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38화 (238/1,132)

< -- 238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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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온을 바닥에 거칠게 동댕이친 카렐은 급한대로 바닥에 떨어진 쿠크리를 움켜쥐었다. 피가 번져나가는 상처를 꽉 움켜쥐고 도망치는 그의 앞뒤로 무기를 쥔 근위대와 플레렌 가 가디언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어오고 있었다.

당황한 대공주는 도망치는 카렐의 등뒤를 몸으로 막아서며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썅! 내 손님을 누구 맘대로 쫓아! 이 무엄한 새끼들아!"

대공주의 명령을 받은 5명의 종친 가디언들이 스프링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며 밑에서 달려올라오던 병사들을 주먹으로 때려눕히자 치안대 병사들이 그 기세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근위대와 플레렌 가 가디언들까지 뜻밖의 사태에 놀라 그들과 맞서면서 넓지않은 주페 태자의 묘소 주변은 쫓기는 자와 쫓는 자, 막는 자와 놀라 도망치는 자들까지 모두 뒤엉켜 온통 정신못차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이 와중에 주페 태자의 묘 앞에 맥없이 꿇어앉은 코리온은 카렐의 피가 묻은 오른손을 꽉 움켜쥔 채 제단에 이마를 기대고 혼자 눈물만 곱삼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차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익.....뭐, 뭐야,"

어깨를 베인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할룩스를 뽑아 쥔 카렐은 이곳 부근에 대기하고 있어야 할 셔틀 조종사 베네루스와 연결이 되지 않자 잠시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뒤를 추격해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휙 돌렸다.

"젠장할!"

쫓아오는 가디언들을 피해 묘소 옆, 잡목숲으로 뛰어들려던 카렐은 그곳에 미리 쳐 있던 실같이 가는 강선 그물에 발목과 손이 얽혀들며 얼어붙은 흙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 앗,"

자신을 향해 칼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2명의 가디언들과 샤드니, 치안군 병사들의 모습에 기겁을 한 카렐이 허둥지둥 강선을 더듬거렸지만 그 가는 강선은 풀어내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깊이 그의 살 속을 파고들 뿐이었다.

"당신은 도대체 뭐해요! 도와줄 생각은 않고!"

도망치는 카렐을 몸으로 막고있던 대공주가 머뭇거리고 있는 남편 예르마크 경을 힘껏 떠밀었다.

"그, 그게......"

흥분해있는 부인과 맏아들, 샤드니 사이에서 난처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남편의 허리에서 대뜸 장검을 빼앗아든 대공주는 앞을 가로막는 치안대 병사의 얼굴을 칼자루로 사정없이 후려쳐 쓰러뜨리버렸다. 그의 몇 발짝 앞에는 강선 그물에 발목과 손이 영켜버린 카렐이 힘겹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내 칼을 안 만진지 오래되어 자신은 없다만......"

이를 악문 대공주가 남편의 장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소리를 내지른 그가 있는 힘을 다해 한쪽을 힘껏 내리치자 불꽃이 튀기며 강선 중 몇 가닥이 팅 소리와 함께 튕겨올랐다.

"아익!"

카렐이 또한번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대공주의 서투른 일격에 칼이 조금 빗나갔는지 함께 베인 카렐의 왼쪽 발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아랑곳하지 않은 대공주는 카렐의 손목에 엉켜있던 강선도 힘껏 내리쳐 끊어내버렸다.

"빨리! 빨리 도망가!"

"이놈! 어딜 도망가!"

시간을 끌고있는 종친 가디언들을 피해 달려온 샤드니가 생각없이 대공주에게까지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네 이놈! 감히 누구 눈앞이라고 칼을 들고 설쳐!"

벌떡 일어선 대공주가 그를 쏘아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모습에 순간 압도당한 샤드니가 기겁을 하고 놀라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그 사이 그물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카렐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빽빽한 침엽수와 잡목숲의 비탈에 서슴없이 몸을 내던졌다.

"젠장!"

무너져내리는 썩은 낙엽무더기, 토사와 함께 카렐이 가파른 숲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자 대공주를 피해 도망쳤던 샤드니가 야산 아랫자락을 손으로 가리키며 악을 쓰고 큰 소리로 외쳤다.

"멀리못간다! 쫓아내려가 잡아!"

그의 명령에 여러 명의 가디언들과 병사들이 잡목숲 아래로 카렐을 쫓아 급히 달려내려가기 시작했다.

카렐은 그곳에게서 그다지 멀리있지는 않았다. 비탈 바로 밑의 썩은 낙엽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카렐은 비탈 밑으로 쓸려내려가는 낙엽더미와 흙무더기를 쫓아 달려내려가고 있는 병사들과 가디언들의 뒷모습을 흐려진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으, 윽,"

덜덜 떨려오는 손목을 가까스로 움직여 쿠크리를 단단히 움켜쥔 카렐은 손목과 발목을 아직까지 부자유스럽게 옥죄고 있는 나머지 강선들을 끊어내기 시작했다. 그물에 같이 엉켜버렸던 할룩스까지 꺼내 올 여유는 없었던 그로서는 이제 어떡해서든 이곳을 자력으로 빠져나가야 할 판이었다.

"찾았습니다!"

멀리 비탈 밑의 병사 중 한명이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방금 전 낙엽더미와 함께 카렐이 일부러 흘려보낸 머플러 자락이었다. 이미 피얼룩으로 더러워져 있는 저 황금색 비단머플러는 이 한밤중엔 적에게 훌륭한 표적만 제공해줄 뿐이었다. 병사들은 머플러 주변을 동심원을 그리며 수색해들어가기 시작했다.

"익!"

눈물이 찔끔 솟은 카렐이 이를 악물었다. 강선이 파고들었던 손목과 발목에서는 지독한 쓰라림과 함께 너덜너덜해진 속살점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가닥이 끊어진 강선을 조심스럽게 발목에서 풀어내고 발목이 자유로와진 그는 입고있던 흰 비단튜닉과 원피스를 조심스럽게 벗기 시작했다. 특유의 광택 때문에 유난히 눈에 잘 띄는 비단옷은 벗고 가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거의 알몸이 되어버린 카렐은 벗은 옷을 돌돌 말아 손에 감고 검은색의 벨트만을 어깨의 상처 위에 단단히 동여맸다.

"젠장할,"

점점 가까와지는 수색병들을 느끼며 카렐이 쿠크리를 입에 물고는 산허리를 따라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스캐너를 이용한 적 수색을 피하기 위해 체온과 신진대사를 최하로 낮춘 이온동물 카렐의 몸은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그 강한 생존본능 하나만으로 가까스로 정신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어,"

눈이 녹아 생긴 누런 진흙구덩이를 발견한 카렐은 기뻐하며 그곳에 얼른 몸을 담궜다. 늦겨울의 밤추위가 맨살갗을 파고들어왔지만 당장은 도리가 없었다.

"헉, 헉,"

몸에 진흙을 바르는 카렐의 입으로 어느새 차갑게 식은 숨결이 뿜어나왔다. 온몸에 진흙을 칠한 이 날렵한 근육질의 산짐승같은 존재는 얼핏보기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덩치 큰 괴물로 보아도 무방한 정도의 모습이었다.

물론 무서워보이기 위해서나 맨몸을 가리기 위해 진흙을 바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푸엘 숲에서 지낸 100년동안의 야생의 삶에서 배운, 상처의 지독한 고통을 잠시나마 가라앉히는 나름대로의 생존의 방법이었고, 유난히 흰 그의 몸을 적들의 시야와 스캐너에서 정체를 감추기 위한 좋은 수단이었다. 심야의 짙은 어둠과 어느새 하나가 된 카렐은 간만에 되살아난 그의 야수적인 본능을 동원해 소리없이 포위망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새끼 도대체 어디간거지!"

병사들이 하나같이 불평을 터뜨리며 주변을 샅샅들이 뒤지고 있었지만 이미 도망가버린 '등급없는 가디언'을 잡기에는 그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제례가 진행되는 동안 태자의 묘소가 있는 야산 아래에 머무르던 하급교수들은 갑자기 윗쪽, 묘소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과 몰려드는 병사들에 놀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코리온의 개인비서관이기도 한 하심 예킨터스 교리 역시 위로 올라간 일행들과 연락조차 되지 않자 이런저런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내 직접 올라가볼테니 여기서들 기다리게."

술렁이고 있는 하급교수들을 일단 진정시킨 하심은 무작정 숲에 발을 들여놓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에게는 신과도 같은 코리온이 저곳에 있는 이상 비서관으로서 그냥 발만 구르고 있을수는 없었다.

"아이, 왜이렇게 어두워?......엉?"

가까스로 길을 찾으며 야산 위 묘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그는 무언가 시커먼 것이 옆을 스쳐지나가는 느낌에 멈칫 하고 말았다.

"뭐지?"

잠시 멈춰섰던 그는 느닷없는 기척에 잔뜩 겁을 먹었는지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 때, 또다시 네발달린 듯한 무언가가 반대편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느, 늑대?"

늑대는 엔간해서는 다 큰 어른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하심이었지만 때때로 늑대 무리에 공격당해 죽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듣는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얼핏 본 그 덩치는 늑대라고하기는 너무나 큰, 거의 호랑이나 사자만한 크기임에 틀림없었다.

"뭐야......"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한 그는 묘소까지 올라가는 것을 일단 포기하고 조금씩 뒷걸음질치며 오던 길을 돌아내려가기 시작했다.

"제, 젠장.....괜히 혼자 왔나....."

공포에 질려 뒷걸음치던 그는 오른편에서 들려온 무언가 부시럭 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웁!"

비명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하심은 무언가 묵직한 것에 왼쪽을 들이받히며 큰 나무둥치 옆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자칫 나무둥치에 심하게 들이받으며 다칠 뻔 한 뒷통수는 누군가의 손 같은 것에 그대로 튕기며 얼떨떨하나마 완충될 수 있었다.

"아....."

비명을 지르려는 하심을 거칠게 깔아뭉갠 '적'은 미처 목소리가 새어나갈 틈도 없이 그의 얼굴만한 큰 손바닥으로 입을 꽉 틀어막아버렸다.

"오랫만이군요. 하심 예킨터스 교수님."

얼굴에 시커먼 진흙을 잔뜩 묻힌 상대가 들릴듯말듯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하심은 자신을 알아보는 이 괴물이 도대체 누군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흙으로 범벅이 된 지저분한 머리칼 사이로 회색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무지개빛 광채와 파충류 눈 특유의 붉은빛 안광을 번갈아가며 번득이고 있었다.

하심은 그의 목에서 자신의 얼굴로 똑똑 떨어져내리는 끈적한 무언가에 순간 경악하며 다시한번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는 달빛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상대의 끔찍한 형상의 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칠게 버둥대기 시작했다.

"가디언 카렐이요."

헐떡이며 흘러나오는 가는 목소리에 예킨터스 교수의 온몸이 돌덩이처럼 바싹 굳어버리고 말았다. 카렐의 오른손에는 마치 넓적한 낫처럼 생긴 희한한 모양의 쿠크리가 쥐여있었다.

"내 시키는대로만 도와주면 해치지 않을테니 걱정마시오."

하심이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서 어깨를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피와 진물에 카렐도 고통스러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두팔로 내 목을 꽉 껴안으시오. 떨어지지 않게."

공포에 질려있던 교수는 마지못해 카렐의 목을 부둥켜안으며 매달렸다. 오른팔로 그의 허리를 붙들어 번쩍 들어올린 카렐은 두 다리와 왼팔로 다시 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두발로 걷는 사람이라는 동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마치 야생동물처럼 능숙하게 네 발, 아니 세 발로 산을 기어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카렐에게 매달려 가는 예킨터스 교수는 극도의 공포에 이미 반 쯤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하심을 매단 채 숲 경계까지 내려온 카렐은 그를 내려놓으며 다시 명령했다.

"차 한대를 이쪽으로 부르시오. 당장."

카렐의 지시에 품 속에서 키를 꺼낸 예킨터스 교수는 급히 호출키를 작동시켰다. 다른 차들 중간에 묻혀있던 그다지 티나지 않는 작고 수수한 차 한대가 숲 경계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차를 바라보던 카렐은 자신에게 붙들린 채 벌벌 떨고있는 하심을 노려보며 잠시 갈등에 사로잡혔다. 샤드니와 함께 코리온의 왼팔격인 저 여자를 데려간다는 것이 어딘지 꺼림칙한 기분도 들었지만 이곳에 그대로 두고 떠나면서 자신의 행방을 알려주는 것도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되지 못했다.

교수를 바닥에 내려놓은 카렐은 그의 허리에 감겨있던 검은색 비단끈을 끌르기 시작했다. 버둥거리는 교수의 옷을 풀어헤치고 카렐이 빼앗아든 건 그가 가슴에 품고있던 할룩스였다.

"뭐, 뭐하는 짓입니까......"

흐뜨러진 옷 매무새를 급히 여미며 예킨터스 교수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교수의 손목에 비단끈을 들이댄 카렐은 희한한 매듭을 지어 단단히 동여매고는 반대편 끝을 자기 손에 단단히 쥐었다.

"한손으로는 풀기 불가능한 매듭이니......감히 도망갈 생각은 마시오."

차 문이 열리자 안에 엉금엉금 기어오른 카렐은 교수를 잡아맨 끈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빨리 안타고 뭐하시오?"

손목을 통해 전해지는 그 강력한 힘에 변변한 저항도 못한 채 차 안에 얼굴을 처박은 하심은 마지못해 문을 닫았다. 뒷쪽 상석에 지친 몸을 눕힌 카렐이 목과 어깨를 움켜쥐며 끄응 하는 소리를 또한번 토해냈다.

"빨리 출발시키시오, 일단 여기만 빠져나가면 놔줄테니."

카렐이 머뭇거리는 하심을 재촉하듯 사뭇 명령조로 지시를 내렸다.

하심의 차는 별다른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자정 무렵의 어둠을 뚫고 이곳 야산자락을 재빨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샤드니의 명을 받고 달려온 병사들은 그제서야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조금씩 멀어지는 야산자락을 바라보며 카렐이 빼앗은 할룩스를 꺼내들었다.

카렐이 도망친지 채 10분도 되지 않을 시간동안 눈 깜짝할새 벌어진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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