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35화 (235/1,132)

< -- 235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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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매년 3월 무렵에 있는 라마단 금식기간은 절제를 통해 몸을 정화한다는 이 기간의 종교적 의미를 그럭저럭 간직하고 있는 서부를 제외한 제국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한달동안의 느긋한 휴가기간---심지어 전쟁마저도---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30일의 기간동안 낮시간동안에는 모든 식사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거래행위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실상 필요불가결한 직종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은 아예 한달동안을 그냥 '놀아버리는'것이 도리어 일반적이었다.

이 기간중에는 제후들간의 모든 교전행위는 명분여하를 떠나 엄격히 금지되었고, 이 '성스러운' 기간중에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엄한 처벌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나 라마단의 원칙들이 엄격히 지켜지는 서부에서는 명예를 손상시키는 비겁한 짓을 저지르거나, 약속을 어기는 등의 행동을 이 기간중에 저지른 사람이나 가문은 평소보다 몇 배의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때이기도 했다.

"이정도면 평소 셔틀 통행량 절반 이하로군요."

아켐 3번 행성의 대기권에 들어서며 조종사 베네루스가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 전 카렐 일행이 한바탕 곤욕을 치렀던 플레렌 가 영지인 4번 행성 인근에 위치한 이 행성은 서부 제2제후 세호 가와 제3제후 발 가가 남반구와 북반구를 나누어 절반씩 영지를 공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근위대 서부 파견군 사령부가 위치한 곳인 탓에 유난히 근위대의 입김이 강한 곳이었다.

이곳 역시 4번 행성과 마찬가지로 행성 대부분이 황량한 모래와 바위사막으로 뒤덮힌, 그다지 매력없는 건조지역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나마 4번 행성보다는 조금이라도 낫다'며 평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대기권에 들어선 카렐의 아르다가 셔틀은 발 가 영지인 북반구의 황량한 상공에 도달해 있었다.

"외가엔 1년 반만에 와보네요."

카렐 옆에 선 아메스가 눈에 익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재작년 외할머니 생신 때 마지막으로 왔었는데......"

아메스가 뒤에 선 카렐을 돌아보며 빙긋이 웃음지었다.

오늘밤 이 둘은 어차피 따로따로 갈라질 예정이었다. 카렐은 일단 발 가 종가에 내려 주페 태자 제례에 참석할 레곤 대공주와 동행할 예정이었고, 아메스는 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가인 세호 가를 찾아가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아메스의 '설득'이 성공하면 카렐 역시 세호 가를 찾아 뤼렌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덧붙여 겹약혼을 허락받는 것이 오늘부터 내일까지의 계획이었다.

사실 황빈을 조건으로 솔과의 약혼을 세호 가에서 허락받는다는 건 아직까지 솔을 '천박한 년' 취급하고 있는 세네피스 황후에 대한 설득은 물론이었고, 잘하면 2제후 세호 가를 이반시켜 서부의 동맹을 깨뜨릴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목적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제례 참석은 물론이고 '겹배우자' 관계의 큰 어른이 될 지도 모르는 뤼렌 부인과의 만남을 위해 카렐은 어느때보다 복장에 꽤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흰색의 실크원피스와 황금자수의 흰 튜닉, 금빛 머플러를 두르고 꽤 값나가는 장신구까지 완벽하게 갖춘 카렐의 복장은 멋쟁이 페로가 일부러 챙겨준 것 답게 누가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세련된 장태자의 자태였다.

발 가 종가에 가까와진 카렐의 셔틀이 약간의 진동과 함께 바닥에 내려앉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외할머니가 조금 꼬장꼬장하셔서 그렇지 못된 분은 아니시니까.....전하 정체만 알게되시면 솔을 제롬 그녀석한테 보내시지는 않을거예요."

카렐의 머플러에 꽂은 핀을 다시 고쳐주며 아메스가 말했다. 카렐과 공식적인 '약혼자'임을 확인받으러 가는 길이 꽤나 즐거운지 아메스도 내내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카렐의 몸 때문에 오랫동안 잠자리도 함께하지 못했던 아메스는 이 한달간의 꿀같은 휴가기간에 가진 서부 방문길에 약혼자와 '꿈같은 시간'을 보낼 기대에 잔뜩 들떠있었다. 아메스 역시도 카렐처럼 화사한 드레스와 비단포, 자이센 가의 문장이 새겨진 붉은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내일쯤 다시 보겠군요."

카렐이 품에 다정하게 안아주며 말을 건네자 아메스의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마친 카렐은 밖으로 나서며 아메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심해 다녀오세요."

다시 이륙하는 셔틀 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아메스도 입가 가득 웃음을 지었다. 뭐 당장 멀어지는 것 정도는 아무 상관없었다.

계획대로라면, 내일이면 어차피 다시 만날테니.

아켐 4번 행성의 플레렌 종가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라마단 둘째날 저녁에 서부제후들과 각지역 대사들을 불러모은 서부 최고제후 두겐 공은 사뭇 굳은 얼굴로 측근들과 무언가 심각한 상의를 하고 있었다.

"뭐하자는 수작이야, 사람 불러다놓고."

서부 제3제후 발 가 종장 사우드 사예브 발 부인이 플레렌 가 사람들의 심각한 표정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서부에서 유일하게 페로와 손잡은 덕에 다른 서부제후들로부터 제대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그는 요즘들어 황당한 짓을 종종 저지르는 저 망할 최고제후가가 오늘 있을 '성명서 발표'에서 또 무언가 한방 터뜨리지나 않을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두겐 공이 갑자기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우드 부인을 바라보았다.

"또라이 서생녀석,"

사우드 발 부인이 차 한 모금을 들이키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사실 그도 아무런 계산도 없이 서부의 적인 페로와 덜컥 손잡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부에서도 남부쪽 경계를 이루는 테나토 행성계를 비롯한 그 일대를 주요 영지로 하고 있는 발 가로서는 북부와 동부 경계인 탈라스 행성계 원정이 전혀 득될 일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지금껏 테나토 행성계의 영유권을 놓고 수백년간 남부와 옥신각신해온 입장에서 남부와의 연합군 결성도 그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 코리온과 플레렌 가가 테나토 행성계를 통한 플라칼 가 군대의 이동을 멋대로 허용하면서 지난번 메디스 시 공격에 이어 저 망할 최고제후가와의 관계가 또한번 잔뜩 틀어져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로서는 저 잘난 페로와 장태자 카렐이 원수같은 싸움꾼 남부와 앞뒤 꽉 막힌 코리온의 종 플레렌 가, 돈버러지 세호 가의 콧대를 콱 꺾어주기만 한다면 이래저래 득이 꽤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그의 조카이기도 한 네페티 부인이 어쩌면 차기 황제의 황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떨어질 떡고물도 놓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 전 사촌누나의 뒤통수를 치고 최고제후직을 차지해버린 있는 두겐 저새끼도 그날로 볼짱 다 보는 셈이었다. 바램대로만 된다면 네페티 부인이 쫓겨나면서 잃어버린 최고제후가에 대한 간접적인 영향력이나마 되찾을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가문의 사활을 걸고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페로와의 정략혼은 이 모든것들을 담보하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도 서부에서 가문의 고립을 자처한 이 위험한 선택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누군가가 제시한다면 언제든 말을 바꿔탈 준비 정도는 당연히 되어있었다. 종장인 그에게는 명문이니 의리 따위보다 훨씬 더 소중한 천만명이 넘는 영지민들과, 그의 결정에 운명을 맡기고 있을 수백의 가문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2제후 세호 가 종장 벨리크 세호 부인을 살짝 째려보았다. 돈이라면 환장하는 저 여자는 코리온의 '교리정치' 나부랭이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면에서는 그의 동지일수도 있었지만 그 외에는 사우드 부인에게는 그다지 이쁜 구석도 없는 인간이었다.

생각없이 한쪽을 돌아보았던 사우드 부인은 한쪽에 말없이 서 있던 레곤 대공주의 측근, 푸아킨 경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도대체가 아들 편을 드는 것인지 아닌건지 알 도리가 없는 레곤 대공주는 그에게는 꽤나 수수께끼같은 행적을 보이고 있었다.

대공주가 오빠인 주페 태자의 기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부에 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맏아들인 코리온과는 함께 있지 않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더니 아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이번 행사에 측근을 보내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새가 모자지간에 할 행동으로는 어딘지 어색한 게 사실이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초청에 응해주신 여러 제후님들과 대사님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단상에 오른 최고제후 두겐이 드디어 사람들 앞에 나서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 코리온 리쿠 학장님의 교리정치선언 이후 4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많은 제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사우드 부인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플레렌 가의 뒤를 잇는 2, 3제후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협조 운운하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사우드 부인의 무례한 태도를 짐짓 못본 척 한 두겐이 말을 이었다.

"그간 교리정치안에 지지 및 조언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리 서부제후지역 전체의 공식적인 견해로 정리하여 발표하고자 이자리를 가졌습니다."

'공식적 견해'라는 말에 제후들의 눈에서 광채가 번득이기 시작했다. 사우드 부인 역시 탁자에 바싹 다가앉으며 저 망할 최고제후가 오늘은 무슨소리를 떠드는지 잔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간 가장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신 사항은 교리정치안에서 제국의 지도자는 과연 누구를 생각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에 우리는 여러 학자분들의 의견을 모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침을 꿀꺽 삼킨 사우드 부인이 마주앉은 벨리크 부인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역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드디어 그간 4달을 미루어온 '교리정치' 나부랭이의 지지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임을 그 둘 모두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좌중을 한 번 둘러본 두겐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가져온 원고를 또릿한 발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윰 포고령에 장자 승계의 원칙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으나 선대황제의 자녀들은 적서 불문하고 모두 제위승계 자격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어떤 자들은 사위를 맞아 제위를 이어야한다는 가당치않은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는 포고령에 전혀 규정되어있지 않은 해괴한 주장입니다. 또한 총리라는 자는 '비상시 특례'를 내세워 제위 후계권을 사칭하고 있으나, 해당되는 포고령 조항 역시 과도기간의 정치공백을 막기 위한 수단일 뿐 후계권을 주장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다수 유학자분들의 유권해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각 지역 대사들이 일제히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두겐의 뜻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원칙인 장자 승계에 따라 제위가 이어져야 할 것인 바, 선대황제의 형이 되시는 로노 태자나 주페 태자저하께서 적서를 떠나 전혀 자손을 남기지 못하셨고, 동생이신 모디아크나 타니토 태자저하 역시 손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레곤 대공주저하의 자손분들이 황실의 직계 S혈통을 당당히 잇고 계시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두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포고령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우리 서부의 충성스러운 제후들과 파예드 아카데미를 축으로 한 유학자들은 S-7세대 중 장자승계에 가장 근접해 계시는 대공주저하의 장자 코리온 세닉 리쿠 대군께서 제국의 새 지도자가 되어야 함을 이자리에서 명백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목청을 높이는 두겐의 이마에 어느새 핏발이 서 있었다.

어느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코리온을 황제로 지원한다는 공식적인 견해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발언에 경악한 남부와 동부, 북부 대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리고 있었다.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는 그들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부 4제후 알리 경이 큰 소리로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5제후, 나머지 하급제후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학장님을 황궁으로!"

알리 경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다른 서부제후들도 일제히 목청을 높이며 그를 따라 함성을 올렸다.

연회장 안에 쏟아지는 서부인들의 박수와 환호의 물결과는 별도로 3제후 사우드 부인과 2제후 벨리크 부인은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자리에 모인 다른 모든 서부제후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이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귀 가문의 '중립외교'가 또한번 도마에 올랐군요."

사우드 부인이 허리를 꼿꼿이 펴며 낮게 빈정거리듯 말하자 벨리크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귀 가문이 계속 서부의 이단아 역할을 계속하실지가 더 궁금한데요?"

단상의 두겐 공을 똑바로 올려본 벨리크 세호 부인이 두 팔을 펼쳐보이며 어깨를 으쓱 하고 있었다. 적극적인 지원은 아니지만 대놓고 반대도 하지 않겠다는, 세호 가로서는 나름대로 꽤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이제 두겐 공을 비롯한 다른 제후들의 시선은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 명, 3제후 사우드 발 부인에게 쏠렸다.

가문의 운명이 걸린 결단의 시간임을 깨달은 사우드 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로서는 서부와 유학자들의 중론을 따라갈지, 조금 더 큰 몫이 걸린 카렐 쪽에 베팅을 할 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한참동안 계속된 그의 침묵에 다른 제후들이 사뭇 긴장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제위라는것이......감히 제후들이 이러쿵저러쿵 끼어들 문제가 아니겠죠. 전 반대합니다."

가져온 파일을 탁 덮은 사우드 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회의실을 그대로 나서버렸다. 이제 그로서는 자신의 이 위험한 도박이 성공하기만을 기원하는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회의실을 나선 또 한사람, 깡마르고 큰 키에 연륜이 들여다보이는 주름 사이로 근심이 가득 고인 얼굴을 한 푸아킨 경은 이날따라 유난히 흐린 밤하늘을 올려보며 220년만에 또다시 찾아온 황실의 위기에 깊은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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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피스 태자빈마마와의 친분은 잘 알고있으나 가능하다면 제위의 향방이 결정될때까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대한 자제하시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레곤 공주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에 전전긍긍하며 이 늙은 모사의 조언에 무조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1번 도시 남쪽 자신의 별장에서 오빠 주페를 기다리고 있던 레곤 공주는 그곳으로 자객이 갈 것이라는 세네피스의 귀띔 덕택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이곳 3번 도시로 도망쳐와 있었다.

'자객'이라는 말에 그곳을 찾아오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주페 오빠의 안전을 그가 걱정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네피스는 '주변에 일체 연락하지 말고 나만 믿고 일단 피하라'며 그를 강제로 이곳에 떠밀었고, 그 약속이 헛된것이 아니었음은 1번 도시의 한 병원에서 상처를 치료받고있다는 주페의 뒤늦은 연락 덕택에 확인될 수 있었다.

세네피스를 의심하는 듯 한 모사 푸아킨의 조언에 레곤이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

"그래도 세네피스 올케 덕에 나하고 주페 오빠가 목숨을 건졌잖아?"

"그러해도 세네피스 태자빈께서는 북부분이시니......"

"됐어, 그래도 당장은 믿을데가 거기밖에 더있냐구."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의 푸아킨이 레곤 공주에게 다시 간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시댁인 세닉 가로 일단 피신하심이 어떠신지......"

"세네피스 올케가 여기 조용히 있으랬어. 지금은 내 몸 하나 살자고 무책임하게 도망칠때가 아니고 이번 일이 잘 풀리게 여기서 지켜봐야 할 때라구, 난 태자라고! 알아? 제국 태자라고!"

또한번 신경질을 부린 레곤 공주가 푸아킨을 한 번 째려보았다. 카파키 가 가신 출신으로 다른 사람도 아닌 세네피스가 직접 그에게 소개해주었던 저 북부 출신 모사는 무슨 이유엔지 자신의 출신가문인 카파키 가와 세네피스 태자빈을 그다지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그렇게 올케를 못믿는데?"

"못믿는다기보다는 그분 역시 가문 내에서 입장이 조금 그러하오니......"

푸아킨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푸아킨은 작금의 정세를 주페 태자만큼이나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권해준대로 중립선언을 한 레곤 공주가 친오빠인 오넬론과 북부의 어마어마한 분노를 사리라는 것도 물론 잘 알고있었다.

그러다보니 세네피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 안되게 행동하는' 옛 주인이며 태자빈을 의심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아는 세네피스 태자빈은 친구인 레곤은 물론이고 주페 태자도 눈하나 깜짝않고 죽여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서부에 계신 코리온 도련님도 유심히 살피셔야 할 듯 합니다. 도련님이 워낙 야심이 크시고 머리까지 명민하시니 이번 유학자 지지선언 사태의 배후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제기랄! 난 지금 내 몸하나 추스리기도 죽을 지경이라구! 맏아들이라고 그 망할 사고뭉치 새끼 이젠 또 어쩌라구! 대가리도 다 큰놈을 두들겨 팰수도 없고!"

신경이 잔뜩 곤두서있던 레곤 공주가 결국 있는대로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거의 이성을 잃은듯 날뛰는 공주의 어깨를 꼭 붙들어주며 푸아킨이 목에 최대한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러시니 더더욱 공주저하께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오늘 샤자한 공이 로노 장태자전하를 위한 15만여 병력의 연합 지원군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이대로 나가면 북, 남부와 동부가 큰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여기에 서부가 주페 태자저하까지 지원하려 나선다면 어머님이신 선대폐하께서 가까스로 기틀을 잡으신 제국은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주페 태자저하와 두분이 손잡고 어떡해서든 전쟁을 막으셔야 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모든 게 어렵다니."

레곤 공주가 머리를 싸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대 오넬론 태자저하를 지지한다 밝히시면 안됩니다."

푸아킨이 떨리는 목소리로 강조했다. 한때 자신의 주군가문이었던 카파키 가를 결과적으로 배신하는 이 조언을 할 수밖에 없는 그의 가슴도 갈갈이 찢겨나가는 기분이었지만 복수심에 눈멀어 냉혈한으로 돌변해버린 종장 투르케스크 공을 잘 아는 그로서는 도저히 그의 뜻을 따르라는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목적했던 타니토 공주 설득도 실패한 채 상처뿐인 몸을 이끌고 파예드 아카데미로 돌아온 주페를 반갑게 맞아준 건 역시 그 사랑스러운 조카 코리온이었다. 주페는 형인 로노 장태자에게 동부에서 온 15만의 병력이 쥐여졌다는, 좋아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소식을 전해듣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숙부님께서 제위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알고있어요."

교수실에 딸린 작은 살림집에 몸져 누워있던 주페의 수발을 손수 들어주며 코리온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지성명이 계속 파장을 불러일으켜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으니 정말 큰일입니다. 조만간 35만의 원리주의 유학자들하고 서부제후 거의 전원이 숙부님을 제위로 보내자고 날뛰어댈 것 같습니다. 이를 어떡해야 하죠?"

칼에 찔린 주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코리온이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웃옷을 벗은 채 그의 손에 몸을 내맡긴 주페 태자는 자신의 걱정을 속속들이 '이해'해주는 조카가 내심 기특한지 약을 발라주던 코리온의 손목을 꼭 쥔 채 입가에 미소를 띠어보이고 있었다.

코리온은 그의 거칠어진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숙부님까지 이렇게 다치셨으니......다친 모습을 보이면 주변에 자칫 제위경쟁이 유혈사태로 번졌다는 위기감을 줄 수 있으니 숙부님께서는 상처가 다 나으실때까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네요."

"하지만 당장 일은 꼬여가고 할일이 태산이니 내 어찌 이대로 쉬고만 있겠냐."

잠시 뜸을 들이던 코리온이 자신을 바라보는 주페 태자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가며 신중하게 말했다.

"제가 일단은 숙부님의 개인 보좌관이 되어서 모든 일을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제후들도 제가 다 만날테니 걱정마세요. 그러니까 여기서 푹 쉬시면서 제게 지시만 내려주세요. 누가 저만큼 숙부님의 의중을 잘 알고있겠어요? 절......믿으시죠?"

자신을 믿느냐고 묻는 코리온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조카의 얼굴과 머리를 정성스럽게 매만져준 주페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그래, 널 믿지. 믿고 말고. 네가 아니면......세상 누굴 믿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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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커스(Crocus)는 자주색 혹은 흰색의 여러해살이 풀로 사프란과 함께 불리기도 합니다. 그 꽃말은 기다림, 무조건적인 용서를 뜻합니다.

<파트 12 기념으로 표지를 바꿔보았습니다. 출판용 표지(퍼억~)같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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