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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225화 (225/1,132)

< -- 225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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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칼 가 중군 보병대 후방에 7백여 중장기병대와 함께 대기하고 있던 베흔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서쪽 언덕을 올려보았다.

"저새끼들 도대체 왜 안움직이는거지?"

베흔의 당연한 의문에 함께있던 중장보병단장 케세크 경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즈는 북부용병대라는 비수를 옆구리에 그대로 놔둔 채 중장보병대를 출동시킬 정도로 바보는 결코 아니었다. 중군의 보병대간 교전이 벌어지면 북부용병대 5천과 1천 기의 경기병들이 당연히 언덕에서 내려와 보병대 우익 혹은 후방을 칠 것이라 예상한 헤즈는 7천 명의 선발된 최정예 베테랑급 중장보병들을 3열의 보병대 우익에 포진시켜놓은 후였다.

그리고 그들 남부보병들에게 적 장창보병이 일단 차단당하면 그 약점인 측면을 찔러들어갈 7백의 정예 중장기병들도 베흔의 지휘하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중이었다.

하지만 언덕의 만여명의 보병들은 이미 전투가 치열한 교전상황에 접어든 지금까지 꿈쩍도 않은 채 자리를 말없이 지키고만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한 베흔은 연신 시계만 바라보며 긴장감을 애써 삭히고 있었다. 저 똑똑한 페로 녀석은 저 북부용병들을 히든카드로, 그리고 이쪽의 정예병들을 후방에 묶어두고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수단으로 일부러 저들을 놔두고 있음이 분명했다.

"제기랄,"

베흔이 창을 옆구리에 끼며 시선을 다시 남쪽으로 돌렸다. 동부보병들과 유목민 경기병들의 지원사격으로 이루어진 동부의 중군과, 이들을 상대하는 남부의 전황은 사실 기대보다 지지부진한 편이었다.

평소같았으면 1, 2선에 섰을 정예병을 제일 후위로 돌려놓은 남부보병대의 지금 전력은 틀림없이 평소 수준의 전력에 비하면 조금 처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동부보병들 역시 예전의 그 모습은 아니었다. 오합지졸의 상징같던 동부보병들은 지난 여러번의 전투들에서 다져지고 나름대로 많이 걸러진 듯 이전보다 훨씬 견고한 진형을 이루고 '전쟁기계' 남부보병들의 공격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밀리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정도가 고작이기는 했지만.

"히르직스 경은 어찌되었지?"

베흔의 질문에 함께있던 케세크 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금 요새로 후송되어서 응급수술 들어간 모양입니다. 2기사단장인 릴라크 예리노프 경이 기병대를 대신 지휘하고 있습니다."

베흔이 표정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릴라크도 대군의 기병을 지휘하기에 전혀 흠잡을데없는 뛰어난 기병지휘관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식적인 사령관인 히르직스가 적에게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좌군 기병대에 안좋은 결과로 나타날 터였다.

"환장하겠군, 망할새끼들."

베흔이 또한번 짜증을 내며 서쪽 언덕을 올려보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교활한 페로 녀석의 속셈에 그대로 말려든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격앙된 듯 피에 굶주린 베흔의 시선은 다시 남쪽의 동부연합군 중군 좌익을 향하고 있었다.

우회기동한 1천여기의 적 유목민 궁기병들은 남부 중장보병대 측면에 계속 위협적인 사격을 가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마장애물까지 갖추고 그들을 기다리는 강력한 남부보병진에 충격작전을 감행할 중무장 기병이 없는 그들의 소극적인 공격은 드문드문 운없이 쓰러지는 보병들을 만들어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저곳만 돌파하면 바로 동부 보병대 좌측면, 그리고 페로 녀석이 웅크리고 있을 적 본진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베흔이 쥐고있던 긴 창을 똑똑 두들기며 자신의 뒤에 도열해 선 7백여 정예 중장기병대의 막강한 위용을 잠시 돌아보았다. 지금 적 중군에는 페로를 지키고있을 약간의 근위기병을 제외하면 중장기병대가 사실상 없을 터였다.

"녀석들이 안 기어나온다면.....나오게 만들기라도 해야겠군."

동부연합군 후방의 본진에서 전황을 살펴보던 페로는 그리도 형편없던 보병들이 전보다는 훨씬 강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전처럼 대오를 이루고 전진해오는 적들에게 겁부터 집어먹지도 않았고, 방패 뒤로 머리를 감춘 채 벌벌 떨고있는 한심한 모습을 더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적 보병들에게 조금씩 밀려나고 있기는 했지만 적 보병들의 머리위로 비처럼 쏟아지는 투창들에 적 보병들의 견고한 밀도 또한 조금씩 낮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본진 앞쪽, 낮으막한 언덕에서 말에 올라 전장을 지켜보는 페로의 시선은 적 후방의 7백여 중장기병대에 줄곧 멎어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저들이 이곳으로 먼저 쳐들어올지, 아니면 역시 기다림에 지친 이쪽이 좌군의 북부보병대를 먼저 움직일지는 말 그대로 페로와 적장간의 '고집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우군에서 제네르가 적 기병사령관 히르직스를 쓰러뜨린 큰 사건은 적들의 인내심을 절반은 깎아먹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적 중장기병들이 움직입니다."

참모들의 보고에 페로가 마른 입술에 살짝 침을 발랐다. 적 후방에 줄곧 대기중이던 7백여의 기병들이 페로의 예상, 혹은 걱정대로 이편 좌익을 향해 천천히 기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페로 스스로도 경기병뿐인 중군 좌익의 취약함을 모르고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진형이나 마찬가지듯이, 약점은 있기 마련이었고, 얼마나 잘 감추느냐, 아니면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일 뿐이었다.

잠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가 싶던 그들은 서쪽 측면을 빙 돌아 페로가 있는 동부 보병대 측후방을 향해 미친 듯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7백의 중장기병이라면 이 2만의 '부실한' 동부보병대의 측면을 흔들어놓기에는 그다지 무리없는 수준의 병력이었다. 2백 5십여기씩, 3개의 돌격진형을 이룬 그들 남부기병들은 기껏 지원사격이나 하고 있던 측면의 유목민 경기병과 궁기병들의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의 땅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초원을 무섭게 쳐내려오고 있었다.

페로가 기다렸다는 듯 참모에게 명령을 내렸다.

"좌군의 나람 경에게 진격준비를 명하게. 가말라 카잔 근위기병대장은 중장기병 4백을 이끌고 녀석들을 붙들어놔. 유목민 궁기병들이 도울테니 어렵지는 않을거다. 좌군이 결판을 지을동안 우리가 적들을 붙들어놔야지."

"하지만 저희가 자리를 비우면 총리각하는....."

가말라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페로를 바라보았지만 페로는 그다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 몸 간수 정도는 하니까 가서 맡아. 근위보병들도 천 명이나 있으니. 남부 중장기병 7백 정도면 잡아놓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게 맡겨두십시오."

근위기병대장 가말라 카잔 장군이 이끄는 4백여 근위중장기병들이 중군 좌익을 향해 쳐오는 7백여 남부기병들을 향해 우렁찬 함성과 함께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상대해온대로라면, 이정도 전력에 궁기병들의 지원사격정도면 남부기병 7백정도 잡아두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 7백의 기병을 몰고오는 적장이 아직 누군지 모르는 페로는 그렇게 믿고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결국 적들이 말려든것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7백의 중장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들어가는 베흔의 머릿속에는 애시당초 '측면교란' 따위의 생각은 없었다. 적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아는 그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측면에서 적 근위기병들에 붙들려 시간이나 질질 끌다가는 언덕에서 때맞춰 기어내려올 북부용병대에게 뒷통수를 얻어맞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럴바에 그가 택한 건 너무나 단순명료한 한가지, 바로 적진의 페로와 지휘부 놈들을 잡아죽이는 것이었다.

가말라를 내보내고 적 기병들의 돌격에서 잠시 신경을 끊었던 페로는 순간 서쪽에서 들려온 요란스런 소음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앞을 막아서는 1천여 궁기병들의 일제사격을 뚫고 돌진해온 그들 7백여 기병들이 가말라가 직접 앞장서 달려간 4백여 동부기병들과 거센 함성을 울리며 정면충돌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적들의 돌격진을 무너뜨리고 난전에 돌입할 것으로 생각했던 페로는 가말라의 기병진 한쪽이 거의 손쓸새도 없이 무참하게 무너져내리는 광경에 순간 경악하고 있었다.

"씨발! 뭐야!"

아무러한 페로의 입이 순간 짝 벌어져버리고 말았다. 동부 중장기병대를 무참하게 꿰뚫고 돌진하는 적들의 쐐기꼴 진형 선두에는 은빛의 낯선 갑주를 입은 거구의 기병이 무시무시하게 큰 창을 휘두르며 눈앞을 가로막는 3, 4명의 동부 근위기병을 거의 공중으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괴력과 속도를 자랑하며 앞을 가로막는 수십의 기병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리는' 그 광경에 경악한 동부기병들은 자기도모르게 그와 그의 기병들에게서 움찔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그를 선두로 한 남부기병들은 자신을 붙들어두려는 가말라의 동부기병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페로가 있는 중군 후방 본진을 향해 거리낌없이 돌격해오고 있었다.

"썅! 저놈 도대체 뭐야!"

제대로된 접전조차 벌여보지 못한 채 수십의 기병을 잃고 돌파까지 허용한 가말라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미친 듯 그들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보병! 보병! 적 기병을 저지해라!"

페로의 명령에 동부연합군 지휘부를 최종방어하는 천여명의 보병들이 6열로 정연하게 정열하며 돌진해오는 적 기병결사대를 향해 창을 빽빽하게 겨누었다. 그 모습에 갑자기 대오의 앞으로 거칠게 치고나온 그 '은빛 기사'는 말등을 박차고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 모습에 페로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의 이 궁금중은 녀석이 창을 든 보병진 한곳에 뛰어들어 짓밟으며 그 일대를 순식간에 무너뜨려버리는---바로 루사에서 카렐이 그랬듯이---모습에 곧바로 해답이 떠오르고 있었다.

순간 페로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베흔이다!"

칼을 굳게 잡은 다룬이 그를 향해 달려나가려는 페로의 말고삐를 거칠게 붙들었다.

"가시면 안됩니다!"

"제기랄! 말도 안돼,"

보병진을 뚫고 적 기병들이 난입하면서 페로를 둘러싼 동부 지휘부가 순간 무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2차 혼란기 당시 최고제후 아들이던 샤자한의 10만의 동부 기병대가 겨우 천 명에 불과한 가디언 기병대에 돌파를 허용하고 무참하게 깨지던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던 그들로서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베흔이 무너뜨린 틈새로 돌진해온 적 기병들에게 휩쓸린 동부연합군 지휘부는 지난 전투에 이어 또한번 적군에 노출되면서 순간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돌파를 어느정도는 예상은 하고, 나름대로의 대비도 있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은 전혀 예상못한, 말 그대로 적의 폭풍같은 기습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다른 자도 아닌 무시무시한 베흔이 있었다.

"걱정마라! 가디언은 한놈 뿐이다! 나머지는 그냥 기병일 뿐이다!"

페로가 흔들리는 지휘부에 힘을 주려는 듯 창을 움켜쥐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각하! 위험합니다! 이대로는......북부용병대를 당장 이쪽으로 불러와야 합니다! 가디언까지 있는 녀석들을 몰아내려면....."

공포감에 휩싸인 참모들이 페로에게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을 움켜쥔 페로가 대뜸 그들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보였다.

"씨발, 너흰 군인 주제에 참모랍시고 기대 숨기만 할 생각으로 여길 왔다는 말이냐! 너희 몸뚱아리 하나 위험하다고 감히 이번 작전 전체를 뒤흔들자고 망발을 떨어!"

"하, 하지만....."

"궁기병 불러들여! 여기서 어떡해서든 최대한 버틴다! 좌군에 시간을 벌어준다! 지휘부는 보병대 2열로 퇴각해!"

화극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며 말에 박차를 가해 직접 전장에 달려나간 페로는 자신을 발견하고 창을 내질러오는 남부 기병의 머리를 그 도끼날로 단번에 두동강내며 소리를 꽥 질렀다.

"봐라! 그냥 기병들이다! 때려 잡으면 된다! 알았나! 적들은 그냥 기병들이다!"

자신이 토막낸 적 기병의 머리를 창끝에 꽂은 페로는 옆에 선 기수의 대장기를 빼앗아들고는 나머지 한손에 치켜들었다. 붉은빛 준마 위에서 몸을 번쩍 일으켜 창과 깃발을 양손에 번쩍 치켜든 그는 거대한 동부연합군의 녹색빛 군기를 직접 짊어진 딸 아메스와 함께 동부 병사들 보라는 듯 큰 고함을 지르며 그들 사이를 무섭게 질주했다.

샤자한 공에게서는 단 한번도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젊은 사령관의 패기넘치는 모습에 동부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고 있었다. 페로가 양손에 창과 깃발을 치켜들고 사방에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나만큼 못하는 새끼들은 이 말발굽으로 피떡이 되도록 짓밟아버릴테다! 썅! 기댈 생각 말고 너희들이 적 기병들을 때려잡으란 말이다!"

반대편에서 동부기병 수십을 혼자 토막내어버린 베흔의 시선에 그런 페로가 들어온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드디어 표적을 발견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저새끼 저기 있었군,"

대여섯명의 동부 기병들을 눈 깜짝할새 베어버리고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베흔을 발견한 페로가 급히 방향을 틀어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세 명의 호위기병들과 함께 페로의 뒤를 뒤늦게 쫓아온 다룬이 칼을 뽑아들며 이 소란통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의 큰 소리를 내질렀다.

"빨리 피하십시오!"

가망이 없음을 잘 아는 다룬이었지만 주인 페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칼을 똑바로 쥔 다룬은 달려오는 베흔의 말 앞을 단신으로 막아섰다. 돌격해오는 무시무시한 그 진동을 몸으로 느끼며 그의 호흡이 가쁘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 때, 쉿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무언가가 베흔의 옆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으익!"

창을 들어 날아오는 투창을 막아낸 베흔이 움찔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강력한 위력에 놀란 베흔의 말이 옆으로 조금 밀려나고 말았다. 기회를 잡은 다룬이 칼을 치켜들며 공중으로 솟구쳐올랐다.

"죽어라! 베흔 이놈!"

있는 힘을 다해 내리친 다룬의 칼날이 귀를 찢는 마찰음을 울리며 베흔의 창과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말에 올라있는 베흔에게 높이와 힘에서 밀린 다룬은 창 샤프트에 팔을 얻어맞으며 바닥에 나딩굴고 말았다.

"귀찮은 새끼!"

쓰러진 다룬을 힘껏 찌르려던 베흔은 또한번 날아온 투창에 소스라치게 놀라 제대로 급소를 찌르지 못하고 왼쪽 옆구리를 비껴찔렸을 뿐이었다. 중상을 입은 다룬은 베흔의 주의가 팔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참 옆에서 난전중인 기병들의 말 다리 밑으로 잽싸게 몸을 날려 도망치고 있었다.

망할놈의 투창 때문에 다룬과 페로를 놓치고 만 베흔은 그제서야 자신에게 투창을 계속 던져대는 귀찮은 놈을 돌아보았다. 눈깜짝할새 또하나의 투창을 뽑아든 유목민 기병대장 이며 카이두의 장남 다얀 바툴은 이번엔 베흔의 얼굴을 향해 세번째의 공격을 날렸다. 지금까지 그를 향해 날린 사격의 정확도로 보아 보통의 적장은 틀림없이 아님을 베흔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 버러지같은 야만족놈."

들릴듯말듯한 중얼거림과 함께 베흔이 허리에 차고있던 단검 중 한개를 눈깜짝할새 집어던졌다. 막 투창을 던지고 미처 방어태세를 잡지 못했던 다얀은 말에 박차를 가해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투창을 능가하는 위력으로 날아온 강력한 단검에 목이 명중한 말이 미친 듯 날뛰자 다얀은 단검이 자신에게 맞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하며 재빨리 말 등에서 뛰어내려 바닥을 한바퀴 굴렀다.

"엇!"

뒤에서 달려오는 말발굽소리에 다얀이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성난 베흔이 말 위에서 거칠게 내지른 창은 아버지를 닮은 이 건장한 전사의 가슴을 무참히 관통하고 말았다. 무심하게 휙 돌아 페로를 쫓아가는 베흔의 뒷모습을 흐려진 눈으로 잠시 바라보던 다얀은 자신의 목숨으로 연합군 지휘부와 총사령관 페로를 살려낸 것에 만족하며 샤레이의 이 피로 물든 초원 위에 생애 마지막 숨결을 내뱉었다.

"제길,"

페로를 쫓으려던 베흔은 또다시 앞을 가로막는 수십의 보병들에 짜증을 내며 말을 돌릴수밖에 없었다. 방금 죽인 망할놈의 궁기병놈 때문에 최고지휘관들 중 한명도 죽이지 못한 셈이었다. 함께온 7백여명의 기병들이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4백여명이나 되는 적 근위기병이나 천여명의 적 근위보병, 그리고 뒤늦게 쫓아온 천여기의 궁기병들이 끝도없이 몰려들면서 더이상 이곳에서 버티기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베흔으로서도 일단 이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내릴수밖에 없었다. 동부보병대 후방이 붕괴되면서 중군의 남부 중장보병대가 더욱 거세게 이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2, 3백은 되는 기병들을 적의 맹렬한 반격에 잃은 베흔으로서는 이제 살아 돌아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일단 퇴각한다!"

베흔의 명령에 함께온 남부 기병들이 동부 지휘부에서 썰물같이 빠져나가며 남부 보병대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젠 들어오는것보다 더 힘든 퇴각이 이미 꽤 큰 손실을 입은 남부 기병들의 앞에 남아있었다.

"다얀 도련님이 돌아가셨다!"

누군가 외친 고함소리가 후방과 측면을 지키며 보병들에 대한 엄호사격을 퍼붓던 탈라스 궁기병들 사이에 순간 무섭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2연대! 저새끼들 다 잡아죽여!"

선임연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극도로 흥분한 탈라스 궁기병들 천여명이 뒤따라오는 동부 중장기병들의 엄호도 무시한 채 달아나는 베흔의 뒤를 미친 듯 달려오기 시작했다. 땅을 울리며 추격해오는 그들 궁기병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던 베흔은 세상 빛을 본 이래 최악의 공포에 직면하고 있었다. 땅을 새카맣게 뒤덮고 몰려오는 그들 발빠른 궁기병들이 무시무시한 집중사격을 쏟아부으면서 후미를 달려오던 기병들부터 차례차례 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4, 5중대가 떨어져서 맡아!"

다급해진 베흔이 제일 후미의 기병들에게 사실상 '여기서 죽어라'에 가까운 명령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석대로라면 중장기병들이 반격하면 몸을 돌려 달아나야 할 궁기병들은 자신을 향해 반격해오는 2백여기 가까운 남부 중장기병들의 존재도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베흔만을 노리고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눈에 광기를 품은 그 모습에 베흔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에 더더욱 박차를 가할수밖에 없었다. 쫓기고있지만 살기 위해서는 반격할수도 없는, 베흔으로서는 눈앞이 깜깜한 상황이었다.

"썅! 저 대가리놈부터 시작해서 한놈도 놓치지 말고 다 찢어죽여!"

부족장들이 서로 경쟁하듯 휘하 궁기병들에게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말에서 떨어진 불운한 남부기병들은 눈깜짝새 자신을 둘러싼 유목민 궁기병들의 피의 복수의 대상일 뿐이었다. 기병 한 명에 적어도 서너명씩은 되는 궁기병들이 달라붙어 시체가 산산조각날때까지 마구 창을 찔러대고 있었다. 제후가의 장자를 잃은 유목민들의 격노가 얼마 안되는 이들 기병들에게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저 야만족놈들!"

뒤를 돌아본 베흔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발빠른 궁기병들은 어느새 달아나는 베흔과 그의 기병들 주변을 빙 둘러싸고는 하늘을 빽빽하게 뒤덮을 정도로 투창을 날려대고 있었다. 아무러한 베흔이었지만 전장에서 자기 자신이 이렇게 끔찍한 상황을 당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아익!"

투창들을 쳐내던 베흔이 비명을 질렀다. 투창 한 개가 어느새 그의 어깨를 꿰뚫고 들어와 있었다. 서너개정도라면 모르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날아오는 투창을 제아무리 베흔이라도 다 쳐낼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달리던 기병들은 어느새 이십여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두 발, 세발이 계속 몸에 명중하면서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섰음을 깨달은 베흔은 야속한 하늘을 향해 처절한 외침을 내지를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의 시야에 북쪽에서 몰려오는 검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군입니다!"

옆을 달리던 기병이 살았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어둠 속에서 언덕을 무섭게 달려내려오고 있는 건 틀림없는 헤즈의 3백여 남부 근위기병들이었다. 말 갈기를 끌어안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베흔은 그제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미친 듯 투창을 날려대던 탈라스 궁기병들도 그제서야 물러나기 시작했다. 말 갈기에 얼굴을 파묻은 베흔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병들만 아니라면 말 목을 부여안고 펑펑 울고라도 싶은 지경이었다.

"썅, 저새끼들 나중에 몽땅 다 잡아서 생매장시켜버릴테다!"

가까스로 사지를 벗어나 보병진 후방으로 되돌아온 베흔이 물러나는 탈라스 궁기병들을 바라보며 악담을 퍼부었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던 베흔은 더이상 싸움에 임할 수도 없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함께 돌진했던 중장기병 7백기 중 무사히 살아돌아온 건 1백여기 뿐이었고 백 명이 넘는 기병들은 더이상 싸울 수 없는 부상자 신세였다. 베흔의 어깨와 등에도 무려 4개나 되는 투창이 박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보통의 기병이라면 이미 절명했을 그 상처에도 아직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건 그의 가디언으로서의 질긴 생명력 그것 하나 뿐이었다.

2차 혼란기의 그 화끈했던 승전에 이어 또한번의 멋진 돌파와 승리를 기대했던 베흔의 이번 시도는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기습으로 마무리되어버리고 있었다.

"언덕의 적 좌군 북부용병대가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응급처치를 받고있는 베흔에게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다가온 중장보병대장 케세크 경이 퉁명스럽게 입을 연 순간, 베흔은 또한번 몸서리쳐지는 절망에 휩싸이고 있었다. 선두에서 앞장서 북부보병진을 뚫도록 예정되어있던 자신이 중상을 입고 나설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적들은 때맞춰 움직임을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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