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32화 (232/1,132)

< -- 232 회: Part 11. 누가 수국을 좋아하는가? -- >

.

.

.

8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플레렌 종가에 돌아온 샤드니는 누나인 네페티 부인이 외가인 발 가를 찾아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나선 샤드니는 지난번 주페 태자와 네페티 부인의 만남이 있었던 접견실로 향했다.

"누가 숨어서 지켜봤을지도 모르지."

지금은 텅 비어있는 접견실을 둘러보던 샤드니는 수상한 흔적을 찾아 구석구석 틈새를 모두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방형 독채인 이곳 접견실에는 누군가 숨어서 대화를 엿들을만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 사람 키의 대여섯배는 됨직한 높은 돔 지붕이 몇 개의 천창이 뚫린 채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저곳에는 괴물---60여년 후에나 태어날---이 아니라면 도저히 매달릴수가 없는 일이었다.

천창에서 생각없이 시선을 돌리던 샤드니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퍼뜩 들었는지 스코프를 끼고는 돔에 붙어있는 촛대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이런,"

상석을 마주보는 촛대 하나에서 나오고 있는 '이상한 신호'를 발견한 샤드니는 즉시 사다리를 가져다가 그곳을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 잡힌 건 손톱만한 작은 감시장치이었다. 안보이는 곳에 이렇게 몰래 설치되어있는데다가 완전히 새것인 것을 보아서 처음부터 설치한 보안용은 아닌 것에 틀림없었다.

"어떤 망할 자식이......"

감시장치를 노려보며 샤드니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샤드니의 머릿속에서 갖은 경우의 수가 다 지나가고 있었다. 일부러든 아니든 누나 네페티 부인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그의 머릿속을 감돌고 있었다.

서둘러 접견실을 나선 샤드니는 이번엔 종가 보좌관실로 걷고 있었다. 많은 시간을 남부에 머무르고 있는 누나를 대신해 가문의 실무를 처리하고 있는 이들 보좌관조직은 부인의 숙부이며 샤드니의 양아버지인 칼림을 비롯한 몇몇 가문 원로측 사람들로 온통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잘 아는 사촌누나 네페티 부인은 엔간하면 저들 '보좌관들'과는 중요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최소한 종가 근황에 관해서라면 저들만한 사람들도 없었다.

"최고제후님이요? 글쎄요......요즘 특별히 이상한 건......의무실을 좀 자주 드나드시는 것 밖에는......"

거의 위협적으로 묻는 샤드니의 추궁에 종가를 관리하는 집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샤드니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의무실? 누님이 어디 아프신건가?"

"아뇨. 그런 것 같지는 않으시던데요. 그냥 의무실장하고 무언가 자주 상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고제후님 침실에 함께 들어가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

'침실에 함께 든다'는 말에 샤드니의 표정이 순간 잔뜩 일그러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건 없어? 요즘 특별히 자주 만나는 사람이라던가......"

"아뇨, 전혀."

"알았다."

대화를 서둘러 마친 샤드니는 종가 제일 외곽에 있는 의무실을 향해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가문 사람들과 영지 내의 중요인물들을 치료해주는 기관인 의무실은 50여명의 의사들로 이루어진 크지않은 고급병원이었다. 샤드니의 가슴과 허리에는 미리 준비해온 단검 한 쌍이 단단히 품어져 있었다.

"썅,"

의무실에 들이닥친 샤드니는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하며 실장실 문을 홱 열어젖혔다.

"이 개새끼,"

안에서 사무를 보던 실장은 대뜸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샤드니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샤드니는 벌벌 떨고있는 의사의 목을 움켜쥐며 이를 드러내고 물었다.

"망할 놈, 네놈이 가문에 고용된 의사 주제에 감히 쓸데없는 데 기웃거려?"

"예? 무슨......"

"닥쳐!"

거칠게 디밀어오는 샤드니의 칼끝에 목을 조금 베인 실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호소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누구보다 가문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 합니다만......"

"오해? 오해라고? 그럼 네놈이 최고제후님과 만나서 무얼 속닥거렸냐는 말이다! 앙? 건강하신 누님에게 무슨 숨겨둔 병이라도 있다고? 아니면 네놈이 누님 침실엔 도대체 뭣하러 들락거리냐? 병이 있으면 이곳에서 치료하면 되지!"

"그게......"

실장이 차마 무어라 말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더러운 놈, 네놈이 감히 최고제후님을 농락하려들었구나!"

칼을 치켜드는 샤드니의 모습에 순간 기겁한 실장이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말했다.

"말도안되는 오해이시옵니다. 전 다만......그분 침실에 있는 환자를 돌보느라....."

"뭐라구?"

칼을 내리치려던 샤드니가 멈칫 했다.

"그곳에 중독환자 한 분이 계십니다. 최고제후님께서 반드시 비밀을 지켜달라 하셔서......어쩔 수 없이 내과의사인 제가 직접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쉰 샤드니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샤드니는 목소리를 최대한 깔며 낮게 물었다.

"그게......누구냐?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네놈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치료할때는 얼굴을 가리고 계셔서......저도 모릅니다......키가 꽤 크신 여자분이시라는 것 밖에는......귀 밑에 상급귀족문이 있으신 걸로 봐서.....꽤 귀하신 분 같습니다. 그리고......몸이 탄탄하고 흉터도 많고 손에 굳은살이 박히신 것을 보아 무장이 아니신가 합니다. 한쪽 팔이 지금 없으신데.....중독치료가 끝나는대로 팔을 재생시킬 계획입니다."

침을 꿀꺽 삼킨 샤드니가 목소리를 잔뜩 깔며 다시 물었다.

"지금도 놈이 있나?"

"많이 아파 거동이 불편하시니......항상 거기 계실겁니다."

"내 여기 왔다는 사실을 행여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네놈을 산채로 짓이겨 죽일 줄 알아라."

한바탕 호통을 친 샤드니는 다시 칼을 숨기고 이번엔 네페티 부인의 침실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누나가 가문 의사와 눈이 맞아 그 손에서 놀아나고 있지 않았을까 했던 그의 황당한 의심은 일단 풀린 셈이었지만 '상급귀족이며 무장'인 어떤 여자가 누나의 침실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는 데 샤드니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나가 녀석을 그정도로 철저하게 감추려 들고 있다면 이번 일과 무언가 관련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눈 앞으로 네페티 부인의 침실이 있는 사자조각의 분수정원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여러명의 용병들이 출입구를 굳게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정원에서 멀찍이 떨어져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누나는 저들에게도 '누군가'의 정체를 감추고있는것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미 누나와 꽤 오랜 시기를 보내온 샤드니는 저들 경비병들을 피해 그 안에 접근하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고, 이런 상황이라면 몇배는 더 쉬워짐은 물론이었다. 헤네랄리페 정원 안쪽으로 급히 몸을 날려 숨어든 샤드니는 깊은 숲 속, 우거진 잡목숲을 따라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요에 파묻힌 채 혼자 책을 읽던 오르마즈는 헤네랄리페 정원 쪽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옆에 놓여있던 단검을 반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부인이십니까?"

아무 대답도 없자 순간 긴장한 오르마즈는 덮고있던 담요를 천천히 들추며 오른손에 단검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찢는듯이 아픈 목을 울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네페티 부인이십니까?"

순간, 웬 금발머리 남자가 정원쪽 창을 훌쩍 뛰어넘어 침실 안에 뛰쳐들어오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오르마즈가 급히 몸을 굴려 침대 반대편으로 굴러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인기척을 느낀 샤드니는 단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꽉 주며 침대에 조심스럽게 접근해들어갔다.

"어떤 년인지 빨리 기어나와라. 외팔이라는 거 잘 안다. 난 30년이 넘게 무술을 익힌 사람이야. 내손에 죽기싫으면 빨리 나와."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던 샤드니는 침대머리에 떨어져있는 책과 피묻은 손수건, 몇 개의 약병을 발견하고는 잠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오라니까!"

칼을 쥔 샤드니가 주변을 한바퀴 빙 돌았지만 침대 옆에는 아무도 발견할수가 없었다. 눈을 부릅뜬 샤드니는 커튼과 태피스트리들 뒤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쪽에 정신이 팔린 샤드니는 침대 밑에서 빠져나와 살그머니 기어오고 있는 그림자를 미처 발견할 여유가 없었다.

"아악!"

오금을 채인 샤드니가 제대로 저항조차 못해본 채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맥없이 꼬꾸리지고 말았다.

"뒤돌아보지 마라."

뒷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칼날의 감촉에 샤드니는 그대로 호흡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가슴과 무릎으로 샤드니의 한쪽 어깨를 꺾어 내리누른 오르마즈는 백전노장답게 한 팔이 없이도 이 성질급한 젊은 청년을 눈깜짝할새 제압해버렸다.

"샤드니라고 했지? 똑똑한 젊은이같은데......이런 개싸움에 섣불리 끼어들지 마라. 나 역시도 그럴 생각이 없으니."

"썅! 네년은 누구냐!"

샤드니가 온몸을 버둥거리며 악을 쓰고 물었다.

"네 누이와 가문을 지켜줄 사람이다."

낮고 약간 탁한, 너무도 침착하고 위엄있는 여자 목소리에 샤드니는 귀에서부터 그의 숨골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무서운 위압감에 온몸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딱딱 끊어지는 강한 억양이 북부 사람같다는 느낌을 주고는 있었지만 샤드니로서는 '북부연합군 사령관'으로 있어야 할 오르마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고하지만......네놈과 철없는 대군녀석이 주페 태자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으니......지금이라도 제정신 차리는게 현명할거다. 내 네페티 부인을 생각해 네놈 목숨만은 살려줄테니 다시는 여기 얼씬하지 마라."

공포에 질린 샤드니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유학자라는 녀석이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줄로 믿겠다. 뒤돌아보지 말고 나가라."

"아, 알겠습니다."

얼굴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샤드니는 상대의 칼날이 목 뒤에서 떨어지자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난 단검을 잘 던진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내가 일어나라고 하거든 그 때 일어나서 나가라."

오르마즈가 샤드니의 어깨를 풀어주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다시한번 고개를 끄덕인 샤드니는 상대가 몸을 질질 끌며 방의 한쪽 모퉁이 뒤로 몸을 피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저런 '병신'에게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제압당해버린 자신을 끊임없이 탓하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헉, 헉,"

문을 향하던 샤드니의 귀에 들려온 건 꽤나 고통에 겨운듯한 상대의 가쁜 호흡소리였다.

"그래, 환자란 말이지....."

밖으로 걸어나가던 샤드니의 한손은 그의 가슴에 품고 있던, 또하나의 작은 단검으로 조심스럽게 향했다. 문을 열고 침실문을 나서던 샤드니는 상대가 모퉁이 뒤에서 기어나오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몸을 휙 돌려 재빨리 단검을 뽑아들고 다시 돌진해들어갔다.

"내가 이대로 물러날 줄 알았냐!"

바닥에 쓰러져있던 오르마즈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오르마즈가 반사적으로 집어던진 단검이 샤드니의 배를 베어버리며 공중에 피를 흩뿌렸다.

"악!"

배를 움켜쥔 샤드니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내달려 오르마즈의 목을 향해 단검을 힘껏 내리찍었다. 샤드니의 체중을 실어 무섭게 내리찍힌 단검날은 때맞춰 몸을 비튼 오르마즈의 왼쪽 어깨에 깊숙히 박히고 말았다.

"아, 앗!"

그제서야 상대의 '얼굴'을 본 샤드니가 자기도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제국의 개국공신이며 성전의 영웅이고 한때 제국의 총리대신까지 지낸 바 있는 그 유명한 오르마즈 카파키 경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만 샤드니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비겁한 놈......"

이를 악문 오르마즈가 샤드니를 힘껏 차냈지만 독기운과 투병으로 힘을 잃은 그의 다리는 샤드니를 조금 뒤로 밀쳐냈을 따름이었다.

"잘만났다! 서부의 원수놈이구나!"

다시한번 달려든 샤드니가 방금전 자신이 떨어뜨리고 나갔던 단검에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오르마즈의 오른손이 조금 더 빨랐다. 하지만 샤드니는 단검을 먼저 잡은 오르마즈의 오른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나머지 한손으로는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썅! 죽어!"

"카, 학,"

샤드니에게 깔려 목이 졸린 채 결사적으로 발을 버둥거리던 오르마즈는 그의 발 옆에 세워져있던 큰 화분을 걸어 쓰러뜨리고 말았다. 샤드니의 뒤통수를 덮친 도자기 화분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깨져 사방에 흩어졌다.

"악!"

큰 충격을 입은 샤드니가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움켜쥐며 옆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은 오르마즈가 샤드니의 얼굴을 옆으로 힘껏 차내버렸다.

"썅!"

다시한번 오르마즈에게 달려들려던 샤드니는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자신의 단검에 흠칫 놀라며 뒤로 조금 물러나고 말았다. 단검에 찔린 왼쪽 어깨가 이미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한 오르마즈는 고통에 겨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샤드니에게 말했다.

"안하려고 했지만......헉, 헉, 더 접근하면......널 죽일수밖에 없다....."

오르마즈의 이 말은 절대 허풍이 아니었다. 게릴라 암살요원시절 숱한 코메트 정예요원과 '침묵의 자매들' 성직자들을 소리없이 저세상으로 보내고 최악의 공포의 대상으로 손꼽혔던 오르마즈의 실력은 이미 제국내에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칼에 베인 배를 움켜쉬며 샤드니는 다시 밖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살기띤 눈을 한 오르마즈는 이번에는 물러나는 그를 끝까지 쏘아보고 있었다.

샤드니가 완전히 물러나자 그제서야 단검을 내려놓은 오르마즈는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침대머리에 있는 할룩스를 더듬더듬 집어들었다. 함부로 밖에 나갈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가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사단 부하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카렐은 우베에게 전문을 건네받은 이후로 줄곧 우울한 표정이었다. 우베로부터 전문 내용을 전해들은 제네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꼭 이렇게 신사적인 방법만 고집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호 가 안가 중의 한군데에 억류되어 있을테니 마스터 케스난에게 시키면 솔의 위치를 파악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서 가디언들로 기습해 되찾아오면 될 겁니다."

'애꾸눈' 제네르가 그다운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는지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카렐은 그의 말에 고개를 조금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아니라니! 솔을 구하는데 뭐 다른 걸 생각할 게 있어! 내가 직접 갈 테니까......"

순간 조금 흥분했는지 네피가 먹던 고깃덩어리까지 내려놓으며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잠시 제네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카렐은 조금은 조심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다.

"로퍼크 가는 솔의 친권을 일찌감치 포기했고 네피 넌 가디언이라 법적으로는 솔에 대한 권리가 없어. 세호 가가 솔을 제롬 공의 첩으로 보내는 데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까짓게 도대체 무슨 문제야! 아버지가 자식을 데려오겠다는데......."

흥분한 네피의 입을 가로막은 카렐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기습해서 납치해오면 당장 곁으로는 데려올 수 있겠지만......세호 가에서 제롬과 파혼을 시켜주고 나와의 혼인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그 상태로는 솔을 황실에서 인정받는 정식 황빈으로 간택할수가 없어."

"그래서!"

"뤼렌 부인에게 내 정체를 밝히고 담판을 짓는밖에. 곧 라마단 금식기간이니까 어차피 한달정도는 전쟁도 중단될테니.....그때 해결을 봐야겠어. 이렇게도 해결이 안된다면 그때가서 힘을 써도 늦지않아."

"그편이 낫겠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네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베가 물었다.

"그럼......솔을 일단 황빈으로 간택하신다고 치고......아직 비어있는 나머지 황빈 1위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샤자한 공과 페로 경이 동부 하급제후가 혈통 중 한명을 들이기로 합의를 봤으니......생각 좀 해봐야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한 카렐이 잠시 베아트릭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떨군 베아트릭스의 검은색 눈동자는 조금은 맥없이 땅바닥만을 향하고 있었다.

제네르가 손가락이 잘려나간 아직 불편한 왼손을 더듬거리며 수첩을 꺼내들었다.

"지금 드러난 간택 대상자로는 7제후 바툴 가의 탈란 바툴 중대장이 있고......9제후 클라투스 가에서는 옛 로노 장태자의 사촌동생을 천거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샤자한 공께서는 도리어 클라투스 가 쪽에 무게를 두고 계신 듯 합니다. 만나는 보셨습니까?"

"아직."

카렐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네르는 카렐의 대답마저도 수첩에 꼼꼼하게 적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최종결정은 전하와 세네피스 황후폐하께서 하시는 것이니......라마단 기간중에 양쪽 모두 공식 상견례를 가지시고 구체적인 절차에 들어가셔야겠습니다."

'구체적인 절차' 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아는 아메스가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그런 아메스에게 대뜸 험한 눈길을 보낸 토로 경이 그가 들으라는듯이 그 탁하고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간택 성사여부를 떠나 당사자에게도 큰 영광이니 전하께서 죄책감이나 부담감을 가지실 필요가 전혀 없사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보시고 전하께 가장 힘이 될 사람을 고르시옵소서."

"알고있네."

짧게 대답한 카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렐의 묘하게 싸늘한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제네르가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전하께서 따로 생각해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카렐은 피곤한 듯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사단 간부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이 수건은 또 뭐냐?"

우베가 자이납의 허리띠에 걸려있는 무명수건을 가리키며 묻자 자이납이 어깨를 으쓱 해보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곱지않게 쏘아보던 시로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이코 유학자선생님꺼지 뭐겠어. 조만간 그양반 옷까지 홀라당 다 벗겨놓고도 남을거야."

"호호호, 그순간이 정말로 기대되네요."

자이납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머리에 감은 검은 '터반'과 허리춤에 달린 수건을 번갈아 만지작거렸다. 자이납의 명랑함에 가벼운 웃음을 지은 제네르가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라마단중엔 뭣들할건가? 나같은 유학자들이야 할일 투성이지만......"

"여자나 좀 꼬셔봐야쓰것는데 이 동부엔 아무래도 미녀는......"

쓸데없는 소리로 또한번 제네르의 꿀밤만 얻어맞은 우베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베아트릭스 경은?"

제네르의 질문에 베아트릭스는 여전히 뻣뻣한 얼굴로 대답했다.

"슬레이프니르 정신무장과 팀웍훈련에 주력할겁니다."

"아휴, 재미없어."

라손이 혀를 쑥 내밀며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지만 베아트릭스는 못들은 척 무표정하게 식사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눈치빠른 우베와 제네르는 베아트릭스가 묘하게도 카렐 외에는 엔간해서는 밝은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미 충분히 꿰고 있었다.

++++++++++++++++++++++++++++++++++++++++++++++++++++++++++++++++++++++++++++++++++++++++++++

지난 연휴기간동안 DataBase대마왕(?)의 강림 때문에 2일 1연재했습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