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39화 (239/1,132)

< -- 239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

.

.

한밤중에 들어온 카렐의 급박한 연락은 라마단의 편안함에 빠져있던 전사단을 발칵 뒤집어놓기에 손색이 없었다. 기습당했다는 카렐이야 일단 그곳을 빠져나왔다지만 세호 가에 갔던 아메스, 그리고 셔틀과도 연락이 불통이라는 건 그에게도 무언가 큰 일이 벌어졌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서부 아켐에는 아직 5시간쯤 더 가야 도착하겠습니다."

"알았다."

셔틀 상석에서 책을 읽던 제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극성당 신임 대제학 취임식 참석차 황제령에 머물던 그와 우베, 자이납 일행은 이번 기습사건에 격분해 펄펄 뛰던 황후를 가까스로 달래놓고는 페로가 마련해준 고속셔틀에 무작정 몸을 실었던 터였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줄 열 명의 페로 가디언들도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네피 대장님을 같이 모시고 올 걸 그랬을까요? 딸 일인데....."

우베의 물음에 제네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을 것 없어. 가뜩이나 딸 납치당해서 신경 곤두서 있는 사람 데리고 와서......그 성격에 무슨 짓을 할 지 알아. 아참, 전하 모셔올 셔틀은 따로 보낸댔지?"

제네르가 우베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아, 예, 총리께서 발 가는 아직 완전히 믿기는 이르다면서 루쿠스탄 영지에 있는 개인셔틀을 방금 그리로 보내셨구요, 그쪽은 4시간 정도 후에 도착할 것 같답니다. 만일을 대비해서 가디언 열 명하고 의사 한 명도 동행했다고 그러네요."

페로의 그 꼼꼼함에 피식 웃음지은 제네르는 별 볼것도 없는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정도 준비면 기왕 도망친 카렐을 다시 안전한 곳으로 빼내오는데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 확실했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세호 가를 찾아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아메스를 찾는 일이었다.

"어허,"

눈을 번쩍 뜬 카렐은 자신의 가슴 위에 얹어놓은 할룩스를 향해 살며시 뻗어온 하심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순간 기겁을 한 하심은 또한번 비명을 지르고 말았지만 여기까지 오는동안 수없이 들은 저 듣기싫은 비명에 이미 귀가 충분히 익숙해진 카렐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모르시오?"

카렐이 눈을 살짝 흘기며 하심을 노려보았다. 일부러 불도 꺼 놓은 하심의 차 안에서 번득이는 그 붉은빛 안광에 기가 눌려버린 하심이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한시간이 넘게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는 차는 파예드 아카데미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자그만 시골마을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특별히 그곳을 잡은 이유는 많지않았다. 지금 밤시간이라는 것과, 작은 시골병원, 아니 지금시간쯤 문닫았을 가능성이 높은 시골 진료소가 하나 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4시간쯤 후에 루쿠스탄에서 자신을 데려올 셔틀이 도착할 것이라는 제네르의 말에 나름대로 안도한 카렐은 그 전에 일단 상처만이라도 간단히 손볼 요량으로 이 비어있는 진료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카렐의 눈치만 보고있던 하심이 용기를 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학장님을......해쳤나요?"

"내가? 허허, 그 반대요."

카렐이 냉큼 대답했다. 하심은 자신을 꽤나 거칠게 다룰 줄 알았던 저 괴물이 생각외로 침착하고 신사적이기까지 한 태도를 보이자 의아하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학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칼도 쓸줄 모르시고......"

"쓸 줄 알았으면 내 목을 동강내놨게?"

카렐이 이미 피가 엉겨붙어있는 목을 더듬으며 연신 투덜거렸다.

"옷이나 천조각이라도 좀 있소?"

"뒤 책상자 옆에......작은 담요 있을거예요."

"고맙소."

담요를 꺼낸 카렐은 그것을 벗은 몸 위에 둘둘 감으며 그나마 안도하고 있었다. 진흙탕에 범벅이 되어버린 그의 때깔나는 비단튜닉과 원피스는 당장은 전혀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얼마간만 조용히 있어주면 풀어줄테니 염려마시오. 가만히만 있어주면 내 절대 해치지 않을테니."

카렐이 다시 침착하게 말하자 식은땀을 흘리던 하심이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도 넘어간 어둠 속으로 멀리 목표삼은 마을이 보이고 있었다.

"괜찮군."

그의 기대대로, 거의 텅 비어있는 마을의 모습에 카렐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주민들 역시 다른 서부민들처럼 라마단을 맞아 각 지역마다 있는 학당에 교리학습을 위해 떠났던가 멀리있는 친척들을 찾아 대 이동을 했을 터였다.

마을 한구석의 조금 큰 건물 앞에 차를 세운 하심은 창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 닫은 모양인데요?"

"그나마 다행이군,"

몸에 담요를 뒤집어쓴 카렐이 차에서 성큼 내려서며 하심을 묶은 비단끈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의 힘에 차에서 튕기듯 나와버린 하심은 하마터면 얼은 땅바닥에 코부터 처박을 뻔 하고 말았다.

대공주의 서툰 칼질 덕에 얼떨결에 종아리를 베어버린 카렐은 그 큰 몸을 구부정하게 기울인 채 조금은 불편한 걸음걸이로 이 문닫힌 시골 진료소에 다가갔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니까요,"

카렐에게 질질 끌려온 하심이 거의 울먹이듯 말했지만 거의 아랑곳하지 않은 카렐은 잠겨있던 문을 한손으로 그대로 비틀어 열며 물었다.

"그게 뭐 어때서?"

"거울 조금만 높이 들고 있으시오."

카렐의 말에 또한번 깜짝 놀란 하심이 카렐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거울을 높이 치켜들었다. 250여년이나 살아오는동안 자기 손으로 자기 상처를 손보는 황당한 광경을 보게 된 건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이곳 진료소를 ‘무단침입’한 카렐이 장 안에서 찾아낸 봉합기, 가위, 칼 같은 원시적인 도구들로 잘린 근육을 자기 손으로 잇는 모습은 하심을 또한번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드레싱만 끝나면 좀 닦아내야 해야겠군......하긴, 부하들 앞에서 이꼴을 하고 있을수도 없으니....."

상처를 대강 손본 카렐은 담요를 치마처럼 허리에 두른 채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으로 몸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애써 시선을 돌려버린 하심은 여전히 그의 손에 비단끈으로 매여있는 상태였다.

"방금전에 차에서같이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거요. 보통의 가디언들도 그정도의 행동은 다 읽으니까."

입술을 꽉 깨문 하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지와 몸 앞쪽을 닦은 카렐은 머리에 묻은 진흙까지 물로 씻어내고는 뚱 하게 서 있는 하심에게 물수건을 불쑥 내밀었다.

"등 좀 닦아주시오."

저 흉칙스런 몸은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하심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개를 든 하심은 그 넓은 등을 물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슨 괴물처럼 바라보지 마시구려. 나처럼 멋있게 잘 빠진 괴물 봤소?"

"알았어요."

카렐의 같잖은 농담에 하심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지난번 창에 찔렸던 흔적은 물론이고 꽤 많은 흉터들이 그 역삼각형의 탄탄한 등에 빈틈없이 빼곡하게 널려있었다.

"뭐, 봐줄......만은......하군요."

마지못해 대꾸한 하심이 카렐에게 수건을 돌려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순간 카렐의 어깨에 새겨진 두 마리의 검은 용무늬, 옛날 주페에게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황족문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 하심은 옆에서 들릴만큼 큰 소리로 자기도모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카렐이 그의 당혹해하는 얼굴을 돌아보며 이상한 듯 물었다.

"리쿠 학장이 말 안했소? 나와 사촌지간이라고?"

"그......으......"

담요를 어깨까지 뒤집어쓴 카렐은 말도 못한 채 더듬거리고 있는 하심을 향해 힘겹게 돌아섰다.

"최측근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보니 오라버니도 이 사실이 꽤나 신경쓰이기는 하나보군......어, 빨래가 다 말랐나? 좀 갖다주시구려."

한낱 가디언, 아니 갑자기 그 정체가 헛갈리기 시작한 이 인간의 심부름을 하며 하심은 잠시 지독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한쪽의 세탁 기계 안에서 깨끗해진 옷가지들을 꺼내든 하심은 그것들을 카렐에게 내밀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은......."

"이젠 또 슬슬 자리를 움직여야겠군."

"갈아입으실 옷들입니다. 아가씨들."

열린 문에서 나타난 하녀 뒤에는 여느 때처럼 무장한 세호 가 가디언이 도끼눈을 뜨고 서서 아메스와 솔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걸핏하면 물어뜯고 악을 쓰며 덤비던 아메스에게 이미 두번이나 '학을 떼었던' 가디언은 여전히 풀죽은 얼굴로 침대맡에 얌전히 앉아있는 '순해터진 미녀' 솔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노골적으로 이를 갈아대고 있는 저 귀찮은 아가씨에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손 올리고 구석으로 물러나십시오."

주군가문의 외손녀들인 이 둘에게 차마 상처를 입힐수는 없었던지, 가디언의 손에는 칼 대신에 시위 진압을 할 때나 쓰는 단단한 고무막대 한 개가 쥐여져 있었다.

"빨리요."

가디언이 이를 드러내며 사뭇 협박조로 말했다. 저 망할 고무막대에 얻어맞은 상처로 머리에 이미 혹이 두개나 생겨버린 아메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가 시키는대로 방 한구석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방 안에 들어선 하녀가 새로 가져온 둘의 옷가지들을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놓기 시작했다.

"제기랄, 너희 상대 잘못골라잡은 줄 알아. 썅, 카렐 님하고 아버지가 너희놈들 그냥놔둘줄 알아? 다음번에 내손에 걸리면 네놈은 그날로 아홉토막이야, 씨발,"

그 가디언은 여전히 못들은 척 귀를 후비며 저 신경쓰이는 아가씨가 또 뛰쳐나오면 어떻게 해야하나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내가 헛소리 하고있는 줄 알아? 썅, 내가 얼마전에 일기투로 남부제후군 교위놈까지 잡았어. 그 전엔 가디언하고도 싸운 적 있어."

아메스의 끝도없이 계속되는 욕지거리와 가소로운 협박에 가디언도 도저히 할말조차 떠오르지 않는지 뒤로 돌아서 버렸다. 침대에 조용히 앉아있던 솔이 그런 가디언에게 힐끔 하니 시선을 주었다.

"야! 이 씨발, 개새끼야, 윗사람이 떠들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아메스가 악을 쓰며 손에 잡히는 책을 들입대 집어던졌다. 듣다못한 가디언이 아메스를 향해 돌아서며 결국 입을 열었다.

"그만 좀 하시죠, 아가씨. 이젠......"

아메스의 계속된 도발에 뒤를 보인 그 가디언에게 솔이 달려든 건 순식간이었다. 침대밑에서 눈깜짝할새 금속제 장식품을 꺼내든 솔은 자신에게는 경계를 완전히 풀고있던 가디언의 뒷통수를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확히 내리찍었다.

"으.....아......"

비명을 지르려는 하녀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은 아메스는 솔이 쓰러진 가디언에게서 빼앗아 던져준 단검을 냉큼 받아들었다.

"됐어!"

하지만 계획이 성공했다고 기뻐하고 있던 둘은 문 앞에 서 있던 또 한명의 경비병의 존재를 그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젠장! 뭐야!"

가디언이 나동그라지는 요란한 소리에 뛰쳐들어온 경비병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상벨을 누르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비상! 비상!"

"제기랄! 또있었어?"

하녀를 내버려둔 채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간 아메스가 미처 준비를 갖추고 있지 못한 경비병에 눈 깜짝할새 달려들며 힘껏 발길질을 날렸다.

"망할!"

몸을 날린 발차기에 맞아 일격에 쓰러진 병사의 허리춤에서 시미터를 빼앗아들며 아메스가 괜한 솔에게 바락바락 악을 썼다. 안가에 비상이 걸리면서 어느새 복도 양쪽에서 경비병들이 우루루 몰려나오고 있었다.

시미터를 쥔 아메스와, 가디언의 거대한 양손검을 빼앗아든 솔은 그 중간에서 어디로 달아나야 하나 잠시 머뭇거렸다.

"따라오세요!"

도망칠 길을 찾지 못한 솔이 결국 옆에 보이는 난간을 넘어 3층 보이드에서 1층 거실으로 무조건 뛰어내렸다. 가디언 특유의 탄력으로 1층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솔은 위에 선 언니 아메스에게 빨리 내려오라 손짓을 보냈다.

"젠장! 내가 못할 것 같냐!"

동생 솔이 뛰는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아메스가 3층으로 무작정 몸을 내던졌다.

"악!"

카펫이 깔린 거실바닥에서 옆으로 벌렁 미끄러진 아메스가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바닥을 볼쌍사납게 한 바퀴 딩군 아메스는 부축해주려는 솔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도와줄 필요없어. 혼자 갈 수 있어. 이제 다 나왔어!"

악을 쓰며 일어선 아메스가 눈앞에 보이는 안가 현관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 문에 달려들려던 아메스는 갑자기 안쪽을 향해 거칠게 열린 문짝에 얼굴을 얻어맞으며 코피와 함께 바닥에 다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것들, 정말로 철딱서니없는 년들이구나."

한손에 칼을 쥔 라바니 경이 뒤로 넘어져있는 아메스를 기가막히다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이! 족보 무시하고 붙어보자!"

그의 시선에 발끈 한 아메스가 칼을 뽑아들며 거구의 라바니 경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칠게 휘두른 그의 시미터는 그 공격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노장 라바니 경의 칼에 맥없이 가로막혀버렸다.

"이 건방진 년! 감히 누구한테!"

그 용맹한 기세가 무색해질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상대의 발에 걷어차인 아메스는 몇발짝을 밀려나고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년 지 애비 지랄같은 성격 그대로 닮았다더니 사실이구나."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 아메스를 내려다보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던 라바니 경은 어느새 경비병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솔에게도 그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솔. 넌 착한 애니 빨리 네 발로 돌아가면 네 이 바보같은 언니 꼴은 안당하게 해 주마."

쓰러진 아메스에게 성큼성큼 다가선 라바니 경은 아직까지도 일어나려 버둥거리던 이 종손녀의 얼굴을 장화 바닥으로 무자비하게 밟아버렸다.

"또 이런 바보짓하면 다음엔 아예 걷지도 못하게 다리뼈를 분질러놓을테다."

라바니 경에게 정강이를 채인 아메스가 또한번 비명을 질렀다. 아메스를 무자비하게 걷어차고 있는 저 사악한 돈벌레 종조부를 바라보며 솔이 그 매혹적인 입가를 조금씩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젠장! 그만하시라구요!"

양손검을 두 손에 움켜쥔 솔이 아메스를 걷어차고 있는 라바니 경을 향해 고함을 꽥 질렀다.

"뭐? 네년도 얻어터지고 싶냐?"

라바니 경의 무서운 시선에 솔이 움찔 했다. 엔간한 아이 키만한 거대한 양손검을 움켜쥔 솔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빨리 비켜요, 빨리. 저흰 갈거라구요."

"오호, 그러셔? 안비키면 어쩌시려고?"

또한번 조롱하는 말을 내놓으려던 라바니 경은 자신의 코앞을 붕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스친 양손검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그의 일격에 반 쯤 열려있던 안가 현관문이 눈 깜짝할새 나뭇조각 파편으로 변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날 바보취급하지 말라구요!"

악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이 속물에게 무작정 덤벼든 솔은 잠시 중심을 잃은 라바니 경의 턱에 단단한 양손검의 자루 끝을 그대로 작렬시켰다.

"익!"

부서진 턱 때문에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라바니 경은 뒤이어 내리찍혀온 솔의 발 뒷꿈치에 얼굴이 짓이겨지며 온몸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썅! 막는 놈은 다죽일거야!"

피를 본 솔이 핏발이 선 눈을 번쩍 부릅뜨며 그 아름다운 외모에는 상상조차 되지 않을 갈라진 쇳소리로 거실 안을 쩌렁 울렸다. 라바니 경을 따라온 네 명의 병사들은 솔이 미친 듯 휘둘러대는 양손검의 엄청난 검풍에 지레 놀라 허둥지둥 물러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메스조차 그 얌전하던 동생의 느닷없는 광기어린 행동에 순간 경악하고 있었다.

"물러나! 물러나란 말이야!"

또한번 무자비하게 휘두른 솔의 양손검에 두 명의 병사들이 조각난 방패와 함께 공중으로 튕겨나버렸고, 현관문의 나머지 문틀 역시 그들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나가! 나가! 솔!"

거의 미친 듯 날뛰는 솔을 억지로 떠밀며 무작정 안가 밖으로 달려나온 아메스는 눈앞이 막막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해안가 절벽 끄트머리에 걸쳐있는 이 작은 집 주변 어디로도 도망칠 구멍이 없었다. 육지쪽인 뤼렌 부인 저택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작은 구름다리는 이미 두 명의 가디언이 막아서고 있었다. 높이만도 족히 반 스타디아는 됨직한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는 넓지않은 자갈밭과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밖으로 제법 사나운 파도가 몰아치는 푸른 바다가 거친 바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망할! 무슨 집이 이딴 데 있어!"

아메스가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얼굴이 짓뭉개진 채 엉금엉금 기어나온 라바니 경이 병사들을 향해 손을 치켜들며 막을 썼다.

"저......저......느, 연들........!"

턱이 뭉개진 라바니 경의 우스꽝스런 발음을 비웃는 것보다 병사들에게 더 급한 문제는 거의 이성을 잃은 듯 괴성을 질러대며 양손검을 휘두르고 있는 저 미모의 아가씨였다. 안가 밖을 지키던 십여명의 병사들이 그 주변에 달려들었지만 그 누구도 차마 다가서지 못한 채 멀찍이서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솔이 시간을 끌어주고 있는 새 기회를 잡은 아메스가 무작정 해안가 절벽 쪽으로 머리를 디밀어보았다.

“이건…….”

너무도 까마득한 절벽 밑을 내려다본 아메스의 두 다리가 절망감에 어느새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구름다리 너머에서는 십여명의 경비병이 더 몰려오고 있었지만 솔이 저들을 혼자 상대하며 얼마나 더 시간을 끌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모한 탈출극을 감행했던 이들이 감히 도망칠 구멍은 더 이상 하나도 없었다.

절벽 끄트머리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아메스는 어느새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몇 명의 병사들과, 뺨을 스치는 제법 강한 바닷바람에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썅! 죽어버릴거야!"

고함을 지른 아메스가 정신이 나갔는지 난간을 기어 넘어가며 절벽에 몸을 내밀었다.

라바니 경과 병사들이 기겁을 했지만 절벽도 전혀 탈 줄 모르는 아메스는 정말로 죽을 생각인지 그 밑으로 한쪽 다리를 뻗고 있었다.

"올라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든 병사들이 정신이 나간 듯한 아메스의 손목을 붙든 순간, 짐짓 발을 미끄러뜨린 아메스는 신고있던 신발을 그대로 절벽 밑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아이씨!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이러느니 죽을거야!"

거칠게 버둥거리던 아메스의 어깨에서 벗겨진 붉은 머플러가 멀리 바닷바람에 날려 자갈밭쪽으로 사라져갔다. 저항하는 아메스를 기를 쓰고 위로 끌어올린 라바니 경은 솔에게 당한 화풀이를 하려는 듯 바닥에 웅크린 이 종손녀를 악을 쓰며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칼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솔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두 명의 가디언들에게도 서슴없이 칼날을 내리찍었다.

"악!"

솔의 그 무지막지하기까지 한 칼놀림을 칼로 맞받아 막아보려던 가디언은 그 뼛속까지 울리는 강력한 검격에 비명을 지르며 팔을 떨구고 말았다. 힘에서 밀린 적 가디언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올려치려던 솔은 때맞춰 뒤에서 달려든 다른 가디언에 양쪽 겨드랑이가 붙들리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놔! 놔! 날 뭘로보고! 내가 이대로 당할 것 같아!"

온몸을 버둥거리며 광기어린 몸짓으로 날뛰는 솔의 엄청난 힘에 그의 겨드랑이를 붙든 가디언조차 혼자 버티기 버거운지 악을 쓰며 동료를 부르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칼을 빼앗아!"

1격에 솔에게 제압당했던 다른 가디언이 꿈틀거리는 솔의 오른팔에 달려들어 관절을 사정없이 꺾어버렸다. 팔이 꺾인 솔이 내지른 처절한 비명소리와 동시에 그가 들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그 거대한 양손검이 화강암 바닥에 나딩굴렀다.

"이, 이년들......독방......에 가둬, 썅,"

얻어맞아 피떡이 되어버린 아메스와, 팔이 꺾여 쓰러져있는 솔을 한번씩 힘껏 걷어찬 라바니 경이 이를 갈며 헐떡이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솔에게 부서진 턱을 움켜쥔 라바니 경은 결국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절벽 밑에 자신의 흔적을 제대로 남겨놓은 아메스가 피떡이 진 얼굴 밑에서 짓고있는 그 은밀한 미소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