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28화 (228/1,132)

< -- 228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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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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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 여객선 3등석을 타고 황제령으로 향하던 주페의 기분은 그다지 나쁜편은 아니었다. 태자 체면에 엔간한 상급귀족들도 다 가지고있는 개인 셔틀은 고사하고 매번 여객선 3등석이나 타고다니는 그의 모습에 코리온이 가끔 체통을 지키라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유학자의 품격과 권위'를 강조하는 코리온 녀석과 '검약과 실천'을 강조하는 자신과의 사소한 의견차이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물론 주페는 이런 생활을 애인에게까지 무작정 강요할 정도로 답답한 사람은 아니라는것이 코리온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이렇게 평상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그는 검붉은 머리칼과 가무잡잡한 피부, 보통 키, 다부진 몸매의 보통의 서부남자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주페는 태자의 황족문이 남들 다 보이는 귀 밑이 아닌 어깨에 있다는 사실에 제국에서 가장 감사하고 있는 사람중에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이렇게 여객선을 탈 때 신분증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는 꽤나 달갑지않은 절차가 불만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일상생활에 별 지장은 없었다. 안그래도 이 3등석의 객실장인지 하는 녀석이 갑자기 찾아와 1등실에 빈방이 있으니 그쪽으로 모시겠다며 쓸데없는 친절로 귀찮게 굴었던 터였다.

"몇살이니?"

주페가 옆자리에 앉은 자그만 여자아이에게 사뭇 다정하게 물었다.

"7살이요."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는 그 이쁘장한 꼬마는 이 낯선 아저씨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해주고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아이에게 계속 말을 건네던 주페에게 아이 엄마인 듯한 여자가 질문을 던졌다.

"애를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이런 예쁜 딸 하나쯤 있으면 소원이 없겠군요."

"결혼 안하셨나보죠?"

"아직이요."

주페가 이 귀여운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여자가 그런 주페를 바라보며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결혼하시면 되죠. 멀쩡하게 생기신 분이......인상도 좋으신데요. 여자들이 좋아할 인상이세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런가요?"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에 주페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여섯 태자들 중에서도 아이들을 가장 좋아하는 주페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어지간히 의아하게 여겼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만 보면 거의 사족을 못쓰는 그의 모습에 몇몇 짖궂은 친구들이 '변태'가 아니냐며 우스개소리를 하거나 동생 레곤 녀석이 주페 오빠가 황족중에 최고의 아버지감이라며 농담을 던졌던것도 이때문이었다.

어쨌든 주페는 이번 일만 마무리되는대로 코리온과 정식으로 혼례를 올릴 생각이었다. 태자 체면에 근친혼이라면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겠지만 그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발현자 둘이 만나면 어떤 아이가 나올까? 아이까지 유학자를 만들면 집안이 너무 재미없어질텐데......남자뿐인 집안보다는 여자아이라도 하나 있는 게 낫겠지? 그럼 날 닮는것보다는 코리온을 닮는 게 훨씬 낫겠군.'

주페는 자신과 코리온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어가며 혼자 즐거운 상상에 잠겨있었다.

"곧 황제령 1번 도시에 도착합니다."

방송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주페가 자신의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옆자리의 꼬마를 데리고있던 여자는 주페의 짐 속에 가득 든 유학 서적들과 문방구들에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그 맨 위에는 주페가 조카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져온, 어린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만든 작은 붓 한꾸러미가 들어있었다. 붓은 허가받은 특별한 장인들만이 만들 수 있는, 제국에서는 꽤 귀한 물건중의 하나였다.

아이의 선망어린 시선이 줄곧 붓에서 떨어지지 않자 주페는 꾸러미에서 한 개를 뽑아 아이의 손에 기꺼이 쥐여주었다. 그 때, 약간의 진동과 함께 여객선이 착륙하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감사합니다."

기쁨에 넘친 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주페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의 얼굴을 다시한번 쓰다듬어주었다.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에 새삼스레 흐뭇함을 느끼며 주페는 자신에게도 하루빨리 아이, 그것도 이렇게 예쁜 딸이 하나쯤 생겼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생각을 문득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차 한대를 빌린 주페는 다섯째 타니토와 만나기로 약속한 이곳의 제니안 지부로 향하고 있었다. 터미널에서부터 정체불명의 차가 계속 뒤를 쫓고 있었지만 주페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있었다. 제니안 지부는 어차피 정식 유학자들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된 성소와도 같은 곳이었다.

오늘의 황제령 방문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첫번째로 설득해야 할 타니토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계획 자체를 탐탁지않아하는 코리온 녀석을 학교에 두고 나온 주페는 녀석이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것을 막기 위해 아예 할룩스까지 꺼놓고 나와있었다.

신분 확인을 받고 안에 들어선 주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일제히 쑥덕대는 모습에 꽤나 의아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태자 신분이 물론 특이한 건 사실이었지만 어차피 유학자들의 친목회관과도 같은 이곳은 이전에도 꽤 자주 드나들던 친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여지껏 저들이 이렇게 '이상한' 태도를 보인 건 처음보는 일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주페는 한쪽 구석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여동생 타니토의 모습에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 여기 분위기가 좀 이상하구나."

오랫만에 만난 오빠를 그다지 곱지않은 눈으로 쏘아본 타니토 공주는 다짜고짜 주페의 손을 붙들고 한쪽의 밀실로 향했다.

"왜그러는 거냐?"

문을 단단히 잠근 타니토는 다시한번 오빠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남극성당 수찬으로 있는 타니토는 여섯 태자들 중 주페 자신과 같은 유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유일한 녀석이였다.

하지만 오늘 타니토는 오빠의 얼굴을 노려보며 대뜸 핏대부터 올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오늘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예요? 사람 놀리려는 거예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상한 태도에 뒤이어 타니토까지 쌀쌀맞게 나오자 도리어 당혹해하고 있는 건 주페 스스로였다.

"갑자기.......무슨 일이라도 있는거니? 내 말했잖니. 중립선언 문제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세상에, 언제는 제위 따위엔 전혀 관심없는 성인군자인 척 말씀하시더니! 이제와서 사람 뒤통수 치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모르겠구나......"

동생의 태도에 당황한 주페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그런 주페에게 타니토가 대답 대신 큰 종이 한 장을 던져놓았다. 서둘러 종이를 펼쳐본 주페는 자기도모르게 입을 쩍 벌려버리고 말았다.

"이게.......이게 도대체.....뭐냐?"

머릿속이 아찔 해진 주페가 자리에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여섯 태자에게 적서를 구분함은 가당치않으니 로노 태자가 제위를 승계함이 원칙이겠으나 그 3촌간에 대역죄인이 있으니 제위승계권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제2태자 주페가 제위를 승계해야 한다고요? 말한번 그럴듯하군요! 직접 발표하기는 민망하셨나요? 이렇게 다른사람 손을 빌리게?"

"타니토, 이건 내 생각이 아니다, 정말이야."

다시한번 '성명서'를 펼쳐든 주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말도안돼......정말 말도안돼......"

바닥에 주저앉은 주페 태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돌변해버린 이곳 유학자들의 수상쩍은 쑥덕거림도 모두 이것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타니토가 여전히 쌀쌀맞게 중얼거렸다.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진들하고......아니, 오빠 본인하고 코리온 녀석은 빠졌더군요. 남극성당의 원리주의 계열 교수 거의 대부분이더군요. 좋으시겠어요. 저같은 놈은 이젠 유학자중엔 기댈데도 없어졌으니. 어쩌죠? 제위에 오르면 제 목숨은 살려주실건가요?"

"타니토, 정말이다. 제발 믿어다오. 이건 내 뜻과는......"

"그 똑똑한 머리로 아직도 이해 못하시겠어요? 이건 오빠가 원하고 말고가 아니고 오빠가 지지받고 있다는 거라구요! 지금 오빠가 제위에 오르고싶지 않다고 하건, 중재에 나서겠다고 하건 결국은 속을 감추려는 시커먼 수작으로밖에 취급받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라구요!"

한참을 씩씩거리던 타니토는 문을 거칠게 닫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바닥에 망연하게 꿇어앉아있던 주페는 자신에게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한 피냄새를 느끼며 몸서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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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 다얀의 시신을 마주한 카이두 경은 최소한 겉으로는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있었다. 페로의 배려로 전투가 끝나자마자 제일먼저 수습된 그의 시신은 그를 따르던 탈라스 궁기병들의 손에 들려 이곳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아들을 잃은 카이두의 첫째부인과 남편을 잃은 3명의 부인들은 시신을 끌어안은 채 이미 거의 탈진해 앉아있었다. 다얀의 유일한 동복 여동생인 탈란이 할 말조차 잃은 어머니를 가까스로 달래주고 있었다.

"엘룬이 죽더니 이젠 다얀까지......"

꽉 깨문 카이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축제분위기에 빠져있다는 샤레이와는 대조적으로 종장의 장자를 잃은 바툴 가의 분위기는 침울함 그 자체였다.

"모두 승리를 축하하자꾸나."

카이두 경이 갑자기 손뼉을 짝짝 쳤다. 아들들에게 술을 가져오게 한 카이두는 자리에 모인 가족들에게 한 잔씩을 모두 돌렸다.

"다얀의 피로 적들을 물리쳤으니 더이상 명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냐! 한잔씩 마시고 남매들은 모두 모이거라. 이애를 초원의 품에 되돌려보내줘야겠구나."

"초원의 품에 되돌려보내다뇨?"

우베가 함께있던 베아트릭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중위도쯤 초원에 가문 성지가 있습니다."

"거기 묻나보죠?"

제멋대고 생각하는 우베를 한 번 내려다본 베아트릭스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거기 내다버립니다."

"엑,"

기겁을 한 우베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럼....."

"거기 사는 동물들의 밥이 됩니다. 우리가 동물들을 먹고 살았으니 죽어서 그들의 밥이 되어주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베아트릭스의 '끔찍한' 대답에 또한번 몸서리친 우베가 조심조심 중얼거렸다.

"유목민으로 안태어나길 잘했네. 에휴,"

목발에 기대 서 있던 카렐은 이들의 방식대로 죽은 다얀의 이마에 한 손을 대고 짧은 조문을 읊어주고 있었다. 카렐의 손을 마지막으로 형제들의 손에 들린 다얀의 시신은 가까운 가족들과 함께 셔틀에 실리고 있었다.

다얀을 실은 셔틀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카렐은 뒤에 선 우베에게 짤막하게 물었다.

"제네르 경 상태는 어떻다지?"

"손가락 3개를 접합수술했고 도끼에 다친 왼쪽 안구를 제거하고 새 안구를 설치하는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머리에는 두개골 골절이 있어서 그쪽도 손봤다고 합니다. 의식도 있고 약간씩 움직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한달은 전장에 나오기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라마단이 얼마 안남았으니 그래도 다행이죠."

"우리쪽 사람들하고 병력 슈트란 종가에서 잠깐 쉬게 해 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되었지?"

"지금쯤 이미 갔을 겁니다. 아참, 네피 님하고 에키트 족 보병들은 바로 여기로 올 겁니다. 그런데 왜......."

"이젠 전장이 이리로 옮겨질테니. 잠깐이라도 거기서 좀 편히 쉬게 해 줘야지."

"이쪽으로요?"

"양쪽 다 어려운 처지에 몰렸으니 남부와 서부가 연합군을 결성할수밖에 없을거야. 그렇다면 돌파하기 쉬운 곳은 샤레이가 아니고 탈라스 쪽이지."

눈을 가늘게 뜬 카렐은 언덕 귀퉁이의 의자에 자리잡고 앉으며 멀리 보이는 사막을 응시했다. 카렐의 뒤에 잠시 말없이 서 있던 베아트릭스가 그런 그의 넓은 어깨 위에 손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 '희한한' 모습에 우베가 잽싸게 베아트릭스의 눈치를 보았다.

잠시 별 말이 없던 카렐은 자신의 어깨에 올라있는 베아트릭스의 거친 손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눈치빠른 우베가 그런 카렐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에게서 손을 먼저 뽑아낸 건 베아트릭스 쪽이었다. 카렐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손을 떨구고 말았다.

고개를 숙인 베아트릭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바로 위의 친오라버니가 전사해서......탈란 이모가 많이 상심했을겁니다.....전하께서 직접 위로해주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알았네."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장자 다얀의 죽음으로 바툴 가에도 약간의 변화가 예상되고 있었다. 카이두에게는 21명의 부인과 70여명에 자녀들이 있었지만 다른 부인들에 비해 늦게 자식을 얻은 첫째부인에게서 얻은 적생자는 다얀과 탈란 둘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나이어린 다얀의 자녀들을 대신해 유일한 적생자 탈란이 바툴 가의 새로운 2인자로 부상할 터였다.

카렐은 갑자기 뒷쪽을 돌아보았다. 샤레이로 보냈던 자신의 아르다가 셔틀이 돌아오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선 카렐이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셔틀 쪽으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그리고 열린 문 안에서는 여전히 밝은 표정의 네피가 선물이라도 들었는지 상자 한꾸러미를 들고 킬킬대며 모습을 나타냈다.

기분이 꽤나 좋아보이는 네피의 모습에 카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셔틀에서 내려선 네피는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무척이나 어색한 표정의 루토가 함께 내려서고 있었다.

"루토. 정말 잘왔다."

카렐이 두 팔을 뻗어 다시 돌아온 옛 부하 루토를 품에 꼭 껴안았다. 지난번 서부 아켐의 메디스 시에서 카렐 손에 목숨을 구한 이후 또한번 이 다정한 '누님'의 품에 안긴 셈이었다. 보안국 부국장이며 근위대 내에서 베흔과 쿠베에 이어 가장 엘리트로 꼽히는 루토가 귀순했다는 소식에 카렐이 부하들에게 술 한잔 함께하자고 덤볐을 정도로 기뻐했던 터였다.

주변을 다 둘러본 네피가 갑자기 볼멘 소리로 물었다.

"카렐, 솔 이녀석 어디갔어? 아빠가 전장에서 돌아왔는데 코빼기도 안보이다니, 잠깐, 근데 넌 또 왜 그모양이야?"

네피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카렐이 순간 경악하고 있었다.

"그......그게......"

페로가 아직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음을 깨달은 카렐이 난처함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다룬 몫의 일까지 떠맡아야 했던 시로는 꽤 오랫동안 병상의 제네르를 찾아가볼 여유가 없었다. 수술 후에도 제네르의 얼굴조차 보지못한 시로는 다룬을 대신할 킵이 도착할때까지 마랄루를 떠날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슈트란 종가에 도착한 건 슈트란 종가에서 이미 쉬고있을 전사단의 일행들보다 거의 한나절은 늦어서였다.

이곳 하인들에게 물어물어 종가 의무실을 직접 찾아간 시로는 제네르가 있다는 병실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고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기대대로, 틀림없이 제네르가 누워있었다.

따뜻한 온돌방에 깔린 포근한 요 위에는 부드러운 비단이불을 덮은 제네르가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다친 머리와 눈, 얼굴 왼쪽에 드레싱을 칭칭 감은 모습이었지만 시로의 그 예민한 감각기에는 그가 살아있음을 보이듯 엷게 내쉬는 호흡이 그대로 느껴져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낯익은 동부 남자 한 명이 제네르의 오른손을 꼭 붙든 채 베개도 없이 웅크리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시로의 시선은 먹고 난 죽그릇과 제네르의 얼굴을 닦아주었을 물수건, 이런저런 책들을 한번씩 훑고지나갔다. 입술을 잘근 깨문 시로는 그대로 휙 돌아서며 다시 방문을 열었다.

".....시로?"

한쪽눈을 가늘게 뜬 제네르가 어둠 속에서 쉰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려도 안오길래......무슨 일 있나 했어......"

네자드 경의 손을 살며시 빠져나온 제네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제네르의 그런 모습에 시로가 잠시나마 '분통'을 터뜨렸던 자신을 원망하며 얼른 그를 옆에서 부축해주었다.

둘은 말없이 밖으로 걷고 있었다. 흰 가운 위에 역시 하얀색의 무명포를 걸친 제네르는 전장에서 벗어난, 그 어느때보다 평온한 모습이었다. 걸음을 옮기기 버거운 듯 제네르가 잠시 자리에서 주춤거렸다. 제네르의 어깨에 옷을 벗어 덮어준 시로는 그를 두 팔에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멀지않은 곳에 보이는 연못가 작은 정자로 향했다.

"늦게와서 미안해요."

머뭇거리던 시로가 제네르를 바닥에 내려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연못 앞에 마주선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제네르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난거 알아."

"아니예요. 정말 아니예요."

시로가 빤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모를 턱이 없었지만 제네르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못을 향해 나란히 선 두 사람은 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시로가 용기를 내 제네르의 어깨에 조심스레 팔을 걸며 스스로도 무안한지 갑자기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푸훗,"

마치 어린애같은 그의 모습에 제네르의 입술에도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어깨를 안고있는 정도로도 몸이 빳빳하게 굳었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 순진한 시로를 향해 먼저 돌아선 건 결국은 제네르였다. 어둠 속에서 시로의 윤기있는 검은 피부와 흰 눈동자, 입술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얀 이가 유난히 번들거려보이고 있었다.

"내 애꾸눈 꼴이 좀 웃기지?"

"아뇨......."

시로는 괜히 할 말이 없어지자 제네르의 눈 언저리와 다친 왼손을 말없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런 시로의 손을 붙든 제네르는 갑자기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그의 유난히 도톰한 입술을 자신의 얇은 입술 안에 조용히 품어들어갔다.

"으, 읍,"

제네의 그것과 혀끝이 맞닿는 느낌에 움찔 한 시로가 순간 어깨를 들썩였다.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와 제대로된 입맞춤을 경험하게 된 시로는 생각없이 발을 옮기다가 하마터면 정자 난간 뒤로 넘어가 연못물에 빠질 뻔 하고 말았다.

"가지 말고."

시로의 허리를 오른팔로 꼭 끌어당긴 제네르는 뻣뻣해져있는 시로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잠시동안 멍 해져있던 시로는 갑자기 제네르를 자신의 크고 다부진 가슴 안에 꽉 부둥켜안았다.

"다리벌리고 엉덩이 빼는 거 보니까 숫총각 맞나봐."

제네르가 키득거리며 어정쩡하게 뒤로 빠져나가 있는 시로의 엉덩이를 다시 바싹 잡아당겼다. 이미 몸이 화끈 달아올라있던 시로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에......예?"

"엉덩이 왜 빼는지는 나도 알아. 후훗,"

장난스런 웃음을 띠고 속삭인 제네르의 시선이 헐렁한 바지를 입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기겁을 한 시로가 급히 팔을 풀고 뒤로 물러서며 괜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는 아랫도리를 얼른 손으로 가리며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괜히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음......그게요......이상한 생각은 절대 안했어요, 정말로......안했구요......"

"아무 반응 없었으면 정말로 실망했을거야."

빙긋 웃어보인 제네르가 다시 병실로 돌아서며 뜻밖의 말을 중얼거리자 한 대 얻어맞은듯한 표정의 시로가 그 뒤를 넋나간 표정으로 뒤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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