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9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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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말이 없어진 솔을 바라보는 사르키스의 속도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제롬이 다녀간 후 솔은 마치 실어증이라도 걸린 사람인 양 그 누구와도 대화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며칠 지나고 나면 솔을 서부에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샤드니로부터 받아놓은 사르키스는 아켐으로 돌아가던 어머니에게 카렐로부터 솔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작고 조용한 집과 솔을 전담할 의사를 꼭 찾아놓으라는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가 가문에서 진행하고 있는 솔의 혼인계획에 찬성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살인마 카렐로부터 솔을 '구해낸' 것을 누구보다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그였지만 강간범인 제롬과 결혼시키는 것은 그로서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무려 1억 골드라는 거액의 지참금이 오갈 가문의 계획에 감히 반기를 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휴우,"
한숨을 내쉰 사르키스는 앞장서 걸어가고 있는 숙부 라바니 경을 힐끔 돌아보았다. 델루지 가로부터 받을 결혼지참금 1억 골드를 어떻게 쓸지에 관한 기대로 이미 잔뜩 들떠있는 저 천하의 속물은 그 중 가문의 공식 예산에 포함될 9할 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천만 골드 중에서 적어도 10분의 1은 자기 것이 될 것이라며 벌써 집수리와 새로 마련할 전용셔틀 견적까지 뽑아두고 있었다.
그는 솔을 잡은 사르키스 자신에게도 적어도 수십만골드는 돌아올 것이라며 기분좋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사르키스는 조카를 '팔아넘긴' 더러운 돈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령실 앞에 다다른 사르키스가 숙부에게 물었다.
"근위대장이 왔다더니 사실입니까?"
"플라칼 가 종장 녀석도 왔다더군. 샤레이에서 된통 당했더다니 아무래도 무슨 큰 합의라도 있을 모양이야."
열린 문 안에 들어선 라바니 경은 사령실 양쪽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양 진영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상석에 앉아있는 코리온과 그 옆의 샤드니의 얼굴은 이런 팽팽한 분위기에 비하면 그럭저럭 밝은 편이었다.
평소처럼 검은 무명포에 용무늬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코리온은 그 넓은 가슴과 어깨를 쫙 펴고 앉은 채 사뭇 굳어있는 남부사람들을 마치 하대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부상을 입은 베흔은 물론이었고 플라칼 가 종장 카나르 경이나 함께온 헤즈 플라칼 사령관 모두 뭣 씹은듯한 굳은 표정인 것을 보면 이번 '회담'의 결과는 어느정도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그러니까......이곳 탈라스를 새로운 거점으로 요동을 도모하시겠다 이것이구려."
찻잔을 쥔 코리온이 그 특유의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해하셨군요."
베흔이 여전히 사무적으로 대꾸하자 코리온이 짐짓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요새화된데다가 트라티누스 가의 비교적 강한 군대가 지키는 샤레이보다는 만만한 7제후 바툴 가가 있고 변변한 요새도 없는 이곳을 통하는 것이 낫겠다 이말씀이시겠죠?.......허나.......남부에서는 이곳 탈라스로 직통하는 워프루트가 없을텐데요?"
"우리 군용 수송선의 서부 테나토와 수베르의 통행권을 보장해준다면 우리도 기꺼이 서부를 돕겠소이다."
"후우.......돌아서라도 이쪽을 오시겠다니......"
남부 군용 수송선의 서부 영토 통과를 용인해달라는 요구에 코리온이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베르야 어차피 플레렌 가와 2제후 세호 가가 차지하고 있으나 별 문제될바가 없었지만 테나토는 서부에서 유일하게 페로 녀석과 손잡은 발 가의 영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최근까지도 테나토, 그리고 마주한 남부 칼릴의 영유권을 놓고 서부와 남부는 심각한 경계선분쟁을 벌여오던 터였다.
그렇다보니 최고제후인 플레렌 가가 승낙을 한다해도 발 가의 그 교활한 사우드 발 부인이 안된다고 펄쩍 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5제후 이스마엘 가의 영지가 코딱지만큼이나마 들어가 있으니 그네들 이름을 팔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어쩌면 발 가가 이스마엘 가를 공격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였다. 지금껏 그가 두겐을 시켜 발 가를 최대한 회유하라 지시해놓은 것도 그때문이었다.
"테나토의 영유권 문제에 관해서는 새 황제께서 등극하실 때까지는 일단 기존의 상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연합 문서에 넣도록 하죠."
코리온의 심중을 미리 예상한 플라칼 가 종장 카나르 경이 입을 열었다. 코리온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부제후들 설득이 쉽지않을 듯 하나.......새로 조직될 양측 연합군의 총 사령관을 서부에서 맡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소."
카나르 경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는 '서부 대표'로 나와있는 '남부사람' 코리온을 꽤나 원망스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이순간 남부사람들 입장에서는 코리온은 대부분의 혈통을 물려준 남부에게서 등을 돌린 배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코리온이 옆에 앉은 샤드니의 얼굴을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여기 앉은 샤드니 누라프 플레렌 경은 최고제후가 직계 상급귀족 출신이고 남극성당에서 군사학을 전공하고 황실 내무부 관료와 타르서스 직할군 사령관의 엘리트 과정을 두루 거친 우수한 지휘관이니 자질은 충분하다 여겨집니다."
"하지만 최고제후의 직계자녀도 아니고 사촌에 불과하니 그 격이 떨어집니다."
카나르 경이 즉시 쏘아붙이자 빙긋이 웃음지은 샤드니가 플레렌 가 족보를 즉시 앞에 펼쳐놓았다.
"이걸 보시면 생각이 틀려지실겁니다."
생각없이 족보를 받아든 베흔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는 샤드니의 밝은 금발머리와 푸른 눈동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그 얼굴을 새삼스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페티 부인.....친동생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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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짓인지 대강 짐작이 가는군요."
망연한 표정의 오르마즈가 '성명서' 사본을 떨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것도 주페 태자가 황제령으로 떠난 바로 그 시간에 맞춰서......태자의 일정을 잘 아는 측근과 공모가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겠군요......"
침대머리에 기대앉은 오르마즈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자 네페티 부인이 마치 죄라도 지은 듯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떨고있는 부인 앞에서 함께 걱정스런 얼굴을 지어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오르마즈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물었다.
"샤드니라고 했습니까?"
"예.......사촌중에 제일 똑똑한 아이인데.......어떻게 이런 짓에......틀림없이 남극성당으로 돌려보냈는데......"
'사촌'이라는 말에 갑자기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던 오르마즈가 갑자기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졌다.
"제가 기억하기로 부인의 세째숙부인 칼림 경 부처중에는 금발이나 푸른눈이 없으신 걸로 아는데......자녀분은 좀 특이하군요. 피부도 하얗고......"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네페티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샤드니는 제 친동생입니다."
오르마즈가 뜻밖의 대답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안그래도 네페티 부인과 꼭 빼닮은 그 모습은 사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희집에는 브라코 오빠부터 샤드니까지 3남매가 있었고......세째숙부님 댁에는 자녀가 하나도 없어서......막내였던 샤드니를 어릴 때 입양보낸 겁니다."
"부인 동생을 입양보냈다면......부인 아버님께 다른 뜻도 있었을겁니다."
"예?"
"아, 아닙니다."
오르마즈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걱정에 잠겨있던 네페티 부인이 안절부절 못하며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망가졌으니.......이제......어떡해야 하죠? 일이 저렇게 되었다면 서부 제후들이 들썩일텐데....."
걱정에 잠겨있는 네페티 부인에게 힘을 주려는 듯 그의 손을 꼭 쥐어주며 오르마즈가 입을 열었다.
"일단 플레렌 가 만이라도 중립을 지키십시오. 세호 가는 지금까지의 전통으로 보아서 태자를 지원하는 데 함부로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고제후와 2제후도 움직이지 않고, 주페 태자 본인도 제위경쟁에 나서지 않을 듯을 분명히 한다면 그 밑의 제후들이 함부로 경거망동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지금 문제는 유학자들이 태자를 부주켜서 경쟁에 뛰어들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과, 플레렌 가 내 원로세력들이 부인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자께서 심지가 굳으시다면 아직은 해결의 여지가 있습니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네페티 부인은 이 믿음직한 조언자의 따뜻한 손을 꼭 쥐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느새 자신은 서부 최고제후라는 사실과,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이 사람이 한때 서부의 원수였고, 북부 최고제후가의 적장자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마치 터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는, 먼 옛날 있었던 사건은 접어두고라도.
피곤한 표정의 오르마즈를 다시 침대에 눕혀준 네페티 부인은 아직 성치않은 그의 몸에 두툼한 담요를 정성들여 여미어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서부 최고제후에게서 이런 보살핌을 받는 오르마즈가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정작 네페티 부인 스스로는 즐거운 표정으로 오르마즈의 수발을 기꺼이 들고 있었다.
오르마즈의 잠자리를 모두 챙겨준 네페티 부인이 침대맡에 엎드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처음에 제 침실에 모실까말까 고민 많이 했어요."
잠시 얼굴이 굳어졌던 오르마즈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몹쓸생각은......안할테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갑자기 조금 시무룩해진 네페티 부인이 오르마즈의 한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오르마즈가 갑자기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뭐 원래 북부인들이 잘 놀기로 유명하죠. 제가 바람둥이라고들 놀리지만......알고보면 다 제가 너무 잘난 탓이죠."
오르마즈의 농담인지 진담인지에 네페티 부인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그의 모습에 오르마즈도 웃음으로 답하고 있었다. 부인의 밝은 표정에 오르마즈도 처음으로 '죄책감과 책임감'을 벗어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웃음이 부쩍 많아진 네페티 부인이 지난번의 사건의 충격에서 생각보다 일찍 벗어난 것은 확실해보였다.
얼핏 깃털처럼 나약해보이는 이 부인의 내면에 생각외로 강한 면이 있음을 오르마즈는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사실 30여년 전 있었던 제수스 자이센의 플레렌 종가 기습사건에서 부인 혼자 살아남았던 그 일을 되짚어보면 그것이 그다지 놀라운일도 아니었다.
유난히 춥던 그날, 도망갈 길도 모두 막혀버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겨우 21살의 파예드 아카데미 생도 네페티는 사람 키의 대여섯배는 되는 수문 밑의 좁고 얼어붙은 수로로 기꺼이 몸을 던졌고, 다리뼈가 모두 부러진 상황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고 살을 에는 찬 냇물을 타고 그 사지를 빠져나왔던 것이었다.
네페티 부인이 침대맡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늦었으니 오늘은 일단 주무세요. 주페 태자저하와 계속 연락을 시도하라고 해 놨으니 연락 닿는대로 태자저하 의향을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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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렌 가 족보를 살핀 베흔이 사뭇 굳은 표정으로 카나르 경과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합의를 본 베흔이 코리온에게 말했다.
"그럼 총사령관은 샤드니 경께서 맡으시는 대신 부사령관인 보병사령관은 헤즈 플라칼 경이 맡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병사령관은 플라칼 가의 히르직스 경이 맡고 낙타병부대는 남부엔 생소하니 지금까지대로 서부의 하지즈 장군이 맡으시면 되겠군요. 참모진은 반반으로 편성하되 라바니 경께서 이곳 탈라스에 경험이 풍부하시니 참모장을 맡으신다면 적당하겠죠?"
야전은 남부가, 사령부의 행정과 지원은 서부가 맡는다는 타협안이었다. 코리온은 생각외로 혼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가지 조건만 더."
코리온의 한마디에 베흔이 잠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녀석들은 다 그대가 마음대로 해도 좋으나......가디언 카렐 그자와 세네피스 카파키 전 황후는 내게 넘겨주시오. 가능하면 산 채로. 죽었다면 시체만이라도."
베흔의 표정이 약간 굳어지고 있었다. 그의 긴장은 그의 요구조건 때문이 아니었다.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 저 무서운 학장은 카렐의 정체를 이미 알고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녀석을 데려다가 어디 쓰시게요? 설마 그자를 살려주시려는 건......"
"내 그 둘의 피를 주페 태자저하 영전에 바치겠다 일찌기 다짐했으니 그분께 바치는 산 제물로 쓸 것이요."
순간 베흔은 하마터면 저 눈치빠른 학장 앞에서 웃음을 터뜨릴 뻔 하고 말았다. 그가 저 잘난 천재양반을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은 생각이 든 건 사실 이번이 처음이었다. 베흔은 들고있던 술잔을 치켜들며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좋습니다."
코리온 역시 베흔을 향해 술잔을 치켜올렸다. 주페 태자의 뒤를 이었다고 자처하는 원리주의 유학자와, 한때 그를 참혹하게 고문했던 근위대장과의 이 불협화음섞인 기묘한 건배는 탈라스 공략을 위한 서부와 남부와의 또한번의 '연합군'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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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코리온이......그럴 리가 없어.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제니안 지부를 나선 주페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내린 결론은 이 사건의 배후에 어쩌면 코리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그의 가슴은 이 뜻밖의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방금 할룩스로 통화한 코리온은 정색을 하며 왜 이제야 연락을 하냐며 주페를 나무라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은 숙부만을 믿고 따르겠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리던 코리온이 자신의 뜻을 저버렸다는 건 주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결국 '가슴'에 굴복하고 만 주페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주페는 하늘을 올려보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없는 원리주의 유학자들이 생각없이 사고를 친 것이라 애써 단정지어버린 그는 일단 다른 방안을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타니토를 설득하는 1차 시도가 실패했으니 한시바삐 학교로 돌아가 최소한 자기 자신은 제위에 뜻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이 믿던 안믿던 중립을 지키는 사람들이 기댈 언덕을 제공해줄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네페티 부인을 비롯한 서부제후들이 이따위 성명문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 중립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레곤을 만나봐야겠군."
차를 출발시킨 주페는 1번도시 남서쪽에 있는 레곤의 별장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는 1번 도시에서 가장 치안이 형편없기로 유명한 남동쪽 슬럼가 외곽의 모습이 스쳐가고 있었다.
"아직도 따라오는군."
주페는 지금까지도 뒤를 따르고 있는 그 이상한 차를 힐끔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일단 외곽까지만 나가면 최대한 속도를 붙여 떨궈버리면 될 문제였다.
"이크,"
도로에 서 있는 두 명의 청년들을 발견한 주페가 급히 차를 세우고 말았다. 물론 이곳 슬럼가에서는 '앞을 가로막는 녀석들이 있으면 설사 어린애라도 그냥 깔아뭉개고 지나가라'는 철칙이 있음을 잘 알고있었지만 주페에게 지킬 것을 기대할만한 룰은 결코 아니었다.
"이런,"
주페의 눈앞이 아찔해져왔다. 어느새 뒤에 바싹 달라붙은 차 때문에 뒤로 빠질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다섯 명 정도의 건장한 청년들이 주페의 차에 다가와 내리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순간 주페는 이들이 그냥 도적이나 건달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야말로 저들을 '깔아뭉개버리고' 달아나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는 결국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주페에게 그들이 슬럼의 어두운 골목 안을 가리키며 들어가라 손짓해보였다.
"누가 보냈나?"
주페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며 다시한번 슬럼 안쪽을 가리켰다.
굳은 표정의 주페는 하는수없이 그들이 가리킨 골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 안쪽, 어둡고 막다른 골목 끝에는 회색 망토를 뒤집어쓴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주페에게 카드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당장 황제령을 떠나십시오. 위험합니다."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에 주페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날 협박하는 거요?"
망토의 어두운 그늘 밑에서 빛나던 무지개톤의 회색눈이 태자를 힐끗 돌아보았다.
"레곤은 지금 별장에 없습니다. 대신 자객들이 매복해있을 겁니다."
세네피스가 손에 들고있던 아켐 행 1등석 탑승권을 다시 내밀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은 주페는 사뭇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그대의 독기어린 혀에서 나오는 말을 내 믿을 것이라 생각하셨소?"
탑승권을 쥐고있던 세네피스의 손끝이 입술과 함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모든 제국민을 속일 수 있었겠으나, 그대 스스로만은 속일 수 없을것이오."
"제, 제발 제 말을......"
세네피스를 무시한 채 휙 돌아선 주페는 앞을 가로막는 청년들을 거칠게 떠밀어버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차에 오르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문 세네피스는 더러운 땅바닥에 맥없이 꿇어앉고 말았다. 붉어진 눈시울을 타고 턱으로 떨어진 눈물이 티켓을 움켜쥔 그의 손등으로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차를 다시 출발시킨 주페는 예정대로 레곤의 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1번 도시 남동쪽 호수변의 고급주택가에 있는 그의 별장은 길지않은 숲길을 가로지르면 나타나는, 물에 반 쯤 걸쳐져 만들어져있는 옛날식의 목조주택이었다.
이미 레곤에게 이시간에 이곳을 찾아오겠노라고 약속을 했던 주페 입장에서 세네피스의 얼토당토않은 협박인지 충고인지를 믿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세네피스 말마따나 레곤이 몸을 피했다면, 그곳에 찾아갈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 턱이 없었다.
평소처럼 집 안에서 달려나온 하인이 주페의 차 문을 친절하게 열어주었다.
"레곤 공주는 안에 있나?"
"안에서 책을 읽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하인의 인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던 주페가 잠시 멈칫 했다.
"레곤이 오빠가 왔는데도 직접 나오지도 않고 있다고?"
"동부에 다녀오신 여독으로 몸살기가 있으신 듯......"
웃으며 대답하던 하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주페는 어느새 자신의 옆구리에 들어와 있는 그의 손목을 반사적으로 움켜잡았다.
"으......윽."
주페의 팔에 손목을 비틀린 하인 녀석이 신음소리와 함께 쥐고있던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주페가 녀석의 목을 꽉 움켜쥐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이런 명령을 내린 게?"
눈을 부릅뜬 주페 태자가 이를 드러내며 그 하인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아드득 하며 뼈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팔이 뒤로 휙 돌아가버렸다. 순간, 사방에서 몰려드는 꽤 여러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주페가 급히 들어사며 차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차에 다가가려던 주페의 코앞으로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또한번 휘둘러오는 칼날을 피해 뒷걸음질치던 주페는 등 뒤의 숲 속에서 몰려나오는 무사들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순식간에 7명의 자객들에게 둘러싸인 주페가 큰 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어떤 놈 지시로 이런 짓을 하는거지!"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지고는 있었지만 주페는 유난히 큰 덩치와 얼굴생김만으로도 그들이 북부인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죽어!"
그들 중 두 명이 동시에 칼을 치켜들며 주페의 앞뒤를 치고 있었다. 앞에서 달려오는 녀석의 배를 재빨리 걷어찬 주페는 눈 깜짝할새 녀석의 손에 들려있던 짧은 검를 빼앗고는 몸을 휙 돌려 뒤를 공격하던 자객의 턱을 거칠게 올려쳐버렸다. 얼굴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놀란 나머지 5명이 큰 소리를 지르며 주페에게 일제공격을 가했다.
"이놈들!"
왼손으로 옆을 공격해온 자객의 얼굴을 힘껏 후려친 주페는 오른손으로는 칼을 휘둘러 앞을 공격해온 녀석의 목을 베어버렸다. 하지만 그새 두 녀석의 칼이 그의 등뒤로 다가와 있었다.
"이, 익,"
등과 옆구리를 베인 주페가 몸을 움츠리며 급히 뒤로 돌아섰다. 그의 놀라운 순발력 덕택에 가까스로 치명상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꽤 많은 피가 그의 옷 위로 번지고 있었다.
"도대체......왜......"
한손에 칼을 쥔 주페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유학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검술 솜씨는 물론이고 강한 힘과 순발력에 자객들도 꽤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두 군데나 깊은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이제 주페에게 그다지 희망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주페의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았던 녀석들 중 1명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또다시 3명의 자객들에게 앞뒤를 가로막힌 주페는 자신의 상황을 이미 잘 알고있었다.
"이런......"
숲 쪽에서 다가오는 또다른 인기척을 느낀 주페가 절망감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세네피스의 경고를 무시한 스스로를 뼈저리게 원망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빨리 끝내."
자신을 둘러싼 3명이 양쪽에서 다시 돌격해오기 시작하자 주페는 반사적으로 칼을 똑바로 치켜들었다.
"뒤에!"
누군가가 비명처럼 소리를 꽥 내지른 고함은 숲 속에서 날아오는 시퍼런 무언가를 향한 것이었다. 주페에게 달려들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던 자객의 눈에 힘있게 날아온 푸른빛 단검이 명중하면서 찢어지는 비명이 사방을 울렸다.
"엇,"
뜻밖의 상황에 놀란 주페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숲에서 달려나온 3명의 건장한 청년들---방금 전 도시에서 그의 차를 세웠던---이 주페를 공격하던 자객들의 등뒤에 달려들면서 어느새 싸움은 그들끼리의 난투극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미 많은 피를 흘린 주페는 결국 숨을 헐떡거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저들간의 싸움은 그의 관심사 밖이었다.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자신의 차를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던 주페는 팔다리에서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코, 코리온......"
숨을 헐떡이던 주페는 열려있는 차 문 앞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조금씩 번져나가는 자신의 붉은 피를 손에 찍어보며 고개를 거칠게 가로젓던 그는 결국 흙바닥에 머리를 힘없이 떨구고 말았다.
병원에서 힘겹게 눈을 뜬 주페의 머리맡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황궁의 웅장한 야경은 그가 아직 황제령 1번 도시에 있다는 사실 정도는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토막토막의 단편적인 기억들만이 남아있는 그의 머릿속은 심하게 혼란스러웠다. 건장한 두 남자에게 들려 차에 실리던 것과, 차 안에서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지혈해주던 하얗고 고운 여자 손,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품에 끌어안고 운전사에게 빨리 가라며 악을 쓰고 재촉하던 여자의 목소리와, 무지개빛이 감도는 그의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주페는 어느새 자신의 머리칼에 배어있는 그 여자의 은은한 향수냄새도 똑똑히 분간해내고 있었다.
병상 옆에는 자신의 소지품들과 짐가방이 곱게 정돈되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언제든 아켐으로 떠날 수 있는 1등석 티켓 한 장이 눈물자국이 남은 모습 그대로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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