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44 회: Part 12. 그는 항상 크로커스를 품고있다. -- >
.
.
.
92.
플라칼 가 영지인 비엔 6번 행성은 인접한 델루지 가 영지인 4번, 5번 행성과 마찬가지로 제국에서는 가장 살기 좋기로 유명한 비엔 행성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1년 내내 온화한 날씨의 델루지 가 영지들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크지않은 육괴들이 고위도에 위치한 덕에 제국에서 가장 추운 기후를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게다가 1년의 절반 이상이 많던적던 비 혹은 눈이 내리는 구질구질한 날씨까지 보이면서 이곳은 농업을 하기에도 그다지 적합한 곳은 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서 수확되는 작물이래야 이런 춥고 습한 날씨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나 고구마, 호밀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 외의 지역은 빽빽한 침엽수림이거나 목초지로밖에 이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양과 들소, 순록이 뛰어다니고 땅을 뒤덮을 정도의 많은 눈과 침엽수림으로 이루어진 이 목가적인 풍경이 외지인들 눈에는 꽤나 낭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직접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델루지 가 영지의 이웃들에 대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가끔씩은 열등감으로까지 나타나곤 했다.
이번 라마단 학회가 열릴 곳이 하필이면 이 행성에서도 제일 추운 극지도시인 두딘카 인근의 남서 콜로니 아카데미라는 건 카렐에게는 이래저래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차에서 내린 카렐을 반겨준 건 그의 큰 키에도 무릎까지 푹 빠지는 엄청난 깊이의 눈무더기였다. 여하간에, 하심의 차에서 내린 카렐이 첫번째로 한 일은 옷가게로 달려가 두툼한 순록털로 만든 망토와 모자, 신발, 장갑을 사는 데 100골드라는 거금을 써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귀한 순록털 제품이 제국에서 제일 싼곳이 여기라니까요."
상점주인의 믿을만한것인이 아닌건지 알쏭달쏭한 말을 한귀로 흘려보내며 그자리에서 털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다시 길거리로 나선 카렐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길을 지나가는 많지않은 남부 시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파묻혔다.
극지 주변에 한술 더 떠 고산지대이기까지 한 이 춥고 조그만 소도시는 인근에 위치한 콜로니 아카데미와, 그리고 라마단 이맘때 절정을 이룰 '툰드라 눈 관광객'들에 기대어 사는, 그저그런 평범한 도시였다.
"살벌하긴 하군."
군데군데 모퉁이마다 자리잡은 치안군 병사들을 바라보며 카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겨우내 내린 눈이 굳게 얼어붙은 한적한 길거리를 종종걸음으로 걸으며 카렐은 이 상황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간만의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뭐 과정이야 어쨌건, 다른 사람들도 간간히 여행오는 이곳에 자신도 라마단맞이 툰드라 관광을 온 것이라 애써 치부한 카렐은 하룻밤 편안히 묵을 호텔을 찾아 아직은 불편한 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눈이 하얗게 쌓인 이 극지 고산도시 두딘카의 평화로운 저녁시간은 이렇듯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쿠!"
사람들의 발에 눈이 다져져 단단하고 미끄러워진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카렐은 눈앞에 미끄러져 나동그라진 한 청년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자리에 멈춰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급히 숙여보인 청년은 엉금엉금 기어 다시 일어나 푸줏간 문을 닫고 있었다. 푸주간 간판을 보고서야 오늘 저녁 식사감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카렐은 무슨 이유엔지 문 꼭대기를 향해 팔을 들고 팔딱팔딱 뛰어오르고 있는 그 자그만 청년의 어깨를 냉큼 붙들었다.
"잠깐만, 고기 좀 샀으면 하는데,"
"아, 하, 그러세요? 잠깐만요."
시린 맨손을 연신 비비며 청년이 닫았던 가게문을 다시 열었다. 카렐은 그제서야 청년의 옆 목에 새겨진 검은색의 일명 '노예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출신지역의 코드와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는 저 노예문은 공식적으로 관리되는 대부분의 노예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기껏해야 우베보다 반 뼘이나 클까 싶어보이는 자그만 키에 앳되고 이쁘장한 얼굴을 한 그 노예청년은 보관고 앞에 서며 제법 장사꾼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드릴까요?"
"양고기 한관만 주게. 지방하고 근육 반반정도 섞인 뱃살로."
"어휴, 양고기에서 기름 많은 걸 달라시는분도 다 계시네요?"
사뭇 밝은 표정의 그 청년은 잘 닦아 정리해놓았던 칼을 다시 꺼내들고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내심 내장을 사고싶은 카렐이었지만 이곳 남부에서는 동물의 내장을 불결하게 여기는 전통 때문에 노예나 짐승들에게 먹일 것이 아니라면 엔간해서는 내장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카렐이 그 노예청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외거노예인가보지?"
"예. 주인님은 남쪽에 주도인 쿠엘스크 시 부근에서 목장 하시구요, 저하고 열 명 정도 외거노예들이 도시마다 있는 푸주간에서 팔고있죠."
"아참, 그거 한입에 먹을만한 크기로 작게 잘라주게나."
"이거 선전하는 게 아니구요, 저희집 고기가 정말 여기서 최고예요."
장사꾼인 양 떠드는 청년의 말에 카렐이 엷게 웃음짓고 있었다.
청년은 이 추운 날씨에 장갑도 끼지 않은 채 곱은 맨손을 호호 불어가며 정성스럽게 칼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기는 최고인지 모르겠지만 청년의 칼질솜씨는 부엌일과는 거리가 먼 카렐이 보기에도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자기가 잘랐으면 족히 10관은 넘는 고기를 잘게 다지고도 남았을 시간동안 청년은 기껏 절반정도 낑낑대며 썰어놓은 후였다.
기다림이 지루해진 카렐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주인이 그렇게 멀리 살면 어떻게 먹고살지?"
"가게 옆에 조그맣게 잘데가 있어요."
"주인은 잘 해주고?"
느닷없는 질문에 청년이 갑자기 카렐을 빤히 쳐다보았다. 질문을 한 카렐도 내심 아차 싶었다.
'주인이 어떻다'는 둥의 말을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것은 노예들에게는 자칫 꽤나 위험한 짓일수도 있었다. 머쓱 해진 카렐이 그 차가운 인상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지었다. 그제서야 고기를 다 썬 청년은 포장지에 곱게 싸 카렐의 손에 넘겨주었다. 카렐은 푸주간 한쪽에 쌓여있던 과일 중 사과 십여개도 집어들어 봉투에 넣었다.
"2골드 10푼이요."
"고맙네."
고기와 사과를 들고 가게를 나선 카렐은 청년이 다시 문 꼭대기를 향해 팔을 뻗고 펄쩍펄쩍 뛰고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문틀 위에 무언가를 얹어놓은 모양이었다. 카렐이 청년 옆에 불쑥 나서며 물었다.
"내가 도와줘도 되겠나?"
"어......예. 문틀 위에 잠금카드를 생각없이 던져놓았는데 키가 안닿아서......"
문틀 위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얹은 카렐은 그 위에 올려있던 자그만 카드를 집어 노예청년에게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카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청년은 카드로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었다.
"하루이틀 한 일도 아닐텐데, 키도 안닿는곳에 저걸 올려놓다니?"
카렐의 질문에 또한번 순박한 웃음을 지은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오늘이 여기서 첫날이어서요......그저께까지 일하던 녀석이 일할땐 카드를 항상 저기 뒀다고 하더라구요. 녀석은 키가 컸거든요."
"그친구는 어디가고?"
카렐의 질문에 표정이 굳어진 청년은 더 이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망해진 카렐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질문했다.
"묵을곳을 찾는데......가까운데 여관 없나?"
"이 바로 옆인데요?"
청년이 손가락으로 바로 옆 건물을 가리켰다. 또한번 머쓱 해진 카렐은 청년과 헤어져 옆 건물로 향했다.
여관으로 들어서려던 카렐은 가게문을 닫은 청년이 건물에 붙은 허름한 판자집---말이 집이지 그냥 건물에 기대 판자들을 얽어놓은 정도 수준의---에 들어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런 추운 지방에서 저런 엉터리 집에 보통 사람이 살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씁쓸한 표정을 지은 카렐은 삐그덕거리는 여관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하룻밤 2골드 50푼. 식사 포함하면 50푼씩 추가.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북부 출신. 하급귀족. 블리크 시어리. 식사는 필요없소."
숙박부를 적던 여관 주인이 카렐의 손에 들린 양고기를 힐끔 보며 물었다.
"옆에 푸주간 열었수?"
"지금 막 닫았소."
"허, 결국 또 열긴 열었군."
주인이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쉬자 갑자기 의아해진 카렐이 되물었다.
"거기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그저께밤에 거기서 고기팔던 노예녀석 자다가 얼어죽었거든."
흠칫 놀란 카렐은 손에 들고있던 서툴게 썬 양고기를 다시한번 내려다보았다. 그 선한 인상의 청년을 머리에 떠올리며 마음속이 착찹해진 카렐은 또다시 눈이 오기 시작한 어두컴컴한 길거리를 내다보았다.
"망할 주인녀석 독종은 독종이야. 약해서 골골거리던 놈 치료라도 해 주던가, 잘데라도 제대로 만들어줬으면 어디 덧나나, 그까짓 돈 아끼려다가 비싼 노예한놈 버렸지. 쯔쯔......"
숙박비를 선불한 카렐은 그의 묵직한 발걸음에 유난히 삐그덕거리는 허름한 계단을 걸어올라 자신의 객실로 향했다.
"형편없군."
망토와 모자를 벗어던지며 카렐이 이미 확인했던 방에 새삼스럽게 불만을 토해냈다. 카렐이 울며 겨자먹기로 이 방을 택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침대가 다른방보다 크다는, 그 하나 뿐이었다. 오래된 벽에 난 작은 창 밖으로 새로 내리기 시작한 희고 굵은 눈이 내다보였다.
벽에는 플라칼 가와 델루지 가 제후군 입대를 권고하는 유치한 홍보 포스터들과 각종 보안에 관한 유의사항을 적어놓은 빛바랜 유인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젠장,"
남부 사정에 익숙한 자신에게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이곳에서만의 '유의사항'을 확인하며 카렐이 괜한 불평을 뱉어냈다. 붉은 딱지가 붙은 유인물 위에는 '행성 밖과 통하는 모든 통신은 물론이고 내부통화도 언제든 도감청될 수 있다는 살벌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할룩스를 이용해 외부와 직접통화하는 건 몇몇 특권층이나 특별한 면허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 도시마다 있는 '보안포스트'를 직접 방문해 자신과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받은 후 보안요원의 입회하에만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남부에서, 아니 제국에서 가장 폐쇄적인 사회인 이곳에 카렐이 떨어진 건 정말 더럽게도 운없는 일이었다.
"모레는 어떻게든 여길 떠야겠군."
부하들과 연락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내린 카렐은 침대 위에 몸을 눕히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라마단 학회가 개회되는 내일까지는 치안군 녀석들이 도끼눈을 뜨고 경비를 강화하고 있을테니 괜히 그 기간중에 움직여 화를 자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일단 감시가 상대적으로 적은 근거리 여객셔틀로 바로 옆의 델루지 가 영지로 이동해 부하들에게 연락하던가 황제령 ㅤㅋㅞㄹ크나 타르서스, 하다못해 페로의 영향권인 프라임 3번 도시 행 여객선만 집어타면 만사 깨끗이 해결되는 셈이었다.
"그래......모레 가자."
스르르 몰려오는 잠을 느끼며 카렐이 오랜 긴장에 지친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남서 콜로니 아카데미에 내려선 코리온은 얼굴을 향해 몰아치는 칼날같이 차가운 바람과 가벼운 현기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고산증세로군."
라마단 학회를 순환개최하는 남극성당과 파예드 아카데미, 그리고 16개의 콜로니 아카데미들 중 학자들이 제일 꺼리는 곳이 바로 이 남서 콜로니 아카데미였다. 해발 고도가 50스타디아가 넘는 깎아지른 산봉우리로 사방이 둘러싸인 분지인 이곳은 1년내내 눈바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하지만 실상 그보다도 방문객들을 더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해면에서 30스타디아에 가까운 높은 고도에서 오는 고산증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빌어먹을 곳에 학교가 세워진 이유는 그 높은 고도와, 남부에서 거의 유일하게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있는 광업지역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지질학과 기상학 분야에 있어서는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이곳이었지만 그런 것들에는 관심없는 파예드 아카데미의 유학자 교수들에게 있어 이곳은 현기증과 짜증이 동시에 나는 오기싫은 곳일 따름이었다.
"하루이틀정도 적응하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이곳 학장이 이번 학회의 가장 큰 손님인 코리온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코리온의 시선은 이곳에 먼저 도착해있는 흰 무명포차림의 남극성당 교수들에 멎어 있었다.
코리온과 함께 객사를 향해 걷기 시작한 하심이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세네피스 카파키 신임 대제학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통신상으로 학회에는 참석할 것이라 하니 미리 준비가 필요할 듯 합니다."
"다른 건?"
"이번 남극성당측 교수들중에 개혁파들이 대거포진했습니다. 자이센 대제학시절에 강의제외되었다가 이번에 복직된 20여명들까지 포함해 거의 120여명이 개혁파 학자들입니다. 지난번 저희 학교에서 피살당했던 40여명의 뒤를 이어 새로 부상하는 젊은 개혁파 학자들로 대부분 수찬 혹은 교리급이 주류입니다."
"그래봤자 어린애들이다."
코리온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번 통신참석자 명단에 제네르 하크로딘 직제학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크로딘 교수가 이제 사실상 유일한 개혁파 지도자로 남게 되었으니 리더쉽이 통일된만큼 개혁파 녀석들이 무서운 집결력을 보이고 있는 듯 합니다. 게다가 신임 대제학의 암묵적인 지원도 받고있는 형편이니 가볍게 생각할 존재들은 아닌 듯 합니다."
제네르의 이름을 들은 코리온이 다시한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쪽이 제가 지난번 말씀드렸던 신입생도 제네르 하크로딘입니다."
처음으로 주페 태자의 교수실을 찾아간 제네르는 그에게 큰 절을 올리고는 공손하게 무릎꿇고 앉았다. 새로 지급받은 검은색 무명포와 줄이 없는 보랏빛 머플러는 이 명문학교의 학부과정 정식 생도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제네르를 주페에게 소개해준 코리온은 주페의 옆에 자리잡고 앉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자네로군, 형님 막사 앞을 지키던 군인이었지? 이렇게 입으니 정말 잘 어울리는군."
주페가 그 선한 얼굴에 미소를 가득 품으며 바싹 얼어붙어있는 제네르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28년간 바닥생활을 전전했던 제네르에게 제국 최고의 유학자이자 태자인 주페를 이렇게 눈앞에서 개인적으로 마주한다는 건---부모님조차 태자의 추천서를 받았다는 딸의 말에 '군대가더니 애가 좀 이상해졌다'고 의심했을 지경이었다.--- 지금껏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옆에 앉은 코리온 리쿠 수찬이 자넬 워낙 극찬해서 내 두말없이 추천서를 써 주었다네. 내 누군가에게 추천서를 써 준건 옆에 있는 리쿠 수찬에 이어서 자네가 두번째라네. 코리온의 문하에서 충실히 학업을 쌓아 차후에 박사생도나 교수가 되거든 나와도 강의실에서 마주할 수 있을 것일세."
"황공하옵니다."
잔뜩 긴장한 제네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박사생도들이나 교수들을 가르치는 주페 태자는 어차피 신입 학부생도인 자신과는 당장은 직접 만날 일이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주페의 그 선하고 총명한 눈빛을 마주한 제네르는 사뭇 날카로운 인상의 그 조카보다 어딘지 더 강한 끌림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반드시 훌륭한 후학이 되어 태자저하와 대군마마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아참, 로노 형님 휘하 기병대 일원이랬지? 형님의 제위등극을 위해 애쓰던 용사라 하니 내 더 든든하네. 자네도 그런 면에서 나와 뜻이 같을 것 같군."
"제국의 도리와 법도가 있사오니 로노 장태자전하께서 제위를 이으심이 어느 면으로 보나 지당할 것이옵니다."
코리온이 제네르를 살짝 째려보았지만 주페는 그런 제네르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여전히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리온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제네르에게 말했다.
"잠깐 밖에서 기다리게. 내 태자저하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알겠습니다."
제네르가 자리를 비우자 주페가 옆의 코리온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내 네가 지체높은 귀족들만 상대하는 듯 하여 내심 걱정했는데, 뜻밖이구나. 저런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인재를 발굴해내다니 말이다. 총명함이 넘치는 것이 내맘에도 꼭 든다. 너와 내 뒤를 이을 훌륭한 유학자가 될 거다."
"감사합니다.......그런데.......지난번 로노 숙부와의 독대 이후에 별 말씀이 없으셔서......무슨 이야기를 나누신건지......"
코리온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은 주페가 어깨를 으쓱 하며 대답했다.
"형님께서 내 말을 그다지 믿지 않으시는 것 같더구나."
주페의 대답에 코리온이 내심 불안하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학자들이 지지를 공식 철회하지 않으면 날 동생으로 여기지 않겠다 하셨으니.....내 그렇게 하겠다 말씀드렸다."
순간 코리온이 경악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어차피 지지선언 자체가 태자의 뜻이 아니었던만큼 지지철회 역시 호락호락 해 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코리온이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유학자들이 숙부님 뜻대로 움직여줄까요?"
"그렇게 만들기라도 해야하지 않겠냐."
주페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타니토를 다시 만나봐야겠다. 녀석이 남극성당에 적을 두고 있으니 녀석과 손잡으면 뭔가 될지도 모르겠다."
주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코리온이 냉큼 나섰다.
"제가 이모님을 만나뵙겠습니다."
"하지만......"
"이모님께서 숙부님께 많이 언짢아하고 계신 듯 하니 숙부님이 직접 찾아가시는것보다 제가 찾아뵙고 좋게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코리온의 말이 그럴듯한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주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럼 네가 남극성당에 다녀오도록 해라. 내가 제위에 뜻이 없다는 사실을 꼭 전하고 둘이 손잡으면 이번 위기를 유혈사태 없이 조용히 끝맺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남극성당쪽 원리주의 교수들 지지철회에 힘써달라는 부탁도 잊지 마라."
주페의 교수실을 나선 코리온은 제네르를 대동하고 자신의 교수실을 향해 걸었다.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제네르를 힐끗 돌아본 코리온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로노 숙부님이 제위에 오르는 방안에 관해 내가 물었을 때 자네가 했던 대답 기억나나?"
"태자저하께서 주변을 잘 관리하셔야한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자네 말에 나도 동감이네. 하지만 애석하게도 태자저하 주변엔 그분을 이용해 세속적인 욕심을 챙기려고 하는 속된 무리들이 너무 많아."
코리온의 말에 제네르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저하의 보좌관으로서 나도 그런 무리들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네. 저렇듯 고결하신 분께서 이런 추악한 제위싸움에 휘말리셔야 쓰겠는가."
"그렇습니다."
코리온의 말에 동감하는 듯 제네르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코리온이 말을 이었다.
"자넨 이곳 학부생도이기 이전에 나와 태자저하의 문하생이니.....저분의 뜻을 돕는 길이 자네가 충성하는 로노 숙부를 돕는 길이 될걸세. 기병으로서 그분을 직접 모시는 것보다 어떻게보면 훨씬 더 의미있는 일일수도 있지."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네르의 서슴없는 대답에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코리온은 사뭇 조심스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그런 의미에서 자네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고싶네만....."
"말씀만 하십시오."
의욕이 넘쳐흐르는 이 젊은 학부생도는 일을 맡기겠다는 코리온의 말에 크게 고무된 듯 또다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지난번에 만났던 하심 예킨터스 생도와 함께 이곳을 졸업하신 여러 선배님들과 연락해 그분들의 의견을 모아주게. 태자저하 주변을 관리할래도 어떤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있는지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겠나."
"서, 선배님들을요?"
"그리고오......내 자네를 생도회 간부로 밀어줄 것이니 교내 생도회쪽 분위기도 내게 계속 알려주면 고맙겠네. 누가 태자저하 뜻에 거스르고 싶어하는지......자넨 나이도 있고......태자저하의 추천을 받은 신입생도니 태자저하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자들이 자네에게 틀림없이 접근해올걸세."
얼핏 '프락치'역할을 하라는 듯한 코리온의 말에 제네르가 잠시 망설였지만 주페를 황제로 만들어 떡고물을 챙기고자 하는 주변의 못된 자들을 걸러내겠다는 코리온의 생각은 전혀 이상할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코리온은 뭐니뭐니해도 주페가 가장 믿는 최측근 보좌관이었으니 그를 의심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제네르는 코리온에게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