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41화 (241/1,132)

< -- 241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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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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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으로 잠시 피해있던 오르마즈는 침실에서 들리는 말다툼소리에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부에서 이곳 서부까지 부인을 찾아온 테번 공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다.

사실 테번 공의 추접스런 의처증은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지만 지금같이 민감한 시기에 부인이 최고제후로서의 본분을 위해 친정에 머무르고 있는 사실까지 따져들며 갖은 억지를 쓰고있는 모습은 저 늙은이가 정말로 최고제후가 맞나 싶을 정도로 한심스런 모습이었다.

물론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테번 공 때문에 자고있던 침대에서 허둥지둥 이곳으로 도망쳐올수밖에 없었던 오르마즈의 신세도 꽤나 한심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저 병적인 의처증환자가 다른사람도 아닌 오르마즈와 부인이 함께있는 광경을 보기라도 한다면 그 뒷일은 어찌 전개될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제기랄, 사고치고 의심받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투덜거린 오르마즈는 쿡쿡 쑤셔오는 왼쪽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테번 공의 신경질적인 고함소리가 또한번 벽을 넘어들어왔다.

"이것아! 자식새끼하고 집안을 한달이나 비워두고 여기서 도대체 무슨 짓거리 하고있는거야? 나 없으니까 좋아죽겠냐? 안봐도 빤하지! 어떤 놈하고 놀아나고 있는지 내가 모를 줄 알고? 내 입에서 먼저 튀어나오기 전에 네년 입으로 실토하란 말이야!"

"못말리겠군. 무슨 애 취급하나......저 말버릇 하고는......"

오르마즈가 지끈지끈 아파진 머리를 싸쥐었다.

"실토 안해? 허! 이년이 간덩이가 제대로 부었구나! 너 맞아봐야 정신차릴래?"

테번 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언가 부딪히며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여나 테번 공이 정말로 네페티 부인을 때린 것인지 오르마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있었다.

"실토 안할거야? 그럼 내입으로 말해줄까? 그놈, 아니, 그년 지금 어딨어? 그 외팔이년 말이야."

생각없이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던 오르마즈는 순간 기겁을 하고 있었다. 테번 저자가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이미 입수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래, 내 안그래도 네년이 언제 그새끼 다시만나나 했어. 아주 이 남편 엿을 먹이는구나? 그년 남녀도 안가린다며? 잠자리에선 어떻든? 오랫만에 그 바람둥이놈한테 다시 안겨보니 어때? 북부놈들 오입질이 그렇게 죽여준다지? 그렇다고 남편 철천지 원수놈하고 놀아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오르마즈는 자기도모르게 쪽방의 옷무더기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듣다못한 네페티 부인이 악을 쓰는 목소리가 다시 벽 틈으로 새어들어왔다.

"말도안되는 억지 좀 쓰지 말아요! 지난번엔 샤자한 공 들먹거리더니 이번엔 오르마즈 경이예요? 제발 그만좀 하시라구요, 난 떳떳하지 못한 짓 한 적 없어요!"

"이 미친년아! 빨리 실토나 하란 말이야! 그놈 어딨어? 그 외팔이놈 나머지 팔뚝까지 토막내버릴테다!"

또한번 무언가 부딪히는 요란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부인이 걱정되기 시작한 오르마즈는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내놓았다.

"이크,"

오르마즈가 입술을 깨물었다. 테번 공에게 뺨을 제대로 얻어맞은 네페티 부인이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그 조그만 부인의 멱살을 붙들고 거칠게 일으켜세운 테번 공은 다시한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몇번이나 같이 잤어? 좋다고는 하던? 하긴, 아무리 주물떡거려도 뻣뻣하니 통나무같은 네년 좋다할 놈이 어딨겠냐만, 너 얼굴하난 반반하잖냐? 아예 짓이겨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게 만들어주랴?"

"저 망할 개새끼,"

오르마즈가 답답함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네페티 부인이 남편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시말하지만 그런 일 없어요!"

"이 썩을 년! 어디서 발뺌이야!"

테번 공이 부인을 바닥에 사정없이 동댕이치고는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쪽방에 숨어 어쩔 줄 몰라하던 오르마즈는 차마 나갈수도, 안나갈수도 없는 입장에서 애만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네페티 부인은 카펫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못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때리느라 지친 테번 공 역시 이 그답지않게 고집을 세우는 부인을 내려다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나하고 남부로 돌아가야겠다."

"못가요,"

네페티 부인이 찢어진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뭐? 이년이 미쳤나! 집을 돌봐야 할것아냐!"

"난......서부 최고제후입니다. 지금은 여길 지켜야해요."

"이 망할 년!"

테번 공이 네페티 부인의 정강이를 다시한번 힘껏 걷어찼다.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두르는 부인의 양 팔을 붙든 테번 공은 맞은 상처에 고통스러워하는 부인을 갑자기 깔아뭉개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이......"

틈새에서 서둘러 눈을 뗀 오르마즈가 눈을 감으며 벽에 머리를 짓쪼아대기 시작했다. 남편과 강제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네페티 부인의 비명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숨어있는 오르마즈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저 때문에......"

카펫바닥에 맥없이 쓰러져있는 네페티 부인에게 다가간 오르마즈가 고개를 떨구며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부인을 강제로 범하고 난 테번 공은 몇 번의 발길질과 갖은 욕지거리를 퍼붓고는 남부로 돌아가버린 후였다. 떨고있는 부인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준 오르마즈는 한팔로나마 부인을 꼭 껴안아주었다.

"더이상 이곳에 있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오늘밤에 떠나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꼭 직접 있을 필요는 없으니....."

"제발,"

고개를 번쩍 치켜든 네페티 부인이 오르마즈의 목을 부둥켜안으며 쏟아지는 눈물을 곱삼켰다.

"제발 가지 마세요......"

오르마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네페티 부인은 그의 목에 눈물을 훔치며 계속 흐느꼈다.

"당신까지 가버리시면......전 누굴 의지하라고......."

"하지만......"

"당신 덕택에 처음으로 자부심을 되찾았는데......제발 가지 말아요, 제발, 아니, 절대 못가십니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오르마즈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은 네페티 부인은 얼떨떨해하고 있는 오르마즈에게 뺨을 부비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으니 제 곁에만 있어줘요. 당신을 다시 놓치고 싶지는 않다구요......."

"자네 누나에게 미안하군......"

찻잔을 쥔 채 교수실 밖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던 코리온이 낮게 중얼거리자 샤드니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오르마즈를 쫓아내는데 괜히 우리가 입을 더럽힐 필요는 없지않겠습니까?"

샤드니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정신나간 노인네 미쳐 날뛰고있을 꼴이 눈에 선하군요. 누나가 멱살잡혀 남부로 끌려가든 오르마즈가 도망가든 둘중의 하나로 결판나겠죠."

샤드니의 비열한 수작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입가를 씰룩거리고 있던 코리온이 따뜻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어느 쪽으로 결판나든 오르마즈와 부인을 일단 떼어놓을수는 있겠지."

샤드니가 조금 흥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태자저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면 계급제를 더 강화할 수 있겠죠? 말안듣는 북부에도 노예제를 도입시키고 평민도 더 세분화해 관리하고.....유학자들의 권위도 더 강화시켜서......"

"착각 말게나."

코리온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샤드니에게 쏘아붙였다.

"후학들이 태자저하께 계급제를 여쭈면 원리주의라는 곧고 아름다운 소나무에만 골라 기생하는 악질적인 기생충이라고 대답하시지. 그러면 왜 원리주의자를 자처하시냐고 여쭈면 기생충이 싫어서 구부러진 추한 소나무가 될 수는 없지않냐고 웃으며 대답하시지만."

기겁을 한 샤드니가 코리온의 대답에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주페 태자가 원리주의 학자 치고는 개혁파적인 성향을 가지는 비주류 계열이라는 것을 익히 들어오기는 했지만 원리주의의 중론인 엄한 계급제까지도 반대한다는 사실은 샤드니에게는 충격과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샤드니의 옆에서 그에게는 전혀 관심없는 주페 이야기를 늘어놓는 코리온의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좋은 추억이라도 떠오른 듯 코리온의 입가에 보일듯말듯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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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온이 탄 차가 파예드 아카데미에 접어들었다. 쿠크리를 쥔 손에 힘을 바싹 준 카렐은 뒤에 달라붙은 치안대 병력수송차가 떨어지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제길할,'

멈춰선 코리온의 차 바로 옆에 병력수송차가 다시 자리잡자 카렐이 그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차에서 뛰어내린 하심은 숙소로 달려들어가 자신의 짐을 꺼내오고 있었다. 카렐은 자신을 깔고앉아있는 저 망할 코리온 녀석도 제발 잠깐이라도 나가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지만 저 답답해 터지는 유학자는 자리에 꼼짝도 않고 앉아 책만 읽고있을 뿐이었다.

"이게 다입니다."

몇분 못가 다시 나타난 하심이 짐가방 두 개를 상석 뒤에 얹으며 말했다.

'우욱'

방금 전보다 더 많은 짐에 짓눌린 카렐은 숨도 쉬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는 미처 내리지도 못한 채 차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썩을'

카렐의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다시 가속한 차는 또 어디론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책을 덮은 코리온이 옆에 앉은 하심에게 조금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자의 상태가......어떻던가?"

"많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상처가 꽤 깊어보였습니다. 어쩌다 그리된건지......"

하심이 코리온을 떠보려는 듯 그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물었다.

코리온은 차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조금은 무성의하게 되물었다.

"녀석이 자기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아뇨, 별 말 없었습니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난폭한 행동이나......협박이나 폭언 같은 건?"

"아뇨......전혀......그 상황에서도 침착했습니다.....이런 표현이 조금 그렇지만......교양있는 귀족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로......"

코리온은 여전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하심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다른 얘기는......없었나?"

"예. 그렇습니다."

"교수가 보긴......어떤 자 같던가?"

하심이 잠시 뜸을 들이자 코리온이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군 하심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나쁜 사람같지는......않았습니다."

새벽 여명을 뚫고 달리던 차는 가벼운 진동과 함께 어딘가에 올라타고 있었다. 어두컴컴하던 새벽하늘은 어느새 금속성의 천장과 눈을 찌르는 인공조명으로 가려졌다.

'엉?'

몰려오는 졸음을 가까스로 쫓고있던 카렐은 그제서야 그곳이 여객선 선창임을 깨달았다. 선창 입구가 닫히는 듯 한 육중한 소음과 진동이 이 불청객 카렐을 더욱 더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객선의 엔진이 작동하는 그 특유의 진동음과 함께 가벼운 중력의 변화가 느껴지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카렐의 기대가 그대로 산산조각나버렸다.

'망했다.'

눈앞이 아찔 해진 카렐이 가까스로 눈을 내밀고 바깥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답답하다못해 야속한 저 코리온 녀석은 이제서야 차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작은 신변용품 가방만을 집어든 코리온은 여느때처럼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하심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선창에서 코리온을 기다리던 교수들 역시 그를 따라 우루루 빠져나가면서 잠시 후, 선창 안은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정적에 빠져들었다.

"다 갔나?"

정신을 퍼뜩 차린 카렐이 가슴을 짓누르는 짐들을 헤치고 창밖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학회가 열리는 남부 비엔으로 가는 전세여객선인 듯 한 이 여객선 선창에는 아카데미 교수들 것으로 보이는 차 백여대가 실려있었다.

차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나간 카렐은 선창 한쪽의 조그만 창에 눈을 가져갔다. 이륙한 지 이미 한참이 지난 이 여객선은 누렇고 황량한 아켐 4번 행성에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심에게서 빼앗은 휴대용 할룩스 역시 스페이스 공간에 접어들면서 먹통이 되어있었다.

"이런 망할!"

절망감에 사로잡힌 카렐이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며 탄식을 내뱉었다. 얼떨결에 이 여객선의 밀항자가 되어버린 그는 이제 꼼짝없이 남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얼어죽겠네,"

난방도 되지 않는 선창의 차 안에서 한시간째 벌벌 떨고있던 카렐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밖으로 천천히 기어나갔다.

"이젠 좀 나아졌겠지?"

객실쪽 출구로 다가간 카렐은 선창과 연결된 복도에 행여 사람이 없나 조심스럽게 살폈다. 유학자 승객들이 라마단 새벽식사를 마치고 잠에 빠져들때까지 한두시간정도는 지난 후에 객실에 접근하는 것이 이래저래 안전한 선택이었다.

복도에 유학자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카렐은 어깨를 곧게 펴고 짐짓 태연하게 걷기 시작했다. 칼에 베인 왼쪽 발목이 욱신거리며 쑤셔왔지만 절룩거리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역시 옷이 날개로군."

자신을 승객으로 착각한 승무원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모습에 카렐이 어깨를 으쓱 했다.

거울 앞에 멈춰선 카렐은 옷매무새를 찬찬히 가다듬었다. 붉은빛 다이아몬드가 박힌 귀걸이와 사파이어가 박힌 머플러핀 겸 브로우치, 흑진주 반지, 다이아몬드 팔찌, 네페티 부인이 선물한 비취목걸이는 고급스런 흰색 비단튜닉을 차려입은 이 키 큰 여자귀족과 꽤 잘 어울리고 있었다.

칼에 찢어진 목덜미 옷자락까지 머리카락으로 그럭저럭 가린 카렐의 모습은 밀항자 따위와는 누가봐도 관계없는, 꽤 세련된 귀족의 그것이었다.

"이거 하나는 녀석한테 감사해야겠군."

카렐은 코리온이 '선물해준' 제법 귀해보이는 붉은빛 긴 쿠크리를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누군가 쓰던 물건인 듯 손때가 많이 타 있는 상아 자루와 날에는 섬세한 장식과 조각까지 새겨져 있었다. 유일한 흠이라면 주워온 물건인 이 칼에 칼집이 없다는 것이었다.

"응?"

날을 유심히 살피던 카렐은 그 한쪽에 새겨져있는 고대어 문장에 잠시 시선이 멎었다.

'코리온 세닉 리쿠가 주페 세호 리쿠에게, 제 모든 성심을 담아 드립니다.

이 칼이 저승까지 함께할 당신과 저를 세상 모든 사악함에서 지켜주기를.'

"내가 가질 물건이 아니군."

주페 태자의 유품임을 깨달은 카렐이 쓴웃음을 지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일단 거울 옆의 린넨박스에 들어있는 긴 천을 끄집어내 칼날을 돌돌 말아 허리에 비껴차고 여객선 안쪽으로 여유만만하게 걸어들어갔다.

자리에 누워 눈을 붙여보려 애쓰던 하심은 30분이 넘도록 계속 뒤척거리고만 있었다. 카렐에게 납치당해 끌려다녔던 몇시간동안의 충격 탓인지 그는 코리온과 함께한 새벽 식사시간에도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터였다.

이런 그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던 코리온은 3층 객실에서 혼자 자기로 되어있던 하심에게 특등실의 자신의 옆 보조침대까지 내주는 호의를 발휘했지만 하심의 불안감은 여전히 그의 뇌리를 맴돌고 있었다.

"휴,"

뒤늦게야 허기를 느낀 하심은 바로 옆 침대에 누워있는 코리온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정 무렵에 있었던 주페 태자 기제사 준비로 저녁도 먹지 못했던 하심은 라마단 덕에 전날 새벽 식사 이후로 꼬박 만 하루를 넘게 굶고 있는 셈이었다.

무명포를 주섬주섬 챙겨입은 하심은 객실 문을 열고 밖에 나섰다. 함께 가는 교수들 모두 새벽식사 후에 잠들었는지 복도에서는 드물게 만나는 승무원들 외에는 인기척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1층이네......"

안내문에서 식당의 위치를 확인한 하심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새벽 식사시간 방금 끝났는데요?"

식당 앞에서 기웃거리는 하심에게 승무원이 절망적인 말을 건네왔다.

승무원은 다른 사람도 아닌 유학자가 낮의 '금식시간'중에 생각없이 식사를 하러 왔다는 사실에 꽤나 어처구니없어하는 눈치였다. 그제서야 지금이 라마단 금식기간임을 떠올린 하심은 왜 방금전 밥을 안먹었을까 하며 민망함과 함께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힘없이 뒤로 돌아선 하심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윗층으로 돌아가는수밖에 없었다. 식당에 붙은 주방에서는 꽤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지만 아마도 낮시간이 끝나는 내일 도착 직전에나 승객들에게 제공될 음식들임에 틀림없었다.

지독한 허기에 다리까지 후들거리며 떨리고있던 하심은 앞으로도 12시간이나 더 굶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 카렐은 3등석 빈 객실을 찾아 2층을 향하고 있었다. 승객 행세를 하며 식당에 기웃거리던 카렐은 마지막으로 나오던 새벽식사를 '포장해달라'며 뻔뻔스럽게 받아들고 몰래 먹을만한 괜찮은 곳을 찾아헤매고 있었다. 새벽식사를 끝낸 유학자 승객들은 이미 곯아떨어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대담해진 카렐은 이제 눈치도 살피지 않고 어깨 쫙 펴고 복도를 활보하고 있었다.

"저기네."

윗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한 카렐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로 접근해오고 있는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금식시간인 지금 1층의 식당 주변에 알짱댈 멍청한 유학자는---그것도 원리주의 본산이라는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가--- 있을 턱이 없었으니 어차피 승무원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걷던 카렐의 눈앞으로 검은 무명포 차림의 낯익은 여자가 갑자기 모습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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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마단에 관해 : 이슬람의 금식기간인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주간에는 식사를 금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하루 2식을 하게 됩니다. 즉 저녁과 해뜨기 전 새벽에 한번씩 식사를 하며, 새벽 4시~5시 정도의 새벽 식사 후에는 다시 새벽잠을 자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낮의 허기 때문에 저녁에 폭식을 하는 경우가 많고, 유흥업소(?) 같은 밤의 문화는 도리어 평소보다 더 활기를 띱니다.

(이슬람 지역에서의 유흥업소는 찻집이나 공연장 등을 말합니다. 제 글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이슬람은 원칙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술을 금하기 때문에 터키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한 이슬람 국가에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술집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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