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37화 (237/1,132)

< -- 237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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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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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만여 동부연합군의 지지를 받는 로노 장태자, 그리고 20만의 북부연합군을 등에 업은 오넬론 태자와의 양자 구도가 막 굳어져가려는 순간에 터진 유학자들의 주페 태자 지지선언은 모든 상황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정교일치를 근간으로 하는 제국의 상황에서 무려 35만이나 되는 원리주의 유학자들의 지지가 한쪽으로 쏠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35만의 대군을 손에 쥔 것보다 더 큰 파괴력을 지닐수도 있었다.

게다가 원리주의를 제외한 나머지 유학자들의 입장은 꽤나 어정쩡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소수의 개혁파 유학자들이 로노 장태자를 지원하기는 했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고, 중도파 유학자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지도자가 태자빈으로 있다는 이유로 오넬론 태자 쪽을 지지하기도 명분이 너무나 궁색했다. 게다가 남극성당 수찬으로 있는 같은 중도파 유학자 타니토 공주 때문에 통일된 입장표명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유학자들의 지지를 독차지할수밖에 없는 주페는 원하든 원하지않든 '3강 구도'의 한 축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게다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주페의 태도는 그의 부상사실을 알 턱이 없는 보통사람들에게는 '태도를 돌변해버린 태자가 사람들 눈을 두려워해서'일 뿐이라는 속단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누가 왔다갔느냐?"

자리에 누워있던 주페가 손님을 대신 맞고 돌아온 코리온에게 물었다.

"3제후 사우드 발 부인입니다."

"부인이 왜?"

"숙부님께서 원하신다면 발 가의 6만 정규군 병력과 기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내가 군대같은 건 필요없다 하지 않았느냐!"

흥분한 주페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옆구리에 힘이 들어가자 갑자기 통증을 느낀 주페는 배를 움켜쥐며 거친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옆구리를 꾹 누른 숙부의 손을 가볍게 옆으로 치워낸 코리온은 그의 상처 위에 자신의 따뜻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숙부님 뜻을 전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 잘했다."

그제서야 안정을 찾은 주페가 코리온의 손을 붙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뜻을 전했다'는 코리온의 말은 말뜻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거짓말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다만 코리온이 '당장은 그렇다'는 사족에 꽤나 힘주어 말했다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잇속에 밝은 제후들이 그 행간에 숨은 뜻을 파악하지 못할 턱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어제 학교를 찾아왔던 4제후 샤디 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에게서 비상연락처와 병력 현황, 조직표와 자신과의 연락통 역할을 할 무장들의 자료들을 넘겨받은 코리온은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비밀파일 안에 잘 보관해두고 있었다.

"몸이 낫으시더라도 가능한 직접활동은 줄이시는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불상사가 또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더 큰 불행을 막을 수 있다면 내 목숨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냐."

누워있는 주페의 벗은 가슴에 이마를 기댄 코리온은 그의 어깨에 새겨진 검은 용 무늬의 황족문을 손끝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씀하시면 전 어떡하라고요."

주페는 요즘 부쩍 살갑게 구는 코리온을 바라보며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래......미안하다, 내가 괜한 말을 하고 말았구나."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이 사랑스러운 조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던 주페는 그의 목 밑에서 만져지는 마름모꼴의 황족문에 잠시 손끝이 멎어있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주페가 입을 열었다.

"S발현자로 사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병원에서 나한테 수혈을 할 뻔했다고 하지 뭐냐."

"정말이요?"

코리온이 대뜸 기가막힌 표정을 지었다. S가 '발현'된 돌연변이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그것임을 주페는 물론이고 코리온도 잘 알고있었다.

갑자기 흥분한 코리온이 숙부를 나무라듯 내뜸 언성을 높였다.

"팔에 안새겨놓으셨었어요? 세상에, 피를 넣었으면 어떡할 뻔 했냐구요. 샤미르 리쿠 님이 이것때문에 돌아가셨다는것도 모르세요?"

코리온이 급히 담요를 들치고는 주페의 팔 안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제국민들이 신체적 특이사항을 작은 문신으로 새겨두는 그곳에 주페는 아무것도 새겨놓지 않은 상태였다.

"미처 생각을 못했었지 뭐냐. 당장 오늘이라도 새겨야겠구나."

씁쓸한 미소를 지은 주페가 팔을 어루만지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코리온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병원에 도착하셨을 때 의식이 없으셨다면서요? 그럼 누가 수혈을 못하게 막은거죠?"

갑자기 표정이 조금 굳어버린 주페가 코리온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잠시 머뭇거리던 주페는 작은 목소리로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카파키 부제학이.....우리 특징을 이미 알고 있더구나......"

순간 입을 굳게 다문 코리온의 양 미간에서 핏줄이 곤두서고 있었다.

"그럼, 그 여자가......구해준 거였나요?"

고개를 조금 끄덕인 주페와 굳은 표정의 코리온 사이에는 잠시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한참동안의 그 어색한 분위기를 감내하고 있던 주페 태자가 갑자기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제 큰 사고가 있을지 모르니 평소에 내 피를 조금씩 뽑아 보관시켜둬야겠다. 행여 우리 둘 중에 한명에게라도 안좋은 일이 생기면 가져다 쓸 수 있지 않겠냐? 너보다는 내가 더 강건한 것 같으니 내 피를 보관시키는 게 낫겠다."

주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혼자 생각에만 잠겨있던 코리온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주페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저어......부탁 있는데요."

"부탁?"

주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지금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먼저 혼례를 올리면 안될까요?"

코리온의 갑작스런 요구에 소스라치게 놀란 주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 지금 말이냐?"

주페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 이상의 황족의 혼인은 무조건 종친회의 동의가 필요한 사항이었다. 이 상황에서 혼례를 올리자는 건 종친회를 소집하자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지금같은 상황에서 황족간의 근친혼을 인정받는 것도 쉽지않은 일인데다가 자칫 잘못되면 겨우 손발을 맞추고 있는 막내동생 레곤과의 관계까지 틀어져버릴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런 '위험한 제안'을 하는 코리온의 의도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그에게 진의부터 묻기도 꽤나 미안한 일이었다.

"글쎄다......나도 필요성은 느끼지만 마무리 후에 하는 편이......종친회는 어쩌고....."

"종친회 동의는 어려운 일이 아닐겁니다. 일단......아이부터 만들어놓으면.....어쩔 수 없이 동의해줄수밖에 없을겁니다."

주페는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그의 의견에 또한번 깜짝 놀라고 있었다. 코리온이 이정도까지 혼인에 집착한 건 처음있는 일이었다.

"예쁜 딸 하나 가지고 싶다고 매일같이 말씀하셨잖아요."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코리온의 매혹적인 갈색 눈동자를 올려보던 주페는 윰 포고령 2차 추가령에 규정되어있는 황제의 자격요건---반드기 기혼자, 혹은 약혼을 한 상태여야 한다는---까지는 미처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이미 며칠째 곱씹으며 나름대로 준비해온 코리온은 머뭇거리고 있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다시한번 강조했다.

"저도 이제 사람들에게 떳떳한 배우자로 인정받고 싶어서 그래요. 언제까지나 숨기고 지낼 수는 없잖아요."

"네 마음도 이해하겠다만......내 며칠만 생각해볼 시간을 다오......"

주페는 오늘따라 다정하게 구는 코리온을 품에 안으며 오랫만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항상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이 착하고 똑똑한 연인만 있다면 그에게는 세상 그 어떤것도 더이상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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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회의에서 급히 돌아온 푸아킨으로부터 결과를 전해들은 레곤 대공주는 이 일이 도대체 코리온의 어머니로서 좋아해야 하는 일인지 아닌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코리온이.......황제가 될 수 있는걸까?"

남편 예르마크 세닉 경과 함께 차에 앉은 대공주가 벌써 몇 번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앞에 조용히 앉아있던 푸아킨은 공주가 처한 꽤나 아이러니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둘도없는 친구이며 올케인 세네피스 황후의 친딸 카렐이 정당한 제위 후계권자임을 잘 알고있는 대공주였지만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한 명의 어머니로서 흔들리지 않을 턱이 없는 일이었다.

"대공주저하,"

보다못한 푸아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난 220년 전처럼 지금이 또다시 대공주에게 자신의 의견이 필요한 때임을 푸아킨은 잘 알고있었다.

"저하의 뜻은 이해하겠지만......"

"그런데?"

"제 생각은 부정적입니다."

"왜?"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주페 태자저하의 전철을 밟을 수 있습니다."

푸아킨의 한마디에 순간 대공주는 온몸에 퍼지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거의 공포에 질린듯한 그의 표정에 푸아킨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현명하게 판단하십시오. 제가보긴......대군마마께서는......"

푸아킨은 더 이상 말을 잇기가 어려운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대공주가 탄 차와, 뒤따라오는 또 한대의 차는 자정이 지난 한밤의 어둠을 가로질러 아켐 4번 행성 남극 부근의 한 야산을 향하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멀리 보이는 빽빽한 숲 사이로 이미 와 있는 꽤 여러대의 차들이 모여 내뿜는 휘황한 불빛이 선명했다. 레곤 대공주는 쌀쌀한 겨울바람에 잔뜩 몸을 움츠리며 차에서 내려섰다. 함께 내린 남편 예르마크 세닉 경이 미리 준비해온 두터운 모직 망토를 부인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남부 4제후 세닉 가 군 총사령관이기도 한 부마 예르마크 경은 그 신분에 걸맞지않게 가정적이고 꼼꼼한 성격은 물론이고, 아들 코리온에게까지 이어질 크고 수려한 외모와 제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능력있는 무장의 한명으로도 제국내에 호평이 자자한 훌륭한 남자였다.

지금껏 운 하나는 억세게 좋은 삶을 살아온 레곤 대공주는 남편복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성격좋고 잘생긴 남편과의 금슬은 다른 황족들의 부러움을 자아낼 정도였다.

물론, 남편에 비하면 누가보아도 많이 처지는 대공주의 외모와 걸핏하면 발끈 하는 불같은 성격 덕택에 호사가들 사이에서 '예르마크 경이 불쌍하다'느니 하는 괜한 입소문이 떠도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지난번 억류되었던 이후로 이 골칫덩이 맏아들과의 관계가 그나마 더 소원해진 대공주는 이번 서부 방문에서는 나름대로 안전에 꽤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무려 5명이나 대동한 종친 가디언들이 뒷차에서 내려서는 모습에 대공주도 조금이나마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흰 비단튜닉 차림의 카렐이 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삼십여명의 아카데미 치안대 병사들이 주변을 경계하고는 있는 모습에 대공주가 입가를 대뜸 일그러뜨렸다. 코리온의 행차에는 평소에도 항상 동행하는 경호원들임을 잘 알고는 있는 그였지만 지난번 어처구니없이 아들 손에 억류되었던 그의 입장에서 저들의 모습이 달가울 턱이 없었다.

"아들하고 만나면서 이래야 한다니. 제기랄, 내팔자야."

동행한 가디언들의 모습에 내심 안도하고 있는 스스로의 기가막힌 처지를 한탄하며 대공주가 연신 무언가 투덜거리고 있었다.

"학장님! 대공주 저하 부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먼저 와 있던 이십여명의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들이 이곳에 모습을 나타낸 대공주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교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무언가 지시를 내리던 코리온의 모습은 다른 교수들 위로 삐죽이 솟아올라와 있는 그 큰 키만 보아도 어렵지않게 구별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향해 돌아선 코리온은 아직 얼어붙어있는 차가운 땅바닥에 꿇어앉으며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정확하게 도착하셨군요. 어머님, 아버님."

"내 이래서 오라버니를 황실 묘지에 그냥 모시자고 하지 않았냐. 어차피 다른 분들과 같은 날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격년으로 왔다갔다해서야 원......"

"돌아가신 분의 유지이오니 어쩌겠습니까."

예의바르게 대답하는 코리온의 입으로 하얀 입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을 다시 한번 찡그린 대공주는 남편이 덮어주었던 모직 망토를 벗어 추위에 떨고있던 아들의 등에 덮어주었다.

"뭐냐. 이 날씨에 겨우 그것만 입고."

갑자기 굳어진 표정의 코리온은 등에 덮인 따뜻한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얼마 전, 바로 이곳에서 체온을 잃고 쓰러졌던 자신에게 카렐이 직접 덮어주었던 것도 이렇게 두툼하고 따뜻한 모직망토였다.

"손목은 왜 그모양이냐?"

대공주가 아들의 왼쪽 손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난번 남극성당에서 암기에 스쳐 검게 변해버리며 생긴 흉터와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를 보호하고 있던 카렐의 손바닥을 뚫고 지나와서 독이 많이 씻겨져나간 덕에 코리온의 손목을 자르는 불상사까지는 생기지 않았었지만 그 크지않았던 상처는 묘하게도 오래가고 있었다.

"별것 아닙니다. 준비가 끝났다고 하니 올라가시죠."

코리온이 손목을 옷소매 속에 감추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무심코 돌아서려던 그는 어머니인 대공주의 뒤로 다가오는 그림자에 순간 움찔 하고 있었다.

"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코리온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에 카렐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코리온 오라버니."

"이, 이......"

"대공주저하의 공식 초청으로 이곳으로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제례에는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터이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렐이 비무장임을 보이듯 두 팔을 활짝 벌려보였다.

'원수'를 이곳에 초청한 어머니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코리온은 마지못해 뒤로 휙 돌아서고 말았다.

"천박한 네것이 감히 제례 분위기를 흐뜨린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줄 알아라."

대공주와 팔짱을 끼고 산 위를 걸어올라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이를 갈며 바라보던 코리온은 옆으로 불쑥 다가온 샤드니의 얼굴을 휙 돌아보았다. 갑자기 코리온에게 바싹 다가선 샤드니가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여주었다.

"뭐, 뭐라고?"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다만 녀석이 대공주저하와 함께 있어 어찌할 수 없으니.....학장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옵니다."

단단히 악문 코리온의 얇은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갈등하실 필요 없습니다. 학장님. 녀석은 사람이 아닌 가디언입니다. 가디언과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태자저하 묘소 앞에서 원수 자식의 숨통을 끊어주는 것이 소원 아니셨습니까. 오늘이 그분 제례일이니.....이만큼 좋은 날이 어딨겠습니까."

샤드니가 갈등하는 코리온을 설득하려는 듯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어 강조했다. 굳어진 표정의 코리온은 고개를 떨군 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제대로 손봤구나."

묘소에 도착한 대공주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썰렁하기까지 하던 봉분 주변을 새로 심은듯한 소나무 묘목들과 관목 몇그루가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네가 심은거냐?"

어머니의 질문에 코리온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카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난 초겨울 카렐이 심어두고 갔던 그 나무들을 둘러보며 대공주가 말을 이었다.

"주페 오라버니 적송을 유난히 좋아하셔서 분재도 곧잘 만들고 하셨는데......나무들도 참 잘생겼고......하나도 안죽고 겨울을 다 넘기는 걸 보니 정성들여 심었나보구나. 오라버니가 지하에서 기뻐하고 계시겠다. 정말 잘했다."

"조만간 제손으로 다 뽑아버릴 겁니다."

코리온이 쌀쌀맞게 중얼거리자 아들의 희한한 태도에 놀란 대공주가 다시 당혹해하고 있었다.

대공주가 더듬거리며 아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수음식이 없구나? 어떻게 된 거냐?"

"오늘은 산 제수를 바칠 것이니 제수음식은 없습니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대꾸한 코리온은 치안대 병사들이 안고 올라온 작은 새끼양을 힐끔 돌아보았다. 어린 양을 잡는다는 사실에 대공주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평소 육식조차 하지 않던 아들이 주페 태자의 제수로 산 양을 잡아 바친다는 사실에 대공주는 또한번 경악하고 있었다. 오늘의 아들은 어쨌거나 평소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코리온과 대공주 부처를 선두로 주페 태자의 묘소 주변에 빙 둘러선 십여명의 사람들은 봉분 앞의 커다란 대리석 제단에 네 다리가 묶인 채 올려진 어린 양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앞으로 나설 수 없는 처지인 카렐은 대공주의 등뒤에서 이 광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양이 눕혀진 제단 앞에 잠시 말없이 꿇어앉아있던 코리온은 어머니인 대공주 뒤에 서 있는 카렐을 힐끔 바라보았다.

"간만에 새 사람이 참석했으니 좀 도와주게. 내 피를 보는 일은 익숙치않군."

카렐은 코리온의 이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잠시 헛갈리고 있었다. 하지만 코리온의 그 날카로운 갈색빛 시선은 틀림없이 그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너 말고 그 일에 익숙한 자가 또 누가있겠나."

치안대 병사가 바친 꽤 큰 쿠크리를 어루만지며 코리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섬뜩한 붉은빛 코팅날과 상아로 만들어진 손잡이, 화려한 술과 보석장식이 붙은, 얼핏보기에도 보통의 칼은 틀림없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카렐이 괜한 헛기침을 하며 봉분 앞으로 나섰다.

제단에 놓여진 새끼양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계속 요란스레 울음을 내놓았다.

카렐 역시도 '인도주의자'로 유명했던 주페 태자의 묘에 양을 죽여 바치는 코리온의 이 해괴한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거지로나마 기껏 '임시평화협정'을 맺은 마당에 이러쿵저러쿵 따져들 게재는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양이 계속 움직이니 네가 잡고있어라."

제단 앞에 무릎꿇은 카렐은 연신 울어대는 양의 목을 치기 쉽게 단단히 움켜잡으며 물었다.

"칼 쓰는것이 서투신데 괜찮겠습니까? 허락하신다면 제가......"

"필요없다."

쌀쌀맞게 대꾸한 코리온이 양을 붙들고있는 카렐의 등뒤로 천천히 다가갔다.

"하, 학장님.....그게......"

코리온이 카렐에게 다가서는 모습에 샤드니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갑자기 입을 열었다.

원래 계획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와, 근위대가 모여 잡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카렐을 대공주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면 코리온이 재빨리 뒤로 빠져나가게 되어있었다. 그러면 제단 앞의 부비트랩이 작동하고, 주변에 치안군과 유학자 복장으로 따라와있는 가디언들이 카렐을 덮쳐 숨통을 끊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코리온은 쭈그려앉은 카렐의 바로 등뒤에 바싹 붙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코리온의 느닷없는 돌발행동에 샤드니의 입이 바싹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쿠크리로는 이렇게 제단에 놓여있는 양의 목을 치기는 적당치 않으니 제가 들고있겠습니다."

카렐이 누워있는 양을 치켜들며 중얼거렸다. 코리온은 별 대답도없이 번쩍이는 붉은빛 쿠크리를 어깨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너무 힘을 주시면 도리어......"

더 말하려던 카렐이 자신의 등뒤로 내리찍어오는 쿠크리의 궤적이 어딘지 이상함을 느끼기까지는 잠깐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이 라마단 기간에 있어서는 안되는, 그것도 원리주의 지도자라는 자의 손에 벌어지리라고는 이자리의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터였다.

"아윽!"

코리온의 손에서 내리찍힌 도끼같은 쿠크리는 카렐의 목을 스치며 피를 공중에 흩뿌렸다. 동시에 주페 태자의 제단과, 그리고 카렐이 붙들고있던 흰 양의 털 위로 카렐의 붉은 피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둘러싸고있던 유학자들은 물론이고, 안전을 약속하고 카렐을 불러들여온 대공주가 큰 소리로 비명을 내지르면서 이 심야의 묘소 주변에 혼란과 경악이 감돌고 있었다. 뒷목의 껍질을 베며 미끄러진 칼날은 그의 어깨까지 깊은 상처를 남겨놓고 있었다.

"네 뭐하는짓이냐! 코리온!"

대공주가 아들의 앞에 달려들며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이, 익!"

싸움꾼의 본능으로 휙 돌아선 카렐의 오른손이 눈 깜짝할새 코리온의 긴 목을 한손에 움켜쥐었다. 하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코리온은 피를 본 순간 동물적인 격노에 휩싸인 이 무시무시한 사촌누이를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라마단에 태자저하 묘 앞에서 이 이상은 할 수 없으니 참겠다. 빨리 꺼져라."

코리온의 목을 움켜쥔 카렐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빛 쿠크리 날에는 상처를 깊이 베지 않도록 틀이 끼워져 있다는 것도 잘 알고있었다.

"저놈 잡아!"

입고있던 갑주를 벗어던지며 달려드는 이십여명에 가까운 가디언들과 이 야산 밑에서 몰려올라오기 시작하는 많은 인기척을 느낀 카렐은 지금 코리온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것인지를 잘 알고있었다.

카렐에게 목을 쥐인 코리온이 눈을 부릅뜨며 쌀쌀맞게 입을 열었다.

"이곳만 벗어나면 네놈을 내손으로 체포해 당장 목을 칠 것이니 근위대가 잡기 전에 빨리 도망쳐라. 함정에 걸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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