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243화 (243/1,132)

< -- 243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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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납과 함께 뤼렌 부인의 사택 주변을 둘러보던 제네르는 또한번 한숨을 내쉴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평지에 있던 세호 가 종가와는 달리 이 망할 저택은 해안가 절벽 꼭대기에 위압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제네르가 또한번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역시 이런 일은 마스터 케스난이 제격인데. 그여자는 전하 직접 지시가 아니면 누구 말도 듣지를 않으니....."

"자칭 전하'만'의 충복이라지 않습니까. 후훗. 오죽하면 아메스 아씨도 그 성깔에 두손 다 들었겠습니까?"

카토의 한마디에 자이납이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갑자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전하한테 보내는 눈빛이 무지 끈적한 것 같기도 하던데......얼굴하고 몸매 하난 정말로 쥑여주더만......거기 안넘어가면 뭔가 이상이 있는 인간이지. 암암."

"쓸데없는 소리들 집어쳐."

제네르가 평소 습관대로 부하들의 한참 '흥미진진해지려는' 농담을 중간에서 끊어버리자 자이납이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굳어진 얼굴로 절벽 위를 올려보던 제네르는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할룩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우베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전하는?"

"그, 그게 말입니다......지금 약속시간에서 한시간이 넘었는데 전하께서 안오십니다. 아까 연락왔던 할룩스 호출번호로 반신을 보내도 불통입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뭐?"

제네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머리를 싸쥔 채 전전긍긍하던 제네르는 일단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일단 거기 계속 대기하고 있어. 그냥 일시적인 불통일수도 있고......아직은 모르니까.....계속 연락 시도해봐. 오시던지 연락이라도 닿으면 당장 연락 주고."

"예. 알겠습니다."

잘 풀린 줄로만 알았던 카렐의 일에서까지 안좋은 소식이 들려오자 제네르는 머리가 온통 깨져버릴 지경이었다.

"일단 그쪽은 좀 기다려보고, 여기나 생각하자구."

"이 절벽은 올라가자면 못오를 건 없겠네요. 약간의 장비만 있으면......"

자이납이 절벽 위를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르고 나서가 더 문제겠는걸."

스캐너를 켜 본 제네르가 사택 마당에 '깔려있는' 경비병들의 숫자를 세어보며 대답했다.

"외부에만 26명이야. 바깥에만 이정도니 아마 건물 안에도 또 있겠지. 지난번에 보니 가디언들도 몇 있던데. 그냥 사택 경비병치고는 너무 많다고 생각되지 않나?"

"아주 많죠."

자이납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아주 구린내가 풀풀 나네요. 주기장이 서북쪽 끝에 있는 듯 하니까 그쪽부터 살펴야겠습니다."

스캐너를 접어 옆구리에 낀 제네르는 자이납과 함께 저택 주변을 빙 돌기 시작했다. 반 바퀴쯤이나 돌았을까, 해안가 자갈밭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자이납이 갑자기 절벽 밑 구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뭐지?"

자이납이 달려가 집어든 건 신발 한 짝이었다. 고급스러워보이는 검은색의 구두는 어딘가에 많이 부딪힌 듯 여기저기 긁혀있었고 흙도 제법 묻어있었다.

"위에서 떨어졌나본데."

제네르가 절벽 위를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놔두고 가죠. 주인이 찾으러올지도 모르죠."

"좀 눈에 익은데?"

고개를 갸웃거린 제네르는 구두를 제자리에 다시 내려놓고 발걸음을 옮기는 자이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때 제네르의 귀에 꽂고있던 할룩스에 카토의 격앙된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빨리 좀 와 보십시오! 저택 북쪽 절벽 밑입니다!"

서둘러 달려간 제네르와 자이납에게 카토가 들어보인 건 붉은색의 비단머플러였다. 바람에 실려 여기저기 굴러다닌 듯 흙과 먼지로 더러워져있는 머플러에는 틀림없는 자이센 가의 황소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아메스 거다. 여기 있나보다."

제네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카토가 조금 자신없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 왔을 때 흘린것일수도 있고......어디 다른데로 옮겨지려고 길을 떠나다가 흘린 것일수도.....왜 이게 집에서 한참 떨어진 여기 떨어져있는거죠?"

"바닷바람이 세니까 여기까지 날아왔을수도 있지."

제네르가 절벽 위에 멀리 보이는 뤼렌 부인 사택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 큰 집 어느구석에 있는건지......어?"

제네르가 갑가지 무언가 떠오른 듯 절벽 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 신발을 주웠던 그곳으로 돌아온 제네르는 방금전의 그 더러워진 구두를 다시 집어들며 뒤따라온 자이납과 카토를 휙 돌아보았다.

"흠, 이거면 좋겠군."

하심의 짐가방을 뒤지던 카렐은 그의 가방에서 붓과 침목 등이 들은 긴 가죽주머니를 끄집어냈다. 하심을 묶어놓은 채로 팔자좋게 목욕까지 하고 나온 카렐은 기분이 꽤 좋아보였다. 목욕을 끝내고나서야 하심을 풀어준 카렐은 그를 구석에 '처박아놓고는' 이번엔 짐가방들을 신나게 뒤지고 있었다.

"그건 20골드나......."

맥없이 쭈그려앉아있던 하심이 내용물을 쏟아놓는 카렐에게 애타는 표정으로 호소했지만 무신경하게 한귀로 흘려보낸 카렐은 그 주머니에 자신의 쿠크리 날 길이를 대보고 있었다.

"오호, 딱 맞네."

침대 밑에서 뜯어낸 가는 파이프를 마치 엿가락같이 구부려 그자리에서 프레임을 만드는 카렐의 무시무시한 손아귀 힘에 또다시 겁에 질려버린 하심은 가죽주머니보다는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함을 떠올릴수밖에 없었다.

카렐은 하심의 가죽주머니를 뜯어 재단한 것을 쇠 프레임 위에 씌우고 바느질해 즉석에서 쿠크리에 맞는 가죽 칼집을 뚝딱 만들어내고 있었다. 새 칼집에 칼을 꽂아놓은 카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칼을 허리에 찼다.

거의 울상이 되어버린 하심을 그제서야 힐끔 바라본 카렐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슴에 달려있던 사파이어 머플러핀을 그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이정도면 가죽주머니 값 몇배는 될테니 가지시구려. 아참, 내친김에 바늘하고 실도 실례 하겠소. 요즘 이런거 구하기가 힘들어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인, 아니 강제로 빼앗은 카렐은 하심의 가방을 다시 뒤져들어갔다. 이번엔 속옷들을 뒤적거리는 카렐의 모습에 하심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카렐이 하심의 속옷을 들어올리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난 원리주의 유학자들은 이런 야한 속옷은 절대 안입는 줄 알았더니만?"

카렐의 손에는 몸에 달라붙는 분홍빛의 짧은 원피스 속옷이 들려있었다. 가슴이 움푹 패인 그 자극적인 디자인의 속옷은 평상시에 받쳐입을만한 그런 속옷은 절대 아니었다. 침대맡에 묶여있던 하심이 마치 비명같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건......그냥 잠옷이라구요!"

"옆에서 봐줄사람도 없는데 뭣하러 이런 걸 입고 자지?"

카렐의 농담에 또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하심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당신같이 첩만 수십명 거느리고 있는 호색한은 기껏 그런 생각이나 하나보죠?"

"지금 내 얘기 한 거요?"

하심의 속옷을 곱게 접어 가방 안에 도로 챙겨넣은 카렐이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여기 또 누가 있어요?"

"그런 소문은 또 어디서 들으셨소?"

"샤드니 경께서 그러셨어요."

"허, 그 기생오래비께서 내가 임신중이라는 헛소리는 혹시 안했소?"

하심의 가방을 쿵 하고 닫으며 카렐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침대머리에 쭈그려 앉아있던 하심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다시 물었다.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거예요?"

"뭐, 없다고 할 순 없지만......수십을 '거느리고' 있다니, 그 비위 다 맞춰줘야 할 거 상상만해도 머릿속이 지끈지끈 아프군. 여봐요, 난 그렇게 여럿 다 챙겨주고 살 정도로 시간 남아도는 놈이 못된단 말이요."

카렐이 푹신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이 곁에 다가오자 질겁한 하심이 옆으로 도망치려 했다.

"어딜 맘대로?"

손을 거칠게 나꿔채 잡아당기는 카렐의 손힘에  하심은 또다시 카렐의 품 안에 거칠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카렐에게서 기를 쓰고 떨어지며 하심이 악을 썼다.

"제, 제발, 난 아직 처녀라구요......"

순간 입을 떡 벌려버린 카렐은 자기도모르게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진짜.......아까부터 저놈의 궁상 하고는......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학장 보좌관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있는건지,"

"예....에?"

"딱 6시간 정도만 자야겠소."

불을 끈 카렐은 지난번 차에서처럼 하심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또다시 카렐과 살을 맞대고 누울수밖에 없는 하심은 카렐에게서 최대한 몸을 떼며 불안한 투로 물었다.

"그......뒤엔 어쩌려구요?"

"하심 예킨터스 교수는 어젯밤 악당 카렐에게 잡혔던 충격에서 얻은 피로로 도착할때까지 곯아떨어져 있어야겠지. 당신을 아끼는 리쿠 학장이니 그정도는 용납해줄거요."

"그래서요?"

"공용터미널에서 여객선이 착륙수속 밟는동안 난 보안승무원 한놈 때려눕히고 쪽문으로 도망가고. 교수들은 침대에 묶여있는 당신을 뒤늦게 발견하겠지만 난 이미 사람들 사이로 빠이빠이 하고 난 후일테고."

최소한 자신을 해칠 의사는 없다는 말에 하심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한번 카렐에게 '당한' 채로 발견된다면 코리온의 자신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하심의 뇌리를 스쳤다.

"저어......그러지 마시고......"

하심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 바싹 달라붙어오자 이번엔 카렐이 도리어 화들짝 놀랐다.

"제발......전 빼주세요. 절대 다른사람한테 얘기 안할께요. 후배 교수 차 한대 빌려서 뒤에 몰래 태워드릴께요. 그녀석은 다른 차 얻어타고 나가라고 하면 되잖아요? 시내에서 콜로니 아카데미까지는 차 몰고 조금 가야 되니까 터미널 나가는대로 적당한데서 내보내드리면 되잖아요? 대신 전 그냥 놔주세요. 이번에 또 같은 일 생기면 학장님이 절 곁에 두지 않으실지도 모른다구요, 제발."

"아까도 속여먹은 댁을 날보고 어떻게 믿으라고?"

카렐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제발, 유학자로서 맹세할께요.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 안할께요. 제발요. 저 그렇게 못된 년 아니라구요, 밤길에서 저 지켜주셨고 이렇게 먹을것도 챙겨주셨는데......유학자로서 맹세하겠다니까요, 그래도 못믿겠어요?"

하심의 울먹이는 호소에 카렐은 그의 생각이 그럴듯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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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온이 직접 적어준 작은 쪽지를 손에 쥔 제네르는 난생처음 마주한 파예드 아카데미 교문의 위압적인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장태자 근위 기병대에 며칠간의 휴가를 얻어 이곳에 나온 제네르는 허름한 평상복 차림으로 교문 앞에 서서 그곳을 드나드는 '너무나도 부러운' 진짜 생도들의 모습을 흘끔흘끔 구경하고 있었다.

"네놈은 뭐야?"

교문 앞을 지키던 치안대 장교 한 명이 수상쩍게 행동하는 제네르에게 다가서며 사뭇 위협적으로 물었다. 그는 제네르의 허름한 차림새를 곱지않은 눈으로 살피며 쏘아붙였다.

"볼일 없으면 당장 꺼져."

순간 발끈 한 제네르는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기병대에서 나온 근사한 제복이 있기는 했지만 서부인 이곳에 오면서 '동부 기병대' 군복을 입을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가진 돈을 모두 털고 안쓰는 물건들까지 모조리 팔아 가까스로 여기까지 오는 여객선 티켓을 끊은 처지에 새 옷을 살 여유도 물론 없었다. 아니, 그건 고사하고 밥을 사먹을 돈조차 없어 부대를 나온 이후로 하루 반을 아무것도 못먹고 굶고있던 차였다.

"사장지학 과정의 코리온 리쿠 수찬님 초대를 받고 왔습니다."

"대군마마께서 너같은 놈을 초대하셨다고?"

"예. 제네르 하크로딘이라고 하시면 아실겁니다. 동부에서 왔습니다."

제네르의 대답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그 장교는 마지못해 어딘가로 확인연락을 하고 있었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제네르를 다시 돌아보았던 장교는 휘하 병사에게 신경질적으로 지시했다.

"이녀석 대군마마 교수실에 데려가."

"어서오시게."

교수실에 웬 여자생도와 함께 앉아있던 코리온은 치안대 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제네르에게 한껏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교수실에 가득한 자료들과 고서들, 많은 희귀한 문서들에 잠시나마 넋이 팔렸던 제네르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코리온에게 절을 올렸다. 코리온이 마주앉아있는 여생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참, 이쪽은 사장지학 학부과정에서 내 문하생도로 있는 하심 예킨터스라고 하네. 학부 8년차니까 자네보다 한 살 어리겠군."

하심은 허름한 차림새의 제네르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맞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교수실을 나서는 하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네르는 코리온이 내민 찻잔을 받아들며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성만 봐서는 꽤 명문가 출신으로 들리는데, 신분이 어떻게 되지?"

"방계 후손으로......하급귀족입니다.'

"그랬군."

코리온은 제네르의 허름한 차림새 따위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태연한 얼굴로 질문을 이었다.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지?"

코리온의 질문에 자존심이 상한 제네르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있었지만 코리온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버님은 말몰이꾼으로 일하시고.....어머님은 그냥 일용노동자로....."

눈앞의 이 청년이 이름만 귀족인 형편없는 신분임을 깨달은 코리온이었지만 별로 내색하지 않으며 어느새 비어버린 제네르의 빈 잔에 찻물을 다시 채워주고 있었다.

"형편이 많이 어렵겠군."

"......"

"공립학교 졸업하고 기병대에 곧바로 들어간건가?"

"아닙니다. 아버지 따라서 5년동안 말몰이꾼을 했습니다. 기병대에는 3년 전에 들어갔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린 코리온이 다시 물었다.

"중장기병대는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닐텐데?"

"말몰이꾼으로 있으면서 틈틈히 검술하고 창술 연습도 했고.......걸음마하면서부터 아버지 따라 말을 타서 기마술 하나는 자신있습니다. 원래는 경기병대에 있다가 1년 전에 중장기병대로 옮겼습니다."

"공부는? 공립학교에서는 유학과목을 깊이있게 가르치지는 않을텐데? 가정교사도 없이 독학으로만 했다는 건 아니겠지?"

"할아버지가 콜로니 아카데미에서 2년정도 공부하신 학력이 있으셔서......그분께 기초는 배웠습니다."

코리온은 이 '껍데기만 귀족'의 황당한 출신에 내심 기가 찼지만 최소한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네르에게 또한번의 질문을 던졌다.

"장횡거의 기일원 사상에 관해 아는바가 있는가?"

"우주의 만유(萬有)는 기(氣)의 집산에 따라 생멸, 변화하는 것이며 이 기의 본체는 태허(太虛)로서, 장횡거는 태허라는 무형의 것이 기의 본체로서 기는 항상 활발한 운동을 되풀이하는 본성을 갖는다고 하였고, 태허 중의 만물은 일시적인 것으로 기가 모이면 모양이 생기고 흩어지면 소멸하는 것이 얼음의 물에 비유할 수 있는 것과 같아 ‘무(無)’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허나 이 표현을 먼저 사용한 장자는 이를 천지만물의 근원으로서 무형의 도로 칭하였습니다."

코리온의 이 질문은 사실 지난해 파예드 아카데미 학부 입학시험에서 기본 경전만을 달달 외우고왔던 거의 대부분의 지원자들을 골탕먹였던 문제였다. 독학만으로 공부한 사람이 전혀 준비도 없이 찾아와 저정도의 대답을 할 수 있다는 데 내심 탄복한 코리온은 제네르의 코앞에 종이 두 장을 내놓았다. 종이의 내용을 살펴본 제네르가 흠칫 놀라고 있었다.

"1달 후에 새 학기가 시작되네. 하나는 입학지원서고 하나는 장학생 신청서니 지금 작성해서 넘겨주게. 여기 나와 태자저하의 무시험입학 추천서를 첨부해 넘기면 5일 이내에 자네의 입학허가가 처리될 것이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원서를 받아든 제네르는 지원서 내용과 코리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무시험 추천입학자는 첫학기 성적이 상등급에 들지 않으면 바로 퇴학처분당하게 되니 나와 태자저하 얼굴을 생각해서 학업에 최대한 정진해주기 바라네."

제네르는 너무나 갑작스레 찾아온 이 행운이 믿기지 않는지 여전히 얼떨떨해져 있었다.

그런 제네르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코리온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제후군에서는 우리 학교나 남극성당에 입학한 장병은 전시라도 휴직처리를 하여주는 것이 관례이니 5일 후에 입학허가서를 가지고 동부로 돌아가 서류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게나. 내 입학시까지 머무를 비용과 여비 정도는 도와주겠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껏해야 기병대 장교 정도가 꿈이었던 자신이 이 명문교의 생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제대로된 예의조차 잊어버린 제네르는 이런 행운을 가져다준 고마운 코리온의 손에 이마를 기대며 뜨거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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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 함께 하겠냐는 코리온의 요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먼저 선창에 내려와있던 하심은 승무원에게 팁을 주고 식사를 선창 안의 차로 배달시켜 먹고 있었다. 물론 메인 메뉴로 나온 양고기덩어리는 옆에 있던 카렐의 차지였고 나머지 음식들만 하심이 손댈 수 있었다.

"익힌 고기는 정말 질색이야."

카렐이 얼굴을 찡그리며 소스를 발라 잘 구운 양고기를 마지못해 입에 우겨넣었다.

"질색이면 저나 주세요."

어느새 카렐에게 꽤 익숙해진 하심이 양고기 한조각을 냉큼 훔쳐가며 키득거렸다.

"젠장할, 간에 기별도 안가겠군. 입맛만 버렸네."

손바닥 크기의 두툼한 양고기를 한입에 다 먹어치운 카렐이 사뭇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입 안을 닦은 카렐은 먹고 난 그릇들을 챙기는 하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댁 볼일 좀 없었으면 좋겠소."

"절대 동감이예요."

"그새 정들어서 어쩌나?"

카렐의 농담에 운전석에 앉아있던 하심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후배 수찬에게서 협박반으로 키를 '얻어온' 하심은 제일 먼저 선창에 내려와 차 안에서 도착시간만을 기다리며 운전석에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식사를 끝낸 카렐은 들어올 때처럼 뒷자리 구석에 그 긴 몸을 꼼꼼하게 숨겼다. 하심이 그런 카렐을 바라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듣던것같이.......나쁜 분은 아니시군요."

목적지 도착이 가까와지자 선창 안에는 차를 가져온 교수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차 뒤에 웅크리고 있던 카렐이 무언가 생각난 듯 하심의 어깨를 똑똑 두들기며 말을 건넸다.

"부탁 있는데,"

"예?"

"최고급 북부산 다이아몬드 팔찌 한 셋트 헐값에 사시겠소? 580골드짜리 300골드에 팔테니. 옷 속에 파묻혀 있던거라서 댁의 학장 앞에서 끼고 신나게 멋부려도 절대 못알아볼거요."

무슨 장사꾼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댄 카렐이 손목에 끼고있던 팔찌를 뽑아 내밀었다.

"뭐에 쓰시게요?"

"나도 이 망할데서 빠져나갈 데 쓸 돈은 있어야 할 것 아뇨."

잠시 지갑을 뒤적뒤적거린 하심은 현금카드에 300골드를 적어넣고 서명을 해서 넘겨주었다. 팔찌를 넘겨받은 하심이 위아래로 뒤집어보며 한 번 되물었다.

"이거 진짜 맞죠? 끼었다가 망신당하는 거 아니죠?"

"사람 말을 못믿네. 북부에서 사온 진품이라니까. 아니면 나중에 나한테 연락해요, 두 배로 환불해줄테니. 내 설마 태자 체면에 가짜를 끼겠소."

선창 엘리베이터 부근이 웅성웅성해지자 하심이 차 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코리온이 몇명의 교수들과 함께 다가오는 모습에 하심이 얼른 문밖으로 나서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코리온이 하심의 비교적 밝아진 표정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기분은 좀 나아졌소? 예킨터스 교수?"

"이젠 괜찮습니다.......전 이 차를 타고 뒤따라가겠습니다."

코리온이 사라지자 한시름 놓은 카렐은 여객선이 착륙하는 진동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잠시 후 열린 선창 문으로 파예드 아카데미 교수들 5백여명으로 이루어진 라마단 학회 참가단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밤인가?"

투명한 차 천장으로 총총한 별들과 선명한 은하수가 보이는 아름다운 밤하늘이 올려보였다. 카렐의 말에 하심이 냉큼 대답했다.

"여기시간으로 지금 저녁이예요. 고위도인데다가 여긴 겨울이어서 대낮에도 네댓시간정도 빼면 계속 밤이거든요. 운좋으면 오로라도 볼 수 있고."

터미널 주변에는 이들 중요한 손님들을 호위하기 위한 플라칼 가 치안군 병사들이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한 채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지금같은 분위기라면 천하의 카렐이어도 함부로 나다니기는 상당히 신경쓰였을 것이 확실했다.

하심과 카렐이 탄 이 작은 차는 다른 교수들의 차들과 함께 이 삼엄한 분위기의 터미널을 빠져나가 남부 플라칼 가의 도시, 두딘카에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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