대체 뭐야,"
양쪽에서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적병들을 보고 기겁한 제네르는 이십여명의 근위기병들만을 이끌고 허둥지둥 남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 둘이 마음먹고 지휘관인 자신에게 협공을 가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같은 난전상황에서는 '후방' 자체가 그다지 의미없는 단어였다. 히르직스와 릴라크도 눈에 불을 켜고 그의 뒤를 쫓았다.
"릴라크! 저놈은 내꺼니까 당장 동쪽으로 물러나서 녀석을 몰기나 해!"
"지난번에 저 망신준 놈이라구요!"
"명령이다!"
릴라크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멈춰설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릴라크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달아나던 제네르 역시 남쪽에서 몰려오던 오십여기의 남부 경창기병들을 만나 허둥지둥 동쪽으로 방향을 꺾고 있었다. 바로 제네르 자신이 생각해낸 난전 덕택에 '맘먹고 쫓아오는 적들을 만난' 자신이 도리어 위험에 처한 꼴이었다.
"아이씨!"
일단 근위기병들 중 대부분을 히르직스와 릴라크의 근위기병들을 막는 데 내보낸 제네르는 가까스로 서너명만을 데리고 다시 난전 중앙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악을 쓰고 달리던 제네르는 이미 중간중간 만난 5명이 넘는 남부 기병들을 혼자 말에서 떨어뜨린 후였다. 발리가 적장들의 악착같은 추격에 위험에 처한 그의 곁에 끝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오호! 지난번에 봐서는 형편없는 놈인줄 알았더니 실력이 제법인데! 저 창에 피묻은 것 좀 보게나?"
달아나던 제네르의 앞을 5명의 기병들과 함께 또다시 가로막은 건 다름아닌 릴라크였다.
"제가 맡겠습니다! 단장님은 빨리 달아나십시오!"
제네르의 위험을 직감한 발리가 3명의 기병들과 함께 즉시 창을 움켜쥐고 단장의 앞을 막아섰다.
"설마 지난번에 져준 걸 진짜 실력이라고 믿고있는 건 아니겠지?"
창을 높이 꼰아잡은 릴라크가 대뜸 발리를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이놈! 여기있었구나!"
우렁찬 고함소리에 제네르가 이번엔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새 제네르를 뒤쫓아온 히르직스의 창에도 피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그 역시도 부하들을 난전 와중에 어디다 다 떨구었는지 부장 한명만을 달랑 거느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시 달아나려던 제네르는 릴라크와 이미 맞붙어 싸우기 시작한 발리를 돌아보았다. 이자리를 피한다면 발리 혼자 앞뒤가 가로막힌 채 죽음을 당하고 말 상황이었다. 제네르는 하는 수 없이 창을 똑바로 치켜들며 낮게 말했다.
"슈로 기사단장 제네르 딜라코프 하크로딘이다."
"웃기지 마라! 슈로 기사단장은 내가 될 거였어!"
"예의라고는 쥐뿔만큼도 모르는 작자가 기사단장을 탐내다니."
"예의 좋아하시네!"
악을 쓰고 소리지르며 제네르를 향해 창을 똑바로 겨눈 히르직스가 괴성을 지르며 돌진해왔다. 제네르는 말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히르직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히르직스의 창끝이 거의 코앞까지 온 순간, 맞받아 돌진하려는 듯 싶던 제네르는 말 고삐를 살짝 잡아당겨 말을 뒷걸음시켜 뒷쪽 옆으로 방향을 홱 틀었다.
"썅! 이녀석!"
충격을 노리고 최대한의 속력을 받아 달려온 히르직스는 자리에 서지 못하고 한참을 더 달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말을 정지시켜 뒤로 돌리던 히르직스는 그제서야 눈 깜짝할새 자신의 등뒤로 다가오고있는 저 약삭빠른 적의 존재를 눈치챘다. 시작부터 히르직스를 놀리듯 피해버린 교활함은 접어두고라도 제자리에서 말을 돌려 그새 자신의 뒤에 따라붙은 믿기지않는 기마술에 히르직스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악!"
제네르를 향해 몸을 돌리던 히르직스가 그만 짧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제네르가 뒤에서 내지른 창에 왼쪽 겨드랑이를 베인 히르직스가 이를 악물며 뒤늦은 반격을 개시했다.
'제기랄'
제네르가 내심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음먹고 급소를 향해 날린 회심의 일격은 녀석이 빠르게 몸을 돌려버린 덕에 겨드랑이를 조금 벤 정도의 결과밖에 얻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뒤이어 날아온 반격은 제네르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공중을 한바퀴 돌려친 그의 위력있는 창날을 가까스로 쳐낸 제네르의 손목이 파르르 저려오고 있었다. 제네르가 미처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는 새 또한번 돌려친 창을 있는힘껏 받아낸 제네르는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말 뒤로 떨어질 뻔 하고 말았다.
'망할, 이정도라니.....'
히르직스의 엄청난 공격을 받아낸 제네르는 머리끝까지 털이 곤두서는 전율을 느끼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나마 적의 겨드랑이 상처 때문에 이정도일 것이라 생각하니 멀쩡한 상태였을 때 어떨는지는 상상하기도 싫을 지경이었다.
"썅!"
오른손으로 단단히 쥔 창끝을 축으로 공중에서 최대한 힘을 주어 휘돌린 제네르의 창날이 히르직스의 목을 겨낭하고 힘을 실어 내리찍히고 있었다.
"아익!"
제네르의 창을 받아낸 히르직스 역시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제네르의 기습공격에 베인 왼쪽 겨드랑이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기회를 잡은 제네르가 손목을 휙 돌려 히르직스의 어깨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히르직스의 견갑을 스친 창끝은 이번엔 그의 목 한쪽을 베어버리며 옆에 피를 흩뿌렸다. 신음소리와 함께 히르직스가 창을 떨구는 모습에 됐다 싶었던 제네르의 표정은 하지만 일순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런!"
히르직스는 창을 '떨군'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이었다. 견갑에 창 미늘이 걸린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왼손으로는 창 자루를, 오른손으로 말 어깨에 달려있던 도끼를 뽑아쥔 히르직스는 자신의 어깨에 걸쳐있던 제네르의 창을 힘껏 내리찍어 그대로 꺾어버리고 말았다.
"젠장할!"
뜻밖의 상황에 서둘러 창을 버리고 칼을 뽑아들려던 제네르는 히르직스가 휘두른 도끼를 어깨에 고정된 작은 방패로 가까스로 받아냈다.
"썅! 죽어!"
상대의 기마술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모를턱이 없는 히르직스는 도끼를 받아내느라 잠시 중심을 잃은 제네르에게 거칠게 몸을 날려 들이받고 말았다. 제대로 충격을 입은 제네르는 히르직스와 함께 말에서 바닥으로 거칠게 나딩굴고 말았다.
"내가 네놈을 순순히 보내줄 줄 알았냐! 이 사이비년아!"
낙마했다가 가까스로 일어선 제네르는 함께 땅바닥에 떨어진 히르직스가 거칠게 휘두르는 도끼를 어깨에 달린 방패로 막으며 뒷걸음치고 있었다. 검을 쓸 때 사용하는 큰 방패는 말에 달려있었지만 지금같아서는 더이상 말에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시한번 검을 뽑으려 허리로 손을 가져간 제네르는 히르직스가 기합소리와 함께 내리찍은 도끼를 방패로 막아냈지만 몸 쪽으로 미끄러진 도끼날은 치켜들고 있던 그의 왼손 손등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악!"
제네르가 비명을 지르며 또한번 뒤로 물러났다. 그의 새끼손가락이 그대로 잘려 바닥에 떨어져버렸고 약지와 중지 또한 거의 잘린 채 약간 남은 살갗에 매달려 너덜거리고 있었다.
"젠장할!"
그제서야 칼을 뽑아든 제네르는 왼손의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다시 반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히르직스가 휘두른 또한번의 도끼질에 제네르의 투구가 쩍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 있었다. 히르직스가 노렸던대로, 이런 백병전에서는 제네르가 히르직스의 상대가 아니었다. 두조각나버린 제네르의 투구가 피로 물든 채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오호, 금발에 파란눈이시군! 동부분답지 않으신걸! 살려줄수만 있다면 오늘밤 데리고 놀고싶다만 안되겠는걸!"
승리를 확신한 히르직스가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제네르의 밝은 금발머리가 덮고있는 이마 중앙으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려 어느새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도끼에 쪼개진 것이 투구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쏟아져내리는 자신의 피를 본 제네르 역시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는 큰 함성을 지르며 다시 히르직스에게 돌진해들어갔다.
"망할새끼! 누가 사이비인지 가려보자!"
히르직스의 도끼를 피한 제네르가 겨우 손가락 두 개 남아있는 왼손으로도 칼을 움켜쥐며 양손으로 검을 있는힘껏 휘둘려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왼팔에 달린 방패에 명중한 공격은 이미 다친 히르직스의 왼쪽 겨드랑이에 또한번 무시무시한 충격과 고통을 가하고 있었다.
"에익!"
히르직스가 무의식중에 거친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그리고 기회를 잡아 또한번 올려친 제네르의 공격에 히르직스의 투구 사이트와 치크피스, 장식까지 산산조각나며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동시에 갑주로 가려진 히르직스의 팔꿈치에 얼굴을 얻어맞은 제네르 역시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를 맞은 충격에 얼떨떨해있던 히르직스가 다시 도끼를 들고 비틀거리며 걸어와 쓰러져있던 제네르의 머리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악!"
공격과 함께 울린 건 제네르가 아닌, 히르직스의 비명소리였다. 넘어져있던 제네르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칼에 허벅지를 깊이 베인 히르직스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하지만 히르직스가 휘두르려던 도끼는 그대로 그의 손에서 미끄러지며 이미 투구가 날아가버린 제네르의 얼굴을 그대로 가격하고 말았다. 떨어지는 도끼 날에 얼굴을 얻어맞은 제네르가 눈을 감싸쥐며 바닥을 한바퀴 굴렀다.
"아, 아악......"
고통에 겨워하던 제네르가 왼쪽 눈에 박혀있던 히르직스의 도끼를 스스로 뽑아 멀리 내던졌다. 왼쪽 눈의 부서진 스코프 사이로 피가 펑펑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썅! 뒈져버려!"
거의 미친 듯 다시 몸을 반 쯤 일으킨 제네르는 쓰러져있던 히르직스를 덮치며 그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버둥거리던 히르직스의 뺨을 벤 칼끝은 그의 귀를 잘라내며 땅바닥에 내리꽂혔을 따름이었다. 히르직스의 결사적인 발길질에 채인 제네르가 한참을 밀려나 다시 나동그라졌다.
"이 독한 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히르직스가 칼에 베인 허벅지에 극도의 고통을 느끼며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이번엔 네놈도 끝내주마!"
땅바닥에 딩굴던 반쪽난 창끝을 주워들고 엉금엉금 기어온 제네르가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가까스로 치켜뜨며 바닥에서 막 일어나려던 히르직스의 목을 향해 힘껏 내질렀다. 하지만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찌르기 공격은 목 대신 뺨을 후려치면서 그의 투구를 대신 박살내버렸을 뿐이었다.
"썅!"
충격에 다시 쓰러진 히르직스를 향해 창을 높이 치켜든 제네르는 온 힘의 체중을 가해 그의 가슴으로 창을 내리찍었다.
"크헉!"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낸 제네르의 참격은 반사적으로 치켜든 히르직스의 오른손 건틀렛을 관통하고 미끄러지면서 은색의 두꺼운 갑주를 관통해 이 무서운 적의 갈빗대 사이의 살점까지 꿰뚫고들어갔다. 치명상을 입은 히르직스가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죽어! 당장!"
다시 창을 뽑아들려던 제네르의 오른손을 결사적으로 움켜쥔 히르직스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처절한 비명을 올렸다. 그의 손을 놓친다면 그의 목숨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는 셈이었다.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그에게서는 살기위한 마지막 괴력이 뿜어나오고 있었다. 제네르는 3개의 손가락이 잘려나간 왼손을 더듬거려 뒷춤의 단검을 뽑아들려 했지만 지독한 출혈로 마비된 손은 거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네르 경! 제네르 경!"
제네르가 위험헤 처했다는 소식에 이십여명의 근위기병과 함께 달려오던 토로 경이 거의 참극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져있는 이곳의 모습에 크게 놀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히르직스 네놈!"
쓰러져있는 히르직스의 모습에 흥분한 토로 경이 창을 치켜들고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제네르의 근위병들과 싸우느라 뒤쳐졌던 히르직스의 근위기병들 역시 사령관을 구하기 위해 뒷쪽에서 달려오고 있었지만 토로 경을 가로막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중상을 입은 채 제네르에게 깔려 움직일 수 없는 히르직스는 꼼짝없이 죽음을 당하고 말 형국이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낸 히르직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거의 기운을 잃고 흐느적거리는 제네르를 힘껏 옆으로 밀어내고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깨진 머리를 붙들고 히르직스를 어떻게든 쫓아가려 몸을 일으키던 제네르는 결국 피범벅이 되어버린 머리부터 천천히 기울며 흙바닥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대장군님! 빨리 달아나십시오!"
부상을 입은 발리를 말에서 떨어뜨린 릴라크가 급히 방향을 돌려 토로 경을 대신 가로막았다. 그사이 릴라크의 호위기병 한 명이 말에서 급히 뛰어내려 쓰러져있던 히르직스를 부축해 짊어지고 허둥지둥 뒤로 달아나고 있었다.
"대장군님을 지켜!"
히르직스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달려온 근위기병들과 토로 경의 근위기병이 광음을 내고 충돌하며 이 조그만 싸움터는 또한번 정신없는 백병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빠져나간 히르직스는 어느새 남부 근위기병의 말에 실려 이 전장에서 급히 몸을 피하고 있었다.
"단장님! 단장님! 어디계십니까!"
릴라크의 공격으로 낙마했던 발리는 토로 경의 기병들과 남부 근위기병들간의 접전이 벌어진 틈새로 재빨리 빠져나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적 기병들의 총사령관 히르직스에 중상을 입혀 쓰러뜨린 제네르의 용맹이 얼마나 큰 전공인지 발리는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기쁨에 넘친 얼굴로 제네르를 찾던 발리의 표정은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제네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조금씩 일그러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 발을 동동 구르던 발리의 눈에 들어온 건 제네르가 타고있던 얼룩무늬 준마 아타르가 안장 위를 비운 채 땅바닥에 코를 대고 무언가 연신 킁킁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단장님!"
희뿌옇게 일어난 먼지 속에서 아타르의 발굽 밑에 보이는 희미한 붉은 망토를 그제서야 발견한 발리는 마치 미친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그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손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엎드려 쓰러져있던 제네르를 무릎 위에 제대로 눕힌 그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이런, 맙소사!"
반 쯤 정신을 잃고 부들부들 떨고있는 제네르의 얼굴은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도끼자국과 조각난 왼쪽 안구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제네르를 품에 끌어안은 발리는 할룩스를 켜고 부근 어딘가 있을 의무병을 울먹이는 소리로 목이 터져라 불러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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